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화. 반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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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월화를 신은 한립은 쾌속으로 건물을 뛰어넘으며 석천공에게 다가가고 있었는데, 수백 장을 주파하다 시야에 하얀 신영이 포착되자 재빨리 대전 지붕에 몸을 숨겼다.
“크악!”
석천공의 심장을 찌르려던 석참풍이 비명을 듣고 놀라 몸을 돌렸다.
그의 눈에 마물 원숭이와 싸우던 두원의 가슴에 하얀 꽃이 피더니 엄청난 피를 뿜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하얀 꽃이 오므라들며 꽃봉오리 모양의 창끝으로 변해 두원의 심장을 뽑아냈다.
가슴이 뻥 뚫린 두원이 샘물처럼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그 뒤로 하얀 갑옷을 입은 마른 신영이 기이하게 생긴 백골 창을 들고 석참풍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너!”
석참풍이 놀라 소리쳤다.
그뿐만 아니라 대전 지붕에 몸을 숨긴 한립도 깜짝 놀랐다.
백골 갑옷을 입은 마른 여인은 다름 아닌 골천심이었다.
여인은 창으로 두원의 아랫배를 쑤셔 다섯 개의 하얀 꽃잎을 피우고 원영마저 부숴버렸다.
두원이 죽자 석참풍의 심복인 여인이 물러나려 했지만 마물 원숭이가 놔주지 않고 따라붙었다.
“현성 수사인 것으로 아는데, 왜 아무런 원한도 없이 내 동료를 죽인 겁니까?”
얼굴을 찡그린 석참풍이 물었다.
눈을 뜬 석천공도 의아한 눈빛으로 골천심을 보고 있었다.
골천심은 멀리서 중상을 입고 쓰러져 꼼짝하지 못하는 석천공을 서늘하게 훑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하, 이 녀석을 구하러 왔다면…….”
이에 석참풍은 미소를 짓고는 일부러 칼을 높이 들어 올려 석천공의 머리를 내리치려 했다.
힘을 가득 실은 것처럼 보였지만 석참풍은 곁눈질로 골천심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피투성이가 된 다른 손에는 버들잎처럼 얇은 하얀 단도가 숨겨져 있었다.
골천심이 석천공을 구하려고 칼을 쳐내면 그 틈에 단도로 중상을 입히거나 목숨을 끊어놓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골천심이 쇄도하는 것을 본 석참풍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녀의 창끝은 칼이 아닌 그의 머리를 향해 있었다.
석천공이야 어찌 되든 말든 그를 죽이는 게 목적이었다.
놀란 석참풍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숨겨둔 버들잎 단도를 골천심의 미간을 향해 날려 보냈다.
열댓 곳의 성규가 빛을 발한 성도는 수백 개의 검빛을 퍼트려 골천심을 공격했다.
골천심은 그걸 보고도 멈추지 않고 장창을 휙 하고 돌려 검빛들 틈에서 창날의 꽃을 피웠다.
괴상한 창날의 꽃잎이 오므라들고 놀랍게도 버들잎 단검이 그 안에 붙잡혀 석참풍을 찔렀다.
발끝으로 땅을 박차고 구덩이 가장자리로 뛰어오른 석참풍은 아직도 마물 원숭이를 처치하지 못한 여인과 상처 입은 팔을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가자!”
그가 먼저 몸을 돌려 달아나자 여인도 다급히 몸을 빼 쫓아갔다.
마물 원숭이가 한동안 쫓아갔지만 결국에는 놓치고는 골천심을 향해 달려왔다.
“귀찮게.”
골천심이 작게 중얼거리고 영패를 꺼내 날리자 마물 원숭이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몸이 줄어들어 조각상 형태로 돌아갔다.
멀리서 그녀가 그걸 잡아다 영패와 함께 소매 속에 집어넣는 것을 본 한립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날 구하러 온 겁니까, 아니면 죽이러 온 겁니까?”
석천공이 차분히 물었다.
눈에 일순 동정심이 어렸던 골천심은 말없이 장창을 들어 그의 머리를 향해 꽂았다.
그때 호선형의 하얀빛이 날아들어 탱! 하고 창을 쳐냈다.
곧이어 한립이 허공답보를 해 바람처럼 석천공 옆에 도착해 하얀 곡도를 거두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골 수사.”
“제가 묻고 싶은 말인데요. 제 일을 방해하시는 이유가 뭐죠?”
한립의 말에 골천심이 반문했다.
“석 수사는 저의 벗입니다. 당신이 아무 이유도 없이 죽이려는 것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지요.”
