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972화 (1,729/2,000)

1972화. 단독행동

*

어느 날 밤, 석전을 나온 한립은 달빛이 비치는 서늘한 골짜기를 둘러보다 역시 석전을 빠져나오는 골천심을 발견했다.

두꺼운 짐승 가죽을 덧댄 외투를 걸쳐서 이전보다는 훨씬 따뜻해 보였다.

“무얼 보고 있으셨나요?”

골천심은 한립이 빤히 바라보는 게 조금 민망했던지 급히 물었다.

“그 가죽 외투는 어디서 나신 겁니까?”

“아, 며칠 전 비늘 대신 털이 자란 요수들이 습격했었거든요. 그중 몇 마리를 죽이고 가죽을 벗겨와 만든 거예요. 모르셨나 보네요?”

“소란이 있던 것은 알았는데, 마침 수련 중이라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현규를 뚫던 찰나라 요수가 습격한 것을 알고도 나서지 않았다.

“그랬군요. 골짜기 내부가 너무 추워서 일행 중 몇몇은 동상을 입어 피부가 갈라지고 터지고 하던데 맨몸으로 나와 계시고 대단하시네요. 게다가 이런 온도에 앉아 수련도 하시고요.”

“아닙니다. 그런데 며칠 전 습격했던 요수들의 실력은 어땠습니까?”

한립은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강했어요……. 이전에 습격하던 것들과 비교해 10배는 강하더군요. 가장 평범한 것들이 현급 요수여서 현성의 수사 한 명은 방심하다 천급 요수에게 다리를 물려 오린상에서 떨어져 끔찍하게 죽었지요.”

골천심은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몰랐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다들 요수의 습격을 경계하고 있어요.”

“길이 험해지고 있군요.”

앞쪽을 바라보며 한립이 탄식했다.

부대는 비탈을 따라 산등성으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그래도 가야죠. 여기까지 어렵게 왔는데 대체 대허에 어떤 진귀한 보물이 있을지 꼭 봐야겠어요.”

“하하, 우리가 실망하지 않을 정도는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름 그대로 그냥 커다란 폐허면 얼마나 낭패겠습니까.”

“또 불길한 소릴!”

한립의 농에 골천심이 그를 흘겨보고 거처로 들어갔다. 그녀가 들어가자 미소를 거둔 한립은 어둠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 * *

이튿날 아침 해가 떠오르기 시작할 무렵, 무리는 가파른 절벽을 타고 올라가 산허리의 좁은 산길을 지나고 있었다.

너무 협소하고 길이 좋지 않아 선두에 선 인수와 괴뢰가 길을 트는데도 속도가 나지 않았다.

쿠르릉!

계곡 아래에서는 벼락이 내리치는 것 같은 소리가 쉼 없이 들려와 인수의 등에 탄 사람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하얀 안개가 자욱하게 낀 골짜기에서 천둥소리와 함께 안개들이 꿈틀거렸고 차가운 강풍이 몰아쳤다.

“또 옵니다! 다들 조심하세요!”

누군가 소리치자 다들 현규를 밝히고 나섰다. 이에 오린상 등 위에 선 단통이 통현비 신통을 제련한 오른손을 들어 뒷발을 박차며 안개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쿵!

단통의 주먹에서 별빛이 소용돌이치며 엄청난 압력이 전해지자 강풍에 휩쓸려 올라온 하얀 안개들이 흩어졌다.

그와 거리를 두고 선 다른 오린상 위에 있는 돼지머리 소년 방선은 여전히 왼손에 짐승 다리를 들고 으적으적 뜯어먹고 있었다.

그는 힐끗 그를 향해 다가오는 하얀 안개를 살피며 흥이 깨졌다는 듯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돌연 눈빛이 사나워지며 기름진 짐승 다리를 거두고 하얀 안개를 향해 입을 벌려 강력한 음파를 방출했다.

음파와 하얀 안개가 충돌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한립이 멀리서 아직 다 흩어지지 않은 안개를 지켜보다 급히 소리쳤다.

“조심하십시오!”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검은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와 비늘이 가득한 구렁이 머리로 변해 커다란 입으로 방선의 머리를 물어뜯으려 했다.

절벽 아래에 숨어 있던 구렁이 인수는 안개에 가려 몸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머리가 오린상만큼 커서 한입에 거대 인수를 삼킬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평소 바보처럼 보이던 방선은 그 순간, 누구보다 기민하게 움직였다. 한립의 충고를 들은 그는 진작 펄쩍 뛰어올라 구렁이 인수보다 먼저 입을 벌렸다.

