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959화 (1,716/2,000)

1959화. 시작

*

“자신 있느냐?”

육화부인은 무의식중에 땋아 놓은 수염을 만지며 물었다.

“제가 술을 빚을 수 있으면 흑겁충 제거 방법을 알려 주시겠습니까?”

“흑겁충을 제거하는 법을 뭘로 보는 것이야……. 겨우 술 한 동이로 바꾸시겠다?”

“그럼 선배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말씀해 주시지요.”

“혈장주와 더불어 주먹만 한 천린운정(天鱗隕晶)을 하나 구해오거라.”

육화부인이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희망에 부풀어 있던 골천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선배님, 천린운정은 적린공경 안에서 가장 등급이 높은 재료 중 하나입니다. 손톱만 한 천린운정도 가격이 천문학적일 텐데, 어떻게 주먹만 한 것을 구해오겠습니까.”

골천심이 급히 나섰고, 그 말을 들은 한립도 인상을 찡그렸다.

“당연히 어떻게 하면 구할 수 있는지도 알려주려 했다. 오성회무의 상품 중 하나가 천린운정이라는 정보가 있다. 몇 등을 해야 얻을 수 있는지는 나도 모르겠고, 그건 너희가 알아서 하거라. 너희 실력으로 될지 모르겠구나.”

육화부인의 말을 들은 한립은 쓴웃음을 흘렸다. 이번 비무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어진 것이다.

“그런데 혈장주를 빚을 수 있다는 말은 사실이겠지?”

“제 목숨이 걸린 일에 농을 하겠습니까?”

“좋다. 술을 빚어서 천린운정과 함께 가져오면 보상으로 네 흑겁충을 제거해 주겠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저는 그럼 준비할 것이 있어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눈치는 있구나.”

한립이 내쫓기 전에 포권을 하고 먼저 나가는 것을 보고 육화부인이 중얼거렸다.

이제 방 안에는 그와 골천심 둘만 남았다.

“휴, 나와 네 어미의 관계는 너도 짐작했겠지.”

길게 한숨을 내쉰 육화부인이 먼저 입을 뗐다.

“어째서 어머니를 떠나 혼자 두신 겁니까? 어째서 그렇게 돌아가시게 두신 거예요.”

눈시울이 붉어진 골천심이 따졌다.

“네 어머니의 성격을 모르더냐? 내가 옆에 있기를 원치 않은 것은 그녀다. 과거의 수많은 일을 어찌 한두 마디로 설명할 수 있겠더냐. 네게 이야기를 해봤자 돌이킬 수도 없고……. 두청양은 이미 죽었다니 내 직접 진원을 찾아가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

육화부인은 씁쓸하게 말했다.

“됐습니다. 어머니의 복수는 제가 직접 할 것입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네 체내의 흑겁충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려 수사에게는 왜 제자가 되라고 하신 겁니까? 같은 인족이기 때문이라는 말은 믿을 수가 없군요.”

“흠, 사실 그 녀석의 근골과 심성을 눈여겨보아서 제자로 삼으려 한 것이다. 노부의 경험으로 볼 때 그 녀석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평범한 인물이 아니야.”

“그렇다면 천린운정을 요구하신 것은요?”

“그거야……. 그 녀석의 실력을 확인하기 위해서이고, 그놈이 천린운정을 구해와야 네게 쓸 것이 아니냐?”

육화부인의 말에 골천심의 안색이 달라졌다.

* * *

성주부의 별원으로 돌아온 한립은 자신의 거처로 가지 않고 신양의 거처로 향했다.

문을 두드리자 오래지 않아 신양이 나왔다.

“려 수사군요, 들어오세요.”

안에는 외뿔 거한 헌원행이 앉아 있었고, 해 도인은 보이지 않았다.

“헌원 수사.”

한립은 속으로 놀라면서도 그에게 공수했고, 헌원행도 인사를 해왔다.

“두 분이 대화를 나누시는 중이었다면 저는 다음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한립은 탁자에 놓인 찻잔의 차가 식어 있는 것을 보았다.

“이미 드릴 말씀은 다 드렸습니다. 려 수사께서 성주님을 찾아오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 말씀 나누시지요.”

헌원행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하고 떠났다.

“허허, 려 수사. 무슨 일로 다 찾아 주셨습니까?”

신양은 한립이 앉자 다시 새 잔을 내와 차를 따라 주었다.

