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960화 (1,717/2,000)

1960화. 수라장(修羅場)

*

한립은 신양의 거처를 나와 곧장 방으로 돌아와 생각에 잠겼다.

석천공이 현성 감옥에 갇혀 있다면 구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 와서 처음 느낀 게 현성은 청양성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방비가 잘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자령은, 소식이 없는 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한참 그 자리에 앉아 있다 고개를 털고 평정을 되찾았다. 지금은 자령과 석천공을 걱정할 때가 아니라, 오성회무에 집중해 천린운정으로 흑겁충을 제거해야만 한다.

* * *

성주부 별원 사추원(沙秋院)의 어느 석전 안.

가죽 외투를 걸친 중년 사내가 커다란 돌의자에 기대앉아 있었다. 까만 코가 번들거리는 중년인은 다름 아닌 통여성 성주 부견이었다.

그가 앉은 상석 아래 좌우로 각각 여섯 명의 통여성 수사들이 앉아 있었다.

“액회 성주께서 이번 오성회무를 매우 기대하고 계신다. 이번에 내려질 상도 평범하지는 않겠지. 온 성의 힘을 쏟아부어 순위권에 들어야 한다. 특히 단통 너는 반드시.”

부견이 눈을 빛내며 말하자 붕대를 감은 우람한 거한이 한참 뒤에야 ‘예’라고 답하고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익숙하다는 듯 부견은 말을 이었다.

“현성의 주자원은 그렇다고 치고 백암성의 ‘방선’과 현지성의 ‘풍무진’은 이길 수 있겠느냐?”

“풍무진은 속도가 빠르지만 제 방어를 뚫을 수 없을 테니 큰 문제가 아닙니다. 따라붙어 근접전을 벌이게 되면 제 뜻대로 할 수 있을 테니까요.”

“방선은?”

“싸워보지 않아 모르겠습니다만, 골천심을 이긴 것을 보면 실력이 없는 자는 아닙니다. 세월이 흘러 더 강해졌을 테고요.”

단통은 계속해서 한참을 뜸을 들이다 답을 했다.

“알겠다. 신중한 것이 네 장점이지…….”

부견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별원의 다른 석전 안에서 속속들이 사람들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이에 대전 안에는 창백한 얼굴의 마른 중년인과 잘생긴 백의 청년만 남게 되었다.

진원과 풍무진이었다.

“무진아, 요즘 늘 수련 중이던데 발전이 있더냐?”

진원이 웃으며 물었다.

“의부께 아룁니다. 오랜 세월의 수련이 며칠 전 큰 강을 이루어 새로운 현규를 뚫었습니다.”

풍무진은 공손하게 답했다.

“잘했다, 잘했어. 좋은 징조로구나! 오성회무에서 순위권 안에 들 수 있겠어.”

진원이 칭찬하는데 풍무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것이냐?”

“이유는 모르겠지만 좋지 않은 예감이 듭니다. 비무대회가 다가오니 불안하기도 하고요.”

“음? 육화부인에게 새로운 무기를 얻지 못해 그런 것이냐. 무기가 아무리 좋아도 신외지물(身外之物)이다. 적린공경 안에서 본연의 실력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의부님 말씀이 맞습니다.”

“허나 뜻밖이기는 했다. 네가 육화부인을 만나고 빈손으로 돌아온 뒤 내가 직접 찾아갔는데도 제련 중이라며 문전박대를 하더구나.”

“혹시 청양성에서 온 그들 때문일까요? 갑자기 무슨 신물을 건네주자 저보다 먼저 육화부인을 만날 기회를 잡았습니다.”

“청양성 노예들이 무슨 능력으로? 아마 우리 쪽에서 무언가 육화부인의 심기를 상하게 해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겠지. 비무대회가 끝나는 대로 내 직접 찾아가 알아보마.”

풍무진의 말에 진원이 손을 저었다.

“그들 때문이든 아니든 비무대회에서 그들을 만나면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골천심이야 힘이 좀 들겠지만, 그 인족은…….”

풍무진은 말을 하다 말고 음산한 웃음을 지었다.

* * *

같은 시각, 백암성 무리도 대전에 모여 손도의 말을 듣고 있었다.

“오성회무가 곧 시작된다. 모두 순위권에 들지는 못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싸워주기를 바란다. 누구든 승리를 하면 백암성으로 돌아가 따로 상을 내릴 것이야.”

손도의 낭랑한 명령에 회색 장포를 입은 사내가 우렁차게 답했다. 그의 말을 따라 다른 이들도 목소리를 높였다.

