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954화 (1,711/2,000)
  • 1954화. 오성회무(五城會武)

    *

    반각(刻)이 흐르고 의식을 거둔 해 도인이 입을 열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물어볼 것이 있으면 얘기 하세요.”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한립의 간단한 질문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청양성에서 많은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몇 가지 것들은, 아주 중요한 기억이었고요. 어찌 되었든 잠시 신양 곁에 있으면서 중요한 일을 준비하려 합니다. 후에 현성으로 갈 생각이니 그때 함께 가시지요.”

    “원래는 자령의 소식도 알아보고, 석천공의 행방도 알아보기 위해 청양성을 떠나려 했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니 같이 가겠습니다. 그 전에 무슨 준비를 하는지 말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수사는 어서 <천살진옥공>을 익혀 힘을 키워야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처할 수 있을 겁니다.”

    해 도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현성으로 언제 떠날 예정입니까?”

    “때가 되면 저절로 알게 될 겁니다. 허나 3, 4년 내로는 움직일 수 없으니 그 시간을 허투루 쓰지 마십시오.”

    미간을 좁힌 한립이 다른 질문을 하려 했지만 해 도인이 손을 저었다.

    “가야겠습니다.”

    이 말만 남긴 채, 해 도인은 석문을 나섰다.

    그가 떠나고 한참을 홀로 생각에 잠겼던 한립도 고개를 털어냈다. 그리고 이내 해 도인이 알려준 현문을 해석해 <천살진옥공>을 살폈다.

    <대주천성원공>, <우화비승공> 그리고 <대력금강결> 보다 심오하고 진령혈맥의 힘으로 현규를 뚫는 방식은 현묘하기까지 했다.

    3일 밤낮을 앉아 있다 눈을 뜬 한립은 간신히 <천살진옥공> 1성 공법을 이해하고 수련을 시작했다.

    요핵을 하나 꺼내 서서히 <천살진옥공>을 운용하자 가슴과 배에 자리 잡은 36개의 현규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거렸다.

    <천살진옥공> 제1성은 가슴과 배에 150개의 현규를 뚫는 방법이 담겨 있었다.

    1성 공법의 핵심은 기운을 모으는 데 있어서 <우화비승공>처럼 속도에 치중하거나 <대력금강결>처럼 힘에 치중하지 않았다.

    <우화비승공>이나 <대력금강결> 같은 신통은 2성부터 익힐 수 있을 터였다.

    그간 연체술을 수련하며 깨달은 바로 근간이 되는 몸통에 현규의 수가 많아야 기초를 탄탄히 쌓고 수행의 길에서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었다.

    겨우 36개의 현규를 지니고, 그가 더 많은 현규를 지닌 이들과 대항할 수 있었던 것도 <대주천성원공>으로 수련한 현규들이 전부 기운을 모으는 축기류 현규였기 때문이다.

    운 좋게 두청양의 창고에서 찾은 조각상에 공법의 가장 앞부분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조골진인에게 찾은 조각상에는 더 많은 공법이 담겨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한립이 공법을 운용해 몸 안의 요핵을 녹이자 뱃속의 장천병이 웅! 떨리며 성신지력을 방출했다.

    방대하고 정순한 성신지력은 그가 연화중인 요핵 이상이었다.

    흠칫 놀란 한립은 곧 희색을 드러냈다.

    가라혈진에서 그 대신 장천병이 흡수한 두청양 등의 성신지력이 흘러나와 그의 수련을 돕고 있었다.

    한립은 급히 <천살진옥공>을 운용해 끊임없이 쏟아지는 정순한 성신지력을 연화시켰고, 동시에 진령혈맥의 힘을 이용해 현규를 뚫으려 했다.

    웅!

    다양한 색깔의 화려한 빛들과 함께 진룡, 천봉, 산악거원 등의 진령허상들이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한립은 경탄을 터트렸다.

