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화. 수상한 움직임
*
어느덧 사흘 뒤.
안색이 훨씬 나아진 석천공이 길게 한 숨을 내뱉고 일어났다.
“괜찮습니까?”
진작 일어나 있던 한립이 관심을 보였다.
“려 수사, 덕분에 살았습니다. 정말 죽는 줄 알았는데 말이에요.”
석천공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인사치레는 되었습니다. 그보다 땅속으로 사라진 구슬은 어떻게 된 겁니까?”
“액회의 혈종(血踪) 비술이에요. 자신의 정혈을 타인의 몸에 심어서 상대의 동정을 시시각각 파악하는 것인데, 폭공계부에 당해 중상을 입은 대신 그 힘이 혈종비술에 영향을 미처 몸 밖으로 빼낼 수 있게 됐습니다.”
“적린공경은 환경이 열악한데도 기이한 술법이 참 많습니다.”
“혈종비술 때문에 처음 려 수사를 보았을 때도 모른 척 한 것이니 이해 바랍니다.”
석천공은 미안함을 담아 설명했다.
“수사가 처한 상황에서는 마땅히 그랬겠지요. 그런데 액회가 왜 수사에게 혈종비술을 쓴 겁니까?”
“……수사의 도움이 없었으면 이미 시체가 되었을 몸인데 무얼 숨기겠습니까. 적린공경에 들어온 것은 수사를 도와 자령 수사를 찾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있어서 입니다. 사실 그게 제가 적린공경에 들어온 진짜 이유라고 할 수 있지요.”
“다른 목적이라면…….”
“적린성해(積鱗聖骸)를 찾기 위해서 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구체적인 것은 저도 잘 모르나 절세의 보물로 대라경 고비를 넘어서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하더군요! 대허 속에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크고요.”
석천공은 적린성해를 설명하며 들뜬 것 같았는데, 한립은 큰 반응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원래는 셋째 형님을 위해서 적린공경까지 들어온 것이었는데 이제는 다 상관없습니다. 앞으로는 나를 위해 살 거예요. ……려 수사, 제게 셋째 형님에게 받은 대허에 관한 자료가 있습니다. 액회가 저를 붙잡은 것도 그 자료를 탐내서인 것 같고요. 저랑 같이 적린성해를 찾아볼 마음이 있으십니까? 수사에게도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액회가 대허에 들어온 것도 그 적린성해라는 것 때문이겠군요?”
“뭐 그렇겠지요. 비밀이 많은 자인데 수년간 곁에서 관찰해보니까 적린성해 말고 다른 것도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기는 하더군요.”
“……액회가 목표로 하는 물건을 찾으려 한다면 그를 적으로 돌리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천천히 고려해보고 답을 드려야겠습니다.”
한립은 성급히 답하지 않았다.
“물론 그러셔도 됩니다.”
석천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그곳에서 머물렀다.
석천공이 겉보기에는 괜찮아진 것 같아도 원기를 크게 상해 더 시간이 필요해서였다.
석천공은 장장 사흘을 더 쉬고 5할의 원기를 되찾았고, 그제야 그들은 출발했다.
* * *
대허 모처의 궁전 안.
거대한 궁전의 바닥과 벽은 어두운 녹색으로 이루어져 있어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리고 그 중앙 사각형 제단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바로 액회, 육화부인 그리고 매부리코 사내였다.
제단 주변은 이런저런 구멍이 가득하고 적잖은 괴뢰들이 부서져 나뒹굴고 있었다.
액회가 올려다보는 제단의 둥그런 지붕에는 성신문자들이 빼곡하게 모여 복잡한 성신진법을 이루고 있었다.
그 성신진법 중앙에 핏빛 물건이 꽂혀 있었는데, 하얀 별빛이 빛기둥을 이루어 그걸 지키고 있었다.
“육화 수사.”
액회의 부름에 육화부인이 바삐 움직이며 성준금제를 펼치는데 필요한 기구들을 늘어 넣고 성란필로 성신진법 바깥에 다른 진법을 그리기 시작했다.
반 시진이 지나 중얼중얼 주문을 왼 그의 손끝에서 하얀빛이 쏘아져 나갔다.
웅웅.
외부 진법이 하얀빛을 뿜어 제단의 하얀 빛기둥을 약화시켰다.
“허허, 역시 육화 수사의 실력을 다르구만. 이렇게 금방 성광천선대진(星光天璇大陣)을 완성하고 말이야.”
“과찬이십니다, 성주님. 급히 펼친 반천선대진이 언제 효력을 잃을지 모르니 서두르시지요.”
육화부인의 당부를 듣고 고개를 끄덕인 액회가 핏빛 물체를 향해 걸어갔다.
