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985화 (1,742/2,000)
  • 1985화. 부령(符靈)

    *

    무성한 수풀을 지나 앞이 확 트이고 거대한 성이 눈앞에 나타났는데, 뾰족한 지붕의 형태가 꼭 하늘을 찌르는 붉은 검 같았다.

    시선을 마주친 한립과 석천공은 소리 없이 반쯤 열린 성문 안으로 들어섰다. 부식이 상당히 진행되었지만 지난번 폐허의 건물들보다는 상태가 양호했다.

    성문 주변을 살폈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별다른 물건도 없었다.

    “대허 안에 무수히 많은 보물이 있을 거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곳에 들어온 이후 성보 두 개를 찾은 것 외에 다른 보물은 본 적이 없습니다.”

    석천공은 탐탁지 않아 하며 전음을 보냈다.

    “성보라도 한두 개 건진 것이 어딥니까. 이곳은 앞서 온 무리가 수색을 마친 것 같으니 안쪽으로 가봐야겠어요. 보물을 찾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될 겁니다.”

    한립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하고 당부도 잊지 않았다.

    ‘저건…….’

    안쪽으로 이동한 둘은 동시에 안색이 달라졌다.

    거대한 광장에 높다란 제단이 우뚝 솟아 있는 것이 붉은색인 것을 제외하면 폐허에서 보았던 은회색 제단과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제단 입구에는 현문으로 유명전(幽明殿)이라는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들어가 봐야겠지만 먼저 온 무리가 안에 있을 겁니다. 아까 말했다시피 조심합시다.”

    “당연하죠, 걱정하지 마세요.”

    한립과 석천공이 한 마디씩 전음으로 주고받고 푸른 연기처럼 변해 제단 입구로 들어갔다.

    팟.

    그들이 들어가고 얼마 되지 않아 입구 지면에 하얀빛이 일며 타원형의 도안이 나타났는데 한립이 육화부인에게 배운 성신문자 보다 훨씬 복잡한 것이었다.

    타원형 도안의 빛이 중앙으로 모며 눈동자처럼 변하고 입구 쪽보다 어두워지다가 곧 사라졌다.

    한립과 석천공은 그것은 꿈에도 모른 채 수백 장에 이르는 통로를 지나고 있었다. 은색 제단 때처럼 벽에 진법 문양이 가득해 의식의 힘이 억제되었다.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간 그들은 드넓은 대청으로 들어섰다.

    사면의 벽이 움푹 들어간 대청 안에는 아무도 없는 대신 붉은 괴뢰들이 가득 쓰러져 있었고 곳곳에 전투의 흔적이 선명했다.

    붉은 괴뢰들은 오장육부가 다 들어가 있어 대량의 은색 액체를 철철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한립은 대허의 괴뢰 잔해를 들고 살피다 눈을 반짝였다.

    붉은 옥석으로 만든 것처럼 투명하게 반짝이는 잔해는 예전에 보았던 검은 원숭이 괴뢰보다 품질이 더 좋았다.

    누군가 괴뢰들을 제거해 두었으니 다행이지 밀폐된 공간에서 이런 괴뢰들이 달려들었으면 고생했을 것이다.

    물론 반대로 말하면 이런 괴뢰들을 제거한 무리의 실력도 상당하다는 뜻이었다.

    “위험한 곳 같으니 조심하면서 이동해야겠습니다.”

    한립이 따로 말하지 않아도 석천공도 두 눈으로 상황을 보고 있었기에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청 안쪽에는 문이 있었고, 그 뒤로 어두운 통로가 길게 이어졌다. 문으로 향하는 동안 주위를 살핀 한립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괴뢰들은 전투 중에 부서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 무언가를 찾으려고 분해를 해놓은 것이었다.

    ‘뭘 찾고 있는 걸까?’

    대청을 가로지른 한립은 고개를 저어 잡생각을 떨치고 오로지 전방의 기척에만 온 정신을 집중했다.

    통로는 곧게 뻗어 있지 않고 구불구불하게 아래로 이어지고 있었다.

    어느 골목을 돌자 갑자기 세 개의 갈림길이 나왔는데 전부 어두워서 멀리까지 보이지 않았다.

    그를 쳐다보는 석천공의 눈에 ‘어디로 갈까요?’라는 의문이 담겨 있었다. 갈림길을 훑던 한립이 중간 통로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곳에만 누가 지난 흔적이 있고 나머지 통로는 깨끗했다.

    “중간 통로는 뭔가 있더라도 다른 이들이 선점했을 겁니다. 다른 쪽으로 가시죠.”

    한립의 이야기에 석천공도 반대하지 않고 상의 끝에 오른쪽 길로 들어섰다.

    네다섯 명이 나란히 걸어도 될 만큼 넓은 통로가 가면 갈수록 밝아지고 더 넓어졌다.