    현투장에서 여러 번 진령혈맥을 발동하려 했지만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억눌려 발현되지 않았는데, 오늘은 가뿐하게 진령 허상들을 불러낼 수 있었다.

    ‘가라혈진의 영향을 받아서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고개를 저은 한립은 잡생각을 버리고 집중했다.

    진령허상들은 이전처럼 9개가 아니라 하나가 추가되어 있었다.

    거대한 백사(白蛇)가 용처럼 몸을 꿈틀거리는데, 핏빛의 두 눈은 포악함 대신 활기를 담고 있었다.

    한립은 백사 진령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가라혈진이 역전하면서 두청양 등의 정혈의 힘을 빨아들였을 뿐 아니라 백사 진령 역시 전해진 것이다.

    이 백사 진령은 한립도 이름을 알고 있었다.

    바로 등사(騰蛇)였다.

    우연인지 아니면 필연인지 등사 진령도 경칩십이결로 변신 가능한 진령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진령 허상 9가지가 번득 사라지고 등사 진령 허상만 남아 그의 몸을 휘감았다.

    등사 진령의 힘이 실처럼 새어 나와 그의 가슴에 아직 닫혀 있는 현규 자리로 흘러들었다.

    닫힌 현규는 성신지력 같은 외부의 힘으로 서서히 길을 터 열렸는데, 진령의 힘은 물처럼 한 방울 한 방울 스며들어 그 과정을 순조롭게 만들었다.

    역시 현규를 뚫는 속도가 상당히 빨라질 것 같았다.

    그러나 한립의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장천병이 내뿜는 성신지력이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이 빠르게 밀려들어 체내의 기경팔맥에서 정체 현상을 일으키고 있었다.

    성신지력이 몸에 가득 차올라 그 스스로 별이 된 듯 엄청난 별빛을 내뿜고 있었다.

    기름에 튀겨지는 것 같은 고통이 전신에서 느껴져서 가라혈진에서 느꼈던 통증을 떠올리게 했다.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한립은 약간이지만 마음이 흐트러졌다.

    적린공경 안에서는 선령력을 사용할 수 없어 이대로 가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장천병이 성신지력을 뿜어내는 게 그저 좋은 일인 줄만 알았는데 뭐든 과하면 화가 되는 법이었다.

    이를 악문 한립은 어쩔 수 없이 <천살진옥공>을 미친 듯이 발동해 동시에 다섯 군데의 현규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강제로 현규에 막대한 힘을 불어넣어 손상을 줄 수도 있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동시에 여러 현규를 뚫는 일은 성신지력 소모가 커서 그럭저럭 장천병이 분출하는 성신지력과 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

    한숨을 돌린 한립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천살진옥공>을 수련했다.

    * * *

    한 달이 넘는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신양이 그렇게 안배를 한 것인지 현투에 참가하라고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현재 한립은 별빛이 차올라 거의 절반쯤 수정화된 몸으로 가슴 다섯 군데에서 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푹.

    작은 폭음과 함께 그중 한 곳이 뚫렸고, 나머지 네 곳도 얼마 지나지 않아 뚫릴 것 같았다.

    그런데 한립은 기뻐할 수가 없었다. 장천병이 더 많은 성신지력을 분출하고 있어서였다.

    ‘제길, 대체 얼마나 많은 성신지력을 흡수했던 거야!’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면서도 바로 정신을 집중해 현규의 수를 6개로 늘렸다.

    이렇게 개수를 늘리다 무슨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몰랐지만 장천병이 분출하는 성신지력의 양을 늘리니 그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의 몸 곳곳에서 현규가 별빛을 반짝였지만, 전신이 수정처럼 빛나는 상태라 잘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5년이 지나갔다.

    전신에서 더없이 밝은 별빛을 방출하는 한립은 거의 본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때, 별빛들이 홀연히 깜빡거리다 흩어졌다.

    몇 마리 용들이 동시에 포효하는 것처럼 맑은 울음소리가 방안을 울리고 뇌전을 품은 돌풍이 몰아쳐 방이 흔들거렸다.

