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966화 (1,723/2,000)
  • 1966화. 두각

    *

    ‘건’과 ‘곤’ 두 무대에서 네 명의 현투사들이 둘씩 마주하고 있었다. 각각 심판이 무대에 오르자 관중들이 환호를 멈추고 그들의 말을 기다렸다.

    ‘건’ 무대에서는 눈처럼 하얀 갑옷을 입고 백골 장창을 든 주자원이 푸른 털 원숭이처럼 얼굴에 복슬복슬 털이 난 거구의 근공을 마주하고 있었다.

    주자원의 무기도 강력한 성신의 힘을 머금은 게 강력한 성보로 보였다. 그러나 근공이 오른손에 낀 하얀 가죽 장갑도 크고 작은 뼈들이 박혀 있어 매우 위력적으로 보였다.

    심판들은 시작을 알리고 알아서 무대에서 내려갔다.

    크오오-!

    야수처럼 포효한 근공이 주먹을 쥐고 쿵, 뛰어올랐다.

    흔들리는 현투대 위로 근공의 전신에서 80여 개의 현규가 퍼퍼펑 빛을 터트렸다.

    오른손 장갑 위로 별빛이 밀려들어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몇 번을 말했습니까. 기운을 바깥으로 방출해 봤자 장갑만 예뻐 보이지 힘이 유실되는 것 외에 아무런 장점도 없다고요.”

    냉정하게 같은 현성 출신 상대를 살핀 주자원이 충고했다.

    그 말에 안색이 달라진 근공은 마구 방출하던 기운을 갈무리했는데, 멀리서 보기에는 힘이 달려서 기운을 거둬들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안목이 있는 사람이라면 장갑의 별빛이 더욱 짙고 선명해진 것을 알아챘을 터였다.

    “훨씬 낫군요. 아쉽기는 하지만…….”

    주자원이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저었다.

    그걸 본 근공의 얼굴이 씁쓸해졌다. 현투장에서 대결하는 게 아니라 평소에 수련하며 지도를 받는 느낌이었다.

    “자, 시작합시다.”

    주자원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근공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 * *

    그 시각, 다른 무대에서는 한립도 풍무진과 멀리 간격을 두고 대치 중이었다.

    새하얀 옷을 입고 유엽세검을 몸에 바짝 붙여 든 풍무진은 마치 우아한 검객 같았다.

    이에 반해 검은 옷을 걸치고 소매를 말아 올린 한립은 행색이 초라했으나 전혀 기죽은 표정이 아니었다.

    “싸우기 전에 무릎 꿇고 사죄할 기회를 주겠다. 싸움이 시작되면 그럴 틈도 없을 테니까.”

    풍무진이 냉랭히 말했다.

    “비무를 하러 왔으면 싸우면 될 일이지 말이 많으십니다.”

    한립은 그를 향해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그리 죽고 싶다면 소원대로 해주마!”

    풍무진은 곧장 두 다리의 수십 개 현규를 밝히고 튀어나와 그와의 거리를 좁혔다.

    지켜보던 이들은 그 빠른 움직임에 감탄했다.

    두 눈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완벽히 따라잡던 한립이 동시에 움직였다.

    두 다리의 현규를 밝힌 그도 우화비승공을 발동해 흐릿하게 사라졌다.

    쿠콰쾅!

    그가 서 있던 자리에 폭음이 울리고, 수백 개의 버들잎 같은 검빛들이 작열했다.

    스치듯 지나친 풍무진은 멈추지 않고 한립을 쫓아 성신지력을 응결한 검빛을 날려 보냈다.

    현투대 위에서 두 사람이 흐릿하게 사라졌다 나타나며 검빛이 폭발해 아주 구경하기 좋았다.

    하지만 아무리 화려한 공격이라도 자꾸 반복되면 지루해지기 마련이었고, 관중석에서는 야유소리가 들려왔다.

    우뚝 멈춰선 풍무진은 멀리 떨어져 있는 한립을 노려보았다. 얼마나 죽일 듯이 째려보는지 두 눈이 이글거리다 못해 연기가 날 지경이었다.

    속도에 자신이 있는 그가 한립을 따라잡지 못하자 열불이 난 것이다.

    “계속 피하기만 하는 것도 실력인가?”

    “계속 따라잡지 못하는 것도 실력이 있는 자가 할 짓은 아닌 것 같습니다.”

    풍무진의 조롱에 한립은 대수롭지 않게 반박했다.

    “이 자식이!”

    대노한 풍무진이 양손으로 동시에 검을 쥐고 좌우로 분리했다.

    안 그래도 가느다랗던 유엽세검은 바람에 날리는 이파리처럼 부드럽게 흔들렸다.

    두 검이 움직일 때마다 나뭇가지에서 이파리가 피어나듯 수많은 검빛이 나타났지만 한립은 동공을 수축했을 뿐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이때 풍무진이 양손을 털었다.

    그러자 성신지력이 응결한 수백 개의 검빛들이 한립을 향해 쇄도했다.

