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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958화 (1,715/2,000)

1958화. 제자

*

청년도 걸음을 멈추고 태연한 골천심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감지했는지 조심스럽게 영패를 받아갔다.

“겨우 낡은 영패가 뭐라고. 위조된 신물은 아닌지 확인해 봐야 할 겁니다.”

풍무진이 그걸 보고 냉소했다.

골천심의 실력이 상당하다는 것은 알지만 겨우 현투사였기에 무시하는 것이었다.

문지기 청년이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멈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염양탑을 지키는 문지기면 문지기답게 구는 것이 좋을 겁니다. 괜히 머리를 굴리다 본분에 맞지 않는 행동으로 대인의 큰일을 망치면 당신에게도 좋지 않을 테니.”

골천심은 차분하지만 분명하게 경고했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바로 보고를 올릴 것이니 두 분 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그 말뜻을 알아들은 청년이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얼굴을 굳힌 풍무진은 기분이 상한 듯했으나 육화부인의 거처라 함부로 굴지 못했다.

반 시진이 지나가는 데도 청년이 돌아오지 않자 슬슬 풍무진의 인내심이 떨어져 갔다.

바로 그때 안에서 뚱뚱한 청년이 다시 나타났다.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대인께서 작업 중이시라 기다리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두 분은 안으로 드시지요.”

청년은 미안한 기색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아닙니다. 육화대인께서 바쁘신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니까요.”

풍무진은 시원하게 웃음을 짓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풍 수사, 대인께서 오늘은 중요한 일이 있다고 내일 뵙자고 하십니다. 제가 말한 두 분은 여기 골 수사와 그 동행이십니다.”

청년은 급히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고, 그의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는지 고개를 숙였다.

“뭐라고요?”

풍무진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걸음을 멈췄다.

“고맙습니다.”

골천심은 놀라지도 않고 청년에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한립도 의아하게 생각하고 그녀를 쫓았다.

“가자!”

청년이 그들을 안으로 데리고 가자 풍무진은 일그러진 얼굴로 멀어져 갔다.

수염이 난 중년인이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따라갔다.

* * *

한립과 골천심은 뚱뚱한 청년을 따라 염양탑의 긴 회랑을 지나 나선형으로 만들어진 계단에 이르렀다.

“대인께서는 꼭대기 층에 계시니 저를 따라오시지요.”

청년은 처음과 달리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골 수사의 신물이 없었다면 육화부인을 뵙지 못했을 겁니다. 수사와 동행을 한 것이 다행이군요.”

“어머니께서 남겨 주신 것인데 그걸로 육화부인을 정말 뵐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아 미리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까…….”

한립과 골천심은 뚱뚱한 청년을 따라 최상층의 어느 방 앞에 멈춰 섰다.

“대인, 손님들을 모셔왔…….”

“왔으면 어서 모시고 들어올 것이지 뭘 꾸물거리는 것이냐?”

청년의 말을 끊고 안에서 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급함이 담긴 목소리에 한립과 골천심이 시선을 마주쳤다.

끼익.

마찰음과 함께 문이 열리고 고기를 굽는 것 같은 냄새가 풍겼다.

코끝을 찡긋한 한립이 골천심과 같이 안으로 들어가자 돌로 만든 문이 서서히 닫혔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냄새는 심해졌고, 창가 옆에 기괴하게 생긴 커다란 돌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 돌 탁자 중앙에 뚫린 구멍에 커다란 솥이 바글바글 끓고 있었다.

키는 작지만 뚱뚱한 몸을 지닌 흑의 노인이 소매를 걷고 두툼한 짐승의 뼈를 건져내 거기 붙은 살점을 뜯으면서 다른 손으로 백골 방패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인족과 똑같이 생긴 노인은 숯불에 너무 가까이 앉아서인지 열기로 얼굴이 달아오르고 앞쪽 머리가 절반은 벗겨져 있었다.

턱에 수북하게 자라 세 갈래로 땋아 늘어트린 수염에는 고기 기름이 잔뜩 묻어 있었다.

‘부인’이 연기대사를 칭하는 특별한 호칭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육화부인의 외모는 그 호칭과 거리가 멀었다.

“너희 중 누가 이 골패의…….”

육화부인은 고개를 들다 골천심을 보고 멈칫했다.

“닮았구나, 너무 닮았어. 이 골패의 주인과는 무슨 관계더냐?”

