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화. 천살진옥공(天煞鎭獄功)
*
온몸의 털이 곤두선 모림은 이내 조각난 머리가 청양성 성주 두청양의 것임을 알아보았다.
“서, 성주…….”
웅비가 깜짝 놀라 중얼거리고 다른 이들도 분분히 안색이 달라져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모림, 웅비 등은 대노한 반면, 대다수는 놀람과 희색이 감돌았고 몇몇은 그냥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시선을 마주친 두 전록관들은 서책과 붓을 든 손을 달달 떨고 있는 데 반해 외뿔 거한은 평온한 얼굴로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성주를 죽인 죄인! 신양, 네 놈을 쳐 죽이겠다.”
모림이 살벌하게 소리쳤다.
“다들 신양이 성주를 죽였다는 것을 아셨을 겁니다. 모두 힘을 합쳐 이 원수를 갚읍시다.”
웅비는 눈을 부라리면서 주위 사람들을 선동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말에 선뜻 나서는 이는 몇 되지 않았다.
두청양이 성주 자리를 지킨 것은 압도적인 무위 때문이었지 무슨 충심이나 인정에 기댄 것이 아니었다.
당연히 그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도 일부에 불과했다.
“누구든 저놈을 죽이면 나 모림은 그 사람을 새로운 성주로 인정하겠습니다.”
그걸 본 모림이 큰소리로 선언했다.
그 말에 대전 안의 분위기가 달라졌고, 몇몇은 더 앞으로 나와 신양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나를 죽이고 싶다고 죽일 수 있을까?”
신양은 낭랑하게 물었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문신 청년을 비롯한 십여 명의 건장한 청년 병사들이 대전 안으로 뛰어 들어와 모림 등을 에워쌌다.
“겨우 이것들로 우리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웅비가 조소하며 두 주먹을 쥐고 강력한 기운을 발산했다. 전신에서 펑펑하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며 현규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런데 열댓 개에서 그 소리가 뚝 그치고 웅비가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어서 비슷한 일들이 다른 이들이게도 일어나 제대로 서 있는 사람은 신양과 그의 수하들뿐이었다.
“화린수 피 안에 백현수의 뼛가루를…….”
겨우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킨 웅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신양은 아직 핏물이 가득한 잔을 들고 가 그의 얼굴에 쪼르륵 따라 부었다.
“이제 와 그걸 깨달아 무엇하겠느냐? ……자, 모두 이제 선택할 차례입니다. 두청양의 충신으로 남아 함께 저승길까지 따라갈 것인지, 아니면 나와 함께 새로운 청양성을 만들어갈 것인지 결정을 내리세요.”
신양의 느긋한 질문에 대전 안에 침묵이 흘렀다.
* * *
옆 방 편전 안.
“골 수사의 예상대로 신양이 준비를 충분히 해두었군요. 우리를 편전이 둔 건 도움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자신의 실력을 보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옆방의 동정을 살피던 한립이 미소를 지었다.
“그자와 힘을 합치기로 한 것은 야심이 커서 누군가의 밑에 오래 있을 자가 아니란 것을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거사를 이루기에 능력 있는 조력자이기는 하지만 항상 안위를 걱정하게 만드는 상대기도 합니다.”
골천심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답했다.
* * *
그 시각, 의사 대전에서는 신양이 다시 입을 열고 말했다.
“누구든 나를 따르겠다면 두청양이 주었던 것 이상의 대우와 혜택을 약속하겠습니다. 물론 딴마음을 품는다면 스스로 명을 재촉하는…….”
콱!
그는 말을 끝맺지 않고 흐릿하게 왜소한 체구의 마른 노인 옆으로 가서 발로 손목을 찍어 버렸다.
신음을 흘리며 쥐고 있던 손을 편 노인은 이상하게 생긴 하얀 뼈를 숨기고 있었다.
“이렇게 농염한 성신지력을 품은 폭린수(爆鱗獸)의 뼈는 구하기 어려운데……. 오항 수사, 평소에 두청양에게 이리 충심이 지극한지 몰랐습니다. 이런 귀한 뼈를 터트려 제게 부상이라도 입히려는 생각이셨습니까?”
신양은 그것을 집어 올렸다.
“두 성주는 내 목숨을 살려준 적이 있습니다. 그가 살았든 죽었든 배신할 생각이 없습니다. 죽이려면 죽이십시오.”
이를 악문 노인이 힘없이 답했다.
“신양, 두 성주를 죽였다고 네가 성주가 될 수 있을 것 같으냐? 주성에서 너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주성 사절이 도착하면 네 놈은 끝이야.”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웅비가 중얼거렸다.