    쉭!

    그들이 얼마 걸어가지 않아, 갑자기 앞쪽에서 매서운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이 걸음을 멈추자 전방에서 하얀 옷을 입은 사내가 하얀빛의 검을 들고 쇄도해 앞에서 걷던 한립의 가슴을 찔렀다.

    흠칫 놀란 한립이 서둘러 옆으로 피하면서 하얀 곡도를 꺼내 역시 상대의 가슴을 가르려 했다.

    그러나 괴이한 일은 그때 벌어졌다.

    도광이 백의 사내를 가르는데 허공을 가르는 듯 어떤 감촉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립이 탄성을 내뱉고 백의 사내는 그대로 뒤쪽의 석천공에게 뛰어들어 빛의 검에서 서늘한 빛을 반짝였다.

    움찔한 석천공의 반응도 느리지 않아 얼른 검을 피했다.

    백의 사내는 매우 빠르게 두 번 공격하며 두 사람을 지나쳐 신형을 멈추었다가 재빨리 몸을 틀어 다시 달려들었다.

    그제야 제대로 보니 엄숙한 표정을 하고 경장 차림을 한 사내는 속세의 절을 지키는 신장처럼 생겼고 진짜 사람이 아닌 하얀 기운 덩어리에 불과했다.

    “천괴현장(天魁玄將)!”

    석천공이 놀라 소리쳤다.

    ‘천괴현장?’

    그게 뭐냐고 묻고 싶었으나 백의 사내가 달려드는 통에 한립은 곡도로 막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천괴현장은 허실변환(虛實變幻)이 가능합니다. 마기를 쓸 수 없는 상태로는 공격을 막을 수 없으니 피해야 해요!”

    귓가에 들리는 석천공의 목소리에 한립이 급히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나 곡도를 완전히 거두지는 않고 하얀 뱀 같은 검빛을 일으켜 백의 사내를 베어보았다.

    쉭!

    역시 검빛은 백의 사내의 몸을 통과해 어떤 위해도 가하지 못했다.

    그런 한립의 행동에 화가 났는지 백의 사내는 석천공은 놔두고 오로지 그를 쫓아와 음산한 검빛을 일으켰다.

    그걸 본 한립이 성월화에서 하얀빛을 반짝여 잔영으로 변해 좌우로 피했다.

    상대의 옷깃도 스치지 못한 백의 사내는 기합을 넣어 음산한 검 그림자를 조밀하게 일으켰다.

    검 그림자에 가려 한립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석천공이 놀라 도우려 하는데 한립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혼자서도 상대할 수 있습니다. 천괴현장의 약점은 모르십니까?”

    “천괴부적이 변한 부령(符靈)이 천괴현장입니다. 바깥에서라면 봉인해 버리면 된다지만 적린공경 안에서는 상대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하하, 알고 보니 부적이 변한 부령이었군요.”

    한립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얼마 되지 않아 통로를 가득 채운 검 그림자 속에서 수정빛이 반짝였다.

    모습을 드러낸 그의 손이 백의 사내의 가슴을 파고들어 있었고, 백의 사내는 뻣뻣하게 굳어 꼼짝하지 못했다.

    석천공이 놀란 눈빛으로 바라보니 한립이 백의 사내의 품에서 손바닥 크기의 하얀 부적을 떼어냈다.

    구불구불한 빛의 문양들이 떠올라 있는 괴이한 부적은 수정 사슬에 칭칭 감겨 아무리 꿈틀거려도 빠져나오지 못했다.

    부적을 빼앗긴 백의 사내가 펑, 하고 빛으로 흩어졌다.

    “어떻게 하신 겁니까? 설마 의식으로 사슬을 만든 겁니까?”

    석천공이 의식 사슬을 보며 기뻐했다.

    “예전에 익혔던 의식 신통 중 하나입니다.”

    “그랬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이런 부적은 봉인 비술을 쓰거나 없애지 않으면 주변의 원기를 흡수해 계속해서 천괴현장을 만들어내니까요.”

    한립이 의식 사슬의 내력을 얼버무렸지만 석천공은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위력이 제법인데 그냥 없애기는 아까우니 봉인해주겠습니다.”

    부적을 감은 의식 사슬이 실오라기처럼 수정빛을 내뿜어 봉인 도안을 이루고 천괴부 안으로 녹아들었다.

    봉천도의 <격원음마공>응 참고해 의식 사슬로 펼쳐본 봉인비술이었다. 과연 천괴부가 더는 요동치지 않자 한립은 흡족한 얼굴로 부적을 거두었다.

    “진선계에서는 천괴부라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성역의 부적입니까?”

    “그건 저도 잘……. 아마 그럴 지도요. 예전에 서고에서 천괴부에 대한 기록을 본 적은 있는데 성역에서도 직접 본 적은 없습니다.”