“그래도 반드시 죽여야겠다면요?”
“그럼 저도 실례를 하는 수밖에요.”
말을 주고받을수록 골천심과 한립의 목소리가 냉랭해졌다.
“알겠습니다.”
이 말을 끝으로 골천심은 한립을 향해 쇄도했다.
서른 개가 넘는 성규를 반짝이는 백골 창이 백여 개의 창 그림자를 만들어 한립의 몸 곳곳을 공격했다.
일단 싸움에 돌입하자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다.
그녀를 따라 얼굴이 싸늘해진 한립도 백골 골도로 허공에 호선을 그려 하늘을 뒤덮고 날아드는 창 그림자들을 갈랐다.
채채챙…….
백여 개의 창 그림자가 흩어진 후, 곡도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창끝을 막았다. 골천심은 놀라는 기색 없이 창을 돌려 창끝의 꽃송이를 피우고 하얀 곡도를 잡아채려 했다.
동시에 창끝에서 하얀빛의 화살이 한립의 가슴으로 날아들었고, 골천심의 소매에서는 석천공의 것이었던 검은 조각 장신구가 튀어나왔다.
펑!
깨진 조각 속에서 검은 소용돌이가 나타나 마물 원숭이를 내뱉었다.
아까보다 크기는 작았지만 마물 원숭이는 여전히 용맹하게 한립에게 달려들었다.
마물 원숭이는 몸을 파르르 떨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가시를 터트렸다.
피피핏.
이때 냅다 백골을 놔버린 골천심이 두 손을 뻗어 소매 속에 숨겨진 6개의 바늘을 석천공 쪽으로 날렸다.
그녀는 한립과 싸우는 척하긴 했지만, 목표는 오로지 석천공 뿐이었다. 바닥에 쓰러져 움직이지 못하는 석천공은 하얀 바늘들이 날아드는 것을 보면서도 피하지 못했다.
그 순간, 콰릉! 하는 굉음이 한립의 몸에서 터져 나왔다.
전신의 현규에서 하얀빛을 방출해 방대한 빛의 파동을 퍼트린 것이다.
백골 창이 쏘아 보낸 빛의 화살, 마물 원숭이의 검은 바늘들이 하얀빛의 파동에 걸려 멈추었다가 분분히 폭발했다.
마물 원숭이는 그 파동에 휩쓸려 주변 건물로 날아가 무너진 건물 잔해에 파묻혔다.
발끝으로 바닥을 박차고 사라진 한립은 순간이동을 하듯 석천공 앞에 나타나 오른손을 뻗었다.
번뜩 사라진 6개의 하얀 바늘이 그의 손에 들려있었다.
그걸 본 골천심의 눈빛이 흔들렸다.
쉭!
한립은 골천심을 지긋이 보다 오른손을 털어 바늘들을 두 배의 속도로 돌려보냈다.
바늘은 6개의 하얀 그림자로 변해 날아갔다.
표정이 급변한 골천심이 백골 창을 회수하고 붙잡아둔 백골 곡도를 방출했다.
동시에 다섯 송이의 하얀 꽃송이가 창끝에서 나타나 나머지 5개의 하얀 그림자를 막아섰다.
챙챙챙챙챙챙!
여섯 번의 충돌음이 터지고 골천심은 연달아 뒷걸음치다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다.
원래도 빠른데 하얀 바늘들의 반탄력이 더해져 눈 깜짝할 사이에 천여 장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한립이 귀신같이 그녀의 앞을 막아서 결국에는 멈춰서야 했다.
“골 수사, 대체 정체가 무엇입니까?”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하지 마세요. 수사께서 굳이 석천공을 지켜야겠다면 그냥 가겠습니다.”
평정을 회복한 골천심이 미소를 지었다.
“정체가 뭐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수사를 공격하게 만들지 마세요.”
한립은 휘둘리지 않고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물었다.
“려 수사께서 알게 되면 오히려 해로운 일이 생길 겁니다. 이로울 것도 없는 일이고요.”
골천심의 대답을 들은 한립은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다.
하얀빛이 그의 몸을 잠식하고 방금 공격할 때보다 더 강력한 기운이 야수처럼 깨어났다.
“이럴 것까지 있나요? 말하면 될 것 아닙니까.”
그를 빤히 들여다본 골천심이 한숨을 내쉬자 한립은 동작을 멈췄지만, 그녀를 억누르는 압박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저는…….”
