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970화 (1,727/2,000)
  • 1970화. 대허(大墟)

    *

    “려 수사, 기다렸습니다. 앉으세요.”

    신양이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뭔가 들뜬 모습이어서 한립은 티 나지 않게 해 도인을 살피고 골천심과 헌원행 옆의 빈자리에 앉았다.

    “오늘 세 분을 부른 것은 막대한 기연에 대해 상의하기 위해섭니다.”

    “기연이요?”

    한립은 물론 다른 이들도 흠칫 놀랐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인 것은 압니다. 이렇게 말하면 알아들을지 모르겠군요. 수많은 보물이 쌓여 있는 적린공경 내 비경에 액회 성주께서 오성회무를 중단하는 대신 16강에 오른 이들을 데리고 함께 수색하러 가시기로 하셨습니다.”

    신양이 웃음 짓는 것을 보며 한립은 어리둥절했다.

    ‘갑자기 웬 비경과 보물이란 말인가?’

    “정말입니까, 성주님!”

    한립과 반대로 옆의 골천심과 헌원행은 격동했다.

    “물론입니다.”

    “성주님,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지요?”

    침음하던 한립이 물었다.

    “려 수사께서는 적린공경에 머문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적린공경 안은 무척 신비로워서 우리 현성에서 오랜 세월 탐색했지만, 아직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곳이 많습니다.

    적린공경 깊은 곳의 허공에서 변화가 일어나면서 수많은 보물이 숨겨진 비경이 나타나는데, 현성으로 흘러들어오는 최상급 보물이나 이번 대회의 상품인 천린운정, 유염혈운 같은 것들도 사실 그곳에서 찾은 겁니다.

    이번에 나타난 것은 백만 년 만에 가장 거대한 비경으로 그 안에서 얻을 수 있는 기연이 무궁무진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신양의 설명을 듣고 한립도 가슴이 뛰었지만 차분한 표정을 유지했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습니다. 기회가 많은 곳인 만큼 위험하겠군요?”

    “자연히 그런 비경들에는 알 수 없는 위험들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세 분 다 신중하게 고민하시고 결정하시면 됩니다. 함께 가기를 원치 않으시면 강요하지 않을 생각이고요.”

    신양의 말이 끝나고 세 사람은 침묵했다.

    한립은 고민하다 슬쩍 해 도인을 보았는데, 고개를 숙인 해 도인이 미세하게 손끝을 움직이는 게 보였다.

    “성주님,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며칠 전 괴성이 갑자기 병력을 끌고 와 전투를 벌이지도 않고 돌아간 것으로 아는데 이번 비경 탐사와 연관된 일인지요?”

    “려 수사의 짐작대로입니다. 괴성은 비경을 위해 이곳에 온 것이었어요. 그들은 우리와 함께 비경에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신양이 한립을 보고 답해주었다. 그 말에 골천심과 헌원행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괴성과 현성은 명백히 적이었다.

    비경 어느 곳에서 만나도 서로 목숨을 걸고 죽이는 사이인데, 그들과 함께 비경에 진입하면 위험이 몇 배로 늘어나는 것과 같았다.

    “성주께서 그리 중요하게 여기는 비경이라는 곳을 저도 한번 보고 싶군요.”

    한립은 그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골 수사와 헌원 수사는 어떻습니까?”

    신양은 그가 동참하는 것에 속으로 좋아하며 골천심과 헌원행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올지 모르는데,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헌원행도 길게 숨을 내쉬며 동의했다.

    “려 수사와 헌원 수사가 가는데 저도 물러날 수 없겠네요.”

    골천심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활짝 웃으며 답했다.

    “아주 잘 되었습니다. 세 분 모두 가주신다면 청양성이 다른 성에 밀리지는 않을 거예요. 거처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시면, 차후에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아, 이건 당분간 비밀이니 다른 이들에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신양의 마지막 말에 세 사람은 알겠다고 하고 자리를 떠났다.

    보름이 지나 어느 새벽.

    성주부 안, 드넓은 백석 광장에 열댓 명이 다섯 무리로 나뉘어 서 있었다.

    가장 왼쪽 무리가 수가 가장 많아 다섯으로 하얀 뼈 갑옷을 입은 현성의 주자원과 주자청 오누이가 대장이었다.

    “이번 일은 평소와는 달라. 넌 원래 선발된 16명 중에 들지 못했으니 현성에 남아서 기다려.”

    인상을 찡그린 주자원이 누이를 설득하려 했다.

    “상관없어요. 무조건 오라버니랑 같이 갈 거예요. 그리고 성주 대인께서 허락하신 일을 오라버니가 어떻게 하려고요?”

    주자청은 씩 웃음 지었다. 주자원이 액회의 말이라면 절대 거스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서였다.

    그 옆의 세 사람은 돼지 얼굴을 한 소년 방선을 대장으로 한 백암성 무리였다. 그는 오늘도 기름진 짐승 다리를 뜯으며 천진하게 웃고 있었다.

