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화. 동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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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송은 그들을 이끌고 거대한 석전 옆에 이르렀다.
“안으로 들어가 잠시 쉬고 계시지요. 제가 이미 성주 대인께 소식을 알렸으니 금방 오실 겁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신양이 인사를 하자 동송은 예의 바르게 미소를 지어 보였고 그는 무리를 이끌고 성큼성큼 대전 안으로 걸어갔다.
누가 보아도 상석인 커다란 의자는 비어 있었지만, 그 왼쪽 아래로 준비된 자리에는 이미 열댓 명이 앉아 있었다.
그중 키가 크지는 않지만 몸통이 유난히 두껍고 코가 까무잡잡한 중년 사내가 눈에 띄었다.
넉넉한 짐승 가죽 외투를 걸친 중년 사내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옆으로 체구가 큰 우람한 거한이 몸을 새하얀 붕대로 감고 새까만 뺨 한쪽만 겉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눈빛만 보아도 포악한 성정이 느껴졌는데, 특이하게도 붕대를 감은 팔 하나가 유난히 길어 바닥에 늘어졌다.
그들도 무어라 대화를 나누다 말고 새로 들어온 이들을 쳐다보았다.
“부 성주, 단 수사, 오래간만입니다.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신양은 웃는 낯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붕대를 두른 거한은 그런 그를 향해 코웃음을 쳤고, 중년 사내는 아예 아무 소리도 못 들은 것처럼 시선도 주지 않았다.
신양은 자조적으로 웃음을 지으며 일행을 데리고 그들 맞은편에 앉으려 했다.
그때 문밖에서 마른기침 소리와 함께 창백한 얼굴에 병색이 짙은 중년 사내가 들어왔다.
한립은 그 목젖 부분에 회색 비늘이 들어차 아래위로 움직이며 진동하는 것을 보았다.
그가 상대의 목을 유심히 보고 있을 때, 병색 짙은 사내 뒤에서 누군가 번뜩 튀어나와 버들잎처럼 가늘고 긴 검을 들고 한립을 향해 달려들었다.
팅!
자신의 오른쪽 눈을 노리는 칼을 본 한립도 무섭게 빠르게 반응했다. 화지동천을 제련한 두 손가락을 세워 검날을 잡아챈 것이다.
검신이 진동을 하다 빠르게 빠져나갔다.
검을 든 이는 새하얀 장삼을 걸친 젊은 공자였다.
굉장히 수려하게 생긴 공자는 부드러운 얼굴 때문에 성별이 모호한 느낌이 있었다.
“함부로 의부님을 쳐다보다니 네 목을 베어 버리겠다.”
서늘한 표정의 젊은 공자는 목소리도 중성적이라 사내인지 여인인지 분별하기 어려웠다.
“큼, 무진아 그만하거라. 어찌 보잘것없는 노예를 상대로 화를 내는 것이냐.”
“예.”
병든 사내의 말에 젊은 공자가 즉시 원래 자리로 물러나 한립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려 수사, 도착하자마자 풍무진에게 걸리셨습니다. 현투장에서 만나게 되면 분명 죽이려 들 거예요.”
골천심의 전음이 머리를 울렸다.
“허약해 보이는 데 그리 강합니까?”
“현지성 성주 진원 휘하의 제일 고수입니다. 두 다리를 위주로 혈규를 뚫어 그림자도 없이 이동하고 류엽착검(柳葉窄劍)의 위력도 극도로 강합니다.”
“저기 붕대를 부른 사내는 어떻습니까.”
“단통이란 잡니다. 통현비(通玄臂)라는 신통을 수련해 전문적으로 오른팔에 현규를 뚫어서 저렇게 기이한 모습이 되었지요. 지난번에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피부가 저렇게 검지도 붕대를 감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또 다른 강력한 신통을 익힌 것이겠지요.”
“아, 단통도 통여성 성주 부견의 심복인데 지난번 제게 지고는 제일 고수라는 칭호를 빼앗긴 것으로 압니다. 이를 갈고 왔을 거예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병든 사내 진원을 따라 현지성 무리가 먼저 부견 맞은편에 앉아 신양 일행은 어쩔 수 없이 그들 뒤에 앉아야 했다.
“진 수사, 보셨습니까? 이름도 없는 잡졸이 반란을 꾀해서 뻔뻔하게 성주 자리를 차지하고 현성의 오성회무에 참석했습니다. 수치심이라는 글자를 어찌 쓰는 지나 아는지 모르겠어요?”
줄곧 눈을 감고 있던 부견이 눈을 떴다.
