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화. 돌발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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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한 마리를 처치했는데, 여덟 마리나!”
“짐승들 따위가 감히 우리 앞을 막다니, 죽고 싶어 환장한 것이지요!”
“액 성주님과 사 성주님이 있으니 다 해치워 주실 겁니다!”
“잠깐, 왠지 눈에 익은 짐승들인데…….”
선박의 수사들이 거대한 교룡 머리들을 보고 웅성거렸다.
두 성주들이 단숨에 괴물을 해치운 것을 보아서인지 두려워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런데 액회와 사심은 물론 신양 등 네 명의 성주나 사심 휘하의 탁과 등은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이거 왠지…….’
동공을 수축한 한립도 불길한 느낌이 엄습해왔다.
크항!
그때 선박 뒤쪽에서 머리 하나가 더 튀어나왔다.
다른 머리보다 훨씬 작은 방금 태어난 것처럼 피부가 쭈글쭈글한 교룡 머리의 목에 암홍색 상처 자국이 남아 있었다.
바로 액회가 베어 버린 교룡 괴물이었다!
“구기교(九祁蛟)였구나!”
액회는 번뜩 괴물의 정체를 깨달았다.
‘구기교!’
그 소리에 한립의 안색도 달라졌다.
그도 구기교의 악명에 대해서는 들어봤는데, 전설일 뿐 직접 구기교를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코끼리를 닮은 커다란 몸통에 구렁이 같은 목들과 9개의 교룡 머리가 달렸다는 구기교는 성정이 포악하고 머리를 베어내도 다시 자라나 근본적으로 죽일 수가 없다고 했다.
그보다 무서운 것은 9개의 머리에 난 입 말고 등에 달리 거대한 입이 만물을 삼키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구기교의 9개의 머리가 사방에서 성준비주를 향해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9개 머리가 하늘을 가리고 하늘에서 내리쬐던 별빛마저 막아 선박의 별빛 보호막이 얇아졌다.
“우린 끝났어…….”
풍무진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암담하게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들도 난색을 표하며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액회와 사심은 가만히 앉아서 죽을 생각은 없는지 시선을 교환한 뒤 동시에 선박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공간이 파편화되는 것처럼 허공이 진동했다.
그러자 사심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검은 천이 바람이 펄럭여 절색의 미모가 드러났고, 그녀의 두 손에서는 각각 구슬이 솟아올랐다.
새하얀 구슬은 강력한 성신지력 파동 속에 백 장 크기의 거대한 신영으로 변했다.
여덟 가지 보물이 박힌 자금색 관을 쓰고 다채롭게 빛나는 금색 비늘 갑옷을 걸친 거인은 전신을 금속으로 주조한 듯 광택이 났다.
금강 거인이 손을 뻗자 다른 구슬이 새하얀 빛을 뿌리면서 은색 거대 우산으로 변해 그의 손에 들렸다.
선박에 선 한립도 금강 거인이 발산하는 위압감을 느낄 수 있었는데 액회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다.
그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심이 공중에서 몸을 틀어 열 손가락을 튕겼고, 금강 거인이 우산을 들고 위쪽으로 들어 올렸다.
화아앗.
우산이 활짝 펴지면서 별빛이 흘러나와 하늘에 은하수를 그렸다.
우산에 박힌 별빛들이 밤하늘의 진짜 별들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그 힘을 이용해 9개의 교룡 머리를 막아섰다.
쾅쾅쾅쾅쾅!
교룡들의 박치기가 이어지니 우산의 별빛 도안들이 연기처럼 사라졌는데도 금강 거한은 일그러진 얼굴로 우산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사심 수사, 이제 제가 맡겠습니다!”
액회가 몽롱하게 별빛으로 몸을 감싸고 우산이 막고 있는 앞으로 주먹을 뻗으려 했다.
그런데 그때 아래쪽 검은 소용돌이 속에서 안개가 꿈틀거린 후 뜻밖에도 구기교의 몸통이 떠올랐다.
짐승의 등이 얼마나 큰지 돌풍 중심부와 거의 맞먹었고, 각진 비늘들 위로 희미하게 상처 자국이 남아 있었다.
“결국에는 하늘의 뜻에 맡겨야겠구나.”
육화부인은 어두운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버지, 이러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 곁을 떠나지 말거라.”
미간을 좁힌 골천심이 뭔가를 말하려 하자 육화부인은 고개를 돌려 단단히 당부했다.
쿠오오오!