위력을 잃었던 제단의 문양들이 액회가 다가서자 자극을 받은 듯 화살처럼 요란한 하얀빛을 발산했다.
그러나 액회에 근접한 하얀빛들은 바로 어둑하게 변해 그의 걸음을 막지 못했다.
액회는 힘을 주어 붉은 물체를 잡아당겼다.
우우웅.
제단 전체가 흔들거렸다.
엄숙한 표정의 액회는 그런 진동은 개의치 않다는 듯 팔뚝의 현규를 밝혀 힘껏 핏빛 물체를 당겼다.
퐁!
핏빛 열쇠가 뽑혀 나오면서 제단의 모든 빛이 사라졌다.
손바닥만 한 열쇠는 핏빛 옥을 갈아 만든 것 같았고 미세한 문양이 가득했다.
“2개째군.”
“축하드립니다, 성주님.”
액회 옆에 있던 매부리고 사내가 인사를 했다. 그러나 육화부인은 담담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그 시각 대허 지하의 칠흑 같은 굴 안.
핏빛 문양들이 교차해 석벽과 천장에 거대하기 짝이 없는 진법이 펼쳐진 그곳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핏빛 진법이 갑자기 반짝거리더니 빛을 잃어 동굴 속이 더욱 어두워졌다.
동굴 안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씩 눈을 반짝이며 천천히 고개를 들자 어느새 모든 이들의 눈에 하얀빛이 떠오르면서 동굴 속을 밤하늘의 별처럼 밝혔다.
* * *
지하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줄도 모르고, 한립과 석천공은 제단 아래 광장 깊은 곳을 탐색 중이었다.
광장이 너무 넓어서 반나절을 돌아다니고서야 어느 신전을 찾을 수 있었다.
까만 바위를 쌓아 만든 신전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그 위로 낯선 별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려 형, 전 이 안에 이전에 마주쳤던 괴뢰들보다 더 강한 괴뢰가 숨어 있다고 확신합니다. 내기 하시겠습니까?”
문 앞에 선 석천공이 웃으며 내기를 하자고 했다.
“석 형, 저는 내기를 안 합니다. 이겨서 뭐가 생기는 것도 아닌데 지면 기분만 상하지 않습니까.”
한립은 고개를 저었다.
오는 내내 여러 건물을 뒤져보았으나 별다른 수확이 없었고 마주친 괴뢰들도 그리 강하지 않아 잘 처리했다.
한립은 장난기 가득한 석천공을 보며 어딘가 달라졌다는 생각을 했다. 수행이나 기운이 달라졌다기보다는 사람이 달라진 느낌이었다.
그가 ‘폭공계부’에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도 신경이 쓰였다.
“갑시다.”
잡생각을 떨치고 먼저 앞으로 나선 한립이 양문형인 석문의 한쪽을 밀었다.
쿠릉…….
마찰음과 함께 석문이 밀리면서 두 사람이 지날 수 있는 협소한 틈이 벌어져 불쾌한 냄새를 풍겼다.
안을 살핀 한립이 백골 곡도를 들고 안으로 들어가자 석천공도 뒤따랐다.
훅!
그들이 들어선 순간, 신전 양쪽 벽에서 불길이 일어 벽에 난 고랑을 타고 두 줄기의 선이 내부를 밝혔다.
기름이 지글지글 타는 냄새가 은은하게 퍼졌다.
한립은 밝아진 시야 속에서 네모난 연못 자리를 발견했다.
연못물은 이미 말라버렸지만, 그 위로 좌우를 가로지르는 하얀 무지개다리가 놓여 있었다.
사방에는 각양각색의 꽃과 짐승의 모습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고, 신전 끝에는 거무튀튀한 석상들이 그들을 마주하고 서 있었다.
왼쪽의 석상은 검은 갑옷을 입고 흑자색 곤봉을 든 키가 큰 마족 사내로, 짧은 머리를 비죽비죽 세우고 툭 튀어나온 입 양옆에 뻐드렁니가 자라나 있었다.
그리 두껍지 않은 곤봉에는 뇌전과 구름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오른쪽 석상은 선이 가는 미모의 인족 여인으로 방금 하늘에서 떨어진 듯 의복이 표표히 날리는 형상이었다.
가슴 앞에 모아진 그녀의 두 손에는 손바닥 크기의 핏빛 열쇠가 들려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 아래쪽으로는 각각 창을 든 3명의 역사가 반쯤 무릎을 굽히고 있었는데, 근육이 가득한 상반신이 얼마나 힘이 센지 알려주었다.