“최선을 다해 성주님의 기대에 부흥하겠습니다!”

모두가 격앙되어 외치는 와중에 어디선가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근원에는 방선이 있었다.

드르렁.

그는 돌의자에 기대 대자로 뻗어 쿨쿨 잠에 빠져 있었고, 무슨 좋은 꿈을 꾸는지 돼지처럼 생긴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손도의 연설로 대전 안의 분위기가 고조될수록 코고는 소리도 커졌지만 다들 익숙한지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가 없었다.

그때 돌연 방선이 목을 떨고 기이하게 큰 입을 벌려 코 고는 소리가 이상해졌다.

굵직하던 소리가 얇아지면서 점차 고음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기이한 파동이 코와 입에서 뿜어져 나와 대전 안의 돌 탁자가 진동했고, 모인 사람들은 손발이 저릿하고 머리가 묵직해졌다.

“휴, 또…….”

다들 탄식을 하는 가운데 손도가 입가에 미소를 띠고 방선의 이마에 딱, 하고 꿀밤을 먹였다.

두 눈을 번쩍 뜬 방선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손도가 그런 방선의 입가에 묻은 침을 소매로 닦아주며 웃음 지었다.

“아무 일도 아니다, 어서 다시 자거라…….”

실없이 웃음을 흘린 방선은 자세를 바꿔 머리를 옆으로 기대고 잠에 빠져들었다.

* * *

그날 밤,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 성주부 대전 지붕에 두 명이 나란히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반듯하게 뻗은 눈썹에 별처럼 빛나는 눈을 지닌 단정한 외모의 사내가 두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누워 있었다.

연달아 오성회무에서 우승을 차지한 주자원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아름답지만 쌀쌀맞은 인상을 지닌 여인이 몸에 딱 붙은 하얀 뼈 갑옷을 입고 있었다.

“성주님도 참, 비무 전날 직접 사기를 북돋지 않으시고 왜 오라버니를 시키시는지 몰라요…….”

여인이 조그만 목소리로 불평을 했다.

“자청, 여기는 성주부다. 네가 아무리 목소리를 낮추어도 성주 대인께서 듣고 계실 것이야.”

그 소리에 주자원이 웃음을 흘렸다.

“성주대인께서 얼마나 아량이 넓으신데, 이런 일로 뭐라고 하시겠어요?”

“넌 오성회무에 처음 참가하는 것이니 다른 참가자들에 대해 잘 파악해 두어야 한다. 통여성의 단통은 통현비 신통이 남달라서…….”

여인이 뒤늦게 아첨하는 것을 보고, 주자원도 더는 뭐라 하지 않고 할 말을 시작했다.

“그만, 그만! 오라버니, 아까 다들 모아 놓고 이미 다 한 말이잖아요. 또 들으면 벌써 7번째예요. 귀에 굳은살 생기겠다고요.”

“그럼 네가 말해 보거라. 누구누구를 주의하라고 했더냐?”

“어휴……. 다 기억하고 있어요. 청양성 외에 다른 성 참가자들은 하나같이 대단해서 전부 조심해야 한다고요. 조심 또 조심할게요.”

주자청은 못 말리겠다는 듯 대충 답했다.

“틀렸다. 청양성의 골천심도 방심해서는 안 될 상대다. 여인이지만 그녀의 실력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아.”

“알겠어요, 알겠어. 청양성에도 골천심이 있죠. 너무 걱정하시는 거 아니에요? 제가 아무리 운이 안 좋아도 연달아 강자들만 만나겠냐고요.”

“내가 연이어 오성회무에서 우승한 비결이 무엇인 줄 아느냐?”

“말해 무엇해요. 당연히 실력이죠!”

“실력은 기본이고 그보다 중요한 것은 절대, 누구도 경시하지 않는 마음이다. 어떤 상대인지 잘 파악하고 있는 강자는 물론 처음 보는 새로운 얼굴들도 유의해서 상대해야 할 것이야.”

“알겠어요, 오라버니. 기억해 둘게요.”

주자원이 진지한 얼굴로 거듭 당부하니 주자청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이런저런 잔소리를 이어가던 주자원이 드디어 여동생과 오붓하게 조용히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 그렇지! 현지성의 풍무진도…….”

“오라버니, 제발 좀!”

침묵은 채 십여 초가 이어지지 못했다.

* * *

현성 사람들이 비무 준비에 한창일 때,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모를 사막에는 모래바람만이 가득했다.

