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화. 육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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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보니 새로운 얼굴들이 많이 보이는군. 그래, 현성에도 새로운 인재가 나올 때가 되었지. 오성회무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으면 좋겠구만.”
액회의 시선이 신양과 그 무리에게 잠시 머물렀다 떠났다.
진원과 부견은 활짝 웃는 얼굴을 유지했지만, 속으로는 불평을 늘어놓았다.
아니, 신양처럼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격려한다는 뜻인가? 그러면 앞으로 그들을 누가 대신하더라도 지지하겠다는 말이 아닌가!
“그간 괴성의 세력이 급격히 성장했네. 아직 대대적인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접경지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우리도 더 경계할 수밖에 없네…….”
“성주 대인의 말씀이 옳습니다. 저희 통여성 인근의 흑량성(黑凉城)도 누차 저희 구역에 넘어와 인수를 사냥하고 합니다. 사냥대와 마주치면 그쪽이 먼저 물러서기는 하지만 언제 충돌하게 될지 알 수 없어 민심이 불안하지요.”
부견이 액회의 말에 입을 열었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소규모 충돌에서는 저희가 대부분 승리를 했습죠.”
손도는 은근히 자신의 공로를 자랑했다.
“저희 현지성은 괴성과의 거리가 먼 편이라 비교적 조용합니다만 그래도 첩자들이 숨어들고는 합니다. 수 천 년을 데리고 있던 꽤 강한 현투사가 수세에 몰리자 괴뢰술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진원도 입을 열었다.
“흠, 그런 일이 있습니까? 청양성은 소란이 있어서 괴성이 침투하기 더 쉬웠을 테니 신양 성주도 조심해야겠어요.”
손도는 신양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성주 대인, 청양성은 언제든 괴성에 대한 방비에 신경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신양은 손도를 상대하지 않고 바로 액회를 향해 포권을 했다.
“괜찮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오성회무에 관해 이야기하지.”
액회의 말에 다들 조용해져서 그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규칙은 왕년과 다를 바 없이 각 성에서 12명의 인원을 선발해 내보낼 수 있네. 각 성의 대장이든 아니면 수석 현투사든 모두 참가가 가능하지. 주성인 현성이 16명을 출전시켜 총 64명의 선부들이 비무를 통해 우승자를 가려내면 되네. 최후의 4인에게는 상이 내려질 것이고, 그중 우승자에게는 깜짝 놀랄 만한 큰 상이 내려질 것이야.”
“콜록콜록, 깜짝 놀랄 만한 상이 무엇일지요? 어쩐 일로 성주 대인께서 이런 중요한 일에 뜸을 들이십니까.”
진원이 웃으며 물었다.
“아직 비무까지 3달이 남았으니 참아보게. 정식으로 비무대회가 개막할 때 다들 실망하지 않을 소식을 들을 것이야.”
액회의 미소가 짙어졌다.
“3달 동안 모두 현성의 별원에서 잠시 수련하면 되는데, 미리 현투장을 경험해 보고 싶은 이들은 자유롭게 비무를 해봐도 되네.”
액회는 이것 외에 몇 가지 사실을 공표하고 자리를 떠났다.
잠시 대화를 나누던 네 부속 성의 성주들도 무리를 이끌고 나가자 신양이 마지막으로 대전을 나와 기다리고 있던 동송을 만났다.
“청양성 귀빈들께서는 성안을 둘러보시겠습니까, 아니면 바로 현성의 별원으로 모실까요?”
“오래 이동을 하다 보니 다들 피곤할 텐데 일단 별원으로 안내해 주세요.”
한립, 골천심과 시선을 교환한 신양이 대답했다.
동송은 그들을 데리고 서쪽으로 가서 성주부보다 더 넓은 면적의 별원으로 데리고 갔다.
“먼저 도착하신 세 성주께서 중앙에 있는 거처를 선택하셨습니다. 남은 곳은 양풍소축(凉風小筑)과 백석원(白石園)인데, 그 안의 건물들은 거리가 떨어져 있어 서로 교류하시기에 조금 불편하실 겁니다.”
동송이 별원 대문을 지나며 미안함을 담아 설명했다.
“조용하게 지내기에는 더 낫겠군요.”
신양은 가볍게 답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동송은 그들을 별원 서남쪽의 양풍소축으로 안내했다.
객잔처럼 생긴 건물들이 병렬로 들어서 있었고, 각 건물이 의식을 차단하는 검은 돌로 이루어져 있어 안심하고 머물 수 있었다.
방도 꽤 많아 모두가 하나씩 방을 쓸 수 있었다.
한립은 거처로 들어가 누군가 손을 쓴 흔적이 있는지 확인하고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금방 밤이 찾아왔다.
