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화. 현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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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반년이 지나 출발 당일.
평범한 복장으로 옷을 갈아입은 한립은 현투장을 떠났다.
신양이 진작 언질을 줬는지, 아무도 그를 막지 않아 성주부까지 단숨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중을 나온 일꾼에 의해 간 곳은 일전에 보았던 의사 대전이었고, 그 안 모인 이들은 그도 다 알만한 자들이었다.
골천심, 독룡, 도강, 손빙하 등 현투장의 수석 현투사들이 전부 모여 있었고 그 밖에 신양에게 굴복한 웅비, 훤원행 등까지 7, 80명은 되어 보였다.
대부분 어딘가 모르게 들뜬 얼굴이었는데, 특히 수석 현투사들은 삼삼오오 모여 오성회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립이 들어온 것을 보고 대다수는 얼굴만 확인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가 현투장에서 어느 정도 인기가 있더라도 수석 현투사들이 보기에는 별 것 아닌 존재였다.
골천심, 신양과 함께 두청양을 죽인 사실이 외부로 흘러나가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한립은 신경 쓰지 않고 대전의 조용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골천심은 그때 독룡, 도강 그리고 금발 청년과 함께 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요리라는 보라색 장포를 입은 여인도 앉아 있었다.
한립을 본 그녀는 다른 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일어나 다가왔다. 미간을 좁힌 요리가 그녀를 따라오고 있었다.
“저 녀석은 누굽니까?”
금발 청년이 한립을 서늘하게 훑고 물었다.
잘생긴 청년은 기운이 남달라 독룡, 도강을 압도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특별히 허가를 받아 몇 년 동안 폐관 수련하셨으니, 역 형께서 저자를 모르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최근 현투장에 들어온 려비우라는 현투사인데 아직 현규를 마흔 몇 개밖에 뚫지 못했지만, 실력이 쓸만해서 독룡 수사를 이긴 적도 있지요. 거기다 인족이라는 사실 때문에 꽤 인기를 누렸는데 5년 전부터인가 역시 특별 허가를 받아 폐관 수련을 했다더군요.”
도강이 독룡을 보고 눈짓하며 설명했다.
“그땐 사정이 있어서 그랬던 겁니다. 지난 일을 다시 꺼내 무엇합니까!”
독룡은 그런 도강을 노려보았다.
“인족? 확실히 신선하기는 합니다. 이번에 현성으로 가서 비무에 참가하려는 걸까요?”
금발 청년은 경시하는 빛을 띠고 물었다.
“그럴 지도요. 그렇지 않았으면 그간 폐관 수련은 왜 했겠습니까?”
도강이 웃음을 흘렸다.
그때 자리에 앉은 한립을 위해 바로 시녀 한 명이 차를 내왔다.
“오랜만입니다, 려 수사.”
차를 마시고 있을 때 골천심이 웃으며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요리는 그 옆에서 냉담한 얼굴로 한립이 안 보이는 것처럼 허공만 쳐다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골 수사.”
“신양 수사가 분명 수사를 청할 거라 짐작했습니다. 그간 계속 폐관 수련을 하셨다던데 실력이 더 느신 듯합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보다는 골 수사의 실력이 부쩍 늘어난 것 같아 축하를 드려야겠군요.”
한립의 입꼬리가 휘었고, 골천심의 미소가 어색해졌다.
비밀 창고에서 얻은 보물들로 수련의 고비를 넘기고 실력이 크게 늘어난 것은 비밀이었는데, 한립이 한눈에 알아봤던 것이다.
한립은 몇 년 사이 힘만 세진 것이 아니라 감각도 예민해져서 골천심의 변화를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려 수사의 안목도 실력만큼이나 높으십니다.”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간 골천심은 그의 옆에 앉았다. 멀리서 그걸 보는 금발 청년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서로 치켜세워주는 것은 그만하고, 청양성에 오래 계셔서 저보다 오성회무에 대해 잘 아실 테니 그 이야기나 해주시지요.”
한립이 이렇게 말하자 골천심이 피식 웃으며 막 입을 떼려 했다.
“하하하, 다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리고 신양이 성주의 복색을 하고 대전 안쪽으로 뚫린 문으로 들어와 상석에 앉았다.
해 도인이 항상 그랬듯 묵묵히 그 뒤에 서 있었다.