후오오-

하얀 별빛이 찬란한 파동을 이루어 구렁이 인수의 머리를 향해 퍼져나갔다.

갑자기 머리에서 피가 솟은 구렁이 인수는 비늘들이 대량으로 떨어져 나간 채 쿵! 소리를 내며 오린상의 등으로 떨어졌다.

쿠콰쾅!

오린상 등에 있던 검은 석전이 부서지자, 방선과 같은 석전에 머물던 두 명의 백암성 수사들이 서둘러 뛰어올라 절벽에 달라붙었다.

구렁이 비늘과 부딪친 오린상은 뜻밖에도 주저앉지 않고 깜짝 놀라 앞발을 들어 올리며 뒤로 물러나다 뒤에서 따라오던 인수 괴뢰와 충돌했다.

예기치 못한 충격에 인수 괴뢰는 몸을 가누지 못했고, 그 아래 절벽 길이 허물어지면서 남색 수정 암석 틈으로 추락하려 했다.

파앗!

그때 그 위에 타고 있던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검은 치마를 입은 여인 둘이 허공에서 부단히 손을 움직이며 팔에 찬 백골 팔찌에서 화려한 빛을 발했다.

험악하게 생긴 인수 괴뢰가 떨어져 내리는 암석 틈에서 발버둥 치며 어떻게든 다시 위로 올라가려 했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었다.

그걸 안 두 여인은 어쩔 수 없이 가볍게 인수 괴뢰의 등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 순간 이변이 발생했다.

키에엑!

방선에게 당한 구렁이 인수가 어찌 된 일인지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입을 벌려 뼈가 시린 남색 빛을 분출한 것이다.

허공의 공기가 얼어붙으며 두 여인을 향해 날아들었다.

막 절벽 위로 올라오려던 두 괴성 여인은 한기에 휩싸여 연달아 두 팔을 움직여 한기를 막으려 했다.

한립은 그들의 팔에서 적잖은 현규가 반짝이는 것을 보고 그들도 부지런히 연체술을 익혀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실력이 단통이나 방선보다는 못해서 남색 한기는 결국 그들의 몸에 들러붙어 하반신을 결박했다.

추진력을 잃어버린 그들은 결국 절벽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걸 본 한립은 미간을 좁히고 번득 사라졌다. 골천심이 말리려 했을 때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허공에서 연달아 펑펑 소리가 들렸고 한립은 허공답보를 해 괴성 여인들을 따라붙었다.

두 다리의 현규가 엄청난 빛을 뿜어 속도를 극성으로 높여 주었고, 왼손과 오른손으로 두 여인의 팔을 잡아챈 그는 다시 뛰어올라 몇 번의 뜀박질 만에 절벽 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때 등에 창을 교차해서 멘 잘생긴 청년이 날아들었다.

그는 한립이 괴성 여인들을 구한 것을 보고는 의외라는 얼굴로 등에서 창을 하나 뽑아 팔뚝의 근육을 폭발적으로 일으켜 휘둘렀다.

펑!

백골 창에서 눈부신 은빛이 터지며 은하수가 구렁이 인수의 머리로 떨어졌다.

은빛은 구렁이 인수의 머리를 푹! 뚫었고 잘생긴 청년은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두 손가락을 모아 까딱였다.

푸확!

창에 연결되어 있던 하얀 실이 구렁이 인수의 머리를 수박처럼 쪼개 피와 살이 튀는 소리가 울렸다.

잘생긴 청년의 손짓에 다시 돌아온 창에는 초승달 모양의 날에 완벽하게 도려낸 주먹 크기의 요핵이 걸려 있었다.

구렁이 요수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잘생긴 청년이 돌아와 한립의 손에서 두 여인을 건네받았다.

“저는 탁과라 합니다. 도움을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려비우라고 합니다.”

탁과가 웃으며 묻는 말에 한립이 답했다.

“지급 요핵입니다. 감사의 뜻이니 받아주십시오.”

한립은 탁과가 던져주는 구렁이 인수의 요핵을 거절하지 않고 받았다. 그리고는 곧바로 포권을 하고는 골천심 옆으로 돌아왔다.

“재미있는 사람이군.”

탁과는 미소를 지으며 두 여인을 데리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한립이 오린상 위로 돌아오자 골천심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섰다.

“경솔하셨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우리와 괴성은 철천지원수입니다. 당장 달려들어 죽이지는 못해도 서로 구해줄 사이는 아니란 뜻이지요. 다들 수사를 배신자라 여길지도 모릅니다.”

골천심은 전음으로 충고했다.