골패를 탁자에 내려놓은 육화부인이 일어나 골천심을 자세히 살폈다.

“골패의 주인이 제 어머니십니다.”

골천심은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홍옥의 딸아이라……. 이름이 무엇이냐?”

“골천심이라 합니다.”

“골천심. 골 씨라고? 네 아비는?”

“저도, 모릅니다. 아버지를 뵌 적도 없고 어머니께 들은 적도 없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아버지께서 이 골패의 원래 주인이라고만 하셨습니다.”

답을 하며 그녀도 육화부인의 얼굴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살폈다. 어미와 육화부인의 사이를 어느 정도 눈치챈 것이다.

옆에 우두커니 선 한립은 속으로 골천심이 미리 말해주지 않은 것을 원망하고 있었다.

그런 관계였으면 진작 말해 그의 근심이나 덜어주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말이다.

“네 어머니는, 잘 지내고 있더냐?”

육화부인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어머니는…….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뭐라고? 홍옥이 어쩌다 그리된 것이야!”

“누군가 어머니의 진령혈맥을 노려서 오래전에 그만…….”

골천심은 말을 잇지 못했다.

육화부인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탁자 주위를 돌다 무형의 기운을 분출해 노기를 드러냈다.

그러다 안타까운 얼굴로 멈춰선 그는 자리에 앉았다.

“그 일에 대해서는 차차 듣기로 하고, 일단 앉거라.”

육화부인의 말에 한립과 골천심이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이 녀석은 누구냐? 반려인 것이야?”

드디어 골천심에게서 시선을 돌린 육화부인이 못마땅한 얼굴로 한립을 보았다. 꼭 사윗감을 살피는 것 같은 상대의 눈빛을 보고 한립은 손을 내저었다.

“오해 마십시오, 선배님. 저는 려비우라 합니다. 골 수사의 벗이라 할 수 있지요.”

“말해 보거라. 무기를 구하기 위해 온 것이냐, 아니면 제작을 의뢰하러 온 것이냐? 제작 의뢰를 할 것이면 개뼈다귀 같은 설계도를 내놓지는 말아야 할 것이야.”

“아닙니다. 저희는 무기를 사기 위해 온 것도 제작을 의뢰하러 온 것도 아닙니다.”

골천심이 답했다.

“그럼 왜 찾아온 것이냐?”

“저희가 찾아온 것은 선배님께 흑겁충을 제거할 방법을 묻기 위해서입니다.”

“청양성에서 온 것이냐?”

한립의 말에 육화부인의 표정도 복잡해졌다.

“그걸 어찌 아셨습니까.”

“흑겁충을 기르는 방법은 내 두청양에게만 알려 주었다. 그놈도 바보가 아니라면 남에게 알리지 않았을 테니 현성 전체에서 그것에 대해 안다면 청양성 사람이라는 뜻 아니겠더냐.”

“선배님의 말씀대로 저희는 청양성에서 왔습니다. 두청양이 흑겁충을 몸에 심어 두었기에 그걸 제거하기 위해 찾아왔고요.”

“그렇다면 두청양의 죽음과 너희도 관계가 있겠구나?”

“흑겁충을 기르는 법을 당신이 두청양에게 전수해 준 것이라고요?”

듣고 있던 골천심이 안색이 달라져 물었다.

육화부인도 그녀가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선배님’에서 ‘당신’으로 변한 것을 알고 마음이 불안해졌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두청양이 비술로 저희의 정혈을 흡수하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지금 성주와 힘을 합쳐 제거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립이 그걸 보고 끼어들었다.

“오래전 노부는 그에게 크게 신세를 진 일이 있어 흑겁충을 기르는 방법을 알려주었을 뿐, 그걸로 무슨 짓을 하는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육화부인은 골천심을 바라보며 찔리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자는 그 비술을 려 수사에게 사용했고, 제게 사용했고……. 제 어머니한테도 사용했습니다.”

“그 말은……. 설마 네 어머니를 해친 것이 두청양이란 소리냐!”

“그건 확신할 수 없지만, 당시 어머니는 현지성에서 두청양에 의해 잡혀갔습니다. 현지성 성주 진원도 연관이 있겠지요.”

“그 일은…… 다시 얘기하자꾸나. 지금 흑겁석을 지니고 있겠지? 그게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테지만 그걸로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게다.”

