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986화 (1,743/2,000)

1986화. 합작

*

“거기 서라.”

평정을 되찾은 한립이 백갑 사내를 따라잡아 의식 사슬을 두른 손을 가슴으로 뻗었다.

이미 중상을 입은 백갑 사내는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때 나머지 두 천괴현장들이 달려들었으나 한립은 손쉽게 그들의 가슴에서 천괴부 한 장씩을 취해 봉인했다.

천괴현장 세 마리가 펑펑펑 연달아 하얀빛으로 돌아갔다.

“보면 볼수록 대단하십니다. 이렇게 쉽게 현괴현장들을 처리하시다니요.”

석천공이 다가와 진심을 담아 탄복했다.

“아닙니다. 제가 익힌 비술이 다행히 부령과 상극이었나 봅니다.”

담담히 미소를 지은 한립은 남은 돌기둥을 살피러 걸어가 허리를 굽혔다.

돌기둥들은 성신지력을 모으는 효력이 있어 천괴부가 그곳에 붙어 힘을 기른 듯했다.

부서진 돌기둥 잔해를 뒤적이니 다섯 개의 짧은 방망이를 찾을 수 있었다.

하얀 방망이에는 성신문자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건…….”

적린공경에서 성준금제에 대해 기본을 익혀 복잡하기는 해도 짧은 방망이에 새겨진 성준금제가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성신지력을 모으는 취성진법으로 당초 경원관에서 보았던 것보다 현묘했다.

한립은 탐나는 눈빛으로 곤봉의 성준금제를 살피다 옥간을 꺼내 문양들을 옮겨 적었다.

이런 상황을 위해 미리 옥간을 준비해 오길 잘한 것 같았다.

아쉬운 건 천괴현장이 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돌기둥을 부수느라 방망이도 손상이 가서 문양을 온전하게 복원할 수는 없다는 점이었다.

신속히 기록을 마친 한립은 석천공과 함께 드넓은 대청을 지났다.

이번에는 어떤 공격도 당하지 않고 대청 너머의 통로를 지나 수백 개에 달하는 검은 계단 앞에 이를 수 있었다.

계단 아래쪽에 하얀빛이 들어오는 출구가 보이고 그 안쪽으로도 공간이 있는 듯했다.

그때 쾅쾅거리는 소리와 누군가의 말소리가 함께 들려와 싸움이 한창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시면 제가 가보겠습니다.”

“조심하세요.”

한립의 전음을 들은 석천공은 자신의 은신술이 그보다 못한 것을 알고 수긍했다.

<만규공적술>을 발동한 한립은 소리 없이 출구로 다가가 바깥을 살폈다.

돌기둥이 있던 대청보다 백 배는 넓은 거대 대전은 지면과 벽이 전부 짙은 푸른색이었고, 좌우 양쪽에 높다란 돌기둥들이 늘어서서 지붕을 받치고 있었다.

그 돌기둥을 따라가니 대전 깊은 곳에 굳게 닫힌 푸른 돌문이 보였다.

그 안에서 격렬히 싸우는 이들은 열댓 마리의 붉은 인형 괴뢰들과 천괴현장 세 마리 그리고 신양, 헌원행, 손도, 방선 네 사람이었다.

보통 사람보다 예닐곱 배는 큰 붉은 인형 괴뢰들은 별다른 무기를 지니지 않았지만 괴력을 발휘하고 협공에 능해 파도처럼 신양 일행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게다가 천괴현장 셋은 다 그가 싸웠던 백갑 사내처럼 허실변환을 써서 몸을 허상화할 수 있었기에 신양 일행은 푸른 석문으로 가지 못하고 그곳에 붙들려 있었다.

대형 괴뢰들은 그렇다 치고 가장 골치가 아픈 것은 역시 천괴현장이었다.

네 사람 중 유일하게 천괴현장에 어느 정도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손도가 검은 무늬가 들어간 새까만 뼈 검으로 그것들을 상대했다.

