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화.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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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보!’
한립은 원숭이 괴뢰의 갑옷과 칼을 보고 눈을 번득였다.
침음하던 그가 <만규공적술>을 멈추고 담벼락 뒤에서 튀어나와 원숭이 괴뢰의 뒤로 다가가는데, 괴뢰가 돌연 몸을 돌려 포효하면서 칼을 내리치려 했다.
서걱!
원숭이 괴뢰의 팔이 아래로 떨어지기 전에 하얀빛이 괴뢰의 머리를 갈랐기에 칼의 움직임도 멎었다.
방대한 원숭이 괴뢰의 몸이 우당탕 뒤로 넘어가고 한립이 표표히 그 옆에 내려섰다.
오랜 세월 탓인지 손상이 심한데도 그의 공격을 감지하고 바로 반격에 들어간 것으로 보아 전성기에는 실력이 상당했을 터였다.
풍화가 심하게 된 칼에 아직도 보광이 어려있고 희미하게 문양이 남아 있는 것만 봐도 그랬다.
“흠?”
칼에 새겨진 문양들이 육화부인이 전수해 줬던 성신문자와 비슷했다.
성신문자는 육화부인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들었는데, 우연히 비슷한 것인지 다른 사정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빠르게 괴뢰를 훑은 한립은 갑옷에 남은 어느 성신문자에서 눈길이 멈추었다.
육화부인에게 배운 성신문자와 똑같아서 절대 우연히 비슷한 모양을 지니게 된 것은 분명 아니었다.
이에 칼을 들어 올려 휘둘러보니 성신지력 파동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워낙 낡아서 쓰기는 무리였다.
한립은 그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궁전 깊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보존이 잘 되어 있었지만 누군가 이미 쓸어갔는지 보물이나 진귀한 물건은 찾을 수 없었다.
아무 소득도 없이 이동하는 동안 괴뢰들만 마주쳤다.
한립은 쓸데없이 괴뢰들과 충돌하지 않고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힘을 썼다.
곧 시야가 탁 트이면서 높다란 은회색 건물이 나타났는데, 제단 양식이었고 광장 주변의 다른 건물들과 함께 달과 별처럼 배치되어 있었다.
거대한 은회색 바위를 깎아 만들어진 튼튼한 제단은 벽면만 풍화가 되어 얼룩덜룩할 뿐 그 근간은 온전해 보였다.
현문(玄文)으로 엽살전(爗殺殿)이란 세 글자가 큼지막하게 적힌 편문이 걸린 제단의 입구는 열려 있었고, 그 안으로 어둑한 통로가 거대한 입처럼 보였다.
제단 내 벽에도 은은하게 성신문자가 있어서 금제의 힘 때문에 의식으로 내부를 살필 수는 없었다.
제단과 그 안의 금제가 부서지지 않았다면 안에 무엇이 들었든 그것도 남아 있을지 모른다는 소리였다.
한립은 눈을 반짝이면서도 무턱대고 들어가지 않고 주변에 의식을 퍼트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입구로 다가섰다.
안쪽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는데 그리 강하지 않은 바람에 소름이 돋았다.
“…….”
눈살을 찌푸린 한립은 물러서지 않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단 모양의 건물에 발을 들인 순간 쿵, 하며 발밑이 폭발해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쉬쉬쉭.
무수히 많은 돌조각이 그를 덮치며 동시에 날카로운 검빛이 구멍에서 튀어나와 그의 두 다리를 베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한립은 폭발이 일어난 순간, 이미 몸을 뒤로 물리면서 피하고 있었다.
쉭!
검은 그림자가 구멍 속에서 튀어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커다란 검은 원숭이가 은색 갑옷을 입고 하얀색의 곡도를 들고 있었는데 광채가 좔좔 흐르는 갑옷은 아깝게 손상이 심했다.
‘인수? 아니, 괴뢰야.’
검은 털이 길게 자란 검은 원숭이의 두 눈은 청동 구슬을 심어 놓은 것처럼 반짝였고, 침이 줄줄 흐르는 데다 송곳니가 살아 있어 짐승과 똑같아 보였다.
그러나 그는 한눈에 괴뢰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해 도인 특유의 분위기가 약간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립의 시선이 하얀 곡도로 향했다.
부식된 흔적이 전혀 없는 곡도는 수은을 발라 놓은 것처럼 반짝이고 은은하게 성신도안이 새겨져 있었다.
주변 공기를 진동시키는 곡도를 자세히 살피려는데, 검은 원숭이가 앞으로 쇄도했다.
동시에 원숭이가 든 하얀 곡도의 성신문양이 빛을 발하면서 음산한 검빛이 한립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음산한 칼의 빛을 본 한립은 몸을 좌우로 흔들어 네다섯 개의 잔영을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날려 보냈다.
