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화. 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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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에 32명의 탈락자가 결정되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시합에서는 큰 사건 없이 예상했던 이들이 승리했지만, 이런저런 소소한 곡절이 있기는 했다.
그중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일은 백암성 현투사가 현성 주자원과의 경기에서 시작하자마자 패배를 선언한 사건이었다.
한립과 골천심은 그들의 비무를 통해 현성 성주 휘하의 최고의 실력자가 어떤 공격을 하는지 살피려다 김이 새고 말았다.
후에 한립은 독룡과 현성 주자청의 비무도 관람했다.
주자청은 여인이었고, 오성회무에도 처음 출전했으나 실력이 출중해 이런저런 실수를 하면서도 독룡을 압도했다.
두 사람은 백여 합을 겨루다 결국 독룡의 패배로 비무를 마쳤다.
가장 의외였던 것은 청양성에서 거의 명성이 없던 헌원행이 현지성 현투사와의 비무에서 승리해 한립, 골천심, 역입애 세 사람과 함께 32명의 승자 명단에 든 것이었다.
청양성은 2회전에 4명밖에 진출하지 못해 다섯 개의 성 중 성적이 가장 낮았으나 목숨을 잃은 참가자가 없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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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레가 지나 오성회무 2회전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관중들이 수라성으로 몰려들었고, 참가자들도 연이어 도착했다.
청양성 현투사들도 일찍 현투장에 도착했는데, 1회전 성적이 나쁘다는 소문이 돌아서인지 어딜 가든 비웃음을 샀다.
독룡과 도강 등 패배한 이들은 민망하고 언짢은 얼굴이었는데, 얼음장 같은 성주 신양의 표정에 비하면 그나마 나았다.
1회전 성적이 좋지 않아서도 그랬지만 적수가 될 2회전 진출자들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기실로 들어간 신양은 아무도 없는 곳으로 무리를 이끌고 갔다.
“1회전의 성적은 신경 쓸 것 없습니다. 시합은 운이 따라 줘야 하고, 자신의 부족한 점을 찾았다면 앞으로 개선할 수 있을 테니까요. 앞으로 남은 비무들도 자세히 살펴 수련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겁니다.”
그는 패배한 이들에게 당부하고 골천심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늘 골 수사의 상대는 현성의 주자청입니다. 주자원의 여동생으로 그보다는 실력이 떨어져도 방심해서는 안 될 상대이니, 결코 빈틈을 보여서는 안 될 겁니다.”
“조언 감사드립니다, 성주님.”
남들 앞이었기에 골천심은 공손히 답했다.
“려 수사, 학봉은 현지성에서 풍무진 다음 가는 고수입니다. 백 개 이상의 현규를 뚫어 지난 대회에서도 8강에 들었던 강자이니 조심하세요.”
신양은 한립에게도 당부를 했고 한립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헌원행 수사의 상대는 통여성의 ‘오숭’입니다. 통여성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실력자이니 최선을 다해주기만 하세요.”
신양은 헌원행에게는 큰 기대를 하지 않는 듯했다.
“전력을 다할 테니 마음 놓으셔도 됩니다, 성주님. 청양성의 명예를 위해 싸우겠습니다!”
그 말에 헌원행은 공수를 하고 진지하게 다짐했다.
신양은 헌원행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역입애를 보았다.
그를 마주 보는 역입애의 표정은 차분했다.
“역입애 수사는 이번 비무에서 네 사람 중 가장 고전이 예상됩니다. 상대가 현지성의 풍무진이고, 그는 진원의 양아들이자 현지성 최고의 실력자니까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풍무진의 실격이 강하다고 하나 이미 전략을 생각해 두었으니 꼭 지리란 법은 없을 겁니다.”
역익애는 신양이 말을 맺기도 전에 자신 있게 웃어 보였다.
“전략을 생각해 두었다니 다행입니다.”
신양은 그가 자신의 말의 끊은 것에 불만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역 수사, 풍무진을 만만히 보았다가는 크게 당할 겁니다.”
골천심이 나서서 충고했다.
“충고 감사합니다.”
슬쩍 미간을 좁혔던 역입애가 얼른 표정을 풀고 담담히 답했다. 한립은 그들의 대화를 못 들은 것처럼 혼자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었다.
신양이 떠나고 역입애가 그런 한립 앞으로 다가왔다.
“려 수사, 이번 시합에서 절대 지지 마세요. 그렇게만 되면 다음 시합에서는 우리 둘이 붙어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러시죠. 저도 역 수사가 풍무진을 이기기를 기원하겠습니다.”
고개를 든 한립은 별 감정 없이 답했다.
코웃음을 친 역입애가 다른 쪽으로 걸어가자 도강 등이 그를 따랐다.
한립은 서 있던 자리에서 그냥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아 버렸다.
중앙관람석으로 이동한 신양은 액회 성주 그리고 다른 부속성 성주들이 도착해 있는 것을 보았다.
