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980화 (1,737/2,000)

1980화. 진상(眞相)

*

잠시 후, 대청 구석에서 잔영들이 융합되며 한립이 멈춰 섰는데 그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희열이 어려있었다.

하얀 신발은 육신의 힘을 증폭할 뿐 아니라 속도를 높이는 데도 뛰어난 성보였다. 이 신발은 안 그래도 빠른 움직임이 장점인 그의 실력을 5할은 높여 줄 것이다.

게다가 일단 성보인 신발을 완벽하게 연화시켜 그의 것으로 만들면 위력은 더 좋아질 터였다.

풍무진은 성두순보다 뛰어난 신발 성보를 얻고 기세등등하게 그를 도발한 것 같았다.

“이건 성월화(星月靴)라고 불러야겠다.”

초승달 문양을 눈여겨본 한립은 신발 성보를 ‘성월화’라 이름 짓고 통로로 들어갔다.

<우화비승공>을 운용하지 않아도 신법 자체가 빨라져서 마치 바람을 타고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대청 뒤의 통로를 따라 쭉 들어간 한립은 전방의 길이 갑자기 아래쪽으로 휘어지는 것을 보고 약간 놀랐다.

그 길을 따라 일각을 더 가서야 눈앞이 확 밝아지면서 거대한 지하광장이 나타났다.

‘제단 지하에 이런 공간이 있었다니.’

건물들이 나무처럼 늘어선 광장은 아주 멀리까지 이어져서 그 규모를 짐작할 수도 없었다.

정신을 차린 그가 건물들을 지나치며 나아갈수록 세심하게 꾸며진 궁전 양식의 건물들이 나타났다.

하나씩 수색을 해보았지만 낡은 건물 안에는 성보나 보물은 없고, 괴뢰들만 힘이 남아 있어 몇 번이고 습격을 당했다.

몇 번이나 그런 일을 겪자 흥미가 사라진 그는 아예 지붕 위로 올라가 이동을 하기 시작했다.

탁.

막 원형 지붕을 지닌 검은 석전 위를 지나던 한립이 문득 눈썹을 끌어올리고 가볍게 지면으로 내려서 방향을 틀었다.

상체를 낮추고 바닥에 바짝 붙어 돌판이 깔린 길을 따라 왼쪽으로 질주하다 보니 문이 무너져 내린 석탑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립은 머뭇거리지 않고 그 안으로 뛰어들어 꼭대기에서 좌측 창문 너머로 바깥을 주시했다.

천여 장 밖, 반원형 저택의 연무장 용도로 쓰이는 듯한 백석 광장에서 네 사람이 싸우고 있었다.

거리가 멀고 네 사람의 속도가 빨라 처음에는 정체를 알 수 없었지만 그중 세 명은 괴성의 복장을 하고 있었고, 하얀 뼈 갑옷을 입은 한 명은 체형이 눈에 익었다.

쾅!

백골 갑옷 사내가 괴성 3인의 협공에 튕겨 나가 검은색 담에 부딪혔다.

담벼락이 깨지면서 잔해가 튀고 바닥으로 떨어진 사내는 한 손에 든 백골 검을 바닥에 늘어트렸고 백발이 가면을 쓴 얼굴을 가렸다.

‘석천공!’

그를 본 한립은 눈썹을 꿈틀했다.

“13 아우, 적린공경에서 너를 만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니 이 형님을 원망하지 말거라…….”

석천공과 싸우던 3인 중 하나가 이렇게 말하고 검은 천을 벗어 얼굴을 드러냈다.

대황자 석참풍이었다!

여기서 형제상잔의 한 장면을 보게 될 줄 몰랐던 한립은 석천공을 구하려고 움직이다 멈칫했다.

안 그래도 괴성 무리 중에 세 사람이 거슬렸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딱 저들 셋이었다.

‘대황자는 무얼 위해 적린공경에 온 걸까? 하는 말을 들어보면 석천공을 죽이기 위해 쫓아온 것은 아닌 듯한데.’

