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973화 (1,730/2,000)

1973화. 보라색 신영

*

괴성 쪽도 바삐 움직이며 거대한 공터를 만들어 각종 재료를 쌓아두고 선박을 만들고 있었다.

한립은 액회 등 다섯 사람과 괴성 쪽을 살피다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그러나 곧 육화부인이 할 일을 지정해 주어 오래 생각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금제 문양을 새기는 데는 특수한 성액(星液)이 필요하다. 너희는 그 배합을 맡는다.”

“예!”

육화부인에게 지목된 서너 명이 대답했다.

“너희는 재료를 다듬고, 또 거기 둘은…….”

현성 사람들은 맡은 임무에 따라 바삐 움직였으나 네 사람만이 아직 어떤 임무도 받지 못해 남아 있었다.

한립과 헌원행이 그랬고, 몸이 마르고 누런 머리카락을 지닌 백암성 청년과 현성의 작고 뚱뚱한 사내도 있었다.

한립은 나머지 둘에 대해 백암성 ‘려강’과 현성 ‘양벌’이라는 이름만 알뿐 다른 것은 알지 못했다.

“저희 넷은 무엇을 하면 좋겠습니까?”

“너희 넷의 의식의 힘이 방대하니 그만큼 중요한 일을 해야겠지. 나를 도와 금제 문양을 새겨 넣게 될 것이다.”

한립의 물음에 육화부인이 그들을 훑고 답했다. 그 말에 한립은 내심 기뻐했다.

성준비주가 어떤 것일지 궁금했는데, 금제 문양을 새겨 넣는 일을 받았으니 연기술의 핵심을 보고 배우는 것과 같았다.

“선배님, 저는 연기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데 무턱대고 맡았다가 중요한 일에 차질이 생길까 걱정입니다. 제가 연기술에 경력이 있는 수사들을 아는데 그들이 저를 대신해 선배님을 돕게 함이 어떨지요?”

헌원행이 주저하다 공수를 하고 말했다.

“성신문자를 새기는 것은 높은 의식 수준을 요구한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인 줄 알았더냐? 너희 넷 말고는 적당한 자가 없으니 네가 하기 싫으면 청양성 신양 성주더러 와서 대신 일을 하라고 전하거라!”

눈을 부릅뜬 육화부인이 불쾌한 내색을 했다.

“아닙니다. 게으름을 피우려는 것이 아니라, 정말 제가 이런 데 소질이 없어 선배님의 일을 망칠까 걱정되어 드린 말씀입니다.”

당황한 헌원행은 연신 공수를 하며 머리를 숙였다.

“걱정 말거라. 복잡한 부분은 너희에게 맡기지 않고, 구석에 간단한 부분만 맡길 것이니 내 지시대로만 하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어쩔 줄 몰라 하자 육화부인은 얼굴을 풀고 담담히 다독였다. 이에 헌원행도 더는 아무 말 하지 않았고, 다른 두 명도 안심했다는 표정이었다.

“네가 걱정하는 것도 당연하다. 적린공경 내에서 금제를 새기는 것은 바깥에서와는 달리 높은 기술을 요구하니까. 일단 이리로 와서 연습해 보거라.”

그들의 표정을 보고 잠시 고민하던 육화부인은 고갯짓을 해 그들을 가까이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팔뚝 절반 크기의 백골 붓을 나눠주었는데, 인수의 송곳니로 만들어진 붓대 중심에 머리카락이 통과할 정도로 미세한 구멍이 뚫려 있어 그 안으로 투명한 주머니에 담긴 은색 액체가 주입되게 되어 있었다.

액체는 육화가 말한 성신지력이 담긴 성액이 틀림없었다.

“성란필(星瀾筆)이라는 것으로 이 안에 담긴 액체가 성액이다. 적린공경 내에서는 선령력으로 진법을 새길 수 없기에 의식의 힘으로 이 성액을 금제진법 안에 주입해야만 한다. 옥간에 간단한 성신문자들이 기록되어 있으니 이 옥판에 새기는 연습을 해보거라.”

육화부인은 그들에게 옥간과 옥판도 하나씩 나눠주었다.

한립이 눈을 반짝이며 의식을 주입해 보니 아주 복잡해서 이전에 보았던 어떤 주술문자와도 다른 문양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성신문자는 외부의 주술문자와는 달리 각인이 어려울 것이다. 내가 방법을 일러줄 터이니 잘 숙지하도록.”

육화 부인은 진지한 얼굴로 네 사람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교육은 몇 시진이 지나서야 겨우 끝이 났다.

연기술에 기초가 탄탄한 한립은 낯선 성신문자를 익히는 데도 깨달음이 빨랐다.

헌원행 등 다른 세 사람은 경험이 부족해 한립보다 배움이 느리기는 했지만 그들도 수행이 높아 서서히 익숙해지는 듯했다.

육화부인이 보는 앞에서 그들은 각자의 옥판에 작업을 시작했다.