    또 그 옆으로 현지성 무리가 약간 처진 분위기로 서 있었다.

    대장인 풍무진은 음울한 표정으로 곁의 두 사람과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가끔 청양성 쪽을 살폈다.

    보름의 요양으로 중상에서 회복한 그는 어떻게 한 것인지 오른팔도 새로 붙여 하얀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그 옆으로 한립을 비롯한 청양성 세 사람이 서 있고, 그 오른쪽에 통여성 세 사람이 있었다.

    “골 수사, 성주부에서 16강에 오른 이들을 모이게 한 것으로 보아 출발하려는 모양인데 어디로 가는지 아십니까?”

    한립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오성회무를 중단한 것도 기이한 일인데, 거기다 현성과 괴성이 결맹을 맺었잖아요. 모든 일이 기밀이라 어떤 정보도 알지 못합니다.”

    “현성과 괴성이 손을 잡고서만 들어갈 수 있는 비경이 어떤 곳일지…….”

    듣고 있던 헌원행이 걱정스레 말했다.

    “신양 성주가 이번 일은 실력자만 대동할 수 있어서 16강에 든 사람 중에서도 원하는 자만 가라고 했잖아요?”

    골첨심이 웃으며 물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번 일정은 위험한 만큼, 그로 인해 얻게 될 이익도 막대하지요. 누가 그런 기회를 놓치겠습니까.”

    헌원행은 쓴웃음을 지었다.

    한립은 아무래도 상관없었고, 흑겁충 해결법과 석천공, 자령의 행방만 알아내면 그만이었다.

    오성회무가 중단되면서 육화부인과의 약속도 이행하기 어려웠고, 일단 현성을 떠나면 석천공의 소식도 얻을 수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데 광장으로 십여 명의 사람들이 더 들어왔다.

    그 맨 앞에 현성 성주 액회가 서 있고, 신양 등 네 부속성의 성주들과 육화 부인이 일렬로 따랐다.

    그러나 한립의 눈은 그들 뒤의 다섯 사람에게 향해 있었다.

    신양을 쫓는 해 도인, 육화부인 뒤의 매부리코 사내를 시작으로 다섯 사람을 훑던 한립은 검은 경장차림에 뼈로 만든 하얀 가면으로 얼굴을 가려 보랏빛 눈만 내놓은 사내를 보고 미미하게 안색이 달라졌다.

    약간 구불구불한 백발을 지닌 사내는 석천공이었다!

    한립이 더없이 반가운 마음에 전음을 보내려는데, 신양이 그를 돌아보며 함부로 그러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자세히 보니 석천공의 눈빛이 멍했고 걸어가는 내내 앞만 보고 있었다.

    “왜 그러죠?”

    골천심은 갑자기 달라진 한립의 얼굴을 보고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갑자기 옛날 생각이 떠올라 잠시 넋을 놓았군요.”

    한립은 미소를 지으며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돌아왔다.

    “각 성의 성주들이 미리 고지를 했을 것이야. 이번 오성회무를 중단한 것은 괴성이 침입했기 때문이 아니라 대허(大墟)가 나타나 현성과 괴성이 힘을 합쳐 탐색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오성회무에서 16강에 든 이들은 이번 탐색의 주력으로 우리와 함께 대허에 진입하게 된다.”

    액회가 광장의 대(臺)로 올라가 직접 그들을 모은 이유를 밝혔다. 다들 안색이 달라져 기뻐하거나 걱정스러워했다.

    이에 한립이 의아한 얼굴로 전음을 보냈다.

    “골 수사, 대허가 무엇입니까?”

    “대허를 모르십니까? 대허란 적린공경의 가장 특수한 구역으로 대량의 보물들이 숨겨져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현성과 괴성이 오랜 세월 찾으려 노력했는데, 그게 지금 나타날 줄은 몰랐네요.”

    골천심이 놀랐다는 듯 전음으로 답했다.

    한립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수시로 석천공을 살폈다.

    “갈 길이 멀고 위험이 따를 테니, 마음을 정하지 못한 이들은 지금이라도 물러나도 좋다. 일단 성을 나선다음 달아나면 큰 벌을 받게 될 것이야.”

    액회는 광장에 모인 이들을 훑었으나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다들 의지가 굳건하니 큰 수확을 거두기를 바라겠다. 출발 전 당부할 것은 단 하나다. 괴성과 잠시 힘을 합치기는 하나 경계심을 늦추지 말고 현성 수사들끼리 똘똘 뭉쳐야 할 것이야.”

    “예!”

    그렇게 한 시진이 지나 현성의 커다란 성문이 천천히 열리고, 열댓 마리의 거대 인수들이 빠져나왔다.

    맨 앞에 선 머리는 소, 몸은 악어를 닮은 높이가 백 장에 이르는 거대 인수가 등에 돌로 만든 검은 궁전을 지고 있었다.