어쩐 일인지 오늘은 육화부인이 보이지 않았다.
“콜록콜록……. 신 성주, 이거 제가 미안하게 됐습니다. 청양성에서는 겨우 네 명만 남았는데 이번 비무가 끝나면 그마저도 둘로 줄겠어요. 그동안의 정을 보와 봐주라고 했는데 풍무진과 학봉이 기를 쓰고 이기겠다지 뭡니까. 그러니 제가 성주라도 어쩔 도리가 있나요.”
진원이 신양을 보더니 허허 웃으며 말했다.
“승부는 끝날 때까지 알 수 없는 법이지요. 현투장이 원래 온갖 일이 다 일어나는 곳 아닙니까?”
신양은 미소를 머금고 답했다.
“콜록, 콜록! 무슨 일이 생겨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는 신 성주의 심성은 탄복할 만합니다만, 어디 한 번 어찌 승부가 나나 봅시다.”
진원도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
부견과 손도는 그들의 대화에 흥미가 없는지 각자 다른 방향을 보고 있었다.
“시간이 되었다. 시작하라.”
액회 성주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입을 열었다. 그러자 새까만 피부의 진행자가 고개를 숙이고 수라장으로 내려갔다.
“여러분, 7일 전의 다채로운 경기를 기억하실 겁니다. 오늘 2회전에서도 경기 방식은 이전과 같으며, 총 16개의 경기가 벌어지게 됩니다.”
까만 거한의 말이 끝나고 중앙관람석 좌측 땅이 열리며 회백색 암석이 솟아 올랐다.
그 위에는 이전보다 절반이 줄은 32명의 이름이 둘씩 짝지어져 있었다.
청양성에서는 한립과 역입애의 시합이 가장 먼저 진행되어 첫 번째 시합에 속해 있었다.
한립은 ‘이’ 무대, 역입애는 ‘태’ 무대에 배치를 받았고, 골천심과 헌원행이 두 번째 시합에 속해 있었다.
말 한마디 없이 역입애가 ‘태’ 무대를 향해 걸어가니 도강들이 우르르 그를 따라갔다.
한립은 의복을 정돈하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조심하세요.”
골천심이 그런 한립을 향해 말했다.
“려 수사, 운이 따라서 다음 시합에도 출전하시기를 응원하겠습니다.”
헌원행도 그를 향해 우호적인 웃음을 지었다. 이에 한립은 두 사람에게 미소를 짓고는 ‘이’ 무대로 나가 펄쩍 뛰어올랐다.
그 위에는 심판복을 입은 마른 노인이 올라와 있었다.
한립은 심판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첫 번째 시합과 달리 구경꾼들이 제법 많이 모여있었다.
대부분이 현지성 사람들로 떠드는 소리만 들어보아도 학봉을 보러 몰려온 구경꾼들이었다.
이때 회색 그림자가 쾌속으로 날아들었다.
키는 큰데 몸이 말라서 대나무 장대처럼 생긴 사내가 회색 장포를 입고 뱀처럼 구불거리는 괴검을 들고 서 있었다.
칼날에 진득하게 암울한 녹색 빛이 묻어 있는 게 눈길을 끌었다.
눈을 반짝인 한립은 지난날 신양에게 받은 학봉에 대한 자료를 되뇌었다.
풍무진처럼 두 다리에 집중적으로 현규를 뚫은 학봉은 속도전에 능했고, 저 벽사검(碧蛇劍)에 묻은 고계 인수의 극독은 현규를 좀 먹는다고 했다.
학봉도 한립을 위아래로 훑는 중이었다.
“려비우, 서순과의 비무를 처음부터 지켜보았습니다. 약한 척 위장해도 나를 속일 수는 없을 거예요.”
학봉이 입을 뗐는데 목소리가 굉장히 거칠었다.
“관심 감사합니다.”
“실력도 괜찮고 연기도 좋은데 나를 상대로 만난 것이 복이 없군요. 지금이라도 패배를 인정하고 내려가는 게 현명할 겁니다.”
“죄송합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비무를 포기할 수는 없어서요. 수사의 호의만 기억해 두겠습니다.”
한립은 잔잔히 미소를 지었다.
“살길을 열어줬건만.”
얼굴을 굳힌 학봉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시간이 되었다. 시합을 시작한다!”
이어서 마른 노인이 시합 시작을 선언했다.
미세하게 흔들린 학봉의 몸에서 웅! 하는 소리가 들린 후 백여 개의 현규가 하얀빛을 내뿜었다.
하얀빛에 둘러싸인 그는 멀리서 보면 빛으로 만들어진 사람 같았다.
특히 두 다리의 현규만 4, 50개가 넘었다.
찬란한 빛이 현규에서 빠져나와 두 마리 백사의 모양을 이루고 그의 두 다리를 휘감고 있었다.
눈을 반짝인 한립도 72곳의 현규를 밝혔다.
