1989화. 꿍꿍이
*
잠시 후 한립과 육화부인이 같이 신전 안으로 돌아왔다.
“이제 출발해도 되겠지?”
“액 성주님과 육화 선배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저도 성주님들을 모시고 함께 가겠습니다.”
액회가 웃는 얼굴로 묻자 한립이 포권을 취했다.
현성 무리가 신전을 빠져나가고 오래 지나지 않아 건물이 흔들거리면서 벽이 갈라지고 석재가 쏟아져 내렸다.
“이런, 무너지려 합니다. 서둘러 나가야 해요!”
손도가 소리치고 나머지 사람들도 당황한 얼굴이었다.
한립은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머릿속에 다른 핏빛 열쇠를 취할 때가 떠올랐다.
그런데 신양도 그리 놀라지 않는 듯 보였다.
“당황할 것 없다.”
액회의 담담한 목소리가 모두를 안심시켰다.
“이런 낙석쯤이야…….”
가볍게 웃음 지은 액회가 소매를 펄럭여 하얀빛을 날렸다. 하얀빛은 빛기둥으로 변해 천장을 녹이고 뻗어 나가 하늘까지 관통했다.
하늘에 둥실 떠 있는 노란 구름을 본 사람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경외감을 담아 액회를 바라보았다.
한립은 슬쩍 신양을 보았다.
하얀 빛기둥 속의 뇌전은 신양이 황토색 단창에서 뿜은 뇌전의 기운과 일치했다. 그때 신양도 뻥 뚫린 천장을 보고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있었다.
구멍을 중심으로 나머지 부분이 무너져 내려 다들 서둘러 위쪽으로 뛰어올라 지하에서 빠져나왔다.
제단 전체가 휘청거리다 완전히 무너져서 지하로 내려앉았고, 깊은 구멍은 무시무시한 악귀의 입처럼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한립은 또 예전처럼 수많은 괴뢰들이 땅속에서 기어 나오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현성 사람들이 상당히 모여 있다고 해도 그 많은 괴뢰를 다 상대할 수는 없었다.
“자, 가보도록 하지.”
액회가 차분히 말하고 다들 그 뒤를 따라가는데, 땅이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립은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갑자기 웬 지진이…….”
몇몇이 웅얼거리는 동안 땅속에서 괴뢰들이 기어 나오고 있었다.
이전 폐허의 상황과 똑같았다.
새빨간 인형 괴뢰들은 화염처럼 붉게 빛나는 거검을 한 자루씩 쥐고 땅속에서 빠져나오자마자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디서 이렇게 많은 괴뢰가!”
괴뢰들의 수는 많았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은 하나같이 실력자들이라 두려워 하지 않고 맞붙었다.
곡도를 휘둘러 붉은 괴뢰를 상대하던 한립은 겨우 두 마리를 죽이고 안색이 나빠졌다.
오장육부가 온전하고 피처럼 은색 액체를 흘리는 붉은 괴뢰들은 힘이나 속도가 예전 폐허의 괴뢰들보다 뛰어났다.
이런 능력을 지닌 괴뢰들의 수가 이전처럼 많으면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그러던 중 액회와 육화부인 등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자 무언가 대책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괴뢰들 때문에 걱정할 것 없네. 육화 수사.”
“예.”
액회의 명에 육화부인이 허리춤에서 회색 향로를 꺼내 들었다.
성규가 반짝이는 향로를 든 그는 주문을 외워 회색 연기를 피우고 있었다.
휘이이이.
삽시간에 연기가 주변 천여 장을 뒤덮자 붉은 괴뢰들이 종이 인형처럼 흐느적거렸다.
눈을 가늘게 뜬 한립은 의식으로 연기 속의 괴뢰를 관찰했는데, 그들의 은색 체액이 회색으로 변하며 더욱 쫀득해져서 관절의 움직임이 점점 느려지는 것을 발견했다.
“그랬군…….”
그제야 천하태평이던 현성 수뇌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걸 보고 현성 사람들이 좋아하며 괴뢰들을 처치해 빈 공간을 만들어냈다. 괴뢰들도 연기를 꺼리는지 다가오지 못하고 주위에서 포효만 하고 있었다.
“액 성주님과 육화 수사의 능력이 놀랍습니다. 이 연기는 어떤 물질이기에 괴뢰들이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손도가 신양과 눈짓을 하고 허허 웃으며 물었다.
“이 정도로 뭘 그러나. 그럼 가지.”
액회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연기를 피우면서 괴뢰들 사이를 지나갔다.
무리는 오래지 않아 아예 녹지를 벗어나 더는 괴뢰들이 쫓아올 수 없는 곳에 이르러 한숨을 돌렸다.