한립은 갑자기 생각이 많아졌다.

“어차피 싸울 것, 그 쓸데없는 소리는 마시지요.”

이때 석천공이 일어나 서늘하게 외쳤다. 입고 있던 갑옷이 거의 부서진 석천공은 누가 보아도 밀리고 있었다.

“어디 죽기 직전에도 그리 말할 수 있는지 보겠다!”

냉소를 흘린 석참풍이 손을 흔들었다.

나머지 두 명도 괴성 복장을 벗어버리고 정체를 드러냈다.

그중 한 명은 체형이 크고 오관이 분명한 새까만 갑옷을 입은 두원이었다. 그는 적린공경을 찾는데 중요한 단서를 찾아 석참풍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나머지 한 사람은 한립과 싸웠던 자청쌍매과 비교해도 뒤지질 않을 정도로 자태와 미모가 뛰어난 여인으로 역시 석참풍의 측근이었다.

좌우에서 튀어 나간 두 사람은 150여 곳의 현규를 밝히고 있었다.

여인은 체구는 작아도 속도가 빨라 두원보다 먼저 석천공의 좌측으로 백골로 만든 채찍을 날렸다.

자신의 미간으로 날아드는 채찍을 본 석천공은 오른손에 든 검으로 좌측을 갈랐다.

검신의 별빛 열댓군데가 빛을 발하면서 하얀 검빛이 불룩 튀어나왔다.

백골 채찍은 안 그래도 백골 검보다 길고 속도도 약간 빨라서 석천공의 미간을 먼저 찔러야 했지만 검빛이 장검보다 길어 여인의 가슴을 꿰뚫으려 했다.

여인은 석천공이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죽이려 들자 손목을 튕겨 채찍을 거두면서 석천공의 검을 휘감았다.

동시에 두원이 도착해 주먹으로 석천공의 오른쪽 옆구리를 향해 내리쳤다. 그 모습에 석천공은 몸을 비틀며 칼자루 부분으로 두원의 주먹을 쳐냈다.

쾅!

두원의 주먹과 백골 검의 칼자루가 부딪치면서 기운의 파랑이 퍼져나갔다.

순간 두 팔이 저릿해진 석천공은 두 손이 미끌어지면서 검을 놓칠 뻔했는데, 재빨리 기합을 넣어 160여 개의 현규를 밝히고 기운을 방출했다.

“그 실력으로 우리 셋을 동시에 상대하겠다고? 어리석은 것.”

석참풍은 그를 비웃고는 쿵, 바닥을 박차고 사라져 손가락을 칼처럼 세운 채 석천공의 머리를 베었다.

연달아 현규가 빛나며 손으로 하얀빛이 밀려들어 예리한 칼날처럼 섬뜩한 파동을 일으켰다.

석천공은 이번 공격의 위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검을 회수해 대응하려 했지만, 좌우에서 여인과 두원이 협공하는 통에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에 한립이 안 되겠다 싶어 탑에서 튀어 나가려 할 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석천공의 앞섶에서 검은빛이 반짝이고 장신구 같은 것이 떨어져 나와 파직! 하고 깨진 것이다.

이어서 검은 소용돌이가 몰아치며 가시 갑옷을 입은 마물 원숭이처럼 변해 석참풍을 향해 돌진했다.

챙!

마찰음이 연달아 울리고 손을 검처럼 쓰는 석참풍을 까만 원숭이 인수가 박치기로 튕겨냈다.

‘저건…….’

다시 몸을 숨긴 한립은 마물 원숭이를 자세히 관찰했다.

석천공의 셋째 형이 그에게 주었던 검은 우리에 갇힌 괴수 조각과 똑같이 생긴 인수였다.

석참풍을 밀어낸 마물 원숭이는 몸을 돌려 여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여인은 채찍을 회수하고 가볍게 뛰어올라 마물 원숭이를 피했고, 지켜보던 두원이 오른쪽에서 주먹을 뻗어 그를 공격했다.

