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969화 (1,726/2,000)

1969화. 실없이

*

한립은 티 나지 않게 눈을 반짝였다. 현성에서 자령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면 이제 남은 곳은 괴성이었다.

“수가 얼마나 된 답니까? 괴성 인물 몇 명이 나타났다고 대회까지 중단하지는 않을 텐데요?”

누군가 질문을 했다.

“그건 나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액회 성주님께서 괴성 성주인 사심이 그곳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현성이 경고해도 물러나지 않는 것을 보면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어요.”

신양이 고개를 저었다.

“전쟁이라도 하려는 걸까요?”

“괴성 성주 사심이 직접 나섰다는 것은 아무래도 좋은 징조는 아니지요.”

골천심의 물음에 신양이 느릿하게 답했다.

삽시간에 방 안이 조용해졌다.

“모두 너무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현성은 정예 병력이 밀집해 있는 데다 부속성들의 인재들까지 모여있으니 결코 괴성에게 당하지만은 않을 겁니다.”

신양이 가라앉은 분위기를 보고 이렇게 말하자 다들 그래도 기운이 좀 나는 듯했다.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반드시 모두 나서야 할 테니 준비를 해두세요.”

신양의 말에 모두 그러겠다고 답했다. 싸움을 두려워할 만한 사람은 이곳에 모여있지 않았다.

“골 수사, 괴성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 정말 현성을 공격하기 위해서일까요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는 걸까요?”

한립은 전음으로 골천심의 생각을 물었다.

“알 수 없어요. 현성과 괴성이 분리되어 있되 오랫동안 공존했지만 소규모 분쟁이 끊이지 않았어요. 게다가 오랜 세월이 지나며 원한이 쌓여서 대규모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으니까요.”

“공존이 가능한 데는 외부적인 요인도 있겠군요.”

“적린공경 내의 대규모 천재지변이나 대규모 인수의 습격이 있으면 잠시 힘을 합치기도 해요. 제 기억에 마지막 대규모 전투는 3만 년 전에 백암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백 년 동안 악전고투 끝에 백암성 절반이 허물어지고 당시 성주였던 자도 목숨을 잃었죠. 손도는 그 뒤에 성주 자리를 계승한 거고요.”

“바깥세상에선 잊힌 비경 안에서, 생존자들끼리 이렇게 격렬하게 싸움을 벌이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모든 게 너무 부족한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서예요. 현성이 아니라 괴성도 궁극적으로는 비경을 떠나고 싶어 하겠죠.”

골천심은 한립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봤다.

“그렇겠죠. 그렇다면 그걸 실천할 만한 이들은 고위층이겠고요?”

“누가 알겠어요……. 어쨌든 정말 전투가 시작되면 조심하세요. 대규모 전투는 개개인의 싸움과는 다르니까요.”

고개를 저은 골천심이 충고했다.

“성주님, 괴성 인물들이 지금 성밖에 몰려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따로 일부 병력으로 청양성을 공격하면 방어할 수 없을 겁니다.”

역입애가 우려를 드러냈다.

“그걸 모르겠습니까. 다만 이제와 청양성으로 돌아가도 늦었을 테니 괴성의 진짜 목표가 청양성이 아니기만을 바라야지요.”

신양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별원의 다른 곳에서도 부속성 성주들이 이 같은 사실을 알리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성 곳곳에서 호각 소리와 북소리가 울리고 북적이던 거리도 썰렁해졌다. 다들 문을 걸어 잠그고 들어간 것이다.

성의 중앙을 지나는 대로에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들과 마차들이 현성 곳곳으로 내달려 더욱 긴장감을 주었다.

현성 정문, 액회의 등장에 병사들이 서둘러 길을 터주었다.

액회는 일고여덟 명을 이끌고 오고 있었다. 그중에는 한립 등을 안내해 주었던 동송과 매부리코 사내도 있었다.

잠시 후, 조용히 바깥을 쳐다보던 액회가 얼굴을 굳혔다.

멀리 시야의 끝에서 회색 선 같은 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흑갑 병사들도 그걸 보고 각자의 무기를 굳세게 쥐었다.

쿠릉!