한립은 그를 쳐다보았지만 해 도인은 고개를 숙이고 그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성주님을 뵙습니다!”
대전 안의 모두가 일어나 예를 취했다. 한립과 골천심도 대화를 멈추고 일어섰다.
“여기 모인 이들은 청양성의 기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들 편히 앉으세요.”
신양은 두 팔을 펼치고 인자하게 말하자 다들 앉기는 했지만, 대전 안은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오늘 모두가 모인 이유는 다들 알고 있겠지만 오성회무에 참가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 전에 간략하게 설명할 것이 있습니다.”
“외람되지만, 성주께 여쭙겠습니다. 오성회무에 달라진 점이라도 있는지요?”
금발 청년이 가장 먼저 물었다.
“저 사람은?”
그걸 본 한립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역입애입니다. 몇 년 동안 폐관 수련을 하느라 려 수사는 처음 보실 거예요.”
골천심도 목소리를 낮춰 답해주었다
역입애라면 2구역의 수석 현투사로, 모두의 공인을 받은 실력자이자 현투장에서 골천심 다음가는 2인자라고 볼 수 있었다.
“입수한 소식에 따르면 액회 성주께서 이번 비무를 위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후한 상을 내리실 예정이라 합니다. 이에 다른 성들도 가장 강한 인원이 대회에 참가한다고 합니다.”
신양이 미소를 머금었다. 그 말에 다들 관심을 보였고 한립은 생각에 잠겼다.
‘액회 성주가 갑자기 후한 상을 내리게 된 내막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 청양성은 4대 부속 성 중 하나로 절대 다른 성에 뒤처질 수 없습니다. 모두 반드시 승리를 거둬 청양성의 체면을 지킵시다.”
신양은 엄숙하게 말했다.
“청양성에 체면을 떨구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성주님. 현성 주성의 참가자보다 좋은 성적을 내겠습니다.”
성주의 말에 대전에 모인 이들이 떠들썩하게 다짐을 했다.
“여러분의 대답을 들으니 안심이 됩니다. 바로 출발 준비를 합시다!”
신양이 미소를 띠며 대전 바깥으로 걸어 나갔고, 대전에 모인 이들도 그를 따라 청양성 바깥으로 향했다.
날씨가 좋았지만, 여전히 모래바람이 불어 하늘까지 노란 기운이 덮여 있었다. 십여 마리의 방대한 체구를 지닌 인수들이 위에 안장이나 사람이 탈 수 있는 공간을 얹고 있었다.
신양이 먼저 검은 비늘이 돋은 코끼리인 오린상 등에 오르고 해 도인이 함께했다.
다른 이들도 각자 인수를 찾아 오르고 있었는데, 인수의 수가 많고 익숙한 이들끼리 모여 앉아 북적이지는 않았다.
한립은 아무도 타지 않은 말 형태의 인수에 오르려 했다.
“려 수사, 괜찮으면 이리로 오시지요?”
신양이 돌연 그쪽을 보더니 웃으며 권했다. 눈을 반짝인 한립은 해 도인을 힐끗 보고 빙긋 미소 지었다.
“성주님과 동석할 수 있다니 제 영광입니다.”
그는 바로 바닥을 박차고 표표히 뛰어올랐다.
“골 수사도 이리로 오시지요. 가는 동안 대화나 나누게 말입니다.”
신양은 골천심도 초대했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미소를 지은 골천심도 오린상 등에 올랐다.
신양의 손짓에 거대한 오린상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고, 멀지 않은 곳에서 역입애가 난색을 표하다 다른 거대 사슴의 등에 올랐다.
* * *
2년이 지나 흙먼지가 뿌연 평원의 끝에 하늘을 받치고 서있는 거인처럼 우뚝 솟은 산맥이 나타났다.
산맥과 백여 리를 앞두고 십여 마리의 인수들이 대열을 이루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는데, 그중 가장 앞선 오린상의 등에 신양, 한립 그리고 골천심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살며시 눈을 뜨고 산맥을 바라본 한립은 흐릿한 윤곽만으로 거대한 성이 세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신 성주, 저기 산맥에 보이는 성이 현성입니까?”
“맞습니다. 중현산맥(重玄山脈)에 세워진 현성은 그 산그늘에 숨어 바람을 막고, 또 그 산세를 이용해 방어하지요. 우리 청양성도 이곳을 본 따 세워졌습니다.”