그보다 대여섯 배는 큰 마물 원숭이도 주눅 들지 않고 허리를 비틀어 주먹을 뻗었다!

쿠앙!

두 주먹이 격렬하게 충돌하면서 사방으로 폭발적인 기운이 몰아쳤다.

재빨리 몸을 돌린 석천공은 그 여파로 다들 정신이 없을 때 달아날 심산 같았다.

그런데 그가 뛰어오르자마자 누군가 소리를 쳤다.

“어딜 가려는 것이냐!”

고함소리와 함께 머리 위에서 흰빛이 반짝이고 석참풍이 손을 칼처럼 쓰며 떨어지고 있었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 석천공은 완전히 피하지 못했고 하얀빛이 그의 뺨을 지나 가슴까지 스쳤다.

사악!

흩날리는 하얀 백발 몇 가닥과 함께 석천공의 뺨이 길게 찢어지면서 가슴을 덮은 갑옷까지 깨졌다.

얼굴과 가슴에 피가 흥건했다.

석참풍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떨어지는 힘을 이용해 발로 석천공의 가슴을 찍어 내렸다.

쿠쿵.

땅이 흔들리고 몸이 땅에 박힌 석천공이 입에서 피를 뿜었다.

주변 땅이 거미줄처럼 갈라져 있었다.

상처가 난 가슴을 또 한번 내리찍은 석참풍은 석천공의 손에 힘에 풀리자 발끝으로 성보인 검을 차올려 받아들었다.

“솔직히 석파공은 몰라도 난 너를 싫어하진 않는다. 허나 어쩔 수 없지……. 네가 보는 눈이 없는 것을 누굴 탓하겠느냐.”

석천공을 내려다보는 대황자의 눈에 뜻밖에도 슬픔이 어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우를 살려줄 것은 아닌지 손에 쥔 장검은 빠르게 머리로 떨어지고 있었다.

반항하기를 포기한 석천공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꽉 쥐고 있던 손을 폈다.

손안에는 피로 얼룩진 나뭇잎 모양의 옥패가 있었다. 바로 삼황자가 그들에게 주었던 신물이었다!

파삭.

피로 얼룩진 옥패는 곧바로 발동해 잎맥을 타고 눈을 찌를 듯한 하얀빛을 내뿜었다.

“이건!”

석참풍이 그걸 보고 기겁해 석천공을 죽이려던 것도 포기하고 미친 듯이 뒤로 물러섰다.

멀리서 지켜보던 한립은 석천공 주변 공간이 갑자기 수축하면서 하얀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콰르르…….

작열하는 태양이 우렁차게 포효하며 하늘로 치솟아 백석 광장을 눈부신 빛으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난폭한 파랑이 사방팔방으로 퍼져 광장에 깔린 돌판이 들썩이다 터져버리기도 했다.

멀리 떨어진 탑에 몸을 숨기고 있던 한립도 그 열기에 피부가 타들어가는 것 같아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그가 선 석탑마저 붕괴할 듯 흔들리며 먼지가 푸스스 떨어져 내렸다. 이런 상황이 십여 초가 이어지다 점점 주위가 고요해졌다.

엄청난 외부의 압력에 안 그래도 낡은 탑은 만 년은 더 흐른 듯 벽이 얇아져 있었다.

잔뜩 인상을 찡그린 한립은 창에 붙어 서서 어두운 얼굴로 백석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거의 평지가 된 광장에는 수십 장 깊이의 거대한 구덩이만 남아 있어 거의 초토화 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그 구덩이 한가운데에서 검은 먼지와 핏물이 달라붙어 만신창이가 된 누군가가 미동도 없이 누워있었다.

그런데 그때 가슴이 격렬하게 들썩이더니 거칠게 기침을 하며 그가 깨어났다.

핏물 때문에 얼굴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자 상처 가득한 석천공의 얼굴이 드러났다.

