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화. 출발
*
그간 헌원행의 말과 행동을 곱씹어본 한립은 상대가 여간내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신양 성주님의 위명을 듣고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탁과가 신양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런 쓸데없는 인사치레는 생략하고 증거나 보여주게.”
신양은 냉랭히 말했고, 탁과는 기분 나빠하지 않고 품에서 핏빛 옥판을 꺼내 건네주었다.
한립은 무엇인지 보고 자세히 보고 싶었으나 신양이 시야를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자잘한 문양들이 언뜻 보인 것으로 보아 진법 도안 같아 보였다. 멀리서 보이는 신양의 얼굴에는 분노와 놀람이 교차하고 있었다.
잠시 후, 원래 표정으로 돌아온 신양은 옥판을 돌려주지 않고 품에 넣어버렸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다만…….”
신양은 말을 하다말고 전음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탁과도 미미하게 입술을 달싹이며 둘은 잠시 이런저런 협의를 했다.
“할 말이 끝났으면 가겠네.”
신양이 냉담히 돌아서 가버리고 헌원행도 탁과의 무운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함께 사라졌다.
“탁과, 신양이 대인의 말에 따를까요?”
그들이 가고 난 뒤 무운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꼭 어린아이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겁니다. 게다가 대인의 계획이 언제 어긋난 적이 있습니까!”
“맞습니다.”
탁과의 말에 무운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떠나고 나서 한참 뒤에야 한립은 몸을 일으켜 그곳을 벗어났다.
분지 입구, 신양과 헌원행이 나란히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파공음이 들리고 한립이 바위 위를 톡톡 치며 다가왔다. 의복이 이리저리 찢기고 피가 묻은 그는 피로한 기색이 다분했다.
“미안합니다. 빙린구여를 쫓다가 너무 멀리까지 갔는지 갑자기 강력한 인수들이 공격해와 따돌리고 오느라 시간이 지체되었습니다. 오래 기다리셨는지요?”
한립은 씁쓸하게 웃으며 사과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 빙린구여를 쫓느라 그런 것인데 미안해하실 것 없습니다.”
신양도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갔던 일은 어찌 되셨습니까?”
“바삐 뛰어다닌 보람은 있었습니다. 빙린구여 네 마리를 죽여 뿔을 챙겨왔습니다.”
“저는 세 마리, 헌원 수사는 운이 따라주지 않아 한 마리를 잡아 왔습니다. 수량은 넉넉하게 구했군요.”
한립이 수정 뿔 네 개를 꺼내 보이고 신양도 세 개를 꺼내 들었다.
“부끄럽습니다. 여기까지 따라와서도 큰 도움이 되지 못한 듯싶어요.”
헌원행은 평소의 성격대로 민망한 내색을 했다.
“그렇게 말씀하실 것 없습니다. 우리 셋이서 힘을 합쳐 임무를 달성했으면 된 것이지요.”
한립은 그의 표정을 보고 속으로 냉소를 흘렸지만 겉으로는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 * *
그렇게 시간이 지나 한 달 후.
밤하늘 가득 별이 떠올라 얼음과 불이 교차하는 협곡 안에도 별빛이 가득 쏟아졌다.
협곡 앞에는 거대한 새를 닮은 검은 선박이 두 날개를 펼치고 지면에서 약간 떠올라 있었다.
선박에 빼곡하게 새겨진 하얀 문양들은 마치 하늘의 별자리를 옮겨 놓은 듯 반짝였고, 현성과 괴성의 무리도 출발 준비를 하고 들뜬 기색으로 선박 양쪽에 모여 있었다.
괴성 쪽에는 탁과 등 세 사람을 주축으로 검은 치마를 입고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들을 따르는 금색 괴뢰들의 수가 사람보다 더 많았다.
수를 다 합하면 현성보다 많았다.
한립이 지켜보는 것을 느낀 탁과가 고개를 돌려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고 한립도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 구해주었던 두 여인도 눈인사를 건넸지만 탁과처럼 직접적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들은 혐오감과 서늘함을 드러냈지만 한립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괴성 무리에서 예전에 보았던 보라색 장포를 입은 여인을 찾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한립과 괴성 사람들이 인사를 주고받는 것을 본 현성 사람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몇몇은 입을 비죽거렸고, 담이 큰 이들은 대놓고 노려보기도 했다.
“비열한 새끼, 저러고도 괴성 첩자가 아니라고?”
