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화. 흡수
*
두청양이 눈을 부릅뜨고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그를 둘러싼 피의 구슬이 거칠게 부풀고 있어서였다.
그의 몸 안으로 흘러드는 핏물들은 한립의 몸 안에서보다 백 배는 광포하게 움직였다.
몸이 내부에서부터 찢겨 나갈 것 같았다.
“큭…….”
주먹으로 제단 바닥을 내리친 두청양의 몸에서 이백여 개의 현규가 빛나며 영롱한 하얀빛으로 피부를 뒤덮었다.
그제야 혈액의 폭주를 억누른 그는 이런 현상이 한립이 암홍색 액체를 마신 탓이란 걸 몰랐다.
시간이 지나 혈액이 소실되는 속도가 줄어들었지만 한립은 오히려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인족 따위가 이렇게 많은 진령혈맥을 지니고 조화를 유지하다니 놀랍기는 하구나. 현투장에 보내 체내의 진령혈맥의 야성을 소모하려 했는데 여전히 이렇듯 광포하다니.”
두청양이 이를 갈았다. 그러나 한립은 그와 대화를 나눌 기운조차 없었다.
<대주천성원공>과 <우화비승공>을 동시에 운용해 유실되는 피를 따라 빠져나가는 성신의 힘을 막으려 했지만 효과가 미미했다.
그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두청양의 몸에서 산악거원 허상이 떠오르더니 주먹으로 가슴을 두들기며 노기를 터트렸고, 다른 쪽에서 청란 허상이 힘껏 날아올라 달아나려 했다.
뇌전에 휩싸인 뇌붕 허상도 그를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진령 허상들은 두청양에게로 옮겨갔지만, 예전과 달리 아주 난폭해 보였다.
눈을 부릅뜬 두청양은 몸이 뜯겨나갈 것 같은 고통에 참지 못하고 괴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그의 피부는 쩍쩍 갈라져 균열이 생겼는데, 한립 때와는 달리 피가 흘러 의복을 적셨다.
진법을 조종하던 신양 등 다섯 명이 안색이 달라졌지만 어찌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모두 멍하니 있지 말고 전력으로 진법을 조종해 성주 대인의 혈맥 흡수를 도와야 합니다.”
돌연 신양이 목소리를 높이자 나머지 사람들은 요핵에 올린 손에 성신지력을 쏟아부었다.
찰나의 순간 신양의 얼굴에 괴이한 미소가 어렸다.
그는 주먹을 들어 자신 앞의 요핵을 쾅! 하고 박살을 냈다.
지급 요핵을 부숴 하얀 성신지력을 먼지처럼 흩어버린 신양은 발끝으로 원기둥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다른 이들은 얼떨떨할 뿐이었다.
웅!
다음 순간, 가라혈진이 균형을 잃고 더욱 강력한 힘으로 내부에 있는 이들을 찢어발기려 했다.
진법 안 사람들은 구금을 당한 것처럼 벗어날 수 없었다.
“신양!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두청양이 대노해 버럭 소리쳤다.
“별일 아닙니다, 성주 대인. 당신의 가라혈진을 조금 손 보아 두었으니 효과가 어떤지는 직접 느껴 보시지요.”
신양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피식 웃어 보였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청양을 둘러싼 피의 장막이 급격히 팽창해 터지며 핏빛 소용돌이가 가라혈진을 둘러쌌다.
대머리 거한 등 네 명의 대장들이 상황이 어려워진 것을 깨닫고 달아나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요핵이 그들을 강하게 흡착해 손을 뗄 수 없었다. 동시에 그들의 몸에서 펑펑펑! 하는 폭음이 연달아 들려왔다.
현규 내의 성신지력이 몸 안의 피와 함께 핏빛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진법 중앙에 선 두청양은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지만, 수행이 높은 탓에 겨우 버틸 수 있었다.
두 눈이 충혈되어 눈꼬리에 핏물이 맺힌 그는 부득부득 이를 갈았다.
“성공인가…….”
신양이 핏빛으로 물든 두청양을 보고 중얼거렸다.
