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952화 (1,709/2,000)
  • 1952화. 신비 조각상

    *

    다시 진열장을 뒤지던 한립은 흑자색의 수정돌을 하나 들었다가 내려놓고 다른 물건으로 손을 가져갔다.

    “음?”

    삼두육비의 마신이 이상한 자세를 하고 앉아 있는 조각이었다. 조골진인의 저물법기 안에서도 이런 검은 조각을 찾았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 하며 재질도 같았는데 다른 것은 두 마신의 자세뿐이었다.

    ‘두 조각이 무슨 연관이 있다면?’

    한립은 신양과 골천심이 다른 데 정신이 팔려있는 것을 확인하고 미간에서 수정빛을 뿜어 조각상에 흡수시켰다.

    검은 조각상은 바르르 떨더니 팔다리를 자유롭게 움직여 가며 총 12가지 자세를 취했다.

    그 뒤로는 여전히 알아볼 수 없는 기이한 문자들이 떠 있었다.

    조골진인에게서 찾은 조각상이 펼치던 자세와 달랐고 뒤에 뜬 문자들도 내용은 몰라도 이전의 것과 차이가 있었다.

    조각상들은 분명 한 벌로 된 보물이었다.

    희색을 숨긴 한립은 검은 조각상을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놓았다. 별다른 수확을 건지지 못한 세 사람은 결국 다시 검은 옥함 옆으로 모였다.

    “어쨌든 단서는 찾았습니다.”

    한립은 옥함의 육화 표식을 보고 생각에 잠겼다.

    “두 분을 위해 흑겁충 제거 방법을 찾지 못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두청양 잔당을 제거하고 수하들을 시켜 알아보면 분명 만족스러운 답변을 드릴 수 있을 겁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요? 그게 언제가 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신양의 말에 한립이 미간을 좁혔다.

    “흑겁충 제거 방법을 아는 두청양이 죽었으나 성주부를 수색하면서 현성으로도 사람을 보내 정보를 알아보면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신 수사, 그런 분명치 않은 말로 넘어가려는 생각 마시지요. 흑겁충에 대해 저희에게 확답을 주셔야 할 겁니다.”

    골천심이 서늘하게 경고했다.

    “……보아하니, 진작 두 분이 손을 잡았군요. 더이상 제게는 협조하지 못하겠다는 뜻입니까?”

    한립과 골천심을 보는 신양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그의 왼팔에 하얀 수정빛이 감돌며 강력한 기운이 두 사람을 압박해왔다.

    과연 두청양과 싸울 때보다 웅장한 기운이었다.

    한립과 골천심도 각자의 기운을 방출해 신양의 위압감을 떨쳐내자 세 기운이 교차하며 허공에 불똥이 튀었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시려는 겁니까?”

    신양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건 수사에게 달렸습니다. 이곳에서 우리와 싸움을 벌이시겠다면 피할 생각은 없다는 것만 알아두시지요!”

    냉소를 흘린 한립의 두 팔에 금빛이 어렸고, 골천심도 등뼈 사슬을 걸어둔 허리춤으로 손이 움직였다.

    “아직 우리에게는 공통의 적인 두청양 잔당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곳에서 서로의 힘을 빼 봤자 적들 좋은 일만 시켜주는 꼴이지요. 일이 커져 현성에서 나서면 우리 모두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고민하던 신양이 기운을 서서히 거두었다. 그러자 한립과 골천심도 차차 기운을 갈무리했다.

    “흑겁충에 대해서는 저도 확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시죠, 두청양 잔당을 제거하고 한 달 내로 두 분께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 해결 방법을 찾지 못하면 두 분이 제게 한 가지씩 다른 요구를 하시면 되고요.”

    신양의 제안에 한립과 골천심이 암암리에 눈짓을 보냈다.

    “신양 수사의 뜻대로 따르겠습니다.”

    한립이 얼굴을 풀고 먼저 대답했다.

    두청양을 죽이고 방금 회포 노인까지 죽여서 두청양 세력과는 말로는 해결할 수 없는 척을 지고 말았다.

    즉시 청양성을 떠나지 못하는 한 신양과 힘을 합쳐야 살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양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 대신 비밀창고까지 왔는데 보물이나 두 개씩 골라가시지요.”

    신양도 다시 살가운 미소를 지으며 그들과의 긴장감을 풀려 했다.

    한립은 그런 상대를 보고 경계심이 더욱 강해졌지만, 구미가 당기는 말이긴 했다.

    창고 안에는 적잖은 진귀한 물건들이 있었고 그가 필요로 하는 연체공법들도 많았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눈을 반짝인 골천심이 답했다.

    “무엇이든 고르세요. 시간이 없으니 빨리만 골라주시면 됩니다.”

    신양은 호방하게 한팔을 펼쳤다.

    몸을 돌려 공법들이 놓인 진열장을 뒤적이던 한립은 눈여겨보았던 서책 들 중에서 한 권을 택했다.

    “그것들 말고 검은 조각상을 고르세요. 그 안에 연체공법이 숨겨져 있습니다.”