그러자 그 휘하의 수하들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부 수사. 그런 쉬운 글자도 어찌 쓰는지 모르십니까? 제게 짐승 가죽과 쓸 만한 돌을 찾아다 주시면 제가 명필로 써드리겠습니다.”
신양은 전혀 주눅 들지 않고 태연하게 답했다.
진원도 의자에 기대앉아 다리를 꼬고 입을 열었다.
“지난번 현성에서 만났을 때 두청양에게 언질을 주었건만, 쯧쯧……. 반골 기질이 있어 조심해야 한다고 했는데도 말을 들어 먹어야지.”
“진원 수사, 현지성에서 하실 일이 없어 우리 청양성까지 신경을 쓰십니까? 두청양은 당신의 조언을 귀담아들었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성안의 수하들이 그에게 불만이 자자해서 저를 추대한 것을 어쩌겠습니까.”
신양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어이없는 소리를 태연하게 하다니 한립이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쓸데없는 소리는 되었고, 지난번 두청양이 데려온 것들은 그럭저럭 봐줄 만했는데 이번에 당신이 데려온 것들은 말라비틀어진 풀떼기 같습니다. 아, 물론 골 수사는 예외네.”
부견이 조소를 하다 덧붙였다.
독룡 등이 얼굴을 굳혔지만, 감히 대꾸하지 못했다. 그리고 역입애의 주먹에서는 뿌드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콜록, 콜록……. 저기 허약하게 생긴 것은 인족이겠군요?”
진원도 기침을 몇 번 하더니 한립을 가리켰다.
그 말에 한립은 미간을 좁혔지만 상대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밝게 답했다.
“제가 인족인 것은 맞습니다만, 허약하다는 말은 저보다는 당신 혹은 당신의 아드님……. 아니, 아니지 따님에게 더 어울릴 듯합니다. 풍무진 수사는 아무리 보아도 사내인지 여인인지 판단이 서질 않는군요?”
그의 말이 끝나자 다들 깜짝 놀란 얼굴로 괴이한 표정을 지었다.
현지성 성주 진원은 특별한 사정이 있어 항시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얬는데 성주라는 신분과 실력 때문에 아무도 이렇게 공공연하게 조롱하지 못했다.
골천심은 미간을 좁혔고 액입애는 냉소를 지었다.
“이 천한 것이 어딜 함부로 입을 놀리는 것이냐! 정녕 죽고 싶으냐!”
진원이 화를 내기도 전에 풍무진이 안색이 퍼렇게 질려 노호성을 터트렸다.
“진 성주께서 내 휘하의 현투사에게 물어서 그가 답을 한 것으로 아는 데 문제가 있느냐? 그보다 너는 대체 무엇이라고 끼어드는 것이야.”
신양이 그런 풍무진을 냉랭히 질책했다.
“당신…….”
노한 풍무진이 그를 가리키며 뭐라 소리치려 했다.
“콜록, 콜록……. 그만하고 물러가거라. 신 성주 아주 당찬 수하를 두셨습니다.”
진원이 손짓해 풍무진을 물리고,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볼 때 피차일반입니다.”
신양이 미소 지었고 한립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러나 한립과 달리 풍무진은 살기등등하게 그를 노려보았다.
“충과 의라고는 모르는 자가 어디서 함부로 나대는지. 정말 우리가 당신을 어쩌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부견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흠, 그렇게 제가 불만이시면 어디 저를 죽일 수 있는지 시험해 보시던가요?”
하하 웃음을 흘린 신양은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청양성 도강 등이 이를 보고 분분히 일어섰고, 부견의 수하들도 마찬가지였다.
현지성 성주 진원은 아무 소리 하지 않았고 심하게 기침만 했다.
조그만 불씨라도 튀면 살벌한 전투가 시작될 듯 분위기가 심각해졌다.
“이거 참 늦었습니다. 다들 화목하게 지내셔야지요…….”
이때 묘한 자성을 지닌 목소리가 대전 바깥에서 들려왔다.
뚱뚱한 체구에 얼굴에 수염을 가득 기른 회포 노인이 웃으며 들어오고 있었다.
“다들 현성 휘하에 있는 사람들인데 서로 도우며 살아야지 싸워봐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리 몸을 쓰고 싶으시면 오성회무에서 실력을 발휘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손 수사,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신양이 회포 노인을 보고 활짝 웃음 지었다.
“신양 성주, 허허. 이거 축하드립니다.”
회포 노인은 자연스럽게 예를 취하며 그를 축하했다. 그의 무리는 청양성 무리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대전 안에서 유일하게 신양과 웃으며 인사를 한 사람이었다.