번쩍 눈을 뜬 한립은 방문을 열고 나가 달이 뜬 하늘을 보다 어딘가로 걸어갔다.
똑똑.
“려 수사?”
문을 두드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천천히 문이 열리고 해 도인이 나타났다.
“신양 수사, 늦은 밤에 실례하겠습니다.”
한립은 문을 열어준 해 도인을 지나 안으로 걸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신양에게로 향했다.
“아닙니다, 앉으세요. 무슨 일이십니까?”
“흑겁충을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하면 다른 요구를 한 가지 들어주신다고 하셨지요. 그 일로 상의를 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
한립도 자리를 잡고 용건을 밝혔다.
“어떤 요구사항인지 말씀해 주시면 힘이 닿는 한에서 애써 보겠습니다.”
“석공과 자령에 대해 조사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자령은 최근 백 년 내에 적린공경에 들어온 여수사이니, 비무대회가 시작되기 전에 답을 주시지요.”
미소를 짓고 있던 신양이 그 말에 난색을 표했다.
“자령이라는 여수사는 수십 년 내로 적린공경에 들어왔으면 알아볼 수 있을 겁니다. 허나 석공은 액회 성주의 수중에 있어 제가 조사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쉬운 일이었으면 제가 신 수사를 찾아왔겠습니까.”
“그렇기는 하지요……. 알겠습니다. 한 번 약조를 지키지 못했으니 이번에는 더욱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한립은 미소를 보이고 그의 거처를 떠나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 한립이 방을 나서려는데 청양성 청년 시종이 문을 두드렸다.
이번에 현성에 온 것은 현투사나 대장들뿐만 아니라 잡일을 도맡아 할 시종들도 있었다.
“려 선배님, 성주님께서 청하십니다.”
“무슨 일로 부르시는지 알더냐?”
“모르겠습니다.”
“가자.”
시종은 한립을 데리고 신양의 거처로 갔다.
그 안에는 신양 본인 외에 골천심, 역입애, 웅비 등도 와있었다.
그가 골천심과 웃으며 눈인사를 하는데, 누군가 적의에 찬 시선을 보내왔다.
바로 역입애였다.
그는 한립이 고개를 돌려 마주 보는데도 눈을 부라리고서야 시선을 돌렸다.
오는 내내 그가 자신에게 적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한립은 황당할 따름이었다.
“모두에게 할 말이 있어 불렀습니다. 대회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고 성안에는 각 성의 세력들이 모여 있기에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거처를 떠나는 일이 없도록 하세요. 외출하더라도 다른 성 사람과의 충돌은 피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신양은 신중하게 말했다.
“예.”
다들 다른 성들이 청양성을 대하는 태도를 보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성주 대인, 각 성에서 12명만 대회에 참가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선발하실 생각입니까?”
역입애가 돌연 이런 질문을 해 모두의 이목을 끌었다. 다들 궁금했는데 묻지 못했던 일이었다.
“출전 명단은 대회가 시작되기 전에 선포할 겁니다. 다들 돌아가세요.”
눈을 반짝인 신양은 정확한 답을 주지 않았다.
실망한 이들이 신양의 거처를 떠나는데 한립은 딴생각을 하며 걸어갔다. 그는 중요하게 할 일이 있어 반드시 출타해야 했다.
“려 수사, 거처를 떠나시려 합니까?”
뒤에서 골천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습니다. 현성이 처음이다 보니 둘러 보려 합니다.”
한립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육화 부인을 찾아 흑겁충에 대해 알아내려는 것이 아니고요?”
골천심이 입술을 달싹여 전음으로 물었다.
“맞습니다.”
“저도 그 일을 조사할 생각이었는데 함께 가시지요. 현성 제일의 연기대사인 육화부인은 만나고 싶다고 아무나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랍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한립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어딘가로 떠나는데 멀리 나무 그늘에서 역입애, 독룡, 도강 등이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립은 골천심을 따라 별원을 나섰고, 오원회무의 영향인지 성은 북적거렸다. 오색천으로 장식한 거리의 상점들은 파는 물건도 청양성보다 품질이 좋아 보였다.
“바깥세상 못지않게 번화합니다.”
한립이 주변을 둘러보며 탄식했다.
“현성의 주성인데 당연하지요.”
골천심은 대수롭지 않게 답하고 번화가를 떠나 인적이 드문 곳으로 걸어갔다.
한참을 그렇게 걸어가 그들이 멈춰선 곳은 산에 기대 지어진 붉은 보탑 앞이었다.
총 9층으로 된 거대한 보탑은 새빨간 주술문자가 새겨져있어 뜨거운 기운을 내뿜었다.
