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987화 (1,744/2,000)
  • 1987화. 두 번째 열쇠

    *

    “준비되셨으면 들어갑시다.”

    신양이 푸른 석문을 위아래로 훑었다.

    “괴뢰는 상관없지만 부령들이 더 있으면 려 수사의 힘을 빌려야겠군.”

    손도가 한립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최선을 다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손 성주님.”

    한립의 대답을 들은 손도가 곁의 방선에게 눈짓을 했다.

    그의 눈짓에 앞으로 나선 방선이 석문을 밀고 그 안으로 들어가고 나머지 사람들이 뒤따랐다.

    모두 안으로 들어서자 손도가 소매를 펄럭여 대문을 다시 닫아 두었다. 이에 한립은 닫히는 문을 바라보다 몸을 돌려 신전 안을 살폈다.

    화륵!

    사방 벽과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화로에서 불길이 치솟아 실내를 밝히고 있었다.

    중앙에는 이상하게 생긴 청동 나무가 서서 성신문양이 새겨진 8개의 가지를 뻗고 있었는데, 가지마다 청동 갑옷을 입은 시체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한립은 섬뜩한 광경에 청동 나무줄기를 따라 위를 쳐다보다 나무 위로 하얀 빛기둥이 솟아올라 핏빛 열쇠를 보호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석천공도 한립의 시선을 따라 위를 쳐다보았으나 눈을 마주친 한립이 아무 소리 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때 청동 나무의 열쇠가 갑자기 강한 빛을 방출했다.

    동시에 앞섶에 다른 핏빛 열쇠를 넣어둔 한립은 가슴이 뜨끈해서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려 수사, 왜 그러십니까?”

    신양이 그 소리를 듣고 물었고, 다른 이들도 모두 한립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는 도중에 내상을 입었는데 갑자기 고통이 밀려와서요. 크게 신경 쓰실 일은 아닙니다.”

    손을 내저은 한립이 변명을 했다.

    열감도 순식간에 지나가고 품에 숨긴 열쇠도 기이한 빛을 뿜지 않아 다른 이들의 눈을 속일 수 있었다.

    “여기는 안전한 것 같으니 앉아서 부상을 돌보시지요. 부상이 심하든 심하지 않든 위기의 순간에 문제가 될지 모릅니다.”

    미간을 좁힌 신양이 걱정스레 말했다.

    “좋은 생각입니다.”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고 정말 신전 구석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망설이던 석천공도 그를 따라 옆에 앉아 운기조식을 했다.

    그걸 본 신양이 청동 나무 위의 핏빛 열쇠로 고개를 돌렸다.

    “하하……. 신 수사, 아까 말씀하셨던 열쇠가 여기 있었습니다. 괴뢰들에게 몰려 이곳까지 온 게 행운이었어요.”

    손도가 밝게 웃음 지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고진감래라더니 고생한 보람이 있군요.”

    “그럼, 저 열쇠는…….”

    “제가 알기로 열쇠를 하나만 가져서는 무용지물이라 했습니다. 누구든 열쇠를 지닌 사람이 있다면 힘을 합치는 것이 가장 좋겠지요.”

    한립은 요양을 하는 척하며 신양과 손도의 대화를 듣고는 냉소를 흘렸다.

    신양과 손도가 이제껏 그들에게 핏빛 열쇠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것도 그러하고, 신양과 손도가 논의하는 척하며 기 싸움을 하는 모습에도 헛웃음이 나왔다.

    “성주님들 청동 나무에 걸린 것들은 괴뢰일 가능성이 큽니다. 열쇠를 얻으려면 저것들부터 해결해야 할 듯싶습니다.”

    가만히 있던 헌원행이 입을 뗐다.

    “헌원 수사의 말이 맞네. 우선 모두 힘을 합쳐 열쇠를 손에 넣는 것이 우선이겠지.”

    “맞습니다. 늦기 전에 움직이시지요.”

    손도와 신양은 그 분위기를 타고 순조롭게 합의를 보았다.

    말을 마친 신양이 먼저 청동 나무 위로 펄쩍 뛰어오르고, 손도가 슬쩍 방선에게 눈짓해 따라가게 했다.

    두 사람이 연달아 청동 나무 가장 윗가지로 올라섰다.

    먼저 청동 가지에 오른 신양이 강력한 흡입력에 발이 딱 달라붙어 더는 움직이지 못할 때 방선도 비슷한 일을 겪고 있었다.

    화앗.

    청동 나무의 성신도안이 분분히 밝게 빛나면서 하얀빛을 주위로 뿌렸다.

