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화. 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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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시다.”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은 신양은 시체들이 다 타기를 기다려 병사용 검은 갑옷을 구해 한립과 골천심이 갈아입게 했다.
“비밀창고는 두청양의 심복인 강자가 지키고 있습니다. 그를 제거하기 위해서 일단 신분을 감추는 것이 좋습니다.”
그 말에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고 현투사 복장을 벗으려다 힐끗 골천심 쪽을 살폈다.
현투사 복장은 신양의 의복과 달리 단벌이라 벗고 나면 속옷밖에 남는 게 없었다.
그때 옷 벗는 소리가 들리고 골천심이 아무렇지 않게 노란 겉옷을 벗어버렸다.
밀착되는 하얀 속옷은 풍만한 가슴을 겨우 가리고 광택이 흐르는 하얀 다리를 고스란히 노출했다.
그러나 한립과 신양의 눈길을 끄는 것은 드러난 가슴과 배, 두 다리에 가득한 흉터와 쇄골을 따라 퍼진 상처 자국이었다.
그녀처럼 몸을 단련한 사람이 이 정도 흉터가 남으려면 어떤 일을 겪었을지 직접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인생도 이 상처 가득한 몸처럼 곡절이 가득했을 것이다.
골천심은 한립과 신양이 석상이라도 되는 듯 태연히 검은 갑옷으로 갈아입고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시간도 없는데 두 분도 어서 갈아입으시죠. 이곳에서 남녀유별은 황당하기 그지 않는 소리니 저를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그녀는 담담히 한 마디를 남기고 먼저 바깥쪽으로 걸어갔다.
“역시 골 수사십니다.”
신양이 대단하다는 듯 혀를 찼고, 한립도 쓴웃음을 지으며 현투사 복장을 벗고 검은 갑옷으로 갈아입었다.
투구까지 쓰면 얼굴도 거의 가려져 신분을 들킬 일도 없었다.
두 사람은 신양을 따라 지하동굴을 빠져나왔고, 해 도인도 말없이 뒤에서 따라왔다.
“려 수사, 저와 손을 잡는 게 어떠십니까?”
이때 매우 작은 전음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평범한 전음 방식과는 다른 골천심의 목소리였다.
“천골맹 가입을 거절한 것만 봐도 려 수사가 단독행동을 선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두청양이 죽어 저와 신양 간의 거래는 끝났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가 순조롭게 성주 자리에 오르면 수사와 저의 이용가치는 없어지는 거고요. 어쨌든 우리 둘의 몸에만 흑겁충이 들어있지 않습니까.”
골천심이 미약한 목소리로 빠르게 말을 이었지만 한립은 대답 없이 짐승 가죽으로 감아 놓은 신양의 오른팔만을 보고 있었다.
“신양의 실력은 아까 본 것이 다가 아닙니다. 스스로 오른팔의 현규를 폭발해 부상이 심한 것 같아도 치밀한 성격을 지닌 자이니 만만히 보면 안 돼요. 우리 두 사람이 손을 잡아야 만일의 사태에 대처할 수 있을 겁니다.”
그의 의도를 파악한 골천심이 덧붙였다. 이에 눈을 반짝인 한립은 티 나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네 사람은 성주부의 편전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꽤 많은 성주부 호위와 관사 그리고 시종들이 모여 있었다.
신양과 함께 사냥을 나가던 이들도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보고 다가왔다.
“신양 대장, 어떻게 되었습니까?”
문신 청년이 소리를 낮춰 물었다.
“성공했다.”
신양이 씩 웃으며 하는 말에 편전 안의 모두가 환호성을 질렀다.
“쉿, 이제 모두 흩어져 계획대로 움직인다.”
손가락으로 입술을 지그시 누른 신양이 조용히 명을 내렸다.
“예!”
기쁨을 감춘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답하고 빠르게 흩어졌다.
“우리도 갑시다.”
신양은 한립과 골천심을 데리고 편전을 나와 좁은 통로로 들어섰다.
한참을 이리저리 돌던 그들은 넓은 전각 안으로 들어가 그 끝에 은색 문양이 새겨져 별빛을 발하는 커다란 석문을 발견했다.
그 위에 청양비장(靑羊秘藏)이라는 네 글자가 금색으로 적혀 있었다.
전각 중앙에 검은 돌을 쌓아 만든 단 위에 회색 장포를 입은 노인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고 있었는데 두 뺨이 은은하게 은백색을 띠는 것이 신기했다.
은빛들이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노인의 사방팔방으로 뻗어 있어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신양 등의 걸음 소리를 들었는지 천천히 눈을 뜬 노인이 스스로 은빛을 거두었다.
