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화. 격전
*
“가르침 감사합니다.”
한립은 학봉에게 고개를 숙이고 들고 있던 벽사검을 돌려주었다.
“현규의 수가 72개는 아닐 겁니다. 대체 실력을 얼마나 숨기고 있는 겁니까?”
씁쓸하게 패배를 인정한 학봉이 복잡한 얼굴로 물었지만 한립은 그저 미소를 머금고 돌아섰다.
멀리서 신양, 진언 등이 ‘이’ 무대를 보다 표정이 달라졌다. 당연히 신양은 미소를 지었고, 진원은 안색이 굳어 있었다.
“진 수사, 저희 청양성 현투사의 실력이 제법이지 않습니까?”
“겨우 한 번 이긴 것으로 그리 우쭐해서야 되겠습니까, 콜록콜록…….”
웃음기 어린 신양의 말에 진원이 원래 표정으로 돌아가 격렬히 기침을 내뱉었다.
그러나 신양의 입꼬리는 내려올 줄 몰랐다.
오성회무 내내 다른 부속성들의 비웃음을 샀는데, 오늘에서야 어깨를 펴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허허, 신 수사께서 이런 고수를 숨겨 두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손도가 신양을 향해 이채를 띠고 말했고, 부견도 그를 다른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하하, 과찬이십니다. 려비우의 실력이 나쁘지 않기는 하나 다른 수하들에 비하면 멀었습니다. 이번 시합은 운이 좋아 이긴 것이겠지요.”
신양의 말에 진원의 눈에 노기가 어렸다.
다들 현지성 제2의 고수가 한립에게 진 것을 보았는데, 청양성 다른 참가자들은 그보다 더 강하다니 현지성의 체면을 깎는 소리였다.
“겸손도 하십니다. 려비우의 실력이면 우리 방선이라 해도 이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눈빛이 일렁인 손도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신 수사, 휘하의 려비우가 실력이 쓸 만한데 어찌 처음 보는 얼굴 같군. 새로 들어온 자인가?”
조용히 있던 액회가 돌연 질문을 했다.
“예, 수십 년 전에 청양성에 들어온 신입입니다.”
신양은 액회 앞에서는 거드름을 떨지 못하고 성실히 답했다.
그 말을 들은 액회가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부속성 성주들도 더는 아무 소리 하지 않았다.
* * *
한립이 현투대에서 내려오자 그를 지켜보던 이들은 경외심을 드러내며 길을 터주었다.
골천심, 헌원행, 독룡, 요리 그리고 다른 청양성 사람들도 그를 향해 다가왔다.
“려 수사, 실력이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습니다. 학봉을 이기다니요!”
골천심이 활짝 웃으니 두 눈에 빛이 어렸다.
“요행히 그렇게 되었습니다.”
한립이 담담히 미소 짓자 헌원행 등의 인사도 이어졌고, 그를 보는 요리의 눈빛도 달라져 있었다.
늘 그를 하찮게 여겼는데 이런 실력자였다니 부끄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녀도 작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한립은 요리를 포함해 모두의 인사에 일일이 답을 해주었다.
“려 수사가 시작부터 승리해서 기분이 좋습니다. 역 수사는 어떤지 함께 가서 보실까요?”
골천심이 멀지 않은 곳의 ‘태’ 무대를 가리켰다.
그녀를 따라 가보니 쇠덩이가 마주치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고 풍무진과 역입애가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한립은 역입애가 싸우는 모습을 처음 봤는데, 학봉보다 현규의 수가 많아 백여 개가 넘어갔다.
속도에 치중한 액입애는 두 다리에만 5, 60개의 현규가 있어 홀연히 이곳에 나타났다, 저곳에 나타났다 하며 검은 채찍으로 풍무진을 공격했다.
그 모습에 한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입애의 성품은 모르겠지만 실력은 청양성 2대 고수라 불릴 만했다. 그저 풍무진의 실력이 더 뛰어나다는 것이 문제였다.
역입애의 신법이 귀신같다면 풍무진의 움직임은 바람과 같아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폭풍처럼 이동했다.
그래서 상대가 어떤 맹공을 펼쳐도 쉽게 피하고 있었다.
풍무진이 손에 든 류엽세검(柳葉細劍)은 그야말로 변화무쌍이라 칼날이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며 독사처럼 역입애의 채찍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벌써 옷자락이 너덜너덜해진 역입애는 몸 곳곳에 피가 묻어나 패색이 짙어 보였다.
‘승산이 많지 않겠지만 자신만만하게 대책이 있다고 한 걸 보면 뭔가 있을 텐데.’
한립이 이렇게 생각하는 동안 골천심 등도 신중한 얼굴로 비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평소에 어떻게 굴었든 같은 청양성 출신인 그가 이기기를 바라는 것이 당연했다.