    별빛 가득한 방에서 천천히 일어난 한립은 정상적인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의 몸에서 반짝이는 현규는 벌써 237개나 되었다.

    5년 동안 장천병이 품은 성신지력을 다 써서 <천살진옥공> 제1성 수련을 마쳤다.

    즐거운 얼굴로 몸에 빼곡하게 응결한 현규를 둘러본 한립은 몇 년 동안의 고생을 떠올리고 길게 숨을 내뱉었다.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몇 년 동안 <천살진옥공>을 수련하느라 매우 지친 상태였다.

    한립은 바로 침상에 쓰러지듯 누워 쿨쿨 잠에 빠졌다.

    *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깊은 잠에서 깨어난 한립은 피로감이 싹 사라지고 당장 삼일 밤낮을 싸워도 될 것처럼 몸에 힘이 넘쳐흘렀다.

    물론 이런 충동적인 생각을 이성으로 억눌렀지만, 갑자기 머리에 들어찬 전투에 대한 열의는 의아했다.

    “힘이 넘치는 것이 좋은 일만은 아니구나.”

    피식 조소한 한립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면밀하게 몸 상태를 관찰했다.

    237개의 현규가 반짝이고 웅장한 기운이 몸에 감돌자, 다시 뛰쳐나가 누구와도 신나게 싸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호전적으로 변한 것은 <천살진옥공>을 익혔기 때문인가?”

    한립은 동요를 억누르고 왼손 날로 허공을 갈랐다.

    휘우웅!

    허공을 가르는 궤적이 허상을 남기고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

    전에는 전력으로 공격해도 비경 허공을 뒤흔든다는 느낌이 없었는데, 지금은 대충 손만 휘둘러도 이런 일이 벌어졌다.

    눈을 번득인 그는 왼손을 펼쳐 앞으로 뻗었다.

    단단한 벽은 두부처럼 푹 들어가 크게 구멍이 뚫렸다. 놀란 한립이 급히 손을 멈춰 매서운 장풍을 거두고 웃음 지었다.

    겨우 3, 4할의 힘을 사용했는데 위력이 대단했다.

    똑똑.

    다른 방법으로 위력을 시험해 보려 할 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반짝인 한립이 침상에서 일어나 나가보니 신양이 서 있었다.

    “려 수사, 소리가 들린다기에 와봤더니 역시 출관하셨군요. 꽤 오래 수련을 하셨습니다.”

    신양은 그를 반기며 장난스럽게 불평했다.

    “신 수사, 아니, 신 성주가 찾아 주셨군요. 안으로 드시죠.”

    “그냥 신양이라 부르셔도 됩니다. 5년 동안 많은 발전이 있으셨습니다.”

    “하하, 과찬이십니다. 제 실력이 아무리 늘었어도 신 수사만 할까요.”

    한립이 미소 짓자 신양도 마주 웃었지만 어딘가 표정이 어색했다.

    지금 한립은 마치 주변에 안개가 낀 것처럼 도통 실력을 가늠할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오늘은 무슨 일로 여기까지 찾아 주셨습니까? 혹시 흑겁충 일 때문입니까?”

    한립이 담담히 화제를 돌렸다.

    “정말 죄송합니다. 두청양의 거처를 샅샅이 뒤졌는데도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흑겁충을 제거할 방법을 구할 수 없을 듯하니 다른 요구사항을 말씀해 주시지요.”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시고, 일단 오늘 저를 찾아온 진짜 목적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흑겁충 이야기로 일부러 오신 것은 아닐 듯싶습니다.”

    “그렇습니다. 오성회무(五城會武)가 코앞이라 상의할 일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오성회무요?”