달빛이 비치는 뿌연 혼돈과 같았다.

그 망망대해와 같은 모래바람 속을 거대한 검은 그림자들이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달빛에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낸 것은 거대하기 짝이 없는 인수들이었고, 그 가장 앞에 선 오린상은 다른 동족보다 훨씬 체구가 컸다.

몸은 비늘로 덮여 있었고, 복부와 다리에는 따로 철갑을 씌운 오린사의 가슴에는 일고여덟 개의 요핵들이 박혀 있었다.

두 개의 기다란 상아가 있을 자리에 날카로운 장창이 꽂혀 달빛 아래 섬뜩한 한광을 번득였다.

이상한 것은 오린상의 움푹 파인 두 눈에 눈알이 없다는 점이었다.

선두에선 오린상은 놀랍게도 바짝 말라버린 시체였고, 그 뒤를 따르는 십여 마리의 대형 인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인수들 등 뒤에 크기가 다른 검은 석전(石殿)들이 얹어져 있었다.

선두의 오린상 석전은 여러 화로가 켜져 있어 내부가 대낮처럼 밝았고, 그 안에 놓인 방원형 돌 제단 위로 검은색 긴치마를 입은 여인이 앉아 있었다.

고운 자태를 지닌 여인은 면사로 얼굴을 가렸지만 겨우 불빛에 어른거리는 얼굴의 윤곽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홀릴 만했다.

그녀와 가까이에 똑같이 검은 면사를 한 여인이 유연한 몸을 돌의자에 기대고 앉아 있었다.

마치 뼈가 없는 뱀 요괴를 보는 것 같았다.

“현성까지 얼마나 남았지?”

여인의 목소리는 온화했지만, 너무 나른해서 마치 잠꼬대를 하는 것처럼 들렸다.

“성주께 아룁니다. 아직 괴성 영역이지만 현성까지 한 달이면 도착할 것입니다.”

제단 위 긴치마 여인이 몸을 기울이며 작게 답했다.

“그래, 드디어 때가 되었구나…….”

성주라 불린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반짝이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 * *

수많은 이들의 기다림 속에 날이 밝아왔다.

현성 밖, 중현산맥에 햇살이 드리우고 성안도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거리마다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성 중앙에 있는 원형 건물로 모여들었다.

현성에서 가장 큰 현투장인 수라장(修羅場)이었다.

수라장 앞 광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그곳에 세워진 석상은 특히 사람들이 물샐틈없이 둘러싸고 석상의 옷깃이나 발등을 만지고 지나갔다.

석상을 만지면 운이 따른다는 속설이 있어 이미 사람의 손이 닿을 만한 곳은 다 매끈매끈하게 변해 있었다.

댕-

종소리가 유유히 울리고 원형 건물 사방의 대문이 천천히 열리면서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때 수라장 지하 깊은 곳에 있는 원형 대청 안에는 수십 명이 다섯 무리로 나뉘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오성회무 참가자인 64명의 현투사들이었고, 당연히 한립과 골천심 등도 속해 있었다.

“려 수사, 혈장주는 잘 익어갑니까?”

골천심은 구석에 앉아 있는 한립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모여있던 역입애 무리도 이제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힐끗 쳐다보다 자기들끼리 떠들었다.

헌원행과 독룡은 그들과 거리를 두고 서 있었는데, 전자는 덤덤한 얼굴인 반면 후자는 조금 긴장한 듯싶었다.

“거의 다 되었습니다. 흑겁충 문제를 먼저 해결하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한립이 고개를 들고 미소를 지었다.

“육화……. 영감의 성격이 이상해 수사께서 천린운정을 구하느라 고생하시겠습니다.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골천심은 절반쯤 진심을 담아 말했다.

“세상에 어디 공짜가 있던가요. 육화 선배님이 그런 요구를 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저 천린운정을 얻기 위한 등수가 너무 높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수사에게만 정보를 드릴게요. 천린운정은 우승을 하지 않아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려 수사도 기회가 있을 거라 믿어요.”

골천심은 그에게만 비밀리에 전음을 보냈다.

“골 수사께서 저를 높게 평가해 주시는 것은 고맙게 생각하겠습니다. 저도 목숨이 걸린 일이라 최선을 다할 것이니 염려 마세요.”

한립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쿠쿵-!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지하 공간 전체가 진동하며 정면 벽이 음푹 들어가 5개의 통로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오성의 현투사들은 현투대로 오르십시오.”

시원시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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