새까만 검의 문양들이 퍼트리는 파동은 신양 무리나 다른 괴뢰들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나 천괴현장 세 마리만은 파동에 부딪히면 늪에 빠진 것처럼 속도가 느려졌다.

그러지 않았다면 천괴현장들이 장창으로 뿜어내는 하얀 창 그림자에 벌써 신양 무리에서 부상자가 나왔을 것이다.

손도의 뼈 검에 검은빛이 일고 창 그림자가 교차해 만든 그물을 갈랐다.

천괴현장 세 마리와 손도가 각각 뒤쪽으로 물러서는 것을 보고 한립은 검은 뼈 검을 자세히 봐두었다.

“려 수사, 석 수사 왔으면 들어오게. 숨어서 지켜보는 것은 그리 떳떳한 태도가 아닐 듯싶구만.”

그때 손도가 고개를 돌려 통로를 쳐다보았다. 그 말에 다른 사람들도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정신없이 괴뢰들과 싸우느라 미처 통로는 신경 쓰지 못했던 것이다.

한립은 기운이 거의 새어나가지 않는 <만규공적술>을 펼친 그와 수백 장 밖 계단 위에 몸을 숨긴 석천공을 알아챈 손도를 놀라움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생각 끝에 석천공에게 손짓을 한 그는 함께 바깥으로 나섰다.

“손도 수사의 감각이 놀랍습니다. 어떻게 우리를 발견하셨는지요?”

한립은 웃으며 물었다.

다른 괴뢰들과 부령도 또 다른 두 사람의 출현에 잠시 공격을 멈추었다.

“허허, 뭐 자랑할 것도 없는 신통이네. 청양성과 백암성은 결맹을 맺었으니 어차피 온 김에 함께 움직이면 어떻겠나?”

“려 수사, 이전에 했던 제안은 아직 유효합니다. 대허 안에서 둘만 다니는 것은 위험할 테니 같이 다니시지요. 두 사람도 이곳의 제단이 범상치 않다는 것은 알아챘을 것 아닙니까. 이렇게 많은 괴뢰들이 지키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 남다른 보물이 숨겨져 있을 겁니다.”

손도의 말에 신양도 거들었다.

헌원행은 이채를 띠고 그들을 보았고, 방선은 그들 뒤에서 누군가를 찾다 실망한 눈치였다.

석천공은 붉은 대형 괴뢰들과 천괴현장의 실력을 보고 놀랐기에 손도, 신양과의 협력에 마음이 기울었지만 슬쩍 한립을 보며 그에게 결정을 맡겼다.

“두 분께서 이리 따뜻하게 맞아주시니 어찌 뜻을 거스르겠습니까.”

한립이 잠시 생각해보다 밝게 웃으며 답했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붉은 괴뢰들이며 천괴현장이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덤벼들고 있었다.

“다 같이 괴뢰와 부령들을 없애고 이야기합시다. 다들 실력을 감추지 말고 빨리 끝냅시다.”

그 말에 희색을 드러낸 신양이 크게 외쳤다.

그의 손에서 뇌전 문양이 새겨진 황토색 단창 세 자루가 나타나 그림자로 변해 날아갔다.

펑펑펑!

황토색 단창들이 박힌 괴뢰는 하얀 뇌전에 휩싸여 폭발해 버렸다.

“부령들은 내게 맡기고 자네들은 신 수사를 도와 괴뢰들을 처리하면 되네.”

손도가 힐금 신양을 보고 검은 검에서 날개를 편 공작과 같은 그림자들을 방출해 동시에 천괴현장 세 마리를 공격했다.

천괴현장들도 장창을 휘두르며 응전하고 있었다.

한립을 포함한 나머지 사람들도 붉은 대형 괴뢰들에게 달려들었다.