연기로 인해 다가오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수만 마리 괴뢰에게 포위당한 것은 그리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액회는 금지가 어디 있는지 아는 듯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붉은 강을 따라 계속해서 나아갔다.
* * *
두 달 뒤, 현성 무리가 붉은 모래지대를 벗어나자 땅이 검게 변하고 빗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습한 공기만큼 성신지력도 농염해져서 땅에서 식물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게다가 대허 가운데 갑자기 등장한 밀림에 안개가 껴있어 퍽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액회는 주변 환경이 모래지대에서 밀림으로 변하든 말든 속도를 유지하며 한가롭게 걸어갔다.
육화부인과 부견, 진원 등이 그 뒤를 따르고 신양, 손도 그리고 한립 등이 가장 뒤쪽에 있었다.
“신 수사, 액 성주가 말한 금지가 이곳에 있는 것이 맞습니까? 밀림이 어딘가 이상합니다.”
한립은 액회의 눈치를 사리며 신양, 손도 등과 전음으로 교류했다.
액회는 무척 강했고 진원, 부견, 소응 등까지 한 편이라 한립 쪽이 열세였다. 이럴 때일수록 그런 사람들끼리 뭉쳐야 위기에 대처할 수 있었다.
“저도 대허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유골이 어디 있는지는 더더욱 알지 못하고요. 밀림의 성신지력이 농염한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이곳에 있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수사의 손에 열쇠가 하나 있는데, 여기서 빠져나가려 해도 액회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신양이 전음으로 답했다.
“열쇠 말인데, 총 다섯 개라면서 액회 성주는 어째서 다른 걸 찾아 나서지 않는 걸까요? 나머지 네 개는 찾기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손도의 의문에 한립이 힐끗 신양을 보았다.
“그리고 열쇠가 어디에 쓰이는 물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금지에 들어가는 용도로만 쓰인다면 몰라도 아니라면 나머지 네 개를 지닌 액회 성주 쪽이 유리할 텐데요.”
아무도 대답이 없는 와중에 손도가 말을 이었다.
액회는 한가롭게 앞으로 걸어가며 멀리서 거리를 두고 따라오는 한립 등은 신경 쓰지 않았다.
“성주님, 신양과 손도가 딴 마음을 품고 결탁한 것 같습니다. 괴성과 한통속이 되어서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싹 없애서 변수를 줄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성주님의 실력에 려비우가 열쇠를 망가뜨리기 전에 빼앗는 것은 일도 아닐 테니까요.”
그때 부견이 슬쩍 액회 옆에 붙어 전음으로 속닥거렸다.
“되었네. 신양과 손도가 괴성과 결탁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들이 의견을 나누는 것은 그저 우리를 경계해서겠지. 대허 안에서 몸을 사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너무 자비로우십니다, 성주님! 겉모습만 봐서는 사람의 성품을 알 수 없다고, 신양도 예전 일로 원한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부 성주, 내게 다 생각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 우리끼리 충돌해봐야 괴성에게만 이득이라는 것을 유념하게.”
액회는 웃음을 잃지 않고 답했다. 그 말에 부견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각기 다른 꿍꿍이를 품고 같은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며칠 뒤, 밀림 깊숙이 들어서자 몇 사람이 두 팔을 벌려 안아도 안 될 만큼 커다란 나무들이 빽빽하게 나타났다.
액회는 금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했고, 이에 다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었다. 미간을 좁힌 한립이 뒤쪽으로 따라가며 수시로 사방을 살폈다.
“얼굴이 왜 그러십니까?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석천공이 그를 보고 전음으로 말을 붙였다.
“아닙니다. 그냥 느낌이 이상해서요.”
“어디가 이상하단 소리십니까?”
“대허 안의 성신지력이 이렇게 농염하고 밀림도 있는데, 오는 동안 인수 한 마리를 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환경이라면 인수들이 득실거려야 맞는데 말입니다.”
“그 말을 들으니 확실히 이상하네요.”
“됐습니다. 액회의 말대로 금지가 코앞이라는데 괜한 생각이겠지요. 석 수사, 지난번에 말했던 적린공경을 떠날 방법이 있을 거란 얘기는 얼마나 확신하십니까?”
“이건 셋째 형님을 통해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야양왕조 서고에서 적린공경에 대해 조사하며 알아낸 거라 확실합니다.”
“석 수사를 못 믿는 것은 아닙니다만 미리 설명을 좀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야양왕조의 비사에 관한 일이라 황실 사람이 아닌 수사에게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천살성황을 걸고 맹세를 하지요, 제가 수사에게 한 말은 다 사실입니다.”
석천공은 진지하게 맹세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는 묻지 않겠습니다.”
또 한참을 걸어가자 전방에 핏빛 안개가 나타났다.