“이번 대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자료를 구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한립은 겉치레 따위는 건너뛰고 본론을 말했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신양도 익숙한지 안쪽으로 들어가 종이 뭉치를 들고 나왔다.

“청양성에서 수집한 자료입니다. 가져가서 편하게 살펴보세요.”

자료를 건네는 신양의 얼굴에 웃음이 어렸다.

한립은 지금까지 시합에 열정을 보이지 않았는데, 오늘 자료를 요구하는 것을 보니 제대로 마음을 먹은 듯했다.

“고맙습니다.”

“갑자기 자료를 구하시는 이유라도…….”

“기왕 비무를 하기로 한 것, 좋은 등수에 들고 싶어서 말입니다. 그게 이상하십니까?”

신양의 질문에 한립은 대충 얼버무렸다.

신양이 두청양과 마찬가지로 흑겁충을 이용해 현투사들과 대장들을 부리기 시작한 와중에 진짜 내막을 알게 할 수 없었다.

“하하, 그럴 리가요. 려 수사가 그런 마음을 먹어주셨다니 기쁠 따름입니다.”

“그럼 저는 자료를 살피러 가보겠습니다.”

볼일이 끝나자 한립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신양이 일어나 그를 배웅했다.

그가 떠나고 침음하던 신양이 손뼉을 짝, 쳤다.

“성주님.”

바로 검은 그림자가 내당에서 걸어 나와 무릎을 꿇었다. 한립을 부르러 나타났던 청년 시종이었다.

검은 장포를 입은 청년은 처음 나타났을 때와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고 몸이 어둠 속에 녹아든 것처럼 보였다.

“려비우가 오늘 어디에 가서 무엇을 했는지 알아 오거라.”

“예.”

신양의 명에 시종이 다시 사라졌다.

* * *

3달의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 오성회무 날이 임박했다.

성주부 별원, 신양의 거처가 위치한 객실에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오늘 신양 성주가 비무에 참가할 명단을 발표할 거라 예고했기에 다들 어딘지 들뜬 모습이었다.

대장들은 몰라도 현투사들은 첫 번째 경기에서만 이겨도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그때부터는 현투장에 남든 말든 자유였다.

방 안에는 역입애를 중심으로 도강, 손빙하 등이 모여 있었고, 다른 이들도 두세 명이 모여 있거나 아니면 홀로 있었다.

독룡은 혼자 앉아 있었다.

그는 수시로 역입애를 살폈으나 그때마다 곁에 앉은 이들이 싸늘한 눈빛으로 보내 접근을 막았다.

이때 균형 잡힌 걸음소리가 들리고 한립이 들어왔다.

3달 전과 비교해 약간 마른 듯한 한립은 주먹의 뼈가 약간 도드라질 정도였는데 풍기는 기운은 더 강해져 있었다.

역입애가 그런 한립을 보고 눈빛이 서늘해졌다.

한립은 방안을 훑다 구석에 앉았고, 다른 이들도 그에게 인사를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독룡이 고민하다가 결심을 하고 일어섰다.

“려 수사, 이거 오랜만입니다.”

독룡은 역입애 주변 이들이 눈살을 찌푸리는 걸 개의치 않고 한립 옆에 앉아 살갑게 말을 붙였다.

눈을 뜬 한립은 그와 멀지 않은 곳의 역입애 무리를 번갈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독룡 수사셨군요. 정말 오래간만이네요.”

“오성회무가 내일부터인데, 려 수사께서는 언제나 그렇듯 담담하십니다. 그만큼 자신이 있으신 것이겠지요.”

“자신은요. 이런 큰 대회가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농도 잘하십니다.”

두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 그들끼리 담소를 나누었다.

역입애가 입을 떼려는데 골천심과 요리가 함께 들어왔다. 얼굴에 보광이 어린 골천심도 이전과는 달라 보였다.

“골 수사, 요즘 내내 폐관 수련을 하셨다던데 성과가 있으셨나 봅니다.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으시겠어요.”

역입애가 즉시 일어나 웃으며 다가갔다.

“과찬이십니다.”

골천심은 간단히 답하고 방을 둘러보다 한립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준수한 얼굴을 일그러트린 역입애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려 수사, 제가 여기 앉아도 되겠습니까?”

골천심은 한립 옆자리를 가리켰다.

“물론이지요, 환영입니다.”

한립이 빙긋 웃으며 답하자 골천심이 자리에 앉았다.

요리도 입을 비죽였지만 골천심 옆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지켜보던 독룡은 조금 놀란 듯했다.