“하하하, 그렇게 내 걱정을 해주니 고맙기는 하다만, 현성에서 언제 부속 성들에 신경을 썼지? 공물만 제때 바치면 청양성 성주의 성이 ‘두’든 ‘신’이든 관심이나 가질 것 같으냐?”
신양은 그야말로 박장대소를 했다.
“하아, 되었으니 죽여라…….”
오항도 그 이치를 알았기에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신양은 곧장 발길질로 오항의 배를 터트렸다.
피와 살이 튀는 참혹한 죽음이었다.
“원하는 대로.”
신양은 웅비 곁에 쪼그려 앉아 피가 묻은 발을 그의 옷자락으로 쓱쓱 문질러 닦았다.
치욕스러운 광경에 부들부들 몸을 뜬 웅비의 마음에는 분노와 함께 공포가 차올랐다.
그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전록관 두 명이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항상 살살 웃으며 그들에게 잘 보이려 하던 신양에게 이런 무서운 모습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저, 저는……. 신양 대장, 아니 신양 성주님을 따르고 싶습니다.”
둥근 얼굴 전록관이 가장 먼저 힘차게 외쳤다.
“저도 신양 성주님을…….”
각진 얼굴 전록관이 그 뒤를 따르고, 그 뒤에도 몇몇이 비슷한 대답을 했다.
흡족하게 미소를 지은 신양은 경쾌하게 모림 옆으로 가서 허리를 숙였다.
“모 수사는 어떤가?”
“하아,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한숨을 쉰 모림이 어쩔 수 없이 굴복했다.
“하하하! 이런, 난 네가 싫은데 어쩌지?”
순간 살기를 드러낸 신양이 주먹으로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콰직!
흡사 수박처럼 갈라진 모림의 머리가 터져 가뜩이나 조용하던 대전에 더욱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신 수사, 어차피 죽일 거면 그냥 죽일 것이지 이렇게 사람을 조롱할 필요가 있으십니까?”
그때 외뿔 거한이 입을 열었다.
“허허, 아직도 죽고 싶은 놈이 남았구나.”
“죽는 게 두렵기는 해도 어차피 죽을 것 누군가에게 농락당하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내 기억하기론 이름이 헌원행이었지?”
“저 같은 자의 이름을 기억해 주실 줄 몰랐군요.”
“좋다, 앞으로 모림이 순찰과 방어를 도맡아 하던 구역은 네가 맡으면 되겠구나.”
고개를 끄덕인 신양의 말에 외뿔 거한은 놀라 입을 벌렸다.
대전 안의 다른 이들도 잘못 들은 것이 아닌지 눈만 깜빡였다.
“모림은 워낙 음험한 성정을 지녔고, 또 모두를 선동해 나를 죽이려 했으니 살려둘 수 없었다. 하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내게 충성만 한다면 당연히 능력에 따라 대우할 것이야.”
신양은 모두를 둘러보고 확실하게 의사를 표명했다.
“신양 성주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약삭빠른 둥근 얼굴 전록관이 선창을 하자 다른 이들도 분분히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신양 성주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신양 성주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 * *
옆 방 편전 안.
“당근과 채찍을 잘 쓰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되면 딴마음을 품으려던 자도 함부로 그렇게 하기 힘들겠지요.”
“이게 끝일까요?”
한립의 말에 골천심이 신비롭게 웃었다.
‘뭐?’
그녀의 의미심장한 말에 한립도 표정이 달라졌다.
* * *
대전 안에서 신양이 손을 들어 그를 추앙하는 이들을 조용히 시켰다. 그는 웅비의 곁으로 가서 웃으며 물었다.
“자, 아직 숨이 붙어 있을 때 하고 싶은 말은?”
“신 수사……. 아니, 신 성주. 저를 잘 알지 않습니까. 모림 저 녀석과 달리 저는 야심도 없고 머리도 못 굴립니다. 진심으로 승복할 테니 살려주십시오.”
진작 간이 콩알만 해진 웅비가 입술을 달싹였다.
“음, 나름 솔직한 대답이기는 한데…….”
신양이 흡족한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웅비가 무어라 더 말하려는데 신양이 덧붙였다.
“허나 말보다는 믿을 만한 방법이 있지.”
그는 돌로 만든 검은 병을 꺼내 웅비의 품에 쑤셔 넣었다.
기다란 검은 지네가 서서히 기어 나와 그의 옷깃을 지나 피부로 파고들었다.
“흑겁충…….”
웅비는 속으로 탄식했지만, 뭐라 하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이미 상대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 꼴인데 여기서 반항해봐야 의미가 없었다.
신양의 손짓에 문신 청년 등이 똑같이 생긴 검은 병을 들고 바닥에 쓰러진 다른 이들에게 다가갔다.