“저 사람이 백암성 성주 손도겠군요.”
한립이 전음으로 골천심에게 말을 붙였다.
“맞아요.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얼굴에서 웃음이 떠날 날이 없지만 네 부속성 중에서 가장 세력이 강합니다. 그걸 드러내지는 않지만요. 그 뒤에 추한 용모를 지닌 녀석이 보이십니까?”
골천심의 말에 한립은 피둥피둥 살이 찐 손도의 몸 뒤로 왜소하고 못생긴 소년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심한 들창코에 입술이 두꺼워서 돼지를 꼭 닮은 모양새였는데, 멍한 얼굴로 기름이 줄줄 흐르는 인수 다리를 열심히 뜯어 먹고 있었다.
“보입니다.”
“방선이라 불리는 자로, 평소에는 유순해 보이지만 일단 전투에 돌입하면 완전 다른 사람이 되지요. 어떻게 하는 것인지 코와 입에서 기이한 음파를 날려 상대방을 마비시킵니다. 저도 멋모르고 싸우다 고생을 했던 경험이 있고요.”
한립은 골천심의 말을 잘 기억해 두었다.
손도의 출현으로 다른 이들도 자연스럽게 다시 자리에 앉았다.
“진 수사, 부 수사께서는 언제 현성에 도착하셨습니까?”
손도가 진원과 부견에게 물었다.
“며칠 전에 도착했습니다, 콜록…….”
진원이 미소를 머금고 답했다.
“저는 그 전에 도착했습니다.”
부견은 다시 눈을 감았다.
“제가 일이 있어 미리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정말 오래간만에 보는 것 아닙니까.”
“콜록! 지난번 오성회무 이후 처음 보는 것이니 그렇지요. 콜록콜록, 두 수사는 그렇게 헤어지고 영영 다시 못 보게 될 줄 몰랐습니다.”
손도의 말에 진원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요. 신양 수사가 그 자리를 대신 한 것은 그만한 능력이 있어서일 테니, 진 수사께서도 그만 받아 들이…….”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데 바깥에서 육중한 걸음 소리가 들렸다.
평범한 체형에 평범한 얼굴을 한 중년 사내가 문턱을 넘어 들어오고 있었고 그 뒤로 갑옷을 입은 사내와 여인이 따라왔다.
흰머리가 나기 시작한 중년 사내는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중년 농부처럼 보였다.
오히려 그 뒤에 선 두 사람이 한 명은 풍채가 건장하고, 다른 한 명은 자태가 빼어나 선남선녀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이 입은 갑옷도 정교한 문양이 들어간 화려한 물건이었다.
그들이 들어서자 부견, 손도가 바로 일어섰고 진원도 꼬고 있던 발을 풀었다.
신양과 그 휘하의 사람들도 중년 사내의 신분을 추측하고 얼른 일어섰다.
“액회 성주님을 뵙습니다!”
모두가 소리를 높여 인사를 하는데, 한립은 골천심의 눈길이 영준한 사내에게 가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왜 그러십니까? 저 훤칠한 사내와 원한이라도 있으십니까?”
한립은 전음을 보냈다.
“원한은요, 연속으로 수차례 오성회무에서 우승한 주자원입니다. 괴상한 상고 연체공법을 익혀 수행을 종잡을 수 없고, 한 번도 시합에서 전력을 다한 적이 없는 자입니다. 너무 빨리 저자와 맞붙지 않게 해달라 기도라도 해야 할 판인걸요.”
골천심은 그의 어조에 담긴 장난기를 받아주지 않고 정색하며 답했다.
중년 사내는 인자한 얼굴로 모두를 향해 손을 뻗어 앉으라는 표시를 했다.
하지만 그가 앉기 전에 누가 감히 앉을 수 있겠는가.
액회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먼저 상석에 앉았고, 갑옷 남녀가 그의 뒤에 자리 잡았다.
그제야 성주들을 시작으로 대전 안에 모인 이들이 한 명씩 앉기 시작했다.
“모두 멀리 오느라 수고가 많을 텐데, 현성의 접대가 부족했다면 이해해 주게.”
액회는 대전 안의 충돌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이고,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액 성주님께서 너무 환대를 해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손도가 그 말을 듣고 서둘러 답했다.
“하하. 오성회무는 현성 각 성의 중요한 행사일세. 각 성의 화합을 도모하는 동시에 실력을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하고. 이를 통해 모두 발전한다면 좋은 일 아니겠는가.”
액회가 웃으며 하는 말에 손도 등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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