얼굴을 푼 골천심이 말을 하다말고 느닷없이 백골창을 움직여 독사처럼 한립을 찔렀다.
한립은 진작 예상을 하고 있었다는 듯 손으로 백골 창을 잡아채 반격을 하려는데 창이 진동하며 하얀빛을 발산했다.
퍼엉!
백골 창이 터져 십여 개의 파편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한립을 공격했고 창날은 하얀 꽃잎 네 개로 갈라져서 잔영을 남기며 폭발했다.
창대 파편보다 꽃잎들의 속도가 빨라 허공에 검은 선을 그리며 한립의 가슴으로 날아들었다.
이건 예상치 못했는지 미간을 좁힌 한립이 뒤로 물러서는 동시에 주먹을 내질렀다.
쿠쾅!
전방의 공간이 응결되며 무형의 장벽을 만들고 창끝이 변한 하얀 꽃잎 네 개를 붙들었다.
꽃잎들은 물고기처럼 파닥거리며 장막을 뚫고 나가려 했지만 팔뚝 절반만큼 밖에 이동하지 못했다.
파파팟!
다른 창 파편들이 뒤이어 장벽에 부딪혔다.
“다음에 또 뵙지요.”
백골 창을 터트리자마자 달아나기 시작한 골천심은 감정 없는 한 마디를 남기고 멀어져갔다.
쾅!
한립이 그녀를 쫓으려는 순간, 건물에 깔려 있던 마물 원숭이가 튀어나와 석천공을 향해 뛰어들었다.
크항!
마물 원숭이는 포효하며 주먹을 들어 석천공의 머리를 깨부수려 하고 있었다.
힐끗 골천심의 뒷모습을 본 한립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턱!
석천공 코앞에서 다시 나타난 한립은 마물 원숭이의 주먹을 막고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퍽!
한립이 다른 주먹으로 마물 원숭이를 쳐올려 터트렸을 때는 이미 골천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전속력으로 쫓으면 반반의 확률로 그녀를 잡을 수 있겠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다.
그녀가 말하지 않아도 왜 석천공을 죽이려 했는지 짐작 가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립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석천공을 향해 입을 열려는데, 석천공이 그걸 보고 힘겹게 손을 저었다.
석천공은 조각난 의복 더미에서 하얀 옥병을 찾아 핏빛 단약을 꺼내 삼켰다. 단약이 뱃속으로 들어가자 전신에 핏빛이 돌면서 상처들이 빠르게 봉합되었다.
그리고 돌연 표정이 신중해지며 중얼중얼 주문을 외고 손끝으로 몸 곳곳을 찍었다.
푹.
미세한 소리와 함께 가슴에서 핏빛 한줄기가 하늘하늘 빠져나왔다.
그걸 본 석천공은 희색을 드러내고 몸 구석구석을 더 빨리 찍으면서 주문을 외웠다.
쏴아아-.
그의 몸속에서 강줄기가 흐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가슴에서 하늘거리던 핏빛이 왼쪽 팔로 옮겨갔을 때, 눈을 질끈 감은 석천공은 오른손을 칼처럼 세워 자신의 왼쪽 팔을 잘라버렸다. 떨어져 나간 왼팔이 핏빛 보광으로 뒤덮여 활활 타올랐다.
한립이 늦지 않게 석천공의 몸을 끌며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석천공은 왼팔이 잘려나간 곳을 지혈하며 한숨을 돌린 표정을 했다.
왼팔이 재로 변하고 핏빛 불길이 가시자, 그 자리에는 핏빛 옥구슬만 덩그러니 남았다.
한립이 그걸 보고 눈에 이채를 띠었다.
“움직이지 마세요.”
석천공의 전음에 한립이 미동도 없이 기다렸다.
과연 핏빛 옥구슬이 진동하며 외부의 상황을 감지하더니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포기하고 땅속으로 파고들어 사라졌다.
그제야 완전히 마음을 놓은 석천공은 천천히 일어나 오른손으로 품에서 핏빛 단약을 더 꺼내 집어삼켰다.
왼쪽 어깨로 선명한 핏빛이 몰려들어 뼈와 살이 미친 듯이 자라나 금방 새로운 팔을 만들어냈다.
이를 지켜보던 한립은 눈을 반짝였다.
외부에서라면 천지영기를 발동해 팔다리를 다시 만드는 것이 어렵지 않았지만 적린공경 안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창백한 얼굴의 석천공은 바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단약의 남은 약효를 녹이기 시작했고, 한립도 그를 방해하지 않고 한쪽에 앉아 운기조식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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