어째서인지 석파공이 그에게 주었던 신물은 그를 마역으로 전송해 주는 대신 그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다.

몸을 부들부들 떨며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던 석천공은 온몸에서 밀려드는 엄청난 고통에 소리죽여 신음했다.

“폭공계부(暴空界符)에 당하고도 살아남다니, 이런 경우는 처음 보는구나…….”

석참풍이 두원과 여인을 데리고 구덩이 가장자리로 걸어와 손뼉을 쳤다.

옷 절반이 뜯겨나가 망가진 내갑(內甲)을 드러낸 그의 팔뚝이 팔꿈치까지 엉망이 되어 하얀 뼈가 드러나 있었다.

한립은 폭공계부라는 말을 듣고 어쩔 수 없이 눈꼬리를 끌어올렸다.

위험할 때마다 손에 쥐고 문지르던 나뭇잎 모양 신물이 어쩐지 섬뜩하게 느껴졌다.

흑연에서 공간 폭풍에 휘말리기 전 그가 이걸 썼더라면 그는 현성과 괴성 무리와 함께 저승길로 갔을 것이다.

구덩이 가운데에서 석천공은 대황자가 무슨 말을 하든 끈질기게 몸부림치며 일어나 앉으려 했다.

그러나 목을 비트는 것 외에는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가 꿈틀거릴 때마다 피에 젖은 의복과 갑옷 파편이 떨어져 새하얀 광택을 내는 아주 얇은 옷이 드러났다.

“성호우의(星狐羽衣)? 쯧쯧, 그래서 그 폭발 속에서도 목숨을 건졌던 거야. 네 여우 같은 어미가 생전에 석파공을 편애하기에 그 보물도 석파공에게 주었을 거라 생각을 했는데 네가 받아 챙겼구나.”

석참풍이 그를 비웃는 소리에 석천공은 항상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던 아름다운 그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호족 출신으로 죽는 순간까지도 한 마디 원망의 말도 없던 그녀는 두 형제가 서로 아끼고 도우며 위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만을 바랐었다.

“셋째 형님, 이 ‘폭공계부’가 정말 형님의 뜻이란 말입니까?”

천천히 눈을 감는 석천공의 눈에서 눈물 한줄기가 떨어져 내렸다.

크앙!

그 순간 야수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구덩이 속에서 마물 원숭이가 멀쩡하게 튀어나와 석참풍 무리를 향해 돌진했다.

“죽여라!”

석참풍의 명에 두원과 여인이 번득 앞으로 나서서 좌우에서 마물 원숭이를 공격했다.

그러는 사이 석참풍은 천천히 구덩이를 내려가 석천공 옆에서 무릎을 굽혔다.

파사삿.

그가 손을 뻗으려는 순간 착 달라붙어 석천공의 전신을 보호해 주던 얇은 성호우의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흥, 역시나 망가졌군. 아깝게 되었어…….”

이렇게 말하며 석천공을 내려다본 그는 순간, 가여운 마음이 들었지만 칼을 들어 그의 가슴에 겨누었다.

“큰형님이 보시기에 셋째 형님의 성품이 어떤 것 같습니까?”

그때 번쩍 눈을 뜬 석천공이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와 뜻모를 질문을 던졌다. 그 말에 미간을 좁히고 열심히 고민하던 석참풍이 진지하게 답해주었다.

“셋째라……. 나도 한평생 그걸 알고 싶었지만 알 수 없었다.”

“한 사람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은 누구도 아니고 그의 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큰형님도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지 못하는 인물이 제 셋째 형님이었다니, 그저 제가 눈이 멀었었나 봅니다.”

석천공은 깊게 탄식했다.

“그만하면 되었다. 내 너를 편히 보내주마.”

그의 말뜻을 되뇌던 석참풍이 느릿하게 말했고, 석천공은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그걸 본 석참풍은 왠지 모르게 불편한 마음을 외면하면서 석천공의 가슴을 향해 칼을 찔러 넣었다.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