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975화 (1,732/2,000)

1975화. 빙린구여

*

이미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이라 세 사람은 겨우 하루 만에 지도에 표시된 지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둠이 내려오고 서늘한 삭풍이 거세져서 수행이 높은 세 사람도 점점 몸이 굳어갔다.

“한기가 예사롭지 않으니 쉴 곳을 찾읍시다.”

신양이 사방을 살피고 말했다.

안 그래도 위태위태하던 헌원행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한립은 아직 버틸 만했으나 굳이 반대하지 않았다.

세 사람은 골짜기 옆에 숨겨진 동굴을 찾아 안으로 들어가 찬바람을 피했다.

추위를 가장 많이 타는 헌원행이 가장 깊숙이 들어가 자리를 잡고 등에 멘 짐에서 넓은 그릇을 꺼내 검은 기름을 부었다.

화륵!

이어 불똥이 튀면서 검은 액체가 활활 타올랐다.

한립이 그걸 보고 미간을 좁혔다. 숨겨진 동굴이기는 해도 불을 피우면 외부의 인수에게 들킬 수 있었다.

고개를 돌려 신양을 보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잠자코 있었다.

“신양 성주님, 려 수사, 두 분의 실력이 고강해 한기의 침식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몸에 부담이 될 겁니다. 이리로 와서 함께 불을 쬐시지요.”

“그럽시다.”

헌원행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신양이 일어나 화로 옆에 앉았고, 한립도 다가갔다.

확실히 불 앞에 앉아 있으니 몸이 훈훈해졌다.

“이 검은 기름은 무엇입니까?”

한립은 비범해 보이는 검은 기름을 보고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그리 귀한 것은 아니고 어떤 인수의 지방을 모아둔 것입니다.”

헌원행이 웃으며 말했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바람이 유난히 세네요.”

다들 더는 묻지 않자 헌원행이 화제를 돌렸다.

“흑연 인근의 산맥이라 종잡을 수 없는 기후를 지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지요.”

신양이 담담히 답했다.

바깥에서는 바람 소리가 더욱 거칠어졌는데, 동굴 안은 밝고 따뜻해서 완전히 딴 세상 같았다.

불을 쬐면서 몸과 마음도 풀어지고 이번 사냥이 그리 어려운 임무도 아니라 세 사람은 편안하게 한담을 나누었다.

밤이 깊어 흥이 다한 그들은 각자 흩어져 헌원행은 동굴 벽에 기대 먼저 눈을 감고, 신양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조식을 했다.

그러나 한립은 졸리지도 수련할 마음도 들지 않아 그저 활활 타는 불길을 보면서 앉아 있었다.

“밤이 깊었는데 잠시 쉬시지요. 내일 사냥이 어렵지는 않겠지만 방심을 해서는 안 될 겁니다.”

언제 눈을 떴는지 신양이 그에게 전음을 보냈다.

“눈에 띄지 않는 곳이지만 언제 인수의 기습이 있을지 모르는데 저라도 깨어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요.”

“하하, 수사는 뛰어난 실력에 조심스럽고 빈틈없는 성격을 지녀서 대허에 들어가서도 큰 공을 세울 수 있을 겁니다.”

“그저 견문이나 넓힐 겸 대허에 들어가 보려는 것인데 큰 공까지 세울 수 있겠습니까.”

“무수히 많은 보물이 있는 곳인데, 정말 원하는 것이 없단 말입니까?”

신양이 의미심장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입니까?”

“오성회무 전에 육화 수사를 찾아갔다는 이야기를 언뜻 들어서요. 그때 천린운정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지요.”

“당시 육화 선배님을 찾아가 어떻게 하면 흑겁충을 제거할 수 있는지 여쭈었습니다. 소식에 정통하시군요.”

한립은 표정 변화 없이 육화를 찾아간 일을 인정했다.

“수사의 뒤를 캔 것은 아니니 오해는 마십시오. 대허에는 천린운정도 있을 겁니다.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신양이 빙긋 웃음 지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려 수사는 적린공경에 머문 시일이 얼마 되지 않아 이번이 처음이겠으나 저는 대허와 같은 비경에 몇 번 들어가 본 적이 있습니다. 수많은 보물 앞에서 우정이니 동료 간의 정이니 심지어 현성과 괴성의 원한까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리지요. 유일하게 변치 않는 것은 이해관계입니다. 똑똑한 분이니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아실 겁니다.”

한립은 여전히 전음으로 은밀하게 말을 걸어오는 신양을 보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허 안에서 개인의 실력보다 중요한 것은 누구와 손을 잡는가입니다. 려 수사야 제가 오래전부터 눈여겨보고 있었느니 저와 힘을 합치겠다면 다른 건 몰라도 천린운정은 약속드리지요.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이 말을 끝으로 신양은 다시 눈을 감았다.