땅부터 하늘까지 이어진 짙은 안개는 마치 핏빛 담벼락 같았다.
“류염무해(硫焱霧海)라 불리는 곳인데 이곳만 통과하면 금지에 다다를 수 있네. 유염혈운이 탄생하는 곳이라 운이 좋다면 지나는 동안 귀한 재료를 찾을 수도 있겠지.”
다들 자기만 쳐다보는 것을 보고 액회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
“석 수사, 이곳에 대해 아십니까?”
한립은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석천공에게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모릅니다. 유염혈운이 여기서 나는 것이었군요.”
액회의 말에 석천공도 전방의 핏빛 안개를 보면서 재료를 찾고 있었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으니 흩어지지 않게 조심해서 지나면 되네.”
액회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고 다들 그 뒤를 쫓았다.
핏빛 안개로 들어가자 한립은 마치 심해로 내려온 것처럼 몸이 묵직해지는 것을 느꼈다.
엄청난 중압감이었다.
일각 정도 그렇게 걸어가도 별다른 일이 없어 처음에 걱정하던 이들도 안심하고 유염혈운이 없나 눈에 불을 켜고 살폈다.
한립은 앞만 보고 가는 액회를 주시하면서 눈을 반짝였다.
대허에 대해 너무 속속들이 아는 것 같은 액회의 행동을 볼수록 마음 한구석이 불안해졌다.
“멍하니 뭐하십니까? 의식의 힘도 강하면서 시간 낭비하지 마시고 어서 유염혈운이나 찾아보지 않고요.”
석천공은 그가 수색에 집중하지 않자 말을 걸었다. 한립은 그런 석천공에게 별말 하지 않고 의식을 퍼트렸다.
그때 신양이 어디로 쏘아져 나갔다.
전방의 안개 속에서 번개처럼 튀어나온 핏빛 안개를 신양이 잡아챈 것이다. 손바닥 크기의 끈적한 물질이 구름 모양을 이루고 핏빛 광채를 내고 있었다.
‘저게 유염혈운?’
신양과 거리를 두고 서 있던 한립은 육안으로는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의식으로 기혈의 파동을 느꼈다.
활짝 웃던 신양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고 얼른 그걸 삼켜버렸다.
핏빛 구름을 삼킨 그의 몸에서 눈부신 빛이 터지고 현규에서도 핏빛이 폭발해 현규 백여 개가 빛이 들어왔다.
그걸 알아챈 신양도 당황해 얼른 안개 속으로 몸을 숨겼다.
행동이 빠르긴 했지만 한립의 의식 범위 내에 있어서 현규의 개수가 260여 개쯤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신양이 핏빛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연달아 괴성과 뇌전 소리가 들려왔다.
강력한 기운이 퍼져 안개가 요동치는 것을 보고 일행의 표정이 가지각색으로 바뀌었다.
유염혈운이 귀한 물건인 줄은 알았지만 복용하자마자 이렇게 수행을 높여 줄 줄은 몰랐다.
그때 석천공과 헌원행이 무리에서 벗어나 좌우로 사라졌다. 손도도 다른 방향을 골라 튀어 나가고 방선이 그를 따라갔다.
침음하던 한립도 어딘가로 튀어 나갔다.
주자청도 그러고 싶었지만 주자원이 옷소매를 붙들어 못 가게 했다.
“알아서 유염혈운을 찾는 건 좋지만 너무 멀리까지 가서 길을 잃지 않게 조심하게. 성해에 비해 유염혈운은 보잘것없다는 것도 잊지 말고 말이야.”
액회가 이렇게 말하자 다들 대답은 했지만 다들 바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성주님, 다들 욕심이 과합니다. 이렇게 명에 따르지 않아서야…….”
부견이 콧방귀를 뀌며 옆에서 다른 이들의 험담을 했다.
“유염혈운 같은 보물을 앞에 두면 그럴 수 있지. 위험한 곳이 아니라 다행이야.”
액회의 반응에 부견은 조금 못마땅했지만 입을 다물었다.
“보물을 찾고 싶으면 다들 가봐도 좋네. 너무 멀리까지만 가지 말고.”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부견, 소응, 주자원 등도 기뻐하며 흩어졌다. 이제 액회 곁에는 육화부인 한 명밖에 없었다.
“육화 수사는 필요 없는가 보군?”
“저는 나이가 있어서요. 성주님 곁에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할 거란 생각에 어디 멀리 가지 못하겠습니다.”
육화부인이 빙긋 웃어 보였다.
“육화 수사가 뭘 아는군.”
“그런데 성주님, 이곳의 유염혈운이 그리 많지 않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갑자기 두 개나 나타나다니 이상합니다.”
육화부인이 의문을 표했지만 액회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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