헌원행이 노란 천을 감은 검은 방망이에 피를 뱉어 흡수시키자 수많은 방망이 허상이 나타나 귀곡성을 터트리면서 괴뢰들 위로 떨어졌다.

그 옆에선 방선이 귀곡성의 영향으로 행동이 느려진 붉은 대형 괴뢰들을 향해 코로 하얀 음파를 방출했다.

두 사람의 협공에 잠시 마비되었던 괴뢰들이 쓸려나갔다.

한립도 그 틈을 타 곡도를 휘두르면서 괴뢰들을 베었고, 석천공이 그 뒤를 따라가며 흑자색 곤봉에 성규를 밝혀 마구 휘둘렀다.

콰쾅쾅! 쿠쿵!

헌원행 방선의 보조에 한립과 석천공의 마무리로 괴뢰들 무리에 길이 뚫렸다.

“잘했습니다! 괴뢰들의 합격술을 깨기만 해도 더는 걱정할 게 없어요!”

한립과 석천공이 그 길을 따라 괴뢰들의 뒤로 빠져나가는 것을 본 신양이 신나 외쳤다.

두 주먹에 하얀빛을 머금은 그가 주먹 허상을 유성처럼 쾅쾅 떨어트려 괴뢰들을 쳐부수었다.

한립과 석천공도 도광과 곤봉 그림자로 괴뢰들의 후방에서 공격을 이어나갔다.

카악!

붉은 대형 괴뢰의 수가 열 마리 남았을 때 비교적 키가 큰 괴뢰가 울부짖었다.

그 소리를 들은 대형 괴뢰 두 마리가 몸을 돌려 한립과 석천공을 집중공격하고 나머지 여덟 마리가 다시 빈틈없이 진을 치고 신양, 헌원행, 방선을 포위했다.

계속해서 주먹을 내지르는 괴뢰들 때문에 신양이 묶여 있는 사이, 한립과 석천공을 향해 날아든 괴뢰 두 마리가 붉은 기운이 어린 주먹을 부풀리고 맹공을 펼쳤다.

콰콰쾅…….

도광과 곤봉 그림자를 터트린 두 괴뢰는 주먹을 펴서 하얀 곡도와 흑자색 곤봉을 맨손으로 잡아챘다.

그 순간, 한립은 냉소를 흘리며 힘껏 곡도를 끌어당겨 공중제비를 돌면서 팔꿈치로 대형 괴뢰의 머리를 찍어 내렸다.

퍽!

붉은 괴뢰의 머리가 수박처럼 터져 끈적한 은색 액체가 튀었지만 한립은 그대로 여덟 마리 괴뢰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때, 하얀빛이 위쪽에서 내려와 하얀 장창으로 변해 떨어지고 있었다.

눈썹을 끌어올린 한립은 빙글 몸을 돌리며 두 다리의 현규를 밝혀 돌연 방향을 틀었다.

쿵.

하얀 그림자가 번득인 뒤 천괴현장 한 마리가 하늘에서 떨어져 그의 앞을 막아섰다.

“와라!”

씩 미소를 지은 한립이 잔영을 남기며 천괴현장 앞으로 파고들었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흠칫 놀란 천괴현장은 피하지 않고 음산한 빛이 반짝이는 장창으로 단숨에 그의 머리를 꿰뚫고자 했다.

“어서 피하세요! 부령의 공격은 막을 수가 없습니다.”

멀리서 이를 본 신양이 놀라 소리쳤다.

그러나 한립은 피하지 않고 두 다리의 현규에서 일부러 빛을 밝혀 그와 천괴현장 주변을 밝은 빛으로 가려 버렸다.

푹!

폭음이 들린 뒤 밝은 빛이 가신 자리에는 천괴현장은 사라지고 한립만 남아 있었다.

석천공을 제외한 모두가 화들짝 놀라 그걸 지켜보았다.

한립은 그들의 반응에는 신경 쓰지 않고, 나머지 여덟 마리 괴뢰 뒤로 가서 주먹으로 연타를 날렸다.