신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신양 성주의 인도로 청양성이 많이 변할 듯싶습니다. 현성을 넘어설 거라 말할 수는 없어도 부속성들 중에서 최고가 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골천심도 눈을 뜨고 웃으며 말했다.
“하하……. 수사의 말씀대로 되었으면 좋겠군요.”
세 사람이 한담을 나누는 사이 성에 도착했다.
멀리서는 흐릿하게 보이던 성의 웅장한 모습이 드러났다.
검은 암석을 쌓아 만든 성벽에는 거대한 하얀 인수의 뼈가 박혀 광택을 냈고 그 안에 함유된 성신지력이 진법과 비슷하게 성을 지키고 있었다.
성문은 총 3개로 중간의 수십 장에 달하는 정문과 양옆에 조금 작은 쪽문 두 개가 있었다.
병사들이 지키고 선 3개의 성문은 모두 열려 있었지만, 중간으로 들어오는 이들은 없었고 오직 양쪽의 쪽문으로만 사람들이 오고 갔다.
신양은 무리를 이끌고 정문 아래로 가서 그곳의 병사에게 청양성 성주의 신물을 보여주었다.
병사는 즉시 검은 장포 차림에 짙은 눈썹을 지닌 청년을 불러왔다.
“신 성주님과 청양성의 귀빈들이 오셨군요. 저는 성주부까지 안내를 맡은 동송이라 합니다.”
“동 수사, 다른 성에서도 도착했습니까?”
신양은 짙은 눈썹 청년의 인사에 예를 취하고 물었다.
“통여성, 현지성, 백암성의 귀빈분들도 모두 도착하셔서 성주부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 저희가 늦었군요.”
“아닙니다. 기간 내에 오셨는데 그런 말씀 마십시오.”
동송은 손을 내저었다.
“그래도 시간을 지체할 수 없으니 수고스럽겠지만 안내 부탁드리겠습니다.”
신양의 말에 동송이 대답하고 수하들을 시켜 먼저 성주부에 청양성 사람들이 도착한 사실을 알렸다.
한립과 골천심이 신양을 따라 가장 앞서 걸어가자 역입애의 미간에 점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신양이라는 새로운 성주는 잘 몰라도 그가 폐관한 세월 동안 두청양을 제거한 것만 봐도 가볍게 볼 인물은 아니었다.
골천심이야 실력으로 그보다 위니 인정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몇 번 손속을 겨뤘지만, 항상 그가 패배를 인정하며 시합이 끝났다.
유독 려비우가 거슬렸는데 도강과 손빙하도 어찌 된 영문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역입애가 그를 의심스럽게 살피는 것도 모르고 한립은 성에 들어서자 주변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성안의 건물들도 아주 질서정연하게 배치가 되어 있고, 성벽과 마찬가지로 검은 돌을 곱게 잘라 쌓아 만들어져 있었다.
건축양식이 단조롭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적린공경과 같은 황폐한 비경 안에서 이 정도만 갖추고 사는 것도 대단하다 할 수 있었다.
드넓은 대로는 대형 인수가 통행하는데도 문제가 없었고, 양옆으로 자리 잡은 상가에는 인수 뼈와 요핵 등의 물품들을 팔았다.
저녁 무렵이라 그런지 행인들이 많지 않았는데 가끔 성 곳곳에서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성 중심으로 가던 한립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전과는 다른 건물을 보아서였다.
극히 넓은 면적을 차지한 원형 건축물은 대량의 검은 돌기둥들에 에워싸여 있었고, 성벽과 마찬가지로 하얀 인수 뼈가 박혀 있었다.
원형 건물 바깥의 광장 중앙에 세워진 조각상에 눈이 갔다.
청양성에도 비슷한 형태의 다른 석상을 보아 신양에게 그 출처를 물어봤지만, 그도 알지 못했다.
그들은 거대 원형 건축물을 돌아 성주부에 도착했다.
현성의 성주부와 청양성의 성주부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
눈앞의 성주부도 화려하진 않았지만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고, 길마다 푸른 돌판이 깔린 데다 사람과 짐승 혹은 반인반수의 모습을 한 신의 석상들이 들어서 있었다.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돌로 만든 궁전들은 한립이 마역에서 보았던 것과 어느 정도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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