대허 진입을 앞두고 겉으로만 합작 중인 괴성과 현성은 물론 현성 내부에서도 속속들이 자신의 실속을 챙기기 위해 다른 꿍꿍이를 품고 있었다.

신양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아주 잘 알았으나 상대가 원하는 것이 뭔지도 모르고 약조를 하느니 상황을 지켜보는 편이 나았다.

밤이 지나고 해가 떠오르자 바람이 약해지면서 뼈에 스며들던 한기가 조금 가셨다.

“출발하시죠.”

신양이 먼저 출발하고 다음으로 한립이 나섰는데 차가운 아침 공기를 들이마신 그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밤을 지새운 탓인지 뭔가 노곤한 게 기력이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헌원행이 그를 돌아보았다.

“아닙니다. 아무래도 아직 몸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한립은 몇 번 더 숨을 고르면서 체내의 기혈의 힘을 운용해 피로감을 쫓고 표정을 풀었다.

“그렇군요, 가시죠.”

고개를 끄덕인 헌원행도 출발하고 한립도 따라가려다 안색이 변해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과 꽤 멀리 떨어진 어느 산에 괴성의 탁과와 키 작은 난쟁이 사내가 지나가고 있었다.

“몸을 숨기세요!”

신양도 그들을 발견하고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헌원행과 한립도 신속히 몸을 낮춘 다음 그들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괴성 사람들은 여기 웬일일까요?”

“한빙산맥 자체도 특수한 인수들이 서식하고 숨겨진 보물도 많아 온 김에 수색하려는 거겠지요. 우리는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딴 길로 새서는 안 될 겁니다.”

헌원행의 중얼거림에 신양이 담담히 말했다.

“신 수사, 저들을 잘 아십니까? 실력은 어떤 편입니까?”

이때 한립이 입을 뗐다.

“키가 큰 자가 탁과, 작은 자가 무운으로 둘 다 괴성의 최상급 고수입니다. 괴성 사람들은 본인의 실력뿐 아니라 어떤 괴뢰를 데리고 다니는가에 따라 전력 차이가 크게 나서 함부로 얕봐서도 안 됩니다. 겉모습만으로 실력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신양의 말에 한립과 헌원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우린 저쪽으로 가면 됩니다.”

다시 반나절을 걸은 세 사람은 거대한 분지 인근에 도달했다.

돌들이 가득 찬 분지 안에 바람이 불 때마다 작은 곤충들이 움직이는 것 같은 사사삭 하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고, 그 지하로 옅은 남색 안개가 차올라 바람에도 흩어지지 않았다.

“여기가 맞습니다.”

신양이 지도를 꺼내 다시 확인했다.

원형의 분지는 내부가 광활해서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이 잘 보이지 않았다.

* * *

반나절 뒤.

권풍이 일고 설랑(雪狼) 인수의 머리로 주먹이 떨어졌다.

퍽!

머리가 수박처럼 깨진 인수의 육체가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리다 멈추었다.

주먹을 회수하며 머릿속의 요핵을 챙긴 한립은 표정이 굳어 있었다.

이곳은 현성보다 더 의식이 제한되어 겨우 3, 40리 밖에는 살피지 못해 분지 곳곳을 반나절 동안 뛰어다녔지만 다른 인수들만 마주치고, 빙린구여는 흔적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전방에 쌓인 돌덩이들은 크기가 갈수록 커져서 작은 산만한 것도 있었고, 남색 안개도 짙어지는 중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침음하던 한립이 훌쩍 바위 위로 뛰어올라 발끝으로 바위들을 하나씩 찍으며 의식을 퍼트렸다.

분지 내의 인수들이 많아서 이렇게 고공에서 이동하는 것은 위험했지만 빙린구여를 빨리 찾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저건?’

숲의 나무처럼 빽빽하게 솟은 바위들을 따라 이동하던 한립은 사람만 한 인수 한 마리가 한기를 발산하는 맑고 투명한 하얀 광석을 갉아먹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쥐처럼 생긴 머리에 파란색과 하얀색이 교차하는 외뿔이 자라나 있고, 머리부터 긴꼬리까지 남색 비늘 갑옷을 두른 인수는 바로 빙린구여였다!

한립이 방향을 틀어 매처럼 달려드는데 빙린구여가 기민하게 그걸 알아차리고 어린아이 칭얼거림 같은 울음소리를 냈다.

네 다리로 뛰어오른 빙린구여는 잔영을 남기면서 극히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거기 서라!”

낮게 소리친 한립은 두 다리의 현규를 밝히며 별빛으로 만들어진 구름 같은 빛덩이에 몸일 싣고 맹렬히 허공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훅.