골천심이 대답하기도 전에 아래쪽에서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포효소리가 들려왔다.
화산이 폭발한 것처럼 귀가 멍해지고 머리가 어지러워질 만큼 굉장한 굉음이었다.
이에 한립은 재빨리 연신술을 운용해 혼백이 뒤흔들리는 충격에도 버티고 서 있었지만 주변 사람들은 육화부인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몸을 가누는 이가 없었다.
골천심의 어깨를 잡고 그녀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려 주던 육화부인은 한립이 멀쩡히 서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네 녀석은 의식이 어찌 그리 견고한 것이야…….”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닌 듯싶습니다, 선배님.”
짧게 답한 한립이 뱃머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석천공과 검은 치마를 입은 여인도 반쯤 주저앉아 있었지만 다른 이들보다는 나아 보였다.
다가가 그들을 살피려는데 발아래가 쑥 꺼지면서 몸이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완전히 통제를 잃은 성준비주가 추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급해진 한립은 두 다리의 현규를 밝혀 발밑으로 성신지력을 폭발해 펑! 하고 살짝 떠올랐지만 아래에서 끌어당기는 힘이 너무 강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혼란에 빠진 사람들이 갖가지 방법으로 달아나려 했으나 불가능했다.
위쪽에 있던 액회와 사심이 선박의 변고를 알고 돌아와 대처하려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콰콰쾅!
성준비주의 선미가 이미 구기교의 등에 난 거대한 입으로 떨어져 엄청난 파괴력에 산산조각이 났다.
“안 돼!”
“악!”
절규와 비명이 난무했으나 미간을 좁힌 한립은 극도로 차분했다.
품에 손을 넣어 나뭇잎 모양 옥패를 손에 쥔 그는 석천공과 검은 치마 여인의 위치를 파악하려 고개를 돌렸다.
나뭇잎 모양 옥패는 3황자 석파공이 적린공경에 들어오기 전, 위치를 특정해 줄 거라 내준 신물이었다.
이것만 있으면 언제든 둘을 데리고 마계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석천공은 보이지 않고 해 도인이 백 장 거리에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해 수사, 어서 이쪽으로 오세요.”
구기교 등에 난 거대 입이 갈수록 가까워져서 한립은 전음만 보내두고 정말 그가 자신을 쫓아 오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찾았다!’
이때 괴성의 그 검은 치마 여인이 포착되었다.
그의 뒤쪽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곧장 우화비승공을 발동한 한립은 두 발로 연달아 허공을 밟고 흡입력에 대항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30장, 20장, 10장…….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마음속에 파문이 일었다.
‘자령, 정말 너인 것이냐?’
그의 손이 자령의 팔을 잡으려는 찰나 머릿속에 육화부인의 전음이 울렸다.
“잠시 후에 가장 큰 공간균열로 뛰어들거라. 꼭 살아남거라…….”
흠칫 놀란 한립이 놀라 고개를 돌리니 육화부인이 구기교의 거대한 입안으로 하얀 원반 같은 것을 던져넣고 있었다.
쿠콰콰콰.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과 함께 구기교의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공간이 거울처럼 깨져 거대한 공간균열이 벌어졌다.
모든 것을 찢어버릴 것 같은 무서운 힘에 현성과 괴성의 수많은 이들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빨려 들어갔다.
운이 좋은 이들은 온몸이 온전하게 빨려 들어갔지만, 운이 나쁜 이들은 무언가에 걸려 순식간에 온몸이 찢겨나갔다.
모골이 송연해진 한립이 펄쩍 뛰어 검은 치마 여인을 붙들려 했지만 공간균열이 하필 그들 사이에 나타나 그를 삼켜버렸다.
새까만 공간 속에서 강력한 파괴력을 느낀 한립은 정신을 잃어 하늘과 땅을 구분할 수가 없어졌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고통과 함께 희미하게 한립의 의식이 돌아왔다. 한립의 뇌리에는 검은 치마 여인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천으로 가려진 얼굴에 자연스럽게 자령이 녹아 들어있었다.
귀가 웅웅 거리고 수많은 잡음이 송곳처럼 박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오감마저 상실한 그는 새까만 어둠 속에서 방향을 파악할 수 없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래쪽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쿵!
단단한 지면으로 추락한 한립은 몸 절반에서 극심한 고통을 느꼈지만 워낙 몸이 튼튼해서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한 번 호되게 부딪치고 나니 의식과 오감도 회복되어 눈앞도 밝아졌다.