“내일이 대회입니다. 준비는 다 되셨습니까?”

웃으며 묻는 골천심의 말에 뼈가 있었다.

“실력자들이 무수히 많은 곳이라 그저 최선을 다하려 합니다.”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말해주세요.”

“아, 마음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한립과 살갑게 이야기를 나누는 골천심을 보고 독룡은 의문이 생겼으나 굳이 묻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청양성 인사들이 더 많이 도착했고, 그중에는 외뿔 거한 헌원행도 있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역입애 옆에 앉지 않고, 골천심과 한립에게 고갯짓을 하고는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한립은 그의 등장에 의아했지만 비무에 현투장 심판이 참석하지 말라는 규정은 없었다.

“하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얼마 후 신양이 기분 좋게 웃으며 등장했다.

“성주님을 뵙습니다.”

“자, 벌써 오성회무가 내일입니다. 다들 준비는 다 되셨습니까?”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성주님!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역입애가 힐끗 골천심을 보며 소리 높여 답했다. 그 곁의 인물들이 그를 따라 답해 대청이 쩌렁쩌렁 울렸다.

청양성 반란으로 고위층이 물갈이되면서 역입애는 그가 선발 명단에 꼭 낄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좋습니다. 이제 명단을 발표하겠습니다.”

신양의 말에 다들 긴장된 표정으로 집중했다.

“1번 골천심, 2번 려비우, 3번 역입애 다음으로 도강, 손빙하, 웅비……. 독룡 및 헌원행 이상 12명입니다.”

신양은 12명의 이름을 뜸 들이지 않고 불렀다.

이름이 불린 이들은 희색을 드러냈지만, 나머지는 실망하며 탄식했다.

골천심과 한립은 이름이 불릴 것을 알고 있어서인지 아무렇지 않았고 떨어진 요리는 낙심하고 독룡은 겨우 붙은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입애는 자신이 한립보다 뒤에 불리자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이 대회가 청양성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아실 겁니다. 명단의 12명은 최선을 다해 4등 안에 들어 청양성의 명예를 드높이길 바랍니다.”

“예, 성주님!”

“좋습니다. 려비우 수사만 남고 다들 돌아가 쉬시지요.”

신양의 말에 다들 한립을 이상하게 쳐다보고 일어났다. 곧 방안에는 한립과 신양만 남았다.

“자령과 석공의 일입니까?”

“맞습니다. 3달 동안 사람을 보내 조사한 결과 무언가를 알아내기는 했습니다.”

한립의 질문에 답을 하는 신양의 표정이 어딘가 어색했다.

“말해주시지요.”

“자령 수사에 관해 현성과 다른 3개의 성에도 알아보았지만 정보를 얻지 못했습니다.”

신양은 한숨을 내쉬었다.

“못 찾았단 말입니까?”

“자령 수사가 정말 현성에 있었다면 정확한 위치는 몰라도 소문이라도 돌았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것조차 없었습니다. 제 판단에는 괴성에 있던가 아니면 적린공경에 들어온 후 인수에 당해 죽은 듯싶습니다.”

신양의 말에 한립은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이 없었다.

“석공 수사에 대해서는 알아낸 게 있습니다. 현성 성주부에 있는데 옥에 갇혀 있답니다.”

“옥에 갇혀 있다고요? 왜 그런지도 알아보셨습니까?”

“성주부에서 엄중히 관리해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목숨이 위험한 처지는 아니라고 하니 걱정하지 마세요.”

“고맙습니다. 자령의 행방은 찾지 못했어도 석공에 대해 알아봐 주셨으니 제 요구를 들어주신 셈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한립을 보고서야 신양은 그제야 안심했다. 그가 나가고 난 뒤 신양은 안쪽 방으로 돌아갔다.

해 도인이 방 한구석에 서 있다 고개를 들고 그를 보았다.

“비무대회가 곧 시작인데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네가 성주인데 수하들은 실력이 없는 데다 기고만장하기만 하면 너도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무표정한 해 도인의 말에 신양이 쓴웃음을 지었다.

“역입애는 실력은 있지만 자만심이 강하고, 다른 성의 최상급 강자들에 비해 부족함이 있다. 그나마 골천심에게 희망을 걸어 볼 만한데. 려 수사는 밑천을 다 보인 것 같지는 않지만 골천심에 비해서는 못하겠지…….”

신양은 해 도인은 신경 쓰지 않고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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