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화.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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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 안이 콰르릉 울리고 있었다.
소응은 막는 사람이 없는데도 급히 열쇠를 향해 다가가지 않고 멀찍이 서서 한립과 석천공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그들이 신양과 짜고 연기하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는 눈치였다.
아무리 기다려도 한립과 석천공이 움직이지 않자 소응의 눈길이 청동 나무 꼭대기의 핏빛 열쇠로 향했다.
탁.
그가 발끝으로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라 고공에 이르기 전에 하얀빛이 그의 태양혈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 휙! 하고 고개를 돌리고도 거의 종이 한 장의 차이만 두고 천장에 박혔다.
겨우 기습을 피해 청동 나무 아래쪽 가지에 떨어진 소응은 매섭게 신양을 노려보았다.
방금 날아든 비도는 신양의 것이었다.
“읍!”
하지만 열쇠가 급했기에 소응은 청동 나무를 오르기 위해 움직이려 했으나 발이 가지에 딱 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려 수사, 이때까지 제가 당신을 해한 적이 있었습니까? 왜 갑자기 돕지 않겠다고 하는 겁니까?”
신양은 부견과 싸우면서 한립에게 전음을 보냈다.
“돕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신 수사와 괴성의 관계가 복잡해 보여 내막을 모르고서는 도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일은 몇 마디로 해명할 수가 없습니다. 일단 열쇠를 손에 넣고 나서 차근차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사정을 알기 전에는 대체 누가 적인지 알 수 없으니 제가 선뜻 믿지 못하는 걸 양해해 주세요.”
한립은 여전히 완곡하게 거절했다.
“려 형이 운이 넘치는 사람이라는 것은 압니다. 이미 다른 열쇠도 하나쯤 가지고 있을 테고요. 그래서 저 열쇠에 열의를 갖지 않는 것은 알지만 우리가 죽고 나면 수사와 석 수사 둘이 저들을 어찌 상대하려 하십니까?”
신양의 말에 한립도 뜨끔했다.
‘어떻게 안 거지?’
기억을 더듬어 보니 아마 두 열쇠가 서로 공명해서 그가 고통스러워할 때 눈치를 챈 듯했다.
“저를 협박하시는 것으로 들립니다.”
“절대 협박이 아닙니다. 이가 빠지면 잇몸이 상하는 것도 순식간이에요. 그 도리를 아셔야지요.”
신양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실려 있었다.
재차 삼차 고민하던 한립은 청동 나무에 붙들린 소응이 두 다리의 현규를 밝혀 점차 흡입력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후우.”
가볍게 탄식한 한립은 아무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성월화로 허공답보를 해서 두세 걸음 만에 청동 나무 꼭대기에 이른 그를 보고 진원 등이 안색이 변해 욕설을 쏟아냈다.
시선을 마주친 신양과 손도는 안도하며 진원과 부견에게 공격을 퍼부어 한립에게 시간을 벌어주었다.
그 덕에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순조롭게 청동 나무 꼭대기에 오른 한립은 나무가 이상한 흡입력을 내뿜는 것을 느꼈다.
석천공은 그가 열쇠를 취하는 동안 보호해 주려고 바짝 따라붙고 있었다.
한립은 흡입력은 신경 쓰지 않고, 나무 위로 뿜어져 나온 하얀 빛기둥을 자세히 살폈다.
이전 진법과 조금 차이가 있었지만, 그 근본은 비슷해서 파훼가 어렵지 않을 듯했다.
그는 품에 숨겨둔 성란필을 꺼내 빛기둥 주변에 슥슥 문양을 그리기 시작했다.
웅.
안 그래도 진법에 소질이 있던 그는 이전에 했던 경험을 살려 금방 외부 진법을 완성할 수 있었고, 하얀 빛기둥이 교란된 사이 핏빛 열쇠를 손에 쥐었다.
그러자 청동 나무의 강력한 흡입력도 사라졌다.
“네 놈이 죽고 싶구나!”
소응은 자신이 한립과 신양의 꾀에 놀아났다고 생각해 흥분한 얼굴로 쾅! 가지를 찍고 날아올랐다.
한립은 석천공을 데리고 먼저 풀쩍 나무에서 뛰어내리며 열쇠를 높이 들고 외쳤다.
“강제로 빼앗으려 들면 부숴버릴 겁니다. 우리를 죽일 수는 있겠지만 당신들도 원하는 바를 얻지는 못할 거예요.”
그의 선포에 소응이 경거망동하지 못하고 청동 나무 꼭대기에 서서 한립을 내려다보았다.
맞붙어 싸우던 이들도 분분히 뒤로 물러섰다.
“려 수사, 나서지 않기로 해놓고 왜 이러는 것인가.”
인상을 찌푸린 부견이 날카롭게 그를 쏘아보았다. 한립은 열쇠를 쥔 손으로 뒷짐 쥐며 딱히 변명하지 않았다.