주위를 둘러본 한립이 눈을 크게 떴다.
누런 땅에는 크고 작은 돌조각들이 가득했고, 어느 곳을 보아도 다른 지형물을 찾아볼 수 없었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 한가운데에 선 것 같았다.
머리 위 하늘은 괴이하게도 황갈색이었고, 누런 구름이 겹겹이 쌓여 그 사이에서 가끔 미약하게 하얀 뇌전빛 같은 게 반짝였다.
출렁이는 구름 속에 희미하게 소용돌이가 남아 있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니 그가 그곳에서 떨어진 게 분명했다.
천천히 바닥에서 일어난 그는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설마 이곳이 대허……. 바깥이랑 확실히 다르긴 한데, 다른 사람들은 어디로 떨어진 거지?”
그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주변 허공을 바라보았다.
실처럼 기운의 파동이 존재했는데 천지영기, 마기와는 완전히 다르고 짙은 성신지력과 비슷했다.
그리고 성신지력을 양분 삼아 돌의 틈에서 하얀 이끼들이 자라나 그나마 사막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눈을 반짝인 한립은 묵묵히 <천살진옥공>을 운용해서 주변의 성신지력을 몸 안으로 불러들였다.
그렇게 모여드는 성신지력의 양이 평소 요핵을 제련해 가며 흡수하는 것 못지않았다.
금방 한립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 후, 그는 이곳이 대허라고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성신지력이 충만하기에 천린운정, 유염혈운 등의 보물들이 탄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립은 이곳이 위험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그 자리에서 가부좌를 틀고 성신지력을 흡수했다.
반나절 뒤 눈을 뜬 그는 기력이 넘쳐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최근 생긴 현규가 곧 뚫리려는 조짐을 보였다.
이곳의 성신지력은 현규를 뚫는데도 효용이 있는지 조금만 더 수련하면 새로운 현규를 열 수 있을 듯했지만 계속 이곳에 앉아 수련만 할 수는 없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방팔방의 모습이 비슷했는데 오른쪽 하늘에 한두 줄기의 그림자 같은 것이 어른거렸다.
대허의 공간압력은 빙화산맥보다 강해서 의식을 방출할 수 있는 거리가 시력으로 볼 수 있는 거리보다 못했다.
한립은 몸을 날려 그곳으로 향했다.
잠시 후, 어른거리던 그림자들이 선명해지며 야트막한 산을 시작으로 시야의 끝까지 구불구불 산맥이 이어졌다.
새까만 산봉우리는 평범한 바위가 아닌 사막의 모래가 단단하게 굳어 쌓여 있었다.
그 위로도 하얀 이끼들이 자라나 단조로운 환경에 변화를 주었다.
검은 산맥 앞에서 걸음을 멈춘 한립은 일단 의식을 퍼트려 보았으나 주위는 고요하기만 했다.
대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방심할 수 없었다.
이렇게 전방을 수시로 살피면서 앞으로 나아갔는데도 반나절이 지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산봉우리들만 점점 높아져서 이제는 높이가 수백 장에 달했고, 산과 산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저건!’
한동안 걷기만 하던 한립은 작게 탄성을 내뱉고, 구름을 뚫고 선 커다란 산맥 쪽으로 갔다.
구름에 꼭대기가 가려진 산 아래에는 산세에 기대 먹색 궁전 건물들이 끝도 없이 세워져 있었다.
아쉬운 점은 건물 대부분이 이미 무너졌다는 것이다.
무너진 건물들의 기둥이나 들보만 보아도 얼마나 웅장하고 화려한 양식으로 지어졌을지 추측할 수 있었다.
한립은 <만규공적술>을 발동해 기운을 감추고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의식으로 주변 동정을 살폈다.
얼마 후, 눈썹을 꿈틀한 그는 기다란 궁전 담벼락 뒤로 숨어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쿵쿵쿵쿵.
육중한 걸음 소리가 들리고 멀지 않은 폐허 속에서 사람보다 몇 배는 큰 노란 괴뢰가 사방을 훑으며 순찰을 돌고 있었다.
긴팔원숭이를 닮은 외모에 거의 부서진 두꺼운 갑옷을 입은 괴뢰는 몸이 부식되어 갈라진 흔적이 보였고, 듬성듬성 이가 나간 칼을 차고 있어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이곳에 머물었는지 알 수 없었다.
갑옷과 칼은 풍화되어 손상이 심했는데도 하얗게 성신지력 파동을 발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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