낮게 울부짖은 검은 원숭이는 곡도를 휘릭 돌려 한립이 만들어낸 잔영들을 향해 원형의 검빛을 날렸다.
그러나 잔영들이 매서운 검빛에 닿아 전부 사라져 버리자 검은 원숭이도 순간 멈칫했다.
그때 귀신처럼 검은 원숭이 앞에 나타난 한립이 왼손을 칼날처럼 사용해 괴뢰의 손목을 베어냈다.
슥!
두부처럼 손목이 떨어져 나간 검은 원숭이는 처량하게 비명을 지르면서 나머지 주먹으로 한립의 머리를 부술 듯 내리쳤다.
하지만 한립의 동작이 훨씬 빨랐다.
잘려나간 괴뢰의 손에서 하얀 곡도를 빼앗은 그는 잔영이 남을 만큼 빠르게 검은 원숭이를 베었다.
그의 신영이 스쳐 지나간 뒤, 검은 원숭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둘로 갈라져 바닥에 쓰러졌다.
꿈틀거리다 발작을 멈춘 원숭이는 체내에서 피처럼 은색 액체가 흘러나왔다. 오장육부가 다 있으니 전부 핏빛 옥석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잔해를 유심히 살피던 한립은 새하얀 곡도를 만지작거리며 미소 지었다.
<천살진옥공>을 운용하니 도신에 새하얀 검빛이 어리고 주변 공기가 웅웅 진동했다. 게다가 휘두르면 하얀 뱀들이 주변을 맴도는 것 같은 검빛이 나타났다.
검빛은 단단해 보이는 벽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런데 몇 번 곡도를 휘둘러 보던 한립의 눈에 실망감이 어렸다.
위력적으로 보이던 곡도는 성보가 아니라서 성두순 같은 진짜 성보처럼 육신의 힘을 강화해주지는 못했다.
어찌 되었든 거저 얻은 보물이었고 귀한 무기라 할 수 있었다.
곡도를 등에 멘 한립은 기운을 숨기고 앞으로 나아갔다.
제단의 대문 뒤로 이어진 기다란 통로는 진회색 벽돌들이 차곡차곡 쌓여 음산한 기운을 뿜어냈다.
여러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을 만큼 넓은 통로는 빛이 거의 들지 않아 왠지 모를 위압감을 주었다.
미간을 좁힌 한립은 안력을 돋우며 계속 걸어갔다.
또 발밑이 쑥 꺼지거나 벽이 무너지고 다른 괴뢰가 튀어나올까 봐 긴장했는데 걱정하던 일은 생기지 않았다. 그리고 출구로 보이는 곳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걸음을 재촉한 그가 출구로 빠져나오자 네모난 대청이 나타났다.
지붕에 하얀 형석들이 박혀 밝은 빛을 발산해 등불 역할을 했고, 넓은 대청 안에는 작은 석상들이 세워져 있었다.
석상들은 자세와 표정이 다양해서 극도로 흥분해 있거나 고통스러워하는 등 표정이 생생했다.
한립이 눈앞의 광경에 놀라고 있을 때, 시야에 하얀빛이 번득였다.
안색이 급변한 한립이 급속도로 뒤로 물러나며 등 뒤의 곡도를 뽑아 하얀빛을 막았다.
채챙!
괴력이 폭발해 곡도를 든 그의 팔이 부르르 떨렸다.
한립이 십여 보를 물러나고 날아든 하얀 빛도 뒤로 튕겨 나갔다.
뱀의 모양을 한 검신은 얇은 검이자 꽤 괜찮은 성보였다. 이어서 어느 석상 뒤에서 풍무진이 나타나 뱀 모양의 검을 받아들었다.
“단번에 머리를 꿰뚫어 죽이려 했건만 동작은 빠르구나.”
혀로 입술을 핥으며 한립을 노려보는 풍무진의 얼굴에 살기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풍무진, 우리가 이렇게 인연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아니, 악연이라고 해야 할까요?”
눈을 가늘게 뜬 한립은 상대를 자세히 관찰했다. 방금 전 공격은 시합 때 보여줬던 실력을 훨씬 상회하는 것이었다.
‘대허 안에서 그사이에 기연이라도 만났단 말인가?’
“흐흐,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들 하지. 수라장에서는 보는 눈이 많아 전력을 다하지 못했다.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라면 너를 죽이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전에 갈등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대허 안에는 괴성 무리가 들어와 있습니다. 현성 사람들끼리 싸운다면 그들만 덕을 보지 않겠습니까?”
풍무진의 말에 한립이 약간 안심하며 차분히 말했다.