    눈을 뜬 한립은 청동 나무에 매달린 ‘시체’들이 앞뒤로 흔들흔들하다가 잘 익은 열매처럼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18마리의 괴뢰들이 눈에서 붉은빛을 번뜩이며 허리에 찬 칼을 뽑아 수많은 성규에서 하얀 별빛을 터트렸다.

    그중 두 마리가 펄쩍펄쩍 청동 나무 위로 올라가고, 나머지는 칼을 들고 한립을 포함한 나머지 사람들을 향해 내달렸다.

    한립이 한숨을 푹 쉬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괴뢰 두 마리가 하나는 종으로, 다른 하나는 횡으로 칼을 휘두르며 좌우에서 달려드는 것을 본 그 역시 허리춤에서 곡도를 뽑아 들고 성월화에 하얀빛을 일으켰다.

    채챙!

    눈 깜짝할 사이에 괴뢰들의 칼을 피한 한립이 곡도로 그들의 두 다리를 그었지만 하얀 불똥이 튀면서 전신 갑옷에 흔적만 남았다.

    ‘단단해!’

    몸을 비튼 한립은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라 대력금강결을 운용한 두툼한 팔로 곡도를 쥐고 그를 쫓는 괴뢰를 내리쳤다.

    하얀 곡도의 성규가 밝게 빛나 별빛이 흐릿하게 어렸다.

    그걸 본 괴뢰도 칼을 평평하게 머리 위로 들어 곡도를 막으려 했다.

    카착!

    괴뢰의 칼이 잘려나가 하얀 곡도가 괴뢰의 어깨로 떨어졌다.

    아쉽게도 칼이 성신지력 대부분을 완충해서 갑옷만 살짝 파이고 괴뢰에게는 작은 상처도 낼 수 없었다.

    인상을 찡그린 한립이 힘을 주어 갑옷에 박힌 곡도를 뽑아내려는데 느닷없이 갑옷에서 강렬한 흡입력이 발생했다.

    동시에 다른 괴뢰가 번득 날아들어 그의 배를 횡으로 가르고 있었다. 한립은 어쩔 수 없이 곡도를 포기하고 물러서야 했다.

    청동 나무 위에서는 신양과 방선이 발이 가지에 딱 붙은 채로 괴뢰들과 싸우고 있었다.

    처음에는 여유가 있었는데 괴뢰 두 마리가 더 뛰어올라 둘씩 그들을 상대하니 고충이 말이 아니었다.

    특히 방선은 괴뢰 두 마리가 양쪽에서 사납게 칼을 휘두르는 통에 몸 곳곳에 상처가 가득했다.

    하지만 고통스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눈빛은 더욱 살아나고 전의가 불타는 것 같았다.

    크오오오!

    괴뢰의 칼이 방선의 가슴을 찌르기 직전, 드디어 돼지 얼굴 소년의 본모습이 드러났다.

    야수처럼 울부짖은 방선의 입에서 육안으로도 확인 가능한 반투명한 음파가 빠져나와 괴뢰와 칼을 느릿하게 만든 것이다.

    음파의 영향을 받은 청동 나무가 바르르 떨리고 방선과 신양은 자유를 되찾았다.

    방선이 자신이 방출한 음파를 따라 뛰어올라 괴리의 목을 맨손으로 비틀어 꺾어 버렸다.

    펑!

    머리가 뽑혀 버린 괴뢰는 데굴데굴 나무 아래로 떨어졌다.

    신양도 즉시 백골로 만든 정교하게 세공된 송곳을 꺼내 괴뢰의 갑옷 이음새 사이를 푹! 찔렀다.

    펑!

    내부에서 시작된 폭발이 괴뢰를 통째로 날려버렸다.

    이걸 시작으로 현성 사람들은 우위를 점해 한 시진 만에 나머지 괴뢰들도 소탕할 수 있었다.

    방선의 몸 곳곳에 가벼운 상처가 남고, 헌원행이 배를 찔린 것 외에는 큰 부상을 당한 사람은 없었다.

    손도는 직접 방선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신양을 돌아보았다.

    “열쇠는 누가 가져다가 보관하겠습니까?”

    “이 중에서 실력이 제일 강한 손 수사께서 보관하시는 게 맞겠지요.”

    신양은 공수하고 예의 바르게 말했다.

    “열쇠에 대해 신양 수사가 더 잘 아시니, 수사께서 가져다 보관하는 것이 원래는 맞을 것인데……. 그나저나 열쇠를 금제 진법이 보호하고 있는데 어떻게 파훼할 수 있는지 아십니까?”

    손도는 짐짓 곤란한 척하며 물었다.

    “저도 진법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요.”

    “허허, 그렇다면 제가 해보는 수밖에요…….”

    두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신전의 육중한 문이 쿵, 하고 터지며 누군가 뛰어들었다.