    눈썹을 끌어올린 한립은 발끝으로 땅을 박차고 뒤쪽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가 움직이자 주변 공기의 흐름이 달라지면서 수많은 버들잎 검기들이 바람을 타고 몇 배로 커져 달려들었다.

    풍무진이 의외라 여긴 것은 쏟아지는 검빛 속에서 한립이 전혀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른손을 천천히 뻗은 한립의 소매 속에서 하얗고 작은 방패가 튀어나와 성신지력과 혈맥의 기운을 바탕으로 둥실 떠올랐다.

    웅웅 떨리는 방패에는 18개의 성신 도안이 반짝이고 있었다.

    쿠오오오오!.

    검빛이 비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어디선가 용울음 소리 비슷한 것이 들려왔다. 하얀 방패는 마치 환영처럼 엄청난 별빛 장막을 분출해 한립을 보호했다.

    퍼퍼퍼퍼펑…….

    수많은 검빛이 사방팔방에서 떨어져 별빛 장막을 뒤흔들었고, 표면이 연기처럼 흩어져가는 별빛 장막은 한립의 몸에서 팔뚝 하나의 거리까지 수축했다.

    그 모습에 풍무진의 입가에 냉소가 맺혔다.

    한립은 여전히 태연자약한 얼굴로 조급한 기색 하나 없었지만 말이다.

    그는 왼손은 뒷짐을 지고 오른손을 뻗어 다섯 손가락을 맹렬히 펼쳤다. 그의 몸에서 현규가 하나씩 빛을 발하더니 50개, 70개, 90개 계속 늘어났다.

    138개의 현규에 빛이 들어왔을 때 검빛에 밀리던 성두순의 18개의 도안들이 미친 듯이 반짝거리며 용 허상을 만들어냈다.

    쿠호오오!

    커다란 용울음 소리와 함께 별빛이 응결해 만들어진 용 허상이 수백 배로 커져 한립을 휘감고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격렬한 공간 파동에 주변의 검빛이 튕겨 나가 흩어졌다.

    그걸 보는 풍무진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현규가 138개…….”

    요리가 입을 가리고 웅얼거렸다.

    “어떻게!”

    독룡도 너무 놀라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소매 속으로 주먹을 불끈 쥔 역입애의 표정도 복잡해졌는데, 다른 현투대의 골천심 만은 놀라면서도 입가에 웃음기가 감돌았다.

    중앙관람석에서 줄곧 긴장하고 있던 신양도 훨씬 편해진 얼굴로 길게 숨을 내쉬며 돌의자에 등을 기댔다.

    한립이 어느 정도 실력을 숨기고 있다고 여기기는 했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마치 그가 자유자재로 현규의 수를 늘릴 수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이상한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려 수사가 실력을 숨기는데 일가견이 있구만. 이제야 제 실력을 드러내다니.”

    액회도 지켜보다 웃음을 지었다.

    “려 수사도 골천심 수사와 마찬가지로 저희 청양성의 기둥이 되는 인재입니다.”

    신양은 길게 설명하지 않고 대답했다.

    “크흠. 이렇게까지 실력을 숨기다니 괴성에서 보낸 첩자인 것은 아닙니까?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신 성주.”

    진원이 헛기침을 하며 음산하게 말했다.

    “증거도 없이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그런 유언비어로 멀쩡한 사람을 잡으려 하신다면 저도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겁니다.”

    안색이 싸늘해진 신양이 냉랭히 경고했다.

    “콜록콜록, 두고 보지 않으면 어찌할 건지 한 번 보고 싶군요. 여기서 붙어보자는 겁니까? 저야 좋습니다만…….”

    그 말에 진원의 태도도 냉랭해졌다.

    이를 지켜보던 부견과 손도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지켜보았고, 육화부인은 시종일관 경기를 관람하는 데만 집중했다.

    “뭣들 하는 것인가.”

    액회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현규를 밝힌 것도 아닌데 강력한 무형의 위압감이 퍼져나갔다. 안 그래도 정말 싸울 생각은 없던 신양과 진원이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용서하시지요, 액 성주님…….”

    “진원 수사가 농으로 하는 말이니 신양 수사는 너무 신경 쓰지 말게. 청양성에 저런 인재가 있다는 것은 현성 전체의 복이니 말이야.”

    그 말을 듣고서야 액회가 얼굴을 풀며 말했다.

    육화부인은 옆의 소란에도 ‘곤’ 무대의 동정을 살폈다. 그뿐 아니라 대다수가 ‘곤’ 무대에 관심을 보였다.

    같은 성 출신끼리 대련을 하듯 싸우는 것보다야 살의가 넘치고 뭔가 강렬한 적의가 오가는 싸움이 더 흥미로웠던 것뿐이다.

    그때 현투대에서는 비웃음을 흘린 풍무진이 번득 몸을 날려 빠르게 한립의 주위를 돌며 빈틈을 노렸다.