“신양 대장, 이곳에는 어쩐 일입니까?”
노인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차갑게 물었다.
“엽 노인, 성주의 명을 받아 가라혈진을 발동하던 중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급하게 혈백정(血魄晶)을 가져가기 위해 왔으니 길을 터주시지요.”
신양은 능숙한 연기로 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비밀창고는 성주님 아니면 그분의 신물을 지닌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런, 제가 마음이 급해 그걸 깜빡했습니다. 여기 성주 대인의 영패입니다.”
표정에 흐트러짐이 없는 노인을 보고 신양은 자신의 이마를 탁! 치며 두청양의 시체에서 찾아낸 검은 영패를 꺼내 보였다.
그제야 의심 어린 표정을 거둔 회포 노인은 커다란 은색 열쇠를 꺼내 석문으로 걸어갔다.
“엇, 비밀창고 대문이!”
그 순간 신양이 눈을 부릅뜨고 석문을 가리켰다. 흠칫 놀라 회포 노인이 자세히 석문을 살폈지만 어떤 이상도 없었다.
그때를 노려 세 개의 날카로운 기운이 뒤에서 그를 기습했다.
양팔에 18개의 별빛을 일으킨 한립은 두 배로 굵어진 팔을 금색 방망이처럼 노인에게 휘둘렀고, 신양은 왼팔에 2, 30개의 현규를 빛내고 그 자체로 검처럼 노인의 등을 찔렀다.
골천심은 백골 장검을 꺼내 잔영을 남기며 노인의 목을 노렸다.
“뭐 하는 겁니까!”
무시무시한 기세를 느낀 노인은 고개를 돌리자마자 은빛 뇌전으로 변해 앞으로 튀어 나갔다.
반응은 한 박자 느렸지만, 속도가 신양 등보다 빨라 세 사람의 공격은 전부 노인에게 닿지 못했다.
동시에 회포 노인의 몸에 은빛이 뭉쳐 뾰족뾰족 가시가 자라난 은색 갑옷이 만들려 했다.
조급해진 신양이 무언가를 하려는데 한립이 흐릿하게 변해 속도를 배로 높여 노인을 따라잡았다.
펑!
그의 두 주먹이 노인의 어깨로 떨어져 주변 허공이 허물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뼈가 으드득 부러진 회포 노인은 힘없이 날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에 가시 갑옷도 흩어져 버렸고 노인이 방법을 마련하기 전에 푹! 푹! 하는 가벼운 소리가 뒤따랐다.
신양의 왼손이 노인의 심장을 파내 터트리고, 골천심의 백골 장도가 그의 단전을 찔렀다.
“다, 당신들…….”
믿기 어려운 얼굴로 몇 글자를 중얼거린 노인이 몸을 비틀다 축 늘어졌다.
“려 수사께서 골치 아픈 갑옷이 완성되기 전에 공격을 해주셔서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손을 털어낸 신양이 인사를 하고 한립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슬쩍 신양의 왼손을 본 한립은 이채를 띠다 고개를 젓고 아무 소리 하지 않았다.
골천심의 장검은 다시 등뼈 사슬로 풀어져 그녀의 허리에 감겼다.
죽은 회포 노인의 손에서 은색 열쇠를 빼앗은 신양은 비밀창고로 걸어가 아래쪽의 하얀 돌을 치우고 구멍에 열쇠를 밀어 넣었다.
카착.
석문이 열리자 신양은 한립과 골천심에게 눈짓을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비밀창고는 웬만한 궁전과 비교를 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고, 검은 나무로 만든 일고여덟 개의 거대 진열장들이 있었다.
진열장이 풍기는 독특하고 그윽한 향기가 비밀창고 안에 가득했다.
진열장은 각각 세 단으로 구분되어 수많은 함이나 상자들이 진귀한 재료, 공법, 요핵 등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한립은 그것들에 눈길도 주지 않고 곧장 창고 중앙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구불구불한 문양이 들어간 사람 키만 한 돌기둥이 있었고, 그 위에 큼지막한 검은 수정돌이 얹어져 있었다.
거울처럼 매끈한 수정돌은 기이한 힘이 담긴 새까만 파문을 퍼트렸다.
한립은 비밀창고에 들어선 순간 체내의 흑겁충이 더없이 깊은 잠에 빠져든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흑겁석!’
눈을 반짝인 한립은 곁의 신양을 보고 함부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골천심의 맑은 눈에도 희색이 어렸다.
“려 수사께서도 흑겁석에 대해 아시는군요. 허나 이건 흑겁충을 억제할 뿐이지 제거하지는 못합니다. 어서 창고를 뒤져 흑겁충을 제거할 방법이 있는지 찾아보시지요. 바깥 형세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몰라 많은 시간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두 분에게 드릴 수 있는 시간은 최대 반 시진입니다.”