    갑자기 머릿속에 해 도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티 나지 않게 고개를 돌려보니 해 도인은 창고 문 옆에 서서 충심을 다해 망을 보는 척하고 있었다.

    침음하던 한립은 해 도인의 설명을 기다렸지만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골천심은 이미 서책과 금색 짐승 등뼈를 골라잡아 신양에게 걸어가고 있었다. 인상을 찡그린 한립은 아쉬운 마음으로 서책을 내려놓고, 몸을 돌려 검은 석상을 집어 들었다.

    연체공법 외에 급하게 필요한 물건은 없었다.

    다른 진열장을 둘러보던 한립은 요핵이 놓인 곳으로 가서 반짝이는 물건들을 살폈다.

    어차피 무기나 재료를 고를 게 아니라면 고계 요핵이나 확보해 두는 게 나았다.

    신양이 앞으로 수련에 필요한 요핵을 내주겠다고 약속했으나 다른 사람의 약속만 믿고 있을 수는 없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갈수록 더 귀한 요핵이 놓여 있는 것을 파악한 그는 가장 오른쪽 끝으로 가서 하얀 옥함을 열어 보았다.

    문양이 어지럽게 교차하는 옥함 안에는 주먹 크기의 하얀 요핵이 놓여 있었고 눈에 보일 만큼 선명한 성신지력 파동이 흘러나왔다.

    한립도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골천심이 그에게 주었던 하얀 요핵보다 훨씬 커서 지급 요핵의 범위를 벗어난 물건이었다.

    “신 수사, 이 두 가지를 골라도 되겠습니까?”

    한립은 신양에게 가서 옥함과 조각상을 보여주었다.

    “물론이지요. 그러나 이 천급(天級) 요핵은 등급이 높은 만큼 연화를 시키는데도 어려움이 많아 까딱 잘못하면 오히려 몸을 상할 수 있음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검은 조각상은 몰라도 하얀 옥함을 본 신양은 아까운 표정을 애써 숨기며 충고했다.

    “조언 감사합니다.”

    해 도인까지 네 사람은 창고를 나와 성주부의 또 다른 편전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이 옆이 두청양의 의사 대전입니다. 제가 남은 심복들을 전부 불러들였으니 순조롭게 일이 진행된다면 두 분이 나서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만일 변고가 생기면 당연히 도움을 받아야겠지만요.”

    신양은 신중하게 설명했다.

    “한배를 탄 처지입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함께 하겠습니다.”

    “골 수사의 말씀이 맞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골천심이 웃음 지었고, 한립도 이렇게 답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신양이 해 도인을 데리고 홀로 바깥으로 향했다.

    “려 수사, 잠시 앉아 쉬시지요. 신양 수사의 계략이면 우리가 나설 필요도 없을 겁니다.”

    골천심은 돌 탁자로 가서 자리를 잡고 한립을 불렀다. 미간을 좁힌 한립이 그녀의 앞에 앉았다.

    “신양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겉보기와 달리 손속도 거침없고 심지도 굳습니다. 누군가 그를 얕잡아 본다면 두청양 꼴이 나는 거지요. ……려 수사, 고민했지만 이 일에 대해 솔직히 털어놓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골천심이 망설이다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도파를 시켜 식심충으로 저를 기습한 것이 당신이란 이야기 말입니까?”

    눈을 반짝인 한립이 먼저 할 말을 대신했다.

    “알고 계셨습니까?”

    “처음에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니 짐작이 가더군요. 두청양과 신양은 저를 죽일 이유가 없지만, 당신이야말로 숨겨진 목적이 있을 것 같아서요.”

    “하하! 제 생각보다 머리가 좋으시네요. 그래서, 제 목적이 무엇일 것 같나요?”

    “두청양과 피맺힌 원한이 있었으니 그가 내 진령혈맥을 흡수해 실력이 느는 것을 원치 않아서였겠지요. 그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한립은 무표정하게 답했다.

    “맞아요. 당시 나와 신양은 다른 방법으로 기습해 두청양을 죽일 계획이었는데 수사의 진령혈맥이 방해가 될까 걱정되었습니다. 식심충으로 수사를 죽일 수 없자 생각을 바꾸었고, 신양도 두청양이 가라혈진으로 진령혈맥을 흡수할 거란 것을 알고 원래 계획을 바꾸었죠.”

    “그보다 왜 내게 사실대로 털어놓으려 한 것인지가 더 궁금합니다.”

    “제대로 손을 잡으려면 서로 솔직한 게 좋으니까요. 신양은 두청양보다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를 경계하다가 그의 손에 죽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죠.”

    골천심이 탄식하듯 말했다.

    * * *

    약 한 시진 후, 성주부 의사 대전 안.

    십여 명의 사내들이 기다란 돌 탁자에 둘러앉아 검은 잔에 담긴 인수의 피를 마시면서 떠들고 있었다.