누군가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당장이라도 저쪽에 붙고 싶어 난리가 난 모양새구나. 노예는 역시 노예일 뿐이지. 신의라고는 없는 놈.”
풍무진도 서늘하게 험담을 했다.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 중, 그걸 듣지 못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는 일언반구도 없던 한립이 풍무진이 입을 놀리자 빙긋 웃으며 돌아보았다.
“패자는 할 말이 없는 법인데, 쓸데없이 말이 많으십니다.”
“뭐라고?”
풍무진이 주먹을 불끈 쥐고 그를 향해 다가오자 다른 현지성 수사 두 명도 따라왔다.
그러나 뒷짐을 진 한립은 여전히 빙긋 웃는 얼굴로 무엇이든 할 테면 해보라는 자세였다. 남의 이목과 그의 태도에 정말 물러설 수 없게 된 풍무진과 현지성 수사들은 현규를 밝혔다.
인상을 찡그린 골천심이 망설이다 빠르게 한립 옆으로 와서 섰다. 그걸 본 통여성 세 사람이 악의를 가지고 그들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그저 단통은 한립이 아니라 골천심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말이다.
헌원행은 고민스러운 얼굴로 움직이지 않고, 그저 무리 앞쪽에 선 신양에게 어떻게 하냐는 눈빛만 보냈다.
옆에선 진원이 싸움을 말릴 생각이 전혀 없자 신양이 인상을 찡그리고 나서려 할 때, 한립 옆에 뜻밖의 인물이 나섰다.
한립도 놀라서 돌아보니 싸우지 않을 때는 늘 손에 두툼한 짐승 다리를 들고 다니는 돼지 얼굴의 소년 방선이었다.
방선은 이런 순간에도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얼굴로 고기를 뜯고 있었다. 16명 중 가장 전력이 센 편인 세 명이 한 편에 선 셈이었다.
수수방관하려던 손도는 방선이 나서자 가만있지 못하고 소리쳤다.
“거사를 앞두고 내분을 일으키다니. 남들 구경하라고 재주라도 부리려는 것이냐! 무슨 터무니 없는 짓들인 게야.”
한립이 돌아보니 역시 괴성 사람들의 얼굴에 비웃음이 가득했다.
“손 성주님의 말씀이 옳으십니다. 저희의 불찰입니다.”
골천심이 그 분위기를 타고 바로 잘못을 인정했고, 진원도 짐짓 자기 성 출신들을 혼내는 척하면서 상황을 정리했다.
“려 수사, 저들과 정말 싸우려 한 것입니까?”
다들 자리로 돌아갈 때 골천심이 전음을 보냈다.
“수사는 어떻습니까? 저와 한편에 서서 저들과 정말 싸울 생각이었습니까?”
한립이 반문을 했다.
“저야……. 그래도 같은 성 출신인데 서로 도와야 하지 않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서 제가 정말 싸움판을 벌이고 싶어도 액회 성주가 두고 보지 않았을 겁니다.”
“일부러 도발만 했다는 뜻이군요.”
“그렇기는 하지만 분명 저들이 먼저 시비를 건 겁니다. 의외인 것은 방선이 왜 나섰냐는 것인데…….”
한립은 말을 하다 말고 돼지 얼굴 소년을 보았다.
“아마 지난번 기습을 당했을 때 수사가 경고해준 일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영악하게 잇속만 챙기는 다른 이들보다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사람인가 봅니다.”
“저도 그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군요.”
“그보다 괴성 사람들과 인사를 하는 척하며 무엇을 보고 있던 건가요?”
“하하, 그냥 눈길 가는 대로…….”
골천심의 예리한 질문에 한립이 어색하게 웃어넘겼다.
“괴성 여인에게 한눈에 반하기라도 했나 봐요? 충고하는데 괴성 여인들은 자태도 곱지만 매혹술에 능해 까딱 경계심을 풀면 혼을 쏙 빼놓을지 모릅니다. 게다가 괴뢰술에도 능하니 그 끝이 어떻게 될지는 뻔하지요.”
입꼬리를 끌어올린 골천심이 농담조로 말했다.
“골 수사, 육화부인께 무슨 이상한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말 마시지요.”
“아버지……. 육화부인은 수사를 무척 높이 평가하고 있어요. 진심으로 제자로 들일 마음도 있고요. 그분 옆에서 만 년 동안 수련하는 건 다른 사람이라면 무척이나 반가워할 기회라고요.”