퍼퍼퍼퍼퍽.

크기가 큰 우두머리 괴뢰를 포함한 다섯 마리가 머리가 터져 바닥으로 쓰러졌다.

한립의 벼락과 같은 속도에 신양 등이 환호하며 나머지 세 마리에게 달려들었다.

노호성을 터트리며 새까만 뼈검을 휘두르는 손도 앞에는 천괴현장이 두 마리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눈길을 손도 쪽으로 돌린 한립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다음 순간, 다른 천괴현장 뒤에 선 그가 주먹에서 눈부신 빛을 발산했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현규를 밝힌 주먹으로 공격을 한 것 같았으나 실은 그 속에 의식 비술인 의식 사슬이 숨어 있었다.

한립이 손을 거두고 하얀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역시 천괴현장이 사라지고 없었다.

미미하게 안색이 달라진 손도는 한립이 마지막 천괴현장마저 눈독 들이는 것을 보고 마음이 급해져 검은 뼈 검에 힘을 불어넣었다.

후후훅!

뼈 검에서 검은빛이 밧줄처럼 튀어나와 마지막 천괴현장을 휘감았다.

키아악!

손도의 체내에서 괴상한 울음소리가 들리고, 뼈 검이 검은 짐승 허상을 내뱉어 천괴현장을 한입에 삼켜버렸다.

검은 짐승 허상은 즉시 뼈 검 안으로 돌아가 사라졌고, 한립은 그저 지켜볼 뿐 아무리 소리 하지 않았다.

“…….”

“…….”

신양 등이 나머지 괴뢰들을 처리하자 대전 안이 조용해졌다. 그러나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새로 등장한 한립이 강적들을 허수아비 베듯이 제거하자 다들 당황해 분위기가 묘해진 탓이다.

“허허허, 려 수사와 석 수사 덕에 전력이 강해졌구만.”

손도가 웃음으로 침묵을 깼다.

“우연히 지나던 길에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저희도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립도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분위기를 풀었다.

“석 수사는 액 성주님과 함께 있던 것 같던데. 려 수사와는 예전부터 알던 사이인가?”

손도는 한립 곁의 석천공을 보며 중얼거리듯 물었다.

“하하, 말하자면 이야기가 깁니다. 려 수사와 석 수사는 확실히 이전부터 아는 사이였고요. 어쨌든 한배를 탄 셈이니 어서 좋은 물건이 없나 찾으러 가보시지요.”

한립이 대답하기 전에 신양이 대신 입을 열었다.

“뭔가 발견하신 게 있습니까?”

그 말에 한립이 신양에게 물었다.

“헌원행 수사와 제단 입구에서 손 성주와 방선 수사를 만났습니다. 제단이 범상치 않아 보여 보물이 없나 살피는 중인데 아직 무엇이 있을지는 모르겠군요.”

신양은 손도를 힐끗 보고 이렇게 답했다.

“그렇네. 이제 두 사람이 더 충원되었으니 수색이 쉬워지겠어.”

손도가 하하 웃음을 흘렸다.

“싸우느라 지쳤을 텐데 잠시 쉬었다 출발하시지요.”

손도의 제안에 얼굴빛이 하얗게 변한 헌원행과 방선이 단약을 복용하고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석천공은 전혀 피곤하지 않았지만 신양 말대로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는 동안 손도는 붉은 대형 괴뢰 쪽으로 가서 검은 비수로 괴뢰들을 해체해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이전에 본 괴뢰 잔해도 손도의 소행인 것 같았다.

쉴 곳을 찾으면서 유심히 살피니 손도가 괴뢰 잔해에서 무언가를 꺼내 얼른 감추는 것을 보았다.

빠른 손놀림이었지만 한립은 콩알 크기의 하얀 수정돌을 빼내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일행은 반 시진 정도 쉬다 푸른 석문 앞으로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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