성란필에 의식을 주입한 한립은 성액을 섬세하게 조종하면서 손목을 유려하게 움직여 빠르게 문양을 만들어갔다.

은빛이 붓끝에서 퍼져나가 옥판에 각인 되었다.

그의 말대로 의식의 힘이 꽤 많이 소모되는 작업이었다. 성란필은 밑 빠진 독처럼 그의 의식의 힘을 빼앗아 갔다.

팟.

옥판의 문양들이 점차 늘어가고 완전한 성신문자가 완성되자 성신문자가 밝게 빛나다 빠르게 어두워졌다.

무형의 금제의 힘이 은은하게 느껴졌다.

“오, 빠르구나. 연기술에 제법 재능이 있어.”

“이전에 이 방면으로 수련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육화부인의 칭찬을 듣고 한립은 솔직히 답했다.

“성신지력이 고르게 분포되어 있고 문양도 정확하고 오차가 없어. 너는 더 복잡한 성신문자를 연습해 보아도 되겠다.”

한립과 달리 다른 세 사람은 네다섯 번 정도 연습하고서야 완벽한 성신문양 하나를 새길 수 있게 되었다.

육화부인이 인내심을 가지고 그들이 부족한 부분을 상세하게 짚어주자 그들의 실력도 빠르게 늘어갔다.

* * *

보름 뒤, 괴성 사람들이 성준비주의 골격을 만들어냈다. 아직 선박이 완성되려면 멀었지만 금제 작업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성준비주의 설계도이다. 대충 살펴보고 나면 내가 후에 자세히 설명해 줄 것이야. 운 좋은 줄 알거라! 다른 때 같았으면 절대 볼 수 없는 물건이니.”

육화부인이 네 사람에게 옥간을 하나씩 나눠주면서 아깝다는 듯 말했다. 그 말에 그들은 쓴웃음을 지으며 설계도의 내용을 살폈다.

옥간에 의식을 주입한 한립은 새의 모양을 한 선박에 성신문자들이 가득한 도면을 보면서 마음이 요동쳤다.

육화부인에게 기초적인 성신금제를 배우고 이전의 연기술이나 진법에 대한 지식이 더해져 어느 정도 도면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건 방어용이 아니라, 무언가를 소환하기 위한 것 같은데…….’

한립이 의문을 품는 동안 헌원행 등 나머지 세 사람은 그런 것도 모르고 구석의 간단한 부분부터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보고 있었다.

“자, 이제 중요한 부분을 설명해 주겠다.”

육화부인은 다시 설명을 시작했고 한립은 정신을 집중했다. 육화부인의 설명에 대략적으로만 이해가 가던 도안이 더욱 분명하게 다가왔다.

한립을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얼떨떨한 얼굴이었지만 육화부인은 몇 번이고 상세하게 풀어서 설명을 해주었다.

“됐으면 이제 가자!”

육화부인은 한립을 제외한 세 사람에게 눈을 부라리고 먼저 선박으로 향했다.

괴성 사람들은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은근히 적의를 드러냈지만 나서서 막지는 않았다.

“오셨습니까! 성준비주의 주요 뼈대는 잡혔으니 이제 육화 수사와 다른 수사들께서 수고를 해주셔야겠습니다.”

검은 갑옷을 입은 잘생긴 청년 탁과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다가와 인사했다.

“알겠네.”

냉담하게 고개를 끄덕인 육화부인은 더는 그를 상대하지 않고, 바로 한립 등에게 명을 내렸다.

“내가 선박 바닥을 받치는 용골(龍骨)의 진법을 새길 것이다. 려비우, 너는 실력이 가장 좋으니 홀로 좌현을 맡고, 려강과 양벌이 우현을 그리고 헌원행이 선미를 맡아 작업하거라.”

“예!”

네 사람은 시키는 대로 신속하게 작업에 착수했다.

탁과는 그들의 냉대에도 화내는 기색 없이 미소를 유지하고 있다가 한립을 보고 웃으며 말을 걸었다.

“려 수사, 안녕하셨습니까?”

“앞으로 쌍방이 협조할 부분이 적지 않겠습니다.”

“유쾌한 작업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립이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아주니 탁과가 밝게 웃었다. 그들이 몇 마디 나누는 사이에 적잖은 시선이 집중되었다.

한립이 예전에 구해주었던 검은 치마를 입은 두 여인을 제외한 괴성 사람들은 대부분 적의를 담아 냉랭한 눈빛을 보냈고, 헌원행 등 현성 사람들도 인상을 찌푸려 갑자기 긴장감이 감돌았다.

“려비우, 지금 한가롭게 떠들 때더냐! 어서 일이나 하거라.”

육화부인이 바로 질책을 했다.

한립은 대수롭지 않게 탁과를 향해 미소를 보이고는 알겠다고 답한 다음 좌현으로 향했다.

주술문자 각인을 시작한 한립은 곁눈질로 청년의 뒷모습을 쫓았다.

원래는 그와 가까워져 자령의 소식을 물을까 했는데 아직은 때가 아닌 듯했다.