액회 성주가 무표정하게 손을 젓자 현성 대문이 열리고 수많은 병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에 3할은 사람을 태운 인수들이었다.

현성 인근의 중현산맥에서도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리고 비행 인수들이 날아들었다.

대부분 대머리독수리인 인수들은 등에 검은 갑옷을 입은 병사들을 태우고 하늘을 빼곡하게 채웠다.

시간이 지나자 회색 선은 회색 구름으로 그리고 다시 다량의 괴뢰 대군으로 변했다.

괴뢰 대군도 현성의 병력을 보고 약 천 리 밖에서 멈춰서서 대치했다.

* * *

시간이 흘러 반나절 뒤, 하늘은 점차 어두워졌다. 그러나 괴성 대군은 시종일관 진격하지 않고 멀리서 까맣게 몰려만 있었다.

“괴성 것들이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습니다. 싸우려면 싸우고 아니면 물러갈 것이지 무슨 음모라도 꾸미고 있는 것일까요?”

현성 성벽 위에 있던 매부리코 사내가 말했다.

그 말에 액회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수군거리며 괴성의 의도를 추측했다. 그러나 액회만은 한마디 말도 없이 생각에 빠져 있었다.

“성주님, 그렇다면 우리가…….”

아무리 고민해 봐도 결론을 낼 수 없자 매부리코 사내가 액회에게 말을 붙였다.

“적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우리도 움직이지 않으면 그만일세. 조급해 말고 순찰병들을 늘려 기습에 대비하면서 괴성에서 이번에 나선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을…….”

액회는 손을 저어 그의 말을 막고는 주변 인물들을 보내고 매부리코 사내만 남겨 놓았다.

“성주님, 왜 다른 성 사람들을 불러 함께 적에 대항하지 않으십니까? 이번에 모인 인원이 상당하고 하나같이 실력자들이라 도움이 될 겁니다.”

“전투가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일단은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네.”

액회의 답에 매부리코 사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난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곳은 소응, 자네에게 맡기지. 괴성 쪽에 이동이 있으면 어찌해야 할지 알 것이야.”

액회는 멀리 괴성 대군을 보며 말했다.

놀란 소응이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액회가 몸을 돌려 홀연히 사라졌다.

어둠이 깔리고 현성과 괴성의 대치가 계속되는 가운데, 달빛이 부드럽게 현성 인근의 황야를 비추었다.

현성 천 리 밖의 야트막한 산에서 하얀 치마를 입은 여인이 달을 올려다보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검은 면사를 써서 얼굴을 가렸지만 형언할 수 없는 매혹적인 기운과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느낌이 공존했다.

“사심 수사, 현녀미(玄女媚)가 느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현성에 대군을 몰고 와서는 홀로 이곳으로 나오시고 담도 크신 듯싶습니다.”

냉담한 목소리가 백의 여인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허공에서 들리고는 곧 액회가 나타났다.

“저와 싸우고 싶으시다면 그렇게 하셔도 좋습니다.”

여유롭게 몸을 돌린 사심이 나른하게 말했다.

순진해 보이던 느낌은 사라지고, 매혹의 힘이 퍼져 밤 풍경이 더욱 운치 있게 느껴졌다.

“흥.”

미간을 좁힌 액회는 작게 코웃음을 치고 움직이지 않았다.

“과연 액 수사께서 저같이 연약한 여인을 공격하지 않으실 줄 알았습니다.”

사심이 키득거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낮에 전음을 보내 나를 불러낸 목적이나 말씀하시지요. 전쟁하러 온 것이면 사양치 않겠습니다.”

“오해하셨네요. 이번에 제가 여기까지 온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라 액 수사와 상의할 일이 있어서입니다.”

그녀는 어느새 기운이 확 달라져 사람의 혼을 쏙 빼놓을 것 같던 매혹적인 기운이 사라지고 평범한 여인처럼 변했다.

“상의할 일이 무엇입니까?”

“액회 수사와 함께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말이 더 맞겠지요.”

“사심 수사, 할 말이 있으면 하시지요.”

부드럽게 웃음 짓는 사심을 향해 액회가 덤덤히 말했다.