표정을 추스른 육화부인이 생각에 잠겨 말했다.

“선배님의 말씀은…….”

한립이 미간을 좁혔다.

“흑겁석이 흑겁충을 억제하는 것은 맞지만 그 효과는 나날이 약해져 언젠가 흑겁충이 발작을 일으킬 것이야. 시간을 끌수록 더 맹렬하게 달려들 테니 너희는 죽은 목숨이라 할 수 있지.”

“선배님께서 저희를 도와주시기를 청합니다.”

“노부가 돕기를 원한다면 한 가지 조건에 수락해야 한다.”

“말씀하시지요.”

“노부를 스승으로 삼고 내 제자가 되어라.”

“스승으로 모시라고 하셨습니까?”

한립은 말문이 턱 박혔고, 골천심도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왜, 싫으냐?”

“싫다기보다는 이해가 되지 않아 그럽니다. 이유를 말씀해 주시지요.”

한립이 심호흡을 하며 답했다.

첫 번째 스승이었던 문 대인과의 인상 깊은 기억 때문인지, 그는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에 그리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육화부인을 따라 연기술을 배울 수 있다면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같은 인족으로서 네가 마음에 든다면 어찌하겠느냐?”

코웃음을 친 육화부인이 답했다.

“선배님 같은 분의 제자가 될 수 있다면 제 복일 겁니다. 그런데 제자가 되면 어떤 제약이 따르게 될지요?”

“노부의 곁에서 시중을 들며 최소 만 년 간은 떠날 수 없다.”

“만 년이나요?”

“수행하는 이들에게는 찰나와 같은 시간이지. 그것도 참기 어렵단 말이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내 제자가 되려고 무릎을 꿇고 사정을 했는지 네가 아느냐?”

육화부인이 오만하게 말했다.

“그건 저도 알지만 저는 적린공경에서 찾아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찾기 전에는 현성에 남을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선배님의 호의를 거절해야겠습니다.”

한립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여인이더냐?”

육화 부인이 눈썹을 끌어올렸고,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하거라. 내 제안을 거절하면 노부의 제자가 될 기회가 날아가는 것은 물론 흑겁충을 없앨 기회도 놓치는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허나 염양탑은 장사를 하는 곳이 아닌지요? 골 수사를 봐서라도 저와 거래를 해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허튼 생각 말고 가보거라. 너 같은 녀석과 노부가 무슨 거래를 하겠더냐.”

육화부인은 한립의 모습을 훑고는 보글보글 끓고 있는 솥에서 고기를 꺼내 뜯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다른 손으로 허공을 쥐고 있었다.

한립이 일어나 자리를 뜨려는 것을 보고, 골천심이 입을 열려고 하는데 그가 돌아섰다.

“육화 선배님, 얼마나 오랫동안 술을 못 드셨습니까?”

그 질문에 육화부인이 식사를 멈추고 자신이 습관적으로 왼손을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관찰력은 쓸만하구나. 노부가 술에 죽고 못 사는 것을 알아보았어.”

“오른손은 고기 기름이 가득한데 왼손은 깨끗하시고, 습관적으로 무언가를 집으려 드시니 모를 수 없었습니다.”

한립이 씩 웃음 지었다.

골천심은 그가 무슨 의도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어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서 어쨌단 거냐? 숨겨 놓은 술이라도 있다는 것이냐?”

“숨겨 놓은 술은 없습니다. 그저 선배님께서 며칠 만 기다려 주시면 못 구할 것도 없지요.”

“그게 무슨 소리냐? 설마 술을 빚을 수 있다는 소리냐?”

육화부인이 들고 있던 뼈다귀를 던져 버리고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한립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적린공경은 마기와 천지영기가 차단되어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는 불모지이다. 선주는커녕 속세의 곡물로 만드는 증류주도 만들 수 없는데 네가 무슨 수로?”

“선배님 혈장주(血漿酒)라는 술을 들어 보셨습니까?”

“혈장주?”

“못 들어 보셨어도 상관없습니다. 짧게 설명드리면 저는 혈장주라는 술을 빚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맛이 좀 특이하기는 한데 적린공경 안에서 원하는 바가 너무 많아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혈장주는 호연도인에게 배운 술이었다.

맛에 호불호가 있어서 그는 그리 좋아하지 않았는데, 적린공경의 인수의 피를 사용해 비슷하게 빚을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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