“육화부인의 거처입니까?”
“네, 여기 염양탑(焰陽塔) 9층에요. 하지만 만나기 쉽지 않을 겁니다.”
골천심이 고개를 들어 탑 꼭대기를 가리켰다.
“잘 아시는 것 같은데, 육화부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제가 잘 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솔직히 현성 사람 중에서 현성 최고의 연기 대사인 육화부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그렇게 연기술이 대단합니까?”
골천심의 얼굴에 동경이 어린 것을 보고 한립이 눈썹을 끌어올렸다.
“물론이죠. 적린공경에 들어오기 전에 3품 성기를 제련했던 실력자인데요.”
“3품 마기!”
한립은 깜짝 놀랐다.
마족들은 성기라 부르는 마기는 선기처럼 등급이 나뉘었다.
장천병을 제외하고 그가 본 가장 강력한 보물이 천호화혈도와 라타비파였는데 그것들이 3품 선기였다.
천호화혈도나 라타비파 급의 선기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면 엄청난 실력자임이 분명했다.
“바깥에서는 그랬을지 몰라도 마기나 선령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적린공경에서는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육화부인은 성신지력을 이용하는 방법을 연구해서 독자적인 길을 개척했어요.”
“청양성에서 본 성신지력으로 만들어진 금제도 그럼 전부 육화부인의 솜씨겠군요?”
“그뿐 아니라 육화부인은 성신지력을 병장기에 주입해 바깥 성기와 비슷한 위력을 낼 수 있게 한다고 해요. 그런 무기를 만드는 대가가 엄청나서 우리는 구할 수 없을 테지만요.”
골천심의 말에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골천심은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염양탑 문 앞으로 갔다.
“활화산에 지어진 탑이에요. 마기를 움직일 수 없는 적린공경에서는 지화를 이용해 제련하는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런데 왜 이리 사람이 없는 것입니까? 실력이 좋은 연기대사에게 무기를 청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올 것 같은데요.”
“육화부인은 액회 성주 전속 연기사로 존귀한 신분을 누리고 방해받는 것을 싫어해서 아무나 찾지 못해요.”
골천심이 대답하고는 문을 두드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얼굴에 부스럼 자국이 있는 키 작고 뚱뚱한 소년이 나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소년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그 둘을 훑었다.
“육화부인의 명성을 흠모하다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뵙기를 청하니 말씀을 전해 주시지요.”
골천심이 나서서 공수했고 한립도 예를 취했다.
“아, 대인께서는 며칠 전 폐관에 들어가셔서 손님을 받지 않으십니다. 돌아가시죠.”
소년은 바로 축객령을 내렸다.
“언제 출관하실지 알 수 있겠습니까?”
인상을 찡그린 한립이 물었다.
“모릅니다. 짧으면 7, 8년만 출관하시기도 하고 길면 백여 년도 걸리니까요!”
“잠시만요, 저희는…….”
그대로 들어가려는 소년의 앞을 골천심이 막았다.
“에이, 왜 이러십니까! 우리 대인께서 어떤 분이신데 만나고 싶다고 다 만날 수 있는 줄 아십니까! 가세요!”
“노예나 다름없는 청양성의 현투사들이 육화부인을 뵐 생각을 하다니 어이가 없구나.”
이때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리고, 성주부 대전에서 보았던 현지성 풍무진이 나타났다.
그의 뒤로 현지성 복색을 한 까만 얼굴에 수염이 자란 방울 같은 눈을 지닌 중년인이 뒤따랐는데 그 눈빛에 야수와 같은 포악함이 도사리고 있었다.
한립은 아무 소리 하지 않았고 골천심도 평온한 얼굴로 노기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들을 지나친 풍무진이 작고 뚱뚱한 소년에게 금색 천을 건넸다.
“저는 풍무진이라 합니다. 의부님이신 현지성 성주의 명을 받아 육화대인을 뵈러 왔으니 이것을 수사께서 대신 전해 주십시오.”
“풍 수사, 잠시 기다려 주셔야겠습니다. 이름은 제가 전할 것이나 만나 주실지는 대인께서 결정하실 일이라…….”
청년이 천에 적힌 내용을 확인하고 아첨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웃으며 대답하는 풍무진은 육화부인이 만나 줄 거라 확신하는 눈치였다.
“잠시 기다려 주시죠. 제게도 신물이 있는데 대신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골천심이 들어가려는 청년을 불러 백골로 만든 영패를 내주었다.
균열이 생긴 영패는 아주 오래된 물건 같았는데 물이 흐르는 듯 주술문자가 새겨져 은은하게 하얀빛을 냈다.
그걸 본 한립의 눈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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