    성주의 자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앉은 신양은 그들 틈에서 잔을 들어 친숙한 인물들과 잔을 부딪쳤지만, 그의 잔에 든 핏물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옆에는 꽤 큰 검은 돌 상자가 봉해져 있었다.

    “신양 대장, 무슨 일로 성주 대인께서 우리를 불러 모으셨는지 아십니까? 무슨 일인지 제게만 귀띔을 좀 해주세요.”

    입가에 뻐드렁니가 삐져나온 하얀 뼈 갑옷을 걸친 거한이 다가와 웃으며 물었다.

    “모림 대장, 저도 말해 주고 싶지만 무슨 일인지 몰라 말해 줄 수가 없습니다. 다들 모이면 성주 대인께서 어련히 말씀을 해주시려고요.”

    신양도 미소를 머금었다.

    이때 의사 대전 정문을 밀고 뺨에 소뿔 자국이 난 청년들이 들어왔다.

    그 뒤를 따르는 세 명 중에는 한립도 익숙한 9구역 현투장을 감독하는 외뿔 거한도 있었고, 나머지 둘은 진홍색 장포를 입은 둥근 얼굴과 각진 얼굴을 지닌 전록관이었다.

    “형님, 사냥을 나간 몇몇 부대 대장들 말고는 전부 모였습니다.”

    그들이 들어오자 문신 청년이 신양에게 다가와 전음을 보냈다.

    신양이 고개를 끄덕이자 문신 청년이 걸어가 석문을 굳게 닫았다.

    외뿔 거한 무리까지 의자에 앉았으나 신양은 묵묵히 대전에 모인 이들을 살펴보기만 했다.

    오래지 않아 누군가 인내심이 바닥났는지 소리를 높였다.

    대추처럼 붉은 얼굴에 머리에는 두 개의 뿔이 솟은 마족 사내였다.

    “신양, 왜 다들 모아 놓고 아무 말이 없는 겁니까? 성주 대인께서 중요하게 선포하실 일이 있다면서요? 성주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그 말에 소란스럽던 대전이 조용해지고 다들 신양을 쳐다보았다.

    “웅비 대장, 성주께서 조금 늦으신다고 그리 짜증을 부리셔야 되겠습니다. 준비한 화린수(花鱗獸) 피가 신선하던데 몇 잔 더 마시면서 기다리시지요. 평소에는 성주 대인의 허락 없이는 마시지 못하는 거 아닙니까?”

    신양은 성내는 기색 없이 웃는 낯으로 답했다.

    그 말에 웅비라 불린 대추처럼 붉은 얼굴 사내는 인수의 피를 입에 털어 넣고는 탁! 하고 잔을 내려놓았다.

    그제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신양은 모두의 시선을 받으면서 평소 두청양 이 앉던 성주의 자리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다들 기괴한 표정으로 그런 그를 보며 할 말을 찾고 있었다.

    “신양! 감히 그 자리에 앉다니 미친 겁니까!”

    살갑게 굴던 뻐드렁니가 난 모림 대장이 돌 탁자를 쾅! 치고 일어나 버럭 화를 냈다.

    “어딜 감히! 어서 거기서 내려오지…….”

    이어서 두 명의 수비 대장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걸 본 신양은 느긋하게 기지개를 켰다.

    “다들 그러지 마시고 제 이야기부터 들어보시지요. 오늘 성주 대인께서 선포하실 일은 딱 한 가지입니다…….”

    여기까지 말한 그는 천천히 대전 안의 사람들을 훑었다.

    “바로 성주의 자리를 내게 넘긴다는 것!”

    그의 말에 대전 안이 펄펄 끓는 기름에 물을 부은 것처럼 소란스럽게 변했다.

    “뭐라고요? 당신에게?”

    웅비가 인상을 팍 쓰고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뭔데 그런 망상을 하는 겁니까!”

    또 다른 거구가 일어나 소리쳤다.

    “신양, 반란이라도 할 셈입니까!”

    모림도 돌의자를 걷어차며 성을 내고 있었다.

    “미쳤군, 미쳤어…….”

    몇몇이 한마디씩을 하고 있었다.

    쾅!

    신양은 주먹으로 돌 탁자를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고, 그 충격에 거미줄처럼 금이 간 돌 탁자가 부서졌다.

    어쩔 수 없이 둘러앉아 있던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서야 했다.

    “제가 미친 것인지, 아니면 제 말이 사실인지 성주 대인께 직접 들으셔야만 믿으시겠습니까?”

    신양은 냉소적으로 그들을 살폈다.

    “성주 대인은 어디 계십니까! 제가 직접 뵈어야겠습니다.”

    모림이 즉시 답하며 앞으로 나섰다.

    “물론 만나 뵙게 해드려야지요.”

    피식 입꼬리를 끌어올린 신양이 옆에 둔 검은 돌 상자 뚜껑을 텅! 쳐서 밀어냈다.

    그 안에는 피와 진득한 액체에 잠긴 두 조각난 머리가 담겨 있었다.

    그걸 본 사람들은 너무 놀라 헛바람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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