“모르는 척 마세요. 우리 두 사람이 오랜 세월 눈독 들이던 곳이 그곳밖에 더 있습니까……. 우리 괴성에서도 입구를 찾았으니 현성이 그곳을 독식하려는 생각은 버리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사심이 귀밑머리를 넘기며 하는 말에 액회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그곳의 입구는 당신의 행적을 뒤쫓아 찾은 게 아니라, 우리 괴성이 따로 인력을 동원해 찾은 거니까요.”

“정말 그런지 아닌지는 사 수사께서 잘 아실 것이고, 현성이 독식하려 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입구를 찾았으면 안쪽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실 텐데요.”

“제가 여인이라고 무시하시는 건가요? 자연적으로 형성된 입구 내부의 위험요소들이 줄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마 주기적으로 변화가 있고, 지금이 가장 약할 때겠지요. 현성에서 이번에 오성회무를 주최하며 귀한 상까지 내건 것도 그곳에 들어갈 인원을 선발하기 위함임을 알고 있고요.”

키득거리는 사심의 눈가에 은은하게 요염한 빛이 떠올랐고, 액회는 표정 변화가 없는 대신 눈빛이 서늘해졌다.

“액 수사, 지금 괴성이나 현성의 일방적인 힘만으로는 진입하는 데 무리가 있을 거예요. 괴성과 현성이 힘을 합쳐야 그나마 가능성이 있을 텐데, 액 수사께서 현명한 결정을 내려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싫다면 어찌할 겁니까?”

액회는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실어 물었다.

“저도 어쩔 수 없죠. 오늘 현성과 전쟁을 해서라도 아무도 제때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막는 수밖에요.”

사심은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말에 액회가 얼음장과 같이 차가운 압력을 뿜어내 방원 수십 리 땅이 흔들리고 돌풍이 불었으나 사심만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돌풍이 불고 땅이 흔들려도 사심의 옷깃은 펄럭이지 않았다.

액회가 심호흡을 하고 썰물처럼 기운을 거두었다.

“그래서 어떻게 합작을 하자는 겁니까?”

* * *

모든 이들의 예상을 깨고 괴성 대군은 밤사이 퇴각했다.

오래지 않아 괴성 대군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액회의 명령 하에 전투상황에서 벗어났다는 뜻의 북소리가 울렸다.

현성 사람들은 물론 한립 등 외부에서 온 사람들도 조금 놀랐지만 안심했다. 반드시 싸워야 할 때가 아니라면 누구도 강적과 목숨을 걸고 싸우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며칠 후, 별원의 거처에 앉은 한립은 하얀 별빛에 휩싸여 <천살진옥공>으로 천급 요핵을 연화시키는 중이었다.

천급 요핵이 함유한 성신지력은 엄청나서 장천병의 도움으로도 아직 완전히 흡수하지 못하고 있었다.

새로운 자리에 반짝이는 현규도 아직 뚫리려는 기미가 없었고 말이다. 하지만 한립은 실망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으로 성주부를 살폈다.

괴성과 대치했던 날에서 벌써 5, 6일이 지나갔는데, 괴성 대군은 정말 물러났는지 그 후 소식이 없었다.

그런데 액회 성주는 오성회무를 재개하지 않고 줄곧 부속 성 사람들을 별원에 머물게 하다가 오늘 아침 일찍 신양을 비롯한 네 성의 성주들을 불렀다.

그때 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한립은 방문을 열어주었다.

청양성 시종은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그가 나타나자 조금 놀라며 공손히 예를 올렸다.

“려 선배님, 성주님께서 청하십니다.”

“알겠네.”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신양의 거처로 향했다.

신양의 거처는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미간을 좁힌 한립이 문을 두드리려는데 문이 저절로 열리며 작은 틈이 벌어졌다.

“려 수사, 들어오세요.”

안에서 들려오는 신양의 목소리에 한립은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탁.

바로 문이 닫히고 돌로 만든 문에 하얀빛이 어리며 외부와 단절되었다.

방 안에는 신양 외에 골천심과 헌원행도 와있었고, 해 도인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신양의 뒤에 서 있었다.

청양성 사람들에게 현재 상황을 알려주기 위해 부른 줄 알았는데, 딱 세 사람만 불렀다는 것이 이상했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