    현성은 주성 외에 네 개의 부속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가 머무는 청양성 외에 통여성(通余城), 현지성(玄止城), 백암성(白巖城)이 그 부속성이었는데 오성회무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청양성에서 지낸 기간이 길지 않아 모르실 법도 합니다. 현성의 다섯 개의 성은 거리가 멀어서 소식을 주고받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액회 성주께서는 각 성의 연계를 위해 천년마다 주성에서 오성회무를 여시고요. 다섯 개의 성에서 선발한 인재들이 비무를 통해 승부를 가리는 자리입니다.”

    신양은 웃으며 설명했다.

    “현성에 그런 행사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제게 그런 말을 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렇게 묻는 한립의 머릿속에 해 도인의 말이 떠올랐다. 해 도인이 말한 중요한 일이 오성회무와 관련 있는 것일까?

    “려 수사께서는 오성회무에 흥미가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가서 그냥 구경만 하라는 뜻은 아닐 거라 예상됩니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시원시원하게 하시지요.”

    “과연 말이 잘 통하십니다. 려 수사께서 우리 청양성의 일원으로 오성회무에 참석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한립이 코웃음을 치는데도 신양은 화내지 않고 허허 웃으며 용건을 밝혔다.

    “오성회무의 규정이 어떻게 됩니까?”

    “역대 대회마다 규정이 동일하지는 않았지만, 보통 둘이 대결을 해서 승자가 다음 시합에 출전하는 식입니다. 마지막까지 남아 순위권에 들면 현성에서 이름을 날리고 적잖은 상을 받을 수 있지요. 액회 성주의 상이 퍽 풍성하거든요.”

    신양은 한립이 단박에 거절하지 않고 규정을 묻자 상세하게 답해주었다.

    “시합은 위험한 편입니까?”

    “위험부담이야 있지요. 하지만 누군가 죽는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안 되겠다 싶으면 졌다고 인정하면 끝이니까요. 멀리 떨어진 각 성의 사람들끼리 원수질 일도 없고, 현성의 진정한 적은 괴성과 인수들이 아닙니까.”

    “괴성…….”

    한립은 오랜만에 듣는 소리에 중얼거렸다.

    바깥세상과 접촉한 지 오래라 거의 잊고 살다시피 했다.

    “천 년에 1번 있는 회합이 단순히 각 성의 교류를 위해서만은 아니겠지요?”

    “그렇습니다. 오성회무의 비무 결과에 따라 각 성의 수련자원이 배분됩니다.”

    한립의 예리한 질문에 웃고 있던 신양의 미소가 살짝 굳었다. 도리어 한립이 잔잔히 미소를 짓고 말없이 그를 지켜보았다.

    “려 수사, 서로 솔직하게 이야기해 봅시다. 저는 성주 자리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번 오성회무에서 반드시 좋은 성과를 거둬야 합니다. 수사의 실력이 고강하니 저를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비무대회에 출전만 해주시면 그로 인해 얻게 되는 상은 물론이고 따로 사례도 하겠습니다.”

    “오, 제게 어떤 사례를 하실 생각이십니까?”

    한립이 직설적으로 묻자 신양은 하얀 옥함을 꺼내 건넸다. 그 틈으로 안에 든 물건을 확인한 한립은 조금 놀라고 말았다.

    “하하, 이렇게 신경을 써주시는데 거절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겠지요!”

    “오성회무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청양성과 현성의 거리가 퍽 머니 반년 후에는 출발할 계획이에요. 미리 준비할 것이 있다면 서둘러 하시고,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은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신양은 곧장 옥함을 챙기는 한립을 보고 속으로 투덜대면서도 겉으로는 활짝 웃어 보였다.

    한립은 신양을 배웅하고 돌아와 옥함을 열어 보았다.

    안에 든 하얀 요핵은 별빛이 선명하게 빛나는 천급 요핵이었다. 그가 비밀 창고에서 선택한 요핵보다는 못해도 그래도 천급 요핵이었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그는 옥함을 닫고 가부좌를 틀었다.

    반년 동안 다른 준비는 할 게 없었고, 엄청나게 늘어난 현규를 숨기는 것이 급선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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