공기 중에 파문이 일면서 속도가 급속도로 빨라진 한립은 순식간에 빙린구여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을 수 있었다.

날카롭게 소리를 지른 빙린구여가 기다란 꼬리로 바닥을 내리쳐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간발의 차로 그의 손을 피했다.

탄성을 내뱉은 한립도 허공에서 방향을 틀어 훅, 하고 허공을 박찼다.

동시에 그의 오른손에서 두 개의 빛이 번개처럼 날아갔다.

펑!

빙린구여는 충격에 날아가 바위에 부딪히고, 노한 기색으로 반격을 가해왔다.

파란색과 하얀색이 교차하는 외뿔에서 수정빛이 반짝이자 남색 몸에 하얀 문양이 자라났다.

갑자기 몸이 두세 배는 커진 빙린구여는 역시 기다랗게 자란 두 앞발의 발톱으로 한립을 할퀴었고, 동시에 꼬리가 잔영을 남기면서 한립의 얼굴을 후려치려 했다.

코웃음을 친 한립이 손을 뻗었다.

퍼퍼퍼퍽…….

짐승의 발톱 잔영이 무형의 장벽에 부딪힌 것처럼 흩어지고 꼬리도 한립의 손바닥 앞에서 멈춰 산산조각이 났다.

펑!

몸에서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 빙린구여는 달려들던 속도보다 더 빠르게 튕겨 나갔다.

이에 한립은 흐릿하게 그 옆에 나타나 뿔을 자세히 살피고는 단숨에 잘라냈다.

육화대인의 말로는 대여섯 개는 필요하다고 했는데 신양과 헌원행은 사냥을 잘하고 있는지 의문이었다.

뿔을 챙긴 한립은 주변 바위를 보고 눈을 반짝였다.

“빙린구여들이 이런 하얀 수정돌을 좋아한단 말이지.”

* * *

반나절 뒤, 또 다른 하얀 수정 바위 주변.

비명이 들리고 복부에 큰 구멍이 뚫린 빙린구여 한 마리가 쓰러졌다.

한립은 민첩하게 그 뿔을 취했다.

인수의 습성을 파악하자 사냥 효율이 늘어나 벌써 네 마리째였다.

하늘을 올려다본 한립은 약속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깨닫고 방향을 돌렸다.

하얀 바위가 모여 있는 장소를 찾다 보니 미리 약속한 구역이 아니라 딴 곳에 와있었다.

빠르게 방향을 살피고 몸을 날린 한립은 하늘이 어두워지고 바람이 거세지는 것을 느끼고 서두르다 갑자기 멈춰 섰다.

그의 의식 범위 내에 두 사람이 들어왔는데, 신양과 헌원행이 아닌 탁과와 무운이었기 때문이다.

“저들이 왜 여기 있는 거지? 우릴 몰래 쫓고 있기라도 한 건가?”

재빨리 의식을 회수한 한립은 만규공적술을 발동해 기운을 감쪽같이 숨기고 사라졌다.

소리 없이 그들을 향해 다가가 인근 바위에 몸을 숨긴 그는 탁과와 무운이 한 곳에 서서 주변을 살펴보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누굴 기습하려는 사람들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 시진이 훌쩍 지나갔다.

쉭, 쉭.

파공음이 두 번 들리고 누군가 다가와 탁과와 무운 앞에 섰다.

한립은 눈을 가늘게 떴지만 검은 장포로 몸을 가린 데다 삿갓으로 얼굴까지 가리고 있어 누군지 보이지 않았다.

“너무 늦은 것 아닙니까?”

탁과가 두 사람을 보고 안심하면서 차갑게 말했다. 검은 장포를 입은 두 사람은 말없이 먼저 주변을 살펴보았다.

“일대를 몇 번이나 샅샅이 수색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탁과는 그들이 무엇을 염려하는지 알고 말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액회가 너무 엄격하게 관리해서 신 수사를 데리고 빠져나올 기회를 찾지 못했습니다.”

누군가 삿갓을 내리며 웃으며 말했는데, 그는 다름 아닌 헌원행이었다!

평소처럼 조용하고 위축된 얼굴이 아니라 자신감이 넘치는 태도를 하고 있어 완전 다른 사람 같았다.

옆에 있던 이도 삿갓을 벗어 신양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신양과 헌원행이 여긴 왜?’

방금 헌원행이 한 말로 미루어 보아 미리 약속하고 접선을 한 게 분명했다.

그리고 기회를 찾기 힘들었다는 말은 헌원행이 일부러 재료를 낭비해 재료를 찾는다는 구실을 만들었다는 뜻도 되었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