    제법 화려한 석전은 액회의 행궁이었다.

    뒤이어 열댓 마리의 거대 오상린도 검은 석전을 지고 있었으나 액회의 행궁에 비해서는 간소했다.

    신양은 해 도인을 데리고 홀로 석전 하나를 썼고, 한립 등 세 명이 같은 석전을 공유했다.

    석전의 크기는 비교적 작았지만 세 사람이 각자 하나씩 방을 쓰고도 남는 공간이 많았다.

    한립은 현성에서 출발한 뒤 바로 들어가 쉬지 않고, 오린상 등 위에서 현중산맥을 바라보았다.

    일각이 지나 산맥을 벗어나고 나서야 시야가 확 트였다.

    처음으로 높은 곳에서 일대를 바라본 한립은 탄성을 내뱉었다.

    산맥의 다른 쪽 비탈에 열댓 마리의 오린상들이 서 있었는데, 비늘 갑옷을 두르고 요핵이 박힌 거대 인수들은 생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전부 괴뢰들…….’

    이때 괴성 무리에서 누군가 날아올라 앞으로 나섰다.

    검은 갑옷을 입은 잘생긴 청년이 뼈로 만든 장창 두 개를 교차해서 메고는 허공에 서 있었다.

    마기나 선령력이 없는 적린공경에서 그런 모습을 보기란 무척 힘들었기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적잖은 이들이 석전에서 나와 구경했다.

    주자청이 그녀의 오라버니와 같이 한쪽에 서서 청년을 올려다보며 감탄했다.

    “와, 엄청 잘생겼다!”

    “무슨 소리냐. 저들은 현성의 적이다.”

    주자원이 곧장 그녀를 질책했다.

    “알겠어요…….”

    주자청도 더는 장난치지 못하고 진지하게 답했다.

    한립은 온화한 미소를 띤 잘생긴 청년을 올려다보며 어색한 기분을 느꼈다.

    고공의 구름층을 보고서야 청년 머리 위의 구름만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현성의 성주님들과 수사분들, 사심 대인께서 하신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불필요한 오해와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괴성과 현성 부대는 각각 앞뒤로 간격을 두고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내 같기도 하고 여인 같기도 한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다 현성의 주자원이 명령을 들은 듯 대답했다.

    “돌아가 알려주시지요. 저희 액회 대인께서 동의하신답니다.”

    잘생긴 청년이 주자원을 향해 포권을 하고 몸을 돌렸다.

    그때 한립은 고공의 구름에서 검은 그림자가 괴성 부대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구름을 벗어난 것은 거대한 익린조(翼鱗鳥)였다.

    가슴에 요핵이 박힌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괴뢰는 잘생긴 청년의 조종을 받아 자유롭게 움직이는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괴성 부대에서 호각 소리가 들리고, 거대 인수 괴뢰들이 일어나 출발했다.

    현성 부대도 수백 장 거리를 두고 천천히 그 뒤를 따라갔다.

    * * *

    한밤중.

    수련하다 자리에서 일어난 한립은 석전 바깥으로 나갔다. 그는 오린상 등에서 펄쩍 뛰어올라 전방의 다른 오린상으로 옮겨탔다.

    그가 석전 앞에 이르자 신양의 목소리가 들렸다.

    “찾아올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말에 한립은 바로 석전 대문을 열고 들어가 해 도인의 안내로 어느 방으로 향했다.

    “앉으세요.”

    방으로 들어서자 신양이 자리를 청했다.

    “신 수사, 오늘…….”

    “지금의 석공 수사는 려 수사가 알던 사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한립이 묻기 전에 신양이 탄식하며 이야기를 꺼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그게……. 두청양이 석공 수사를 현성으로 보낸 일 자체가 비밀리에 이루어져 저도 자세한 내용은 모릅니다. 그런데 현성에서 다시 보니 완전히 느낌이 달라져 있더군요. 마치, 괴뢰처럼 말입니다.”

    신양의 말에 한립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냥 느낌일 뿐이기는 합니다. 어찌 되었든 함부로 접근하는 것은 현명한 행동이 아닐 겁니다.”

    “그럴 거였으면 이 시각에 찾아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한립은 차분하게 답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상한 것 투성이었다.

    적린공경에 들어올 당시 3황자 석파공은 그들에게 나뭇잎 모양의 옥패를 하나씩 주었다.

    그들의 위치를 특정하기 위한 물건이라 그것만 있으면 언제든 적린공경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야 자령을 찾지 못했으니 떠나지 못한다 해도 석천공은 그럴 이유가 없었다. 누군가 그를 괴뢰로 제련하려 했다면 도망은 못 가도 적린공경에서 빠져나갈 기회는 있었을 것이다.

    “하긴 늘 신중하던 분이었으니까요.”

    “제가 나서서 알아보기는 불편하니 신 수사의 도움이 필요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떤 소식이든 알게 되면 곧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신양의 정중한 말에 한립도 포권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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