“우리 청양성 사람이 무엇을 하든 부 성주가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신양이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콜록콜록……. 부 수사, 우리가 저들의 고육책에 걸려든 것 같습니다.”
진원이 기침을 내뱉으며 말했다.
“우릴 가지고 놀다니, 그까짓 열쇠 때문에 정말 너를 어쩌지 못할 것 같더냐!”
소응이 음산하게 경고했다.
“소응, 어찌 그런 말을 내뱉는 건가?”
그때 신전 바깥에서 노호성이 들리고 네 사람이 걸어들어왔다.
그 중 평범한 얼굴의 중년인과 다부진 몸에 키가 작은 노인이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그들은 현성 성주 액회와 육화부인이었다.
그들 뒤로 뼈 갑옷을 입은 잘생기고 어여쁜 오누이 주자원, 주자청이 뒤따랐다.
신양은 액회의 등장에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한립의 의심이 깊어지게 만들었다.
“액 성주님을 뵙습니다.”
다들 그를 향해 예를 올렸다.
“성주님, 저는…….”
소응이 다가가 몸을 숙이는데 액회가 싸늘하게 소매를 펄럭여 밀어버렸다.
서둘러 일어선 소응은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하고 고개를 조아렸고, 그걸 본 진원 등은 두려움을 드러냈다.
한립은 핏빛 열쇠를 단단히 쥐고, 액회의 표정을 살피며 이걸 그냥 내주는 게 좋을지 아니면 부숴버린다는 협박을 계속할지 가늠했다.
액회는 굳은 얼굴로 이곳에 모인 이들을 훑다가 한립 뒤의 석천공을 보고 언뜻 놀라는 듯했지만 그걸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았다.
“진 성주, 부 성주 아주 능력들이 대단하구만. 아직 필요한 물건은 찾지도 못하고 현성 안에 내분만 일으키는 것인가?”
“아닙니다. 저희는 열쇠를 찾아다 액 성주님께 바치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먼저 공을 세우려는 욕심이 앞서 손 수사, 신 수사와 충돌하게 된 겁니다.”
진원이 서둘러 해명했다.
“허허, 이럴 때는 기침도 안 하시고 말도 아주 잘하십니다.”
듣고 있던 손도가 비아냥거렸다.
“열쇠를 찾는 것은 각자의 능력에 달렸고, 괴성에게서 빼앗으려 다퉜다면 상을 줘야 마땅하겠지. 허나 자기편과 싸우고 있는 꼴을 보니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군.”
액회가 약간 얼굴을 풀고 그들을 나무랐다.
“공을 세우려 과욕을 부린 저희 잘못이니 나중에 백암성과 청양성에 따로 보상하겠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성주님.”
부견이 진원을 따라 서둘러 덧붙였다.
“……모두 현성을 위해 그랬다는 것을 아네. 손 수사와 신 수사에게는 돌아가는 대로 사죄를 해야 할 것이야. 기왕 청양성에서 열쇠를 찾았으니 잠시 려 수사가 보관하는 것으로 하고, 더는 공을 다투지 말고 합심해 진정한 보물을 얻어 돌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게.”
액회의 말에 분명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그들을 죽이려 한 죄가 공을 다툰 사소한 일로 치부되자 손도 등은 불만스러웠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액 성주님께서 오셨는데 열쇠를 제가 보관할 수 있나요. 당연히 성주님께 바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한립이 때마침 앞으로 나서 열쇠를 내밀었다.
“다들 모르겠지만 이 열쇠는 총 5개로 전부 모여야 대허 깊은 곳의 금지에 들어갈 수 있네. 열쇠 하나를 지니고 있다고 무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보물이 숨겨진 곳에 도달하기 전까지 가지고 있게.”
액회는 힐끗 그걸 보고 웃으며 거절했다. 한립도 더는 뭐라 하지 않고 열쇠를 품에 집어넣었다.
두근, 두근, 두근.
또다시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그 소리에 맞춰 두 열쇠가 상호호응하려 했다. 이어서 뜨거운 기류가 핏빛 열쇠에서 흘러나와 한립의 체내로 흡수되었다.
기혈의 흐름이 빨라져 성신지력이 동요했고, 거의 뚫릴 것 같던 현규가 그 순간 관통되었다.
기쁨을 감추고 서둘러 기혈의 힘과 성신지력을 억누른 한립은 다른 이들의 주의력을 돌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이런 것을 여쭈어도 될지 모르겠지만, 대허 깊은 곳에 숨겨져 있다는 보물이 대체 무엇인지요?”
“전설에 따르면 대허 깊은 곳에는 무한한 힘을 지닌 유골이 있다고 하네. 하늘과 땅을 무너지게 할 수 있는 보물로 그걸 보기만 해도 수행에 엄청난 도움이 될 거라는 이야기가 있지.”
액회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정말 대단한 보물일 터였다.
다들 그 말에 눈을 반짝이면서 탐욕을 드러냈다.
한립은 석천공이 말했던 ‘적린성해’를 떠올리고 액회가 말한 유골과 같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석천공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는지 그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신양의 눈에는 근심이 가득해 보였다.