골천심은 이미 그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인정했지만 호칭이 입에 붙지 않는 듯했다.
“저도 원하는 일입니다만 해야 할 일이 있어 어쩔 수 없이 거절한 것입니다.”
“휴, 하긴 육화부인도 인연이라는 게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스승으로 모시지 않더라도 성격상 대허에서 무사히 돌아가면 흑겁충 문제를 그냥 모른 척하지는 않으실 거예요.”
“그거야 알 수 없지요. 마침 제가 현성 별원에 숨겨 둔 혈장주가 거의 익어갈 때입니다만…….”
골천심의 전음에 한립이 미소를 지었다.
“하, 육화부인이 확답을 주기 전에는 그 술도 절대 안 내놓을 생각인 거죠?”
“하하, 그럴 리가요.”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성준비주에 다섯 사람이 나타나 뱃머리에 섰다.
그중에는 당연히 육화부인, 액회 그리고 사심이 있었고 그 뒤로 뼈 가면으로 얼굴 절반을 가린 석천공과 삿갓을 쓴 신비한 여인이 있었다.
“…….”
그들을 본 한립의 시선에 긴장감이 어렸다.
석천공도 석천공이지만 삿갓 여인의 자태나 분위기가 자령과 너무 닮아 있었다.
“성준비주가 완성되어 이제 대허로 들어갈 때이다. 공간 폭풍이 바깥처럼 험악하지는 않아도 얕봐서는 안 된다. 대허로 진입하려면 모두 힘을 합쳐야 하니 전부 전력을 다해 성준금제를 발동해 위기 속에서 길을 찾도록 하라.”
액회가 현성과 괴성 수사들을 내려다보며 먼저 말했다.
“여기까지 온 것도 쉽지 않았지만, 대허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가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모두 옛 감정은 묻어두고 힘을 합치기를 바란다.”
사심이 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큰 종소리처럼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액회의 목소리와 달리 그녀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속삭이는 것처럼 마음에 파고들었다.
“노부가 성준금제를 발동하는 방법을 알려주겠다. 승선한 후에는 다들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야.”
육화부인이 나서서 상세하게 금제를 발동하는 방법을 일러주었고, 몇 가지 유의할 사항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육화부인은 안심하지 못하고 다시 한번 같은 설명을 반복했다.
준비가 끝나자 액회가 명을 내렸다.
“승선!”
“예!”
현성과 괴성 수사들이 우렁차게 외치고 몸을 날려 성준비주 위로 올라섰다.
선박은 중간에 튀어나온 부분을 중심으로 둘로 나뉘어 좌우 양측에 지붕이 뚫린 선실이 있었다.
그 안에 마련된 좌석에는 환형의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현성 사람들은 육화부인의 지시대로 좌측 자리에 앉았고, 괴성 사람들은 우측으로 향했다.
액회 등은 여전히 뱃머리에 서 있었다.
“출발하라.”
모두가 승선을 마치고 액회의 명이 떨어졌다.
육화부인이 성준비주 뱃머리에 마련된 원형 진법에 들어가 가부좌를 틀고 앉자 액회 등 나머지 사람들도 진법 안에 자리를 잡았다.
웅웅.
수결을 맺고 공법을 발동하자 그들 아래 진법이 새하얀 빛을 머금었고, 선박 중앙의 볼록 튀어나온 골격이 별빛을 반짝이며 성준비주가 떠올랐다.
선박이 백여 장 높이까지 솟았을 때 육화부인이 소리쳤다.
“금제를 발동하라!”
현성과 괴성 사람들은 육화부인이 미리 알려준 방법대로 각자 수십 개의 현규를 밝히고 좌석의 환형 문양에 성신지력을 흘려보냈다.
문양을 타고 빛이 흘러가 두 날개를 채우니 정말 거대한 하얀 매가 날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한립은 현규와 선박의 금제가 호응하면서 힘이 유실되는 것을 느꼈지만 찬란한 별빛 속에서 기분만은 편안했다.
이때 육화부인이 수결의 모양을 바꾸고 연달아 선박 몇 군데를 눌러 성준비주 날개의 가장 커다란 문양에 힘을 실었다.
쿠쿵.
엄청난 진동에 고개를 든 한립은 밤하늘의 별들이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굵직한 두 줄기 별빛을 응결해 성준비주의 두 날개로 쏘아 보내는 것을 보았다.
선박에 탄 사람들은 탄성을 내지르며 서둘러 금제 발동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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