    두 사람은 지체없이 다시 출발했다.

    빛이 밝아질수록 특이한 파동 같은 게 느껴졌다. 시선을 교환한 한립과 석천공은 조심조심 앞으로 나아갔다.

    좌우로 구불구불한 통로를 빠져나오니 네모난 대청이 나타났고, 그 안에 다섯 개의 돌기둥이 서서 별빛을 방출하고 있었다.

    다섯 개의 돌기둥 중 가장 왼쪽 것을 제외한 네 기둥에는 천괴부가 한 장씩 붙어 있었는데 그 중 중간 기둥의 천괴부는 다른 세 장보다 크기가 컸다.

    “여기는…….”

    한립이 무어라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네 장의 부적이 무언가를 감응하고 눈부신 빛을 발산하며 돌기둥에서 떨어져 나와 백의 사내들로 변했다.

    3명은 한립이 봉인한 부령과 똑같았고, 나머지 가장 큰 천괴부 부령만 하얀 갑옷에 옥으로 만든 허리띠를 하고 가죽 신발을 신은 채 긴 창을 들고 있었다.

    게다가 특별한 부령의 눈빛은 마치 사람과도 같아 지능이 높아 보였다.

    부적의 변화는 순식간이라 한립이 의식 신통을 쓰기도 전에 벌써 그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하얀 갑옷을 입은 키가 큰 사내의 속도가 가장 빨라 장창으로 잔영을 남기며 한립의 머리를 내리치려 들었다.

    쿠쿵.

    살의가 넘치는 강력한 힘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와 한립을 덮쳤고 곁의 석천공도 진흙에 빠진 기분이었다.

    하얀 장창은 한립을 노렸지만, 그 옆으로 허상 같은 게 나누어져 동시에 석천공도 함께 겨누었다.

    매우 빠른 속도에 한립도 피하지 못하고 미간에서 두 줄기의 굵직한 수정 사슬을 뿜어 장창과 석천공을 향해 날아드는 허상을 막았다.

    챙! 챙!

    의식 사슬이 잠시 창과 허상을 막기는 했으나 금방 끊어졌다.

    “일단 피합시다.”

    그렇게 시간을 번 한립은 전신의 현규를 밝혀 방대한 기운으로 압박감을 떨치고 석천공을 끌어당겼다.

    한립이 석천공을 데리고 사라진 자리에 하얀 장창이 쾅! 떨어져 깊은 구멍을 남겼다.

    휙 몸을 돌린 백갑(白甲) 사내는 뒤따르던 천괴현장을 향해 전광석화처럼 창을 찔렀다.

    그 순간, 그 천괴현장 뒤에서 한립이 나타나 쑥 팔을 뻗었다.

    펑!

    천괴현장이 터지고 한립의 손에는 의식 사슬에 감긴 하얀 부적이 들려있었다. 그가 사라지고 하얀 창이 떨어져 새로운 깊은 구멍을 만들어냈다.

    “네가 빠르다고 해도 나보다는 아니다.”

    한립은 다섯 개의 돌기둥 옆에 나타나 손에 쥔 천괴부에 사슬 봉인을 흡수시켰다.

    반항하던 천괴부가 얌전해지고 분노한 백갑 사내가 하얀빛을 대량으로 발산하며 주변의 성신지력을 마구 흡수하기 시작했다.

    돌기둥들도 함께 빛나며 강렬한 성신지력 파동을 백갑 사내에게 주입해 주었다.

    안 그래도 체구가 큰 백갑 사내가 더 커지자 한립은 급히 팔뚝의 현규를 일으켜 몸을 움직였다.

    쾅!

    다섯 개의 돌기둥이 부서지면서 백갑 사내의 팽창도 멈추었다.

    크악!

    노호성을 터트린 백갑 사내는 번득 사라져 한립 앞에 나타나더니 장창에서 폭풍과 같은 기류를 내뿜으며 한립의 머리를 내리쳤다.

    한립은 급히 창을 피하고 미간에서 수정빛을 내뿜었다.

    이어 의식 사슬 여러 개가 튀어나와 장창이 만들어낸 기류를 막는 사이, 그의 미간에서 하얀 검 그림자가 쏘아져 나왔다.

    쉑!

    만물을 베어버릴 수 있는 기운을 드러낸 검 그림자가 급격히 커져 장창의 기류를 반 토막 내버렸다.

    그러자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장창도 두 조각으로 잘려있었다.

    하얀 거검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백갑 사내를 베어 길게 상처를 남겼다. 백갑 사내가 세로로 쪼개진 채로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보자 한립의 얼굴에도 놀라움이 떠올랐다.

    이게 될까 싶은 마음에 시험 삼아 써본 의식 검이 이렇게 잘 통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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