    한립 등이 분분히 양쪽으로 비켜서고 신전 문이 날아올라 청동 나무에 부딪혀 갈라졌다.

    “다들 양보하느라 바쁜 것 같은데, 제가 열쇠를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은 진원이었다.

    새로 등장한 무리에는 진원과 부견 두 성주가 가장 앞에 서 있고, 소응이라 불리던 현성 장로 매부리코 사내도 그 옆에 있었다.

    그들 세 사람 뒤로 붕대로 온몸을 감은 건장한 사내와 작고 뚱뚱한 중년인이 따라 들어왔는데, 전자는 한립도 익숙한 단통이었고 후자는 현지성의 장로였다.

    “언제부터 와있던 겁니까? 내 천성목(天星目)으로도 보질 못했는데.”

    손도가 인상을 찡그렸다.

    “흐흐, 제단 입구에 천성목을 설치해 두었다고 다 된 줄 아셨습니까?”

    부견이 비웃는 소리에 손도가 난색을 표했다.

    “진 수사, 부 수사 뭐든 먼저 온 사람이 우선권이 있는 것은 아시지요? 저희가 이곳의 괴뢰들을 다 제거한 다음에 열쇠만 가져가시겠다니 그리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닙니다.”

    얼굴을 굳힌 신양이 입을 열었다.

    “콜록콜록. 신 수사, 똑똑한 분이 왜 그리 어리석은 소리를 하십니까. 어차피 열쇠를 나눠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누가 먼저 왔느냐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진원이 연신 기침을 하며 씩 웃음 지었다.

    “청양성과 백암성이 힘을 합치면 당신들보다 전력이 못하지 않습니다. 빼앗고 싶으시다면 그렇게 해보세요.”

    신양의 목소리가 냉랭해졌고 손도가 그 옆에 가서 섰다.

    “콜록콜록……. 사람 수가 많다고 그리 자신을 하십니까.”

    “석공, 어서 이리로 오지 못할까. 성주님을 배신하려는 것이냐?”

    진원이 냉소를 흘리자 소응이 석천공을 향해 말했다.

    그러나 입꼬리를 끌어올린 석천공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신양이 그걸 보고 힐끗 한립을 살피고는 안심했다.

    “손 수사, 통여성과 백암성의 교분을 생각해서 충고 한마디 하겠습니다. 신양은 늑대와 같은 마음을 품은 자이니 가까이하면 분명 화를 입을 겁니다. 괴성과 진작 내통해 그와 손을 잡으면 스스로 궁지로 모는 꼴이 될 거란 소립니다.”

    부견이 또랑또랑하게 의외의 사실을 밝혔다.

    그 소리에 신양의 눈빛이 흔들렸는데 손도는 진작 알고 있었는지 아니면 전혀 믿지 않는 것인지 표정에 흔들림이 없었다.

    “제가 손 성주와 같이 진원과 부견을 맡고, 헌원행이 현지성 장로를, 방선이 단통을 막을 것이니 수사가 소응을 상대로 시간을 끌며 석 수사에게 열쇠를 가져오라고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때 한립의 머릿속에 신양의 말소리가 들렸다.

    “미안합니다, 신 수사. 저희는 이 싸움에 낄 생각이 없습니다.”

    한립은 전음 대신 소리를 높여 입장을 밝히고 석천공을 데리고 쌍방과 모두 거리를 벌렸다.

    신양과 진원 무리 모두 뜻밖의 사태에 경계와 의혹의 시선을 보냈다.

    “려 수사…….”

    말문이 막힌 신양은 선뜻 말을 잇지 못했다.

    한립은 진작부터 그를 의심하면서 경계하고 있었기에 더는 그들의 싸움에 끼고 싶지 않았다.

    “하하, 려 수사가 과연 머리가 좋구만! 콜록, 우리 현지성과 자네의 은원은 이것으로 없던 일로 하지. 후에 사례도 할 것이야.”

    진원이 웃음을 지었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공격하세요!”

    이때 소응이 소리치자 부견, 진원 등이 현규를 밝히고 청동 나무를 향해 달려갔다.

    신양은 한립을 더 설득해 보려 했지만 날아드는 부견의 주먹에 어쩔 수 없이 싸움을 시작했다.

    얼굴색이 시시각각 변하던 손도도 진원과 맞붙었다.

    진원의 수하인 장로가 히죽 웃으며 헌원행을 향해 달려들었고, 단통은 인상을 찌푸리고 한립 쪽을 보다 방선을 향해 다가갔다.

    방선은 단통의 굵은 오른 주먹이 날아들자 씩 웃는 얼굴로 거침없이 주먹을 쳐들었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