시선을 마주친 한립과 석천공은 돌계단을 내려가 연못가에서 말라붙은 바닥을 살피다 돌다리로 올라섰다.
다리 중앙에 이르자 갑자기 바닥이 떨려왔다. 곧바로 좌우를 살폈으나 어디서 나타난 변화인지 찾을 수 없었다.
쏴아아…….
이때 다리 밑으로 물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숙인 한립은 연못 어딘가에서 샘물이 터져 물이 차오르는 것을 보았다.
“갑자기 어디서…….”
“일단 건너가시죠.”
의아한 얼굴의 석천공을 향해 한립이 말했다.
쏴아!
물소리가 급격히 커지며 샘물이 솟는 속도가 빨라졌고, 하얀 안개도 물 위로 차오르고 있었다.
무언가를 감지한 한립이 고개를 드니 신전 천장에 하얀 별빛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미미하게 미간을 좁힌 한립은 석천공과 함께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런데 한 걸음 만에 주변 풍경이 달라져 화려한 궁전 안에 들어설 수 있었다.
곳곳에서 아름다운 연주 소리가 들리고 화려하게 치장을 한 절색의 여인들이 보였다.
백옥 비파를 든 여인들은 연주하며 춤을 추었다.
“환영진이 있을 줄이야…….”
한립은 당황하지 않고 미소를 머금었다.
“려 형, 보통 환영진이 아닙니다. 의식 비술로 벗어나려 해보았지만 실패했다고요. 환영진이 살진(殺陣)으로 변하기 전에 방법이 있으면 깨보세요.”
석천공은 그런 한립을 보고 쓴웃음을 흘렸다.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묵묵히 연신술을 발동했다.
의식이 증폭됨에 따라 미인들의 고운 피부가 썩어 악귀처럼 변해갔다.
“흠…….”
“파훼할 수 없겠습니까?”
“색다르기는 하지만 파훼할 수 있을 겁니다.”
한립이 자신 있게 웃으며 답했다.
그때, 피부가 썩어 악귀처럼 변한 여인들이 한립이 진법을 파훼하려는 것을 알고 비파를 던진 채 날카로운 손톱을 펼치고 달려들었다.
“깨져라!”
5성 연신술을 극성으로 발동한 한립이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궁전을 울리고 달려들던 악귀 여인들도 분분히 암홍색 불똥으로 변해 흩어졌다.
그러나 악귀 여인들만 사라졌을 뿐 그들은 여전히 화려한 궁전 안에 있었다.
“진법의 중추를 파괴해야겠습니다……. 석 형, 중심 잘 잡고 계십시오.”
잠시 고민하던 한립이 석천공의 어깨를 받치고 발로 쿵! 바닥을 내리쳤다.
쿠쿵!
함몰된 궁전 바닥이 구멍으로 변해 그들은 끝없이 추락했다.
십여 초가 지나고 떨어지는 느낌이 사라진 두 사람은 신전 안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저 그들이 서 있던 돌다리가 한립의 발길질에 부서져 끊겨 있을 뿐이었다.
“환영진의 중추가 바로 다리였나 봅니다.”
석천공이 생각에 잠겨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던 한립은 표정이 달라져 신전 안쪽을 쳐다봤다.
반쯤 꿇어앉아 있던 여섯 개의 석상들이 움직이면서 도자기 깨지는 소리와 함께 겉면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두 눈에 핏빛이 들어온 석상들은 하나 같이 한립과 석천공을 돌아보는 중이었다.
창을 든 석상들은 괴뢰로 변해 세 마리씩 한립과 석천공을 향해 달려들었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어느 역사의 창을 피한 한립은 두 발로 땅을 쿵, 찍고 성월화의 힘으로 귀신처럼 쏘아져 나갔다.
그의 손에 들린 곡도가 움직이고 역사 괴뢰의 목을 자르려는 순간 좌우에서 다른 괴뢰들이 목과 단전을 노리고 창을 뻗었다.
흠칫 놀란 한립은 몸을 빙글 돌려 곡도로 목을 향해 다가오는 창을 쳐냄과 동시에 발로 단전을 향해 오는 창을 찼다.
이때 귓가에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공격했던 역사 괴뢰가 뒤통수를 노리고 있었다.
고개를 홱 틀어 창을 피한 한립은 세 괴뢰의 협공에 깜짝 놀랐다. 이전에 보아왔던 괴뢰들과는 급이 달랐다.
한립도 빠르게 발을 놀려 귓가를 스친 창을 잡고 어깨에 힘을 실었다.
역사 괴뢰가 바닥에 떨어지기 전, 성월화를 실은 한립이 허공을 박차고 창으로 괴뢰의 허리를 갈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