괴성의 막사 쪽도 특수한 재료로 만들어졌는지 의식을 차단해 내부를 염탐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육화부인을 포함한 다섯 사람은 밤낮없이 작업해서 보름이 채 지나기 전에 선박의 주요 뼈대에 금제 진법을 거의 다 새겨 넣었다.

그렇다고 해서 성준비주의 진법이 완성되었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열심히 진법을 새기던 한립이 성액이 떨어져 보충하러 가려는데, 괴성 막사 안에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액회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놀랄 일도 아니었다.

반나절 전에 액회가 신양 등을 데리고 괴성 막사로 간 뒤로 이야기가 술술 잘 풀리는지 자주 그런 소리가 들려오고는 했다.

액회 일행이 막사를 빠져나온 뒤, 탁과를 대동한 사심 뒤로 네다섯 사람이 따라 나와 그들을 배웅했다.

돌연 얼굴이 굳은 한립은 사심 곁의 보라색 인영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여리여리한 자태를 지닌 여인은 검은 삿갓에 검은 면사로 얼굴을 전부 가리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자령과 느낌이 비슷했다.

한립은 다가가서 확인하고 싶었지만, 보라색 인영은 사심에게 무어라 한 마디를 건네고 막사 안으로 몸을 돌려 버렸다.

급한 마음에 한립이 무의식중에 걸음을 옮겼다.

“멈추십시오. 이쪽은 괴성의 막사라 외부인은 드나들 수 없습니다!”

금색 장포를 입은 청년이 갑자기 나타나 그의 앞을 막아섰다.

“신양 성주님께 볼 일이 있어 뵈려던 것인데, 의도치 않게 무례를…….”

반사적으로 사과를 하려던 한립이 금포 청년을 자세히 보고 말을 멈추었다.

살아 있는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생겼지만 생기라고는 전혀 없는 청년은 해 도인과 같은 괴뢰였다. 눈빛이 죽어 있고 표정이 멍한 것이 해 도인보다는 급이 한참 떨어졌다.

“물러서 주세요.”

금포 괴뢰의 경고에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현성 주둔지로 발걸음을 옮겨 성액을 한 병 취해 선박으로 돌아왔다.

“려비우, 다시 한번 경고하는데 진법을 새기는 데만 집중하거라. 다른 일에는 신경 끄고!”

육화부인이 그런 그를 막아서고 혼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제가 맡은 부분은 곧 마무리가 될 듯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공손하게 답했다.

그를 째려본 육화부인이 더는 뭐라 하지 않고 자신의 할 일을 하러 가는데 한립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일부러 괴성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것을 모를 줄 아느냐. 현성과 괴성은 물과 불처럼 섞일 수 없는 사이니 간자로 의심받고 싶지 않으면 그만두거라!”

힐끗 그를 본 한립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할 일을 하러 갔다.

다섯 사람이 바삐 움직여 그로부터 사흘 후 해가 질 무렵, 주요 골격의 진법 작업이 끝났다.

그동안 쉬지도 못하고 성신문자를 새기느라 다들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고생 많았다. 이제 괴성 사람들이 성준비주를 마무리해야 나머지 작업을 이어갈 수 있을 테니 한동안 쉬도록 하거라.”

육화부인은 그들을 대하는 태도가 한결 온화해져 있었다.

“예.”

헌원행 등 세 사람이 대답하고 각자의 거처로 가는데 육화부인이 한립을 불러 세웠다.

“괴성 사람과 접촉하려는 목적이 무엇이냐?”

그를 쳐다보는 육화부인의 표정은 아주 진지했다.

“제가 원하는 재료가 있는데 괴성에만 있다고 하기에 거래할 수 있을까 해서 원만히 지내보려 한 것입니다. 일에는 차질이 없게 할 것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노부가 그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믿을 것 같더냐? 목적이 뭔지는 상관없다만, 현성과 괴성의 원한은 쉽게 풀릴 게 아니라는 것만 명심하거라.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손을 잡았지만 대허에 진입하는 즉시 양측은 태도가 돌변할 것이야. 현명하게 괴성 사람들과 거리를 두어 다른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말란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현성이 넓다 하나 앞으로 현성에서 네가 설 자리는 없을 것이야.”

냉정한 말이었지만 한립은 상대가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마음이 따뜻해졌다.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육화부인이 그대로 가버리고, 그 자리에 잠시 서 있던 한립도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 * *

어느 날 밤, 어둠이 짙게 드리웠을 때 누군가 소리 없이 막사에서 빠져나와 산봉우리의 그림자에 숨어 현성 주둔지를 벗어났다.

괴성 막사 쪽으로 향하는 흐릿한 그림자는 어떤 기운도 발산하지 않아 유령 같았다.

괴성 막사 앞 바위 뒤에 멈춘 그림자는 바로 한립이었다.

며칠 전 보았던 보라색 신영을 떠올릴수록 어떻게 해도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어 위험을 감수하고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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