“신 수사, 지금이라도 사실대로 말씀해 주시지요. 대체 무얼 알고 있는 겁니까?”
한립이 전음을 보냈지만 신양은 한동안 답이 없었다.
“액회 성주의 말이 사실입니까?”
한립은 오래 기다리지 않고 또 물었다.
“……려 수사를 속이고 싶지는 않고, 제게도 사정이 있어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도 서로 솔직해질 수 없다면 앞으로 협조는 없을 겁니다.”
“그게……. 휴, 꼭 알아야겠다면 어쩔 수 없지요. 처음에 저는 청양성 사람이 아니라, 현성 사람이었습니다. 저와 제 친형님인 신렬 모두 성주부 출신으로 다른 성으로 보내져 그곳의 정보를 캐는 임무를 맡기 위해 고된 훈련을 거쳤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훈련 과제가 서로를 암살하는 것이었지요.”
머뭇거리던 신양이 전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형제가 서로를 죽이도록 했단 말입니까?”
진짜 임무도 아니고 임무를 맡기 위한 훈련 과정에 그런 일을 시켰다니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렇습니다. 액회가 파견한 소응이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기에 별수 없이……. 결국에는 저만 살아남았지요.”
“당신이 액회에게 어떤 원한이 있는지는 저와 무관합니다. 적린공경 안에서 어떻게 살아서 빠져나갈지가 더 중요하니까요. 당신과 손을 잡을 수는 있지만 지금 액회에게 도전하는 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습니다.”
“휴, 압니다. 게다가 저도 액회에게 복수를 하려는 게 아니라 려 수사와 마찬가지로 어떻게든 살아남을 궁리를 하는 것뿐이에요.”
“그럼 액회가 방금 한 말은…….”
신양의 말에서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한립이 말을 흐렸다.
“그가 사실을 말했든 아니든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만, 그런 전설이 있기는 합니다. 대허 깊은 곳에 어떤 유골이 숨겨져 있는데 무궁무진한 힘을 품고 있어 유골의 작은 뼛조각 하나라도 구해 몸속에서 연화시킬 수 있다면 현규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는 내용입니다. 우리 같은 현수들에게는 신물(神物)이나 다름없지요.”
신양의 설명에 한립이 다른 걸 물으려는데 액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려 수사, 열쇠를 지녔으니 함께 움직이지. 괴성 사람들에게 열쇠를 빼앗기면 낭패이니 말일세.”
“다섯 개가 모여야 보물이 숨겨진 곳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괴성 사람들이 먼저 도착해도 어쩌지 못하겠군요?”
손도가 질문을 했다.
“괴성이 다른 것은 몰라도 현성보다 괴뢰술에 정통하니 다른 방도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줄곧 묵묵히 서 있던 육화부인이 대답했다.
한립이 액회의 제안에 따라나서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데, 귓가에 석천공의 전음이 들려왔다.
“우리가 지닌 전송 신물은 가짭니다. 이제 성역으로 돌아갈 방법이 없으니 제 생각에는 적린공경 안에서 우리가 바깥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장소는 대허 뿐일 거예요.”
그 말을 듣고 한립은 고심했다.
“려 수사, 무슨 걱정이 있다면 말해도 좋네.”
액회는 평소의 사람 좋은 얼굴로 돌아와 물었다.
“솔직히 체내에 흑겁충이 있어 걱정이 많습니다. 대허 안에서 무슨 변고를 당할지도 모르는데, 흑겁충이 발작을 일으키면 저도 잘못되고 현성의 대업도 어그러지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흑겁충이라. 그건 육화수사의 수법이 아닌가…….”
“그게 사정이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제가 흑겁충을 제거해 주겠습니다.”
액회의 눈길을 받은 육화부인은 자연스럽게 한립을 데리고 신전을 빠져나갔다.
“아주 세치 혀를 잘 놀리는구나. 이런 때에 노부에게 흑겁충을 해결하라고 압박을 가할 줄도 알고 말이야?”
“오해십니다, 선배님. 골 수사에게 선배님이 이 일이 끝나는 대로 흑겁충 일을 도와주실 거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럴 이유가 있겠습니까.”
“고 녀석이 그새 그걸 네게 말했단 말이냐. 아니 팔이 안으로 굽어야지 그 녀석은 어찌…….”
“선배님, 대허에 들어온 후로 골 수사를 만난 적이 있으십니까?”
“못 보았다. 상황이 복잡해서 그리 옆에 붙어 있으라 말했건만. 너는 만나 보았느냐?”
“골 수사는 무사할 테니 안심하시지요.”
걱정스러운 육화부인의 물음에 한립은 이전 일을 언급하지 않고 위로했다.
“내 딸 걱정도 해주고 그래도 네가 양심은 있구나……. 그래, 그런 녀석이 아니었으면 액 성주님의 명이 있어도 노부가 이런 고생을 하지는 않았겠지. 시작하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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