“다들 흑겁충은 익숙할 테니 굳이 뭔지 설명하지 않겠다. 두청양이 죽었으니 흑겁충을 제거할 수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지. 이후 큰 공을 세우는 자만 흑겁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신양은 바닥에서 뻣뻣하게 굳어 흑겁충을 받아들이는 이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렇게 신양은 원하는 대로 성주의 자리를 차지했으나, 사냥을 나간 몇몇 부대가 아직 복귀하지 않아 바로 축하 연회를 열지 않고 성안의 변고를 비밀로 했다.
나머지 대장들을 전부 굴복시킨 다음, 정정당당하게 의식을 치르고 두청양의 창고에서 보물들을 챙겨다 현성에 바치면 명실상부한 청양성 성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립은 그런 일에는 신경 쓰지 않고, 곧장 현투장의 거처로 돌아왔다.
그도 이번 반란의 핵심 인물이었으나 골천심과 마찬가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신양, 해 도인 등을 제외하면 그가 무슨 역할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신양은 그들을 현투장에서 빼내 비밀 객경의 신분으로 청양성에 남겨두려 했지만 한립과 골천심 둘 다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
한동안 원래 현투사의 신분으로 현투장에 남기로 택한 것이다.
한립은 신양에게 다시 한 번 자령이 청양성에 나타난 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이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떠나기로 했다.
그러나 떠나기 전, 해 도인에게 들을 이야기가 있었다.
그날 밤 바깥에서 누군가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한립은 두꺼운 석문을 열고 그 사람을 안으로 들였다.
“해 수사, 대체 무슨 생각인 겁니까?”
“시간이 많지 않아 할 말만 하겠습니다.”
신중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는 해 도인을 보고 한립은 문득 완전히 낯선 사람을 대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가 알던 해 도인과 다를 뿐 아니라, 고작 몇 시진 전 낮에 만난 해 도인과도 달라 보였다.
“의식으로 석상을 조사해 보셨습니까?”
해 도인은 한립이 들고 있던 석상을 보고 물었다.
안 그래도 석상에 의식을 주입해 이상한 문자와 12가지 자세를 살피던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청양은 의식의 힘이 부족해 조각상의 변화를 세밀하게 관찰하지 못했을 겁니다. 수사는 조각상 뒤로 떠오른 문자까지 보셨겠지요?”
“총 12가지 자세를 취하고, 12단락의 문자들이 떠올랐지만 내가 모르는 글자들이었습니다.”
“그 조각상의 이름은 천살신상(天煞神像)입니다. 마역에서 오랫동안 신봉해온 고대의 신이지만 오래전에 잊혀졌지요. 그 안에 기록된 문자 역시 실전된 고대문자인 현문(玄文)입니다.”
“현문…….”
“조각상의 현문은 아주 심오한 연체공법을 이루고 있습니다. 천살진옥공(天煞鎭獄功)이란 공법은 총 12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가장 앞부분의 3성까지가 조각상에 담겨 있습니다.”
“내게 이 조각상을 선택하라 이른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들을수록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다.
“보기에 화려하고 대단해 보이는 공법이라도 기껏해야 현규 삼백여 개를 뚫는 것이 한계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천살진옥공>은 450개의 현규를 뚫을 수 있습니다.”
“현규를 450개나 말입니까?”
“조각상이 하나라 450개이고, 나머지 세 개의 조각상을 더 찾아 12성 공법을 수련하면 총 1800개의 현규를 뚫을 수 있습니다.”
“…….”
해 도인은 덤덤하게 말했지만 한립은 깜짝 놀라 한동안 말을 잊지 못했다.
“그것 외에 수사에게 이 공법을 선택하라 말한 것은 다른 장점도 있기 때문입니다. <천살진옥공>은 1성씩 수련할 때마다 다른 종류의 진령 혈맥의 힘을 빌려 현규를 뚫어야 하는데, 다른 이들은 그렇게 혼잡한 진령혈맥을 지니면 몸속에서 충돌이 일겠지요. 하지만 수사는 이미 <경칩십이변>을 익혀 수많은 진령혈맥을 대강 연화시켜 왔으니 <천살진옥공>을 수련하는데 어려움이 적을 겁니다.”
“진령혈맥을 대강 연화시켜 왔다니, 그건 무슨 말입니까?”
한립은 해 도인의 말에서 무언가 걸리는 점을 발견하고 물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수사가 진령혈맥을 연화시키는 방법은 영계에서 얻은 조잡한 수법입니다. <천살진옥공>은 고급 연화법이 포함되어 있으니 체내의 진령혈맥의 힘을 완전히 연화시킬 수 있을 거예요. 이렇게 되면 현규를 늘리는 동시에 진령혈맥의 힘도 강대해 질 겁니다.”
“그렇군요.”
“이제 현문을 어떻게 읽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바로 시작하시지요.”
해 도인은 한립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의식연계를 통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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