도강 등이 관람을 하다 골천심 등이 온 것을 힐끗 보고 다시 현투대로 시선을 옮겼다.
그 순간, 눈빛이 사나워진 역입애가 손을 뻗어 검은 채찍을 느닷없이 날카로운 칼처럼 세워 풍무진을 찔렀다.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였다.
발끝만 바닥에 닿은 풍무진은 검은 채찍을 유연하게 피하고 채찍의 경로를 따라 유엽세검을 뻗었다.
역입애는 차분히 뒤로 물러나 검을 피하고 손목을 털어 다시 채찍을 뱀처럼 휘둘렀다.
“헛수고 하십니다.”
냉소를 흘린 풍무진의 신형이 좌우로 흔들리다 종적을 감추었다.
검은 채찍이 허공을 가르자 역입애의 균형이 흔들렸고, 그 틈에 유엽세검이 흐릿하게 뒤에서 나타나 불가사의한 속도로 연달아 아홉 번을 베었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아홉 번이나 칼질을 당한 역입애는 진극막이 찢긴 뒤로는 고스란히 공격을 받아내야 했다.
그런데 다들 눈을 부릅뜰만한 일이 벌어졌다.
연달아 9번이나 공격당한 역입애가 단지 두세 걸음 물러났을 뿐, 멀쩡하게 서 있었던 것이다.
풍무진도 꽤나 놀란 얼굴이었다.
그때 두 눈에서 강렬한 빛을 뿜은 역입애가 팔을 크게 휘둘러 채찍에서 수십 개의 채찍 허상을 만들어냈다.
채찍 허상들은 크고 작은 검은 고리를 그리며 풍무진을 향해 질풍처럼 날아들었다.
검은 고리 속에서 현투대가 어두워지고 안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립은 현투대 위의 장면을 보고 놀란 기색이 스쳤다.
“쇄천인(鎖天印)! 몇 해 못 본 사이에 실력이 이렇게 늘었을 줄이야.”
옆에서 골천심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을 차린 풍무진도 진지한 얼굴로 전신의 150여 개의 현규를 밝혔다.
몸 곳곳에서 파파팍!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릎을 굽혔다 펴며 그가 뛰어오르는 충격에 현투대가 흔들렸고, 하얀 연기로 변한 풍무진이 하늘을 뒤덮은 채찍 허상들을 뚫고 날아올랐다.
역입애의 검은 채찍이 만든 허상들은 원을 그리며 그가 가는 곳마다 앞을 막아왔다.
하지만 풍무진의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검은 고리들을 간발의 차이로 비켜나가며 이동하고 있었다.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 무대 위에 하얀 신영이 표표히 이동하는 모습에 관중들은 시선을 빼앗겼다.
“역입애의 수법은 채찍 허상으로 상대를 가둬 빠져나갈 수 없게 하는 것인데 풍무진도 신법이 뛰어나 그걸 벗어나려 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 역입애라면 분명 다음 수를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그의 상대가 풍무진이라는 게 안타깝지만요.”
한립과 골천심이 한마디씩 했다.
현투장 위, 풍무진의 손에든 유엽세검이 수많은 별빛 주술문자들을 날리며 눈부신 하얀 파문으로 현투장 절반을 장악했다.
하얀 파문 속에 별빛이 떨어질 때마다 유엽세검이 웅웅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엽세검이 풍무진의 손을 떠나 빛의 검으로 변해 검은 채찍 허상들을 뒤쫓았다.
촤악!
검은 공간에 길이 트이자 풍무진이 그 속으로 날아들었다.
한립은 유엽세검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가느다란 검이 발산하는 위력은 극히 강해서 그가 맞닥뜨렸다고 해도 받아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채찍 허상을 두른 역입애가 괴이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의 소매 속에서 펑! 하고 새하얀 실들이 터져 나왔다.
옥을 정밀하게 세공한 것처럼 보이는 실들은 반짝거리는 하얀빛을 품고 그물을 이루었다.
풍무진도 이럴 줄은 몰랐는지 하얀 그물에 걸려 순식간에 고치처럼 변하고 말았다.
쿵.
하얀 그물에 둘둘 말린 풍무진이 현투대 위로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관중석에서 탄성이 들려왔다. 역입애의 얼굴에도 희색이 떠올랐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그는 몸 곳곳이 붉게 변하고 파란 힘줄이 솟아올라 괴로워했다.
곧 핏기가 가시고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그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롱주술(朧冑術)을 익혔을 줄은 몰랐는데……. 그래서 아까 풍무진의 검에 맞고도 무사했구나. 저 하얀 실은 뭐길래 풍무진을 가둘 수 있었던 걸까?”
의혹에 휩싸인 헌원행이 중얼거렸고, 한립도 그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청양성 현투장에서 들어보았던 롱주술은 체내의 기혈을 전신의 현규로 퍼트려 단기간에 방어력을 폭발적으로 높이는 비술이었다.