신양이 한립과 골천심의 마음을 읽고 이렇게 말했다
가타부타 없이 골천심이 먼저 진열장 하나를 맡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고, 한립도 수색에 들어갔다.
적린공경은 마기, 선령력을 사용할 수 없었기에 당연히 금제로 보물들을 보호하지 못했다.
이에 세 사람이 창고를 둘러보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향 하나가 탈 시간이 지나 어떤 경전을 내려놓은 한립이 어두운 얼굴로 골천심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그들은 신양이 수작을 부릴까 봐 경전들을 수색하는 것은 그 둘이 전담하고 신양에겐 다른 물건들을 살펴달라고 했었다.
그런데 창고 안의 서적이란 서적은 다 뒤졌건만 흑겁충에 대해 언급된 것은 단 한 권도 없었다.
“여기 쓸 만한 자료를 찾은 듯합니다. 와서 보시지요.”
그 순간, 신양이 전음을 보내왔다.
한립과 골천심이 급히 다가가 보니 신양 앞에 반투명한 검은 수정 상자가 놓여 있었다.
그 안으로 다닥다닥 검은 괴충들이 붙어 있었는데 다름 아닌 흑겁충이었다.
신양은 상자와 똑같은 재질의 글자가 새겨진 검은 옥판을 들고 있었다.
그에게 검은 옥판을 넘겨받은 한립과 골천심은 빠르게 내용을 훑고 표정이 가라앉았다.
옥판에는 흑겁충을 어떻게 기르고 사람의 몸에 심는지 상세하게 적혀 있었지만 어떻게 제거하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흑겁충은 무리생활을 하는 괴충으로 무리마다 흑겁충왕이 있어 나머지 흑겁충들을 통솔한다고 했다.
흑겁석은 원래 흑겁충왕의 시체로, 비술을 이용해 충왕을 수정으로 응결해 흑겁충을 억제하는 작용을 하게 했다는 것이다.
만일 흑겁충 한 마리만 억제하려 한다면 손톱 크기의 흑겁석을 몸에 지니는 것으로 충분했다.
“여기 이걸 몸에 잘 지니고 다니시면 될 겁니다.”
내용을 숙지한 신양이 흑겁석으로 다가가 달걀 크기의 검은 수정 덩어리를 베어내 한립과 골천심에게 주었다.
“적혀 있기론 이렇게 많은 양은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하하, 양이 많으면 그만큼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한립의 말에 신양이 웃음 지었다.
“고맙습니다.”
한립도 거절하지 않고 흑겁석 조각을 잘 넣어 두었다. 그런데 골천심은 흑겁석을 받고도 검은 옥함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흑겁충을 가져다 쓰시고 싶은 겁니까? 마음대로 하셔도 되지만 특수한 용기에 담아 가셔야 할 겁니다.”
“흑겁석을 통으로 들고 다니지 않는 한 흑겁충만 챙겨가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보다 여기를 보시지요.”
신양의 말에 고개를 저은 골천심이 상자의 한 면을 가리켰다.
마침 한립이 있는 쪽에서는 보이지 않던 면이라 그는 골첨심을 지나 그녀가 가리킨 곳을 보았다.
여섯 개의 꽃잎을 지닌 꽃봉오리 도안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아는 문양입니까?”
“청양성에 오기 전에 현성에서 같은 문양을 보았습니다. 주검대사(鑄劍大師)인 육화부인 고유의 표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육화부인이요? 그런 방면으로 여인이 이름을 떨치는 경우는 거의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한립이 턱을 쓸었다.
“육화부인은 여인이 아닙니다. ‘부인’은 검이나 다른 기물을 제련하는데 능한 백읍족(百邑族)에서 각 세대에 기술이 가장 뛰어난 사람을 높여 부르는 칭호입니다. 육화 선배님은 백읍족의 이번 대 ‘부인’으로 백만 년 전에 무슨 이유에선지 야양왕조에 의해 적린공경에 버려져 지금껏 현성 주성에 머물고 있습니다. 각종 기물 제련에 능해 두청양도 예전에 무기를 한 점 받고자 했으나 거절당했지요.”
신양이 고개를 저으며 설명해주었다.
“아, 그랬군요. 옥함에 육화부인의 표식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걸 육화부인이 만들었다는 뜻일 테니, 흑겁충과 무슨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립과 골천심이 한 마디씩 주고받았다.
“우선 이곳부터 샅샅이 뒤지고 그건 차차 이야기하시지요.”
신양의 말에 한립이 아직 진열장 한 곳이 남아 있는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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