그가 다음 행동하기 전에 두 다리에서 백사들이 꿈틀한 학봉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다음 순간, 녹색 검 그림자가 한립의 오른쪽 가슴을 노렸다. 그러나 아무런 방비도 없이 한립이 우두커니 서 있자 관중석에서 탄성이 들려왔다.
비무를 시작하자마자 승부가 났단 말인가?
그러나 벽사검에 찔린 한립의 가슴에서는 피가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잔영이 흩어지자 이번엔 학봉이 당황했다.
훅.
뒤에서 바람 소리와 함께 한립이 두 다리에 <우화비승공>을 이용해 뚫은 현규들을 모조리 밝힌 채 손을 뻗고 있었다.
날카로운 다섯 손가락에서 뿜어져 나오는 바람이 학봉의 목을 찔러왔다.
화들짝 놀란 학봉은 몸을 돌릴 겨를도 없이 번개처럼 손을 틀어 벽사검으로 빼곡한 검 그림자들을 방출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마치 독사가 혀를 날름거릴 때 내는 쉭쉭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이에 다섯 손가락을 구부려 주먹을 쥔 한립은 팔 전체를 금빛으로 두르고 벽사검의 검 그림자들과 충돌했다.
콰쾅!
화려한 금빛이 한립의 오른팔에서 폭발하며 녹색 검 그림자들을 무찔렀다. 그러자 학봉이 몸을 바르르 떨며 뒤로 튕겨 나갔다.
금색 털이 난 한립의 오른손 주먹에는 벽사검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학봉은 두 발을 교차하면서 하얀 잔영을 남기고 방향을 틀어 한립의 뒤로 쇄도했다.
펑!
한립이 언제 뒤를 돌았는지 다시 주먹을 뻗어 벽사검을 쳐내고 학봉을 튕겨냈다.
연달아 두 번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조바심이 든 학봉은 신법을 극성으로 펼쳤다.
엄청난 잔영들이 겹겹이 생겨나 거대한 백사처럼 변해 한립을 포위했다. 강한 바람이 백사 잔영에서 불어와 한립을 가두려 들었다.
“학봉 수사의 사영(蛇影) 둔법입니다. 려비우가 이건 못 당하겠지요!”
관중석의 누군가가 흥분해 소리쳤다.
푹! 푹!
백사 잔영 속에서 바람을 타고 녹색 검 그림자들이 튀어나와 한립을 찔러 들어갔다.
그러나 한립은 눈썹을 꿈틀할 뿐 주먹으로 그것들을 쳐내버렸다.
퍼퍼펑.
빼곡히 날아온 검 그림자들이 무형의 장벽을 만난 듯 부서져 나갔다.
무대를 뒤덮던 검 그림자들이 전부 흩어지자 학봉이 난감한 얼굴로 나타났다.
비틀거리던 그가 제 자리를 잡기 전에 한립이 귀신처럼 그의 뒤에서 나타나 오른손 손가락을 그의 심장으로 뻗었다.
쉭.
날카로운 무언가가 허공을 꿰뚫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려왔다.
가슴이 서늘해진 학봉은 한립의 손가락이 그의 진극막을 뚫고 단숨에 심장에 구멍을 뚫을 거라 직감했다.
다급해진 그는 손에 든 벽사검을 휘둘러 열댓 개의 검 그림자로 한립의 팔을 공격했다.
한립의 팔이 무쇠처럼 단단한 것은 알았지만 어떻게든 찰나의 시간이라도 벌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한립이 마지막 순간, 손가락의 방향을 틀어 두 손가락으로 검 그림자 속에 숨은 벽사검을 잡아챌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말도 안 돼!’
그의 괴력에 손아귀가 뜨끈해지며 벽사검을 빼앗긴 학봉은 기겁해 미친 듯이 뒤로 물러났고, 동시에 학봉의 왼쪽 소매에서 녹색 바늘들이 한립을 향해 튀어 나갔다.
미리 대비하고 있던 한립도 왼손을 펼쳐 앞으로 뻗었다. 무시무시한 힘이 파도처럼 흘러나와 극독이 발라진 독침들을 밀어냈다.
이렇게 되자 계속해서 밀리던 학봉은 제한된 현투대 끄트머리까지 밀리고 말았다. 그는 이제 피할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기합을 넣으며 전신의 현규를 밝히고 마구 주먹질을 했다.
허공이 덜덜 떨리고 폭음이 들려왔다. 하지만 결국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쿵쿵 밀려난 것은 학봉이었다.
녹색 그림자가 번득이고 한립이 든 벽사검 칼끝이 그의 목에 닿아 있었다.
“제가 졌습니다.”
학봉이 우위를 점하다가 전세가 역전되어 패배를 인정하기까지 관중들은 어안이 벙벙해 있다가 그제야 환호성을 터트렸다.
“려비우, 승!”
마른 노인도 놀란 얼굴로 결과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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