롱주술은 그 자체로 강력할 뿐 아니라 현규를 더 많이 뚫을수록 위력이 늘어났지만, 그 수련 과정이 고되어서 익히기가 무척 어려웠다.
거기다 비술을 한 번 쓸 때마다 기혈의 힘이 3분의 1이나 사라져 까딱 잘못하면 몸이 망가질 수 있어 익히려는 자가 많지 않았다.
“천라지망(天羅地網)입니다. 유화 부인이 십만 년 전에 천급 인주수(鱗蛛獸)의 거미줄을 이용해 제련한 특수한 무기로 성보(星寶)는 아니지만 그에 못지않지요. 잃어버린 것으로 아는데 어쩌다 역입애의 손에 들어갔는지 모르겠어요. 자신만만해 하던 이유가 있었군요.”
골천심이 설명을 했다.
청양성의 다른 이들은 환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중앙관람석에 앉은 신양은 뜻밖의 승리에 기뻐하다가 슬쩍 옆에 앉은 진원이 아무 걱정 없는 얼굴을 한 것을 보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현투대 위 숨을 고른 역입애가 간신히 몸을 가누고 아직도 하늘 높이 치솟고 있는 유엽세검을 보았다.
검은 채찍이 그의 손을 벗어나 풍무진이 들어있는 하얀 고치를 감아 현투장 밖으로 던지려 할 때 이변이 발생했다.
콰득!
빛을 번득인 고치가 둘로 갈라지고, 풍무진의 신영이 안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더없이 빠른 속도로 역입애를 노렸다.
안색이 급변한 역입애는 검은 채찍을 거둬 방어하려 했지만, 이미 기력이 쇠한 그가 팔을 절반쯤 들어 올렸을 때는 이미 하얀빛이 가슴을 강타하고 있었다.
파직!
가슴이 함몰된 역입애는 대량의 피를 뿜으며 현투대 밖으로 날아갔다.
누군가 허공에서 나타나 역입애를 받아들고 서서히 지면에 내려섰는데, 바로 신양이었다.
청양성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한립도 그들을 따라가며 동공을 수축했다.
방금까지 중앙관람석에 앉아 있던 신양이 어느 틈에 내려왔는지 그도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비무를 보느라 집중을 하고 있었다지만 그의 오감을 속인 신양의 실력이 비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각혈을 한 역립애는 종잇장처럼 질린 얼굴로 정신을 잃고 늘어져 있었다.
신양은 즉시 혈홍색 옥병을 꺼내 역입애의 입에 대고 같은 색깔의 단약 몇 개를 넣어 주었다.
단약이 급속도로 녹아들자 역입애의 안색이 편해졌고, 움푹 들어갔던 가슴뼈도 서서히 차올랐다.
안심한 신양은 고개를 들어 풍무진이 허공에 뜬 유엽세검과 똑같이 생긴 검을 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랬군.”
담담히 말한 그는 손을 들어 손바닥에서 흡입력을 발생시켰다.
팟.
그러자 현투대 위의 두 동강 난 하얀 고치가 날아들어 주먹 크기의 구슬로 뭉쳐졌다.
풍무진도 신양은 개의치 않고 고공으로 손을 뻗어 검을 회수했다.
두 유엽세검이 공명하면서 웅웅, 맑게 울었다.
현투장 아래에서 한립은 두 개의 검을 보고 있었고, 시선을 느낀 풍무진이 돌아보며 말했다.
“려비우, 목이나 잘 씻고 기다리고 있거라.”
풍무진은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각양각색의 표정으로 한립을 쳐다보았다.
순서에 따르면 3차전에서 역입애를 이긴 풍무진이 한립과 8강에 오르기 위해 시합을 치르게 되어 있었다.
현지성 성주 진원의 양아들이자 공인된 현지성 일인자가 한립을 공개적으로 도발한 것이다.
이를 지켜보던 이들은 한립도 그만한 실력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상대해 드리지요.”
한립은 표정 변화 없이 덤덤하게 답했다. 이에 풍무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풍무진, 승!”
심판이 풍무진의 승리를 선언하자 도처에서 박수와 함성이 쏟아졌다.
풍무진도 한립에게 시선을 거두고 중앙관람석의 진원에게 공수한 다음 느긋하게 현투대에서 내려왔다.
신양은 다른 이들의 반응에 관심을 두지 않고 하얀 구슬을 역입애 품속에 쑤셔 넣어 주었다. 그리고 곧장 그를 데리고 나가며 입을 열었다.
“려비우 수사는 나를 따르고, 다른 이들은 남아서 골천심과 헌원행 수사를 응원해 주시지요.”
그 말에 한립은 골천심과 헌원행에게 인사를 하고는 그를 따라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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