주위를 돌아보니 역시 현성 사람들이 호의적이지 않은 눈빛을 보내고 있었는데 돼지 얼굴 소년 방선만이 헤벌쭉 웃음을 지어 보였다.

평소의 천진한 척하는 상태인 건지 아니면 그가 위험을 경고해준 고마움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시선을 거둔 한립이 골천심에게 전음으로 답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곳입니다. 쌍방이 진심으로 힘을 합치지 않으면 고난이 닥쳤을 때 서로에게 좋지 못할 거예요.”

이렇게 말했지만 실은 현성에서 자령의 소식을 알아내지 못해 괴성 쪽에 일말의 여지를 남겨두기 위해서 그렇게 행동한 것이었다.

소란이 지나고 두 무리는 더욱 조심스럽게 절벽을 따라 길을 지나갔다.

그럼에도 수백 마리의 표범 떼와 한기를 지닌 인수들이 여러 차례 습격해와 이동속도가 더디기 이를 데 없었다.

그렇게 몇 고개를 지나 그들은 드디어 산맥 깊은 곳의 거대 협곡 앞에 이르렀다.

현성 사람들과 괴성 사람들은 협곡을 경계로 왼쪽과 오른쪽에 각자 짐을 풀었는데, 협곡 안은 남색과 붉은색이 반반씩 한기와 열기를 방출해 흑연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흑연 주변에 공간균열들이 모여 있는 모습은 여전히 무시무시했다.

* * *

저녁 무렵 한립과 골천심은 막사를 나와 협곡 입구로 갔다.

“액 성주는 육화부인과 사심 성주를 만나러 간 것입니까?”

“맞아요, 이곳에 임시로 막사를 짓게 하고 바로요.”

한립의 물음에 골천심이 협곡을 바라보며 답했다.

“이곳이 바로 대허로 들어갈 입구인가 봅니다.”

“환경이 특수해서인지 공간 폭풍이 바깥보다 약하기는 하네요.”

쿠르릉…….

골천심의 말이 끝나자마자 협곡 안쪽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붉은 화염들이 솟아오르고 남색 삭풍이 불면서 기름에 물을 부은 듯 격렬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얼음과 불이 맞붙어 하얀 돌풍을 이루고 몰아치는 모양새였다.

협소한 계곡 안에서 이런 하얀 돌풍들이 상승하며 공간 폭풍과 대항했다.

“돌풍으로 길을 트면 확실히 그냥 지나가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아무 대책도 없이 맨몸으로 통과하라고 하지는 않겠죠. 성주들끼리 만났으니 곧 결정을 내릴 거예요.”

“하긴 우리가 신경쓸 문제는 아닐 겁니다.”

골천심이 작게 웃음 짓자 한립도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평온한 얼굴을 했지만, 시선은 공간 폭풍이 약해진 부분을 넘어 흑연의 끝에 보이는 하얀 대륙에 가 있었다.

저게 ‘대허’란 말인가?

* * *

밤이 지나고 다음 날 해가 떴을 때, 사람들은 막사를 거두고 공터로 모였다.

“흑연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는 보면 알거라 생각한다. 현성의 힘만으로는 이곳을 지날 수 없을 테니 두 성이 힘을 합쳐 난관을 극복해야 할 것이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괴성과의 충돌을 엄히 금한다. 모든 건 대허로 진입한 이후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

액회의 말에 현성 사람들은 속마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힘차게 답했다.

“성주님, 흑연을 지날 방도는 찾으셨는지요?”

백암성 성주 손도가 입을 열었다.

“허허, 안심들 해도 되네. 나와 육화 수사 그리고 괴성의 사심이 논의를 마쳤으니.”

“흑연에서 가장 위험한 요소는 모든 것을 빨아들여 집어삼키는 힘입니다. 다행히 위쪽의 공간 폭풍은 산맥의 특수한 환경 때문에 약해졌고요. 노부는 액 성주님, 괴성 사심성주와 논의 끝에 성준비주(星隼飛舟)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능한 성신 금제와 괴성이 능한 괴뢰기관술을 더해 만든 대형선박으로 흑연을 건너게 되는 겁니다.”

액회의 눈짓에 육화부인이 앞으로 나서서 설명했다. 현성 사람들은 그리 놀라지 않고 분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성준비주의 본체는 괴성이 맡고, 우리는 선박에 금제를 각인하는 작업을 진행할 것이다. 앞으로 모두는 육화 수사의 지시에 따르면 될 것이야.”

액회는 여기까지 말하고 육화부인에게 뒷일을 맡긴 뒤, 신양 등 네 성의 성주를 모아 전음으로 상의를 시작했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