    양손에 들린 검들이 춤을 추듯 움직이면서 점점 더 조밀한 공격을 날렸으나 한립은 물샐틈없는 방어를 하는 중이었다.

    얼굴이 어두워진 풍무진은 갑자기 멈춰서 150여 개의 현규를 밝히고 손에 든 유엽세검에서 별빛을 찬란하게 반짝이며 수많은 성신문자들을 만들어냈다.

    이어서 하얀 파문을 일으킨 유엽세검이 웅웅 울기 시작했다.

    한립은 그가 이전에 역입애에게 썼던 초식을 사용하려는 것을 알고 기분이 가라앉았다.

    “가라.”

    유엽세검은 풍무진의 나지막한 명령에 그의 손을 떠나 더없이 밝은 빛의 검으로 변해 날아들었다.

    빛이 검이 지날 때마다 허공이 웅웅! 울며 붕괴해 그 위력이 이전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를 예의 주시하던 한립은 두 팔의 18곳의 대력금강결 현규를 밝히고 두 손을 뻗었다.

    성두순의 눈처럼 하얀빛이 몇 배로 커져 빛의 검을 맞이했다.

    카아앙!

    거미줄 같은 검은 균열이 허공에 생기고 빛의 검과 성두순 사이에서 불똥이 튀었다.

    눈이 밝은 한립은 방패 중앙의 18개 성신 도안에 머리카락 같은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주 미세한 틈이었지만 성두순이 방출하는 별빛 장막 전체가 흔들리면서 이전처럼 그를 완벽하게 보호해 주지는 못했다.

    희색을 드러낸 풍무진은 오른손의 장검을 버들가지처럼 휘며 한립의 방어막 곳곳의 빈틈을 공략했다.

    사삭.

    오래지 않아 한립의 의복이 조금씩 찢어져 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립이 두른 진극막은 매끈하게 광택을 내며 날카로운 유엽세검의 검빛을 잘 흘려보냈다.

    이에 풍무진은 한 손으로 쥐고 있던 검을 다시 양손으로 쥐고 전신의 160개의 현규에 빛을 일으켰다.

    동시에 디링하는 울림소리가 나며 그의 장검도 함께 빛이 강해졌다.

    ‘성규(星竅)!’

    신양의 설명을 듣고 성두순을 직접 제련하면서 한립은 성보에 성규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사람의 현규처럼 성규의 수가 많을수록 성보의 등급도 높아지고, 함유한 성신지력도 강해졌지만 그만큼 제련하기 어려웠다.

    누군가 성보와 무척 친밀하게 연계가 되었다면 성보를 자신의 팔처럼 자연스럽게 부리며 성보의 성규 역시 현규처럼 자신의 역량을 끌어올리는데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성두순에는 성규가 총 18군데 있었는데 한립은 제련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겨우 8곳의 위력을 빌려 사용하고 있었다.

    21곳의 성규가 빛을 내뿜어 풍무진의 기운이 거의 배로 증폭된 것과는 달랐다.

    희열에 찬 풍무진은 번득 사라져 순식간에 한립 앞에 나타나더니 장검을 오른쪽에서부터 기이한 각도로 기울여 한립의 허리를 베려 했다.

    풍무진의 이번 공격은 빠르고 독해서 피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손바닥을 맹렬히 아래로 움직인 한립은 음산하게 엄습해 오는 얇은 칼날을 향해 방패 자체를 이동시켰다.

    팟.

    방패와 검이 충돌하려는 순간, 풍무진의 유엽세검이 대량의 별 문양을 빛내며 배로 커져 상아빛 파동을 일으켰다.

    카착!

    균열이 심해진 하얀 방패는 터져버리기 직전이었다.

    눈살을 찌푸린 한립은 과감히 성두순을 내던지고 뒤쪽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이어 펑, 하고 하얀 방패가 갈라지며 검빛이 거의 한립의 콧날을 스쳐 지나갔다.

    “이제 어디로 피할 테냐?”

    공중의 한립을 보고 풍무진이 따라 뛰어올라 화살처럼 쇄도했다.

    현규와 검신의 성규들이 동시에 밝은 빛을 뿜어 그를 성신지력으로 감싸고 유엽세검에 방대한 양의 힘이 밀려 들어갔다.

    두 사람의 거리가 지척에 이르러 검빛의 속도가 정점에 달했을 때, 한립은 무게가 천근은 되는 추처럼 급속도로 하강했지만 검빛을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관중석에서 검이 그를 베려는 것을 보고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런…….”

    중앙관람석의 신양은 흠칫 놀랐으나 진원 등 다른 이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피하기 어렵겠구나…….”

    골천심도 내심 탄식했다.

    이제 역입애는 정말 마음이 복잡해졌다.

    한립의 실력이 그보다 강하다는 것을 확인하자 그가 풍무진을 꺾고 이겼으면 하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세상일이 어디 자기 마음처럼 된단 말인가.

    미간을 좁힌 해 도인은 묵묵히 말이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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