“봐달라는 것이냐? 아무리 빌어도 늦었다. 의부님과 모두의 앞에서 망신을 주었으니 널 절대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풍무진은 원한이 서린 눈빛으로 다른 손에도 뱀 모양의 검을 불러냈다.
“그러니까 반드시 나와 싸워야겠다 이 말이군요…….”
한립은 탄식을 했고, 냉소를 흘린 풍무진은 더는 말을 나눌 생각이 없다는 듯 튀어나왔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급격히 줄어들고 두 자루의 검이 한립의 심장을 찔러 들어왔다.
풍무진이 공격을 시작하고 쌍검이 한립의 가슴에 이르기까지 거의 시간차가 없었다.
한립이 제자리에서 서서 아무 반응이 없자 불안해하던 풍무진은 득의양양하게 검날을 얼굴 쪽으로 옮겼다.
상대가 절망에 빠져 덜덜 떠는 모습을 봐야 그날의 치욕을 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뭐야!’
그런데 가까이 다가선 풍무진이 본 것은 얼음장 같은 한립의 눈빛이었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손의 쌍검에 무시무시한 힘이 도래했다.
두 팔을 부들부들 떨면서 손아귀에 힘을 주었지만 쌍검을 놓치기 직전이었다.
기겁한 풍무진이 두 발을 교차해 이상하게 걸으면서 흐릿하게 변해 백장 밖으로 물러났다.
“……그렇게 원한다니 싸워드리겠습니다.”
한립은 풍무진을 향해 담담히 말하고 전신에서 하얀빛을 반짝였다.
현규들이 연달아 빛을 발해 237개의 현규에서 눈부신 별빛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주변 십여 장 내의 공기가 터지면서 해일처럼 사방팔방으로 위압감이 퍼져나갔다.
쿠쿠쿵.
대청이 진동해 그 안의 석상까지 흔들리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실력을!”
풍무진은 한립이 2백여 개의 현규를 지닌 것을 보고 믿기지 않는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풍무진은 한립의 실력이 상상을 초월하자 얼굴이 파랗게 질려 대청 깊은 곳으로 몸을 날렸다.
안쪽의 통로로 이어지는 입구가 있었다.
이에 한립은 발끝으로 톡 하고 지면을 치고 사라졌다. 그러자 그 자리가 무너져 내려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얼마 달아나지 못한 풍무진은 뒤에서 바람 소리가 들리고 흐릿한 하얀 신영이 그를 따라잡는 것을 보았다.
굵은 팔이 번개처럼 튀어나와 수많은 현규들에서 별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쿠쿠쿠…….
공간이 주먹을 따라 함께 왜곡되어 겹겹이 포개졌다.
“크아아!”
엄청난 압력에 급격히 속도가 줄어든 풍무진은 괴성을 지르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뱀 모양 쌍검을 교차해 머리를 막으면서 모든 힘을 성보 속으로 주입하기 시작했다.
찬란한 별빛 열댓 개가 검신에서 반짝이고, 별빛 거검 두 자루가 교차하며 주먹을 막으려 했다.
챙강!
한립의 주먹에 맞은 별빛 거검들은 깨져 별빛으로 흩날리고 뱀 모양 검들도 산산조각이 났다.
그 충격으로 풍무진은 무릎까지 땅에 박혔는데, 금색 주먹이 멈출 생각 없이 그의 머리로 계속 떨어졌다.
겁에 질린 풍무진은 바닥에 고정되어 달아나지도 못하고 맞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잠시 후, 눈부신 하얀빛이 한립의 주먹 끝에서 빠져나와 그의 전신을 뒤덮었다.
하얀빛 속에서 두 자루 검처럼 조각조각이 난 풍부진은 곧 형체를 분간할 수 없게 찢겨나가고 말았다.
그제야 모습을 드러낸 한립은 별빛을 거두고 평온하게 주먹을 회수했다.
풍무진이 원래 실력을 숨겼든 아니면 대허에서 기연을 얻었든 간에 단시간에 그를 능가할 실력을 지니게 되었을 리 없었다.
한립은 그대로 지나가려다 멈칫하고 풍무진의 잔해에서 하얀 신발을 들어 올렸다.
은백색의 요수 가죽으로 만들어진 신발에는 하얀 성신문자가 가득 새겨져 있고 복사뼈 자리에 두 개의 초승달 문양이 들어가 있었다.
“이 신발은…….”
그는 곧장 신발을 갈아신고 가볍게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 자리에서 사라진 그는 다음 순간, 백여 장 밖에 서 있었다.
하얀 신발의 64개 현규가 반짝이면서 그의 현규와 호응했다.
얼굴이 밝아진 한립이 흐릿하게 변하자 갑자기 대청 곳곳에서 그의 잔영들이 나타나 귀신처럼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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