그의 말소리에 맞춰 가라혈진이 변화를 일으키더니 핏빛 소용돌이의 움직임이 느릿해지면서 두청양 체내의 피가 두 구멍을 이은 고랑을 따라 거꾸로 한립 쪽으로 흘러들기 시작했다.
‘이건…….’
한립은 자신의 몸이 불을 피워놓은 것처럼 뜨거워지고 쩍쩍 갈라진 피부가 새빨갛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하반신을 타고 올라왔던 핏물이 그의 목까지 올라왔다가 결국에는 전신을 뒤덮어 새빨간 핏덩이가 되고 말았다.
두청양 뿐만 아니라 진법 안에 있던 나머지 대장들의 성신지력이 콸콸 흘러드는데 누군들 견딜 수 있을까?
“으아악…….”
모호하게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핏빛 고치 안에서 들려왔다.
한립은 몸 안에서 여러 기운이 충돌하며 골격이 뒤틀리고, 기경팔맥이 부풀어 올라 당장이라도 온몸이 터질 것 같았다.
뇌전 연못에서 몸을 씻어낼 때보다도 더 고통스러웠으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는 방책을 강구하기 보다는 의식의 힘을 일으켜 의식 세계를 보호하면서 정신을 잃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다.
한립은 이를 악물고 어려운 시간을 견뎌냈고, 나머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두청양도 한립이 견디지 못하고 몸이 터져 죽으면 그의 혈맥의 힘을 다시 빼앗을 생각으로 꿋꿋하게 버티고 있었다.
그때가 되면 배신을 한 신양도 려비우 못지않게 끔찍하게 죽여줄 참이었다.
신양은 미리 해 도인을 데리고 동굴 변두리로 물러나 있었다.
불안한 표정의 그도 이마에 굵을 땀방울을 흘리며 한립이 죽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방대한 충격에 네 명의 대장이 죽는 것을 물론이고, 두청양도 중상을 입을 테니 그때 공격해서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한립과 두청양 모두 엄청난 인내력으로 고통을 감내하고 있어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졌다.
모든 것을 걸었기에 오늘 일이 실패하면 그의 미래는 불 보듯 뻔했다.
해 도인만이 고요한 얼굴로 자신은 상관없다는 듯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진법 중앙, 부풀어 오르는 핏빛 고치 속에서 한립도 거품처럼 팽창해 있었다. 하지만 그 기혈의 난동 속에서도 진령 허상들은 더는 도망치려 하지 않고 하나씩 한립의 몸속으로 흡수되어 갔다.
“안 돼!”
“어찌 저럴 수가…….”
가라혈진에 붙들려 기운을 흡수당하던 네 명의 대장들은 기혈이 쉼 없이 한립에게 흘러 들어가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빵빵하게 부풀어가는 한립과 반대로 그들은 두 뺨이 홀쭉해지다 못해 푹 꺼져 있었다.
“흐압!”
그걸 본 두청양이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기합을 넣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그의 피를 거꾸로 다 빨리게 생겼기 때문이다.
두청양 몸에서 이백여 개의 현규 말고도 수십 개가 더 빛을 발했다.
대부분이 허리와 두 팔에 밀집되어 있었다. 주먹을 들어 올린 그는 맹렬히 지면을 내리쳤다.
콰쾅!
가라혈진과 지하동굴 전체가 흔들렸지만 놀랍게도 진법은 망가지지 않았다.
당초 설계할 때부터 외부의 공격에도 운용을 멈추지 않도록 단단하게 만들어 두었기 때문이었다.
신양이 배반해서 진법을 개조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웅!
두청양은 반동으로 떠올라 다른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쳐 가라혈진과 자신의 연계를 완전히 끊어냈다.
울컥 피를 쏟은 그는 가슴이 움푹 들어갔지만, 그 덕에 진법 바깥의 바닥으로 떨어지며 가라혈진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가 달아나자 압력이 네 명의 대장들에게 집중되었다.
끄악!
참혹한 비명과 함께 네 명의 몸이 거의 동시에 터져 핏물이 꽃잎처럼 흩날렸다.
겨우 몸을 가눈 두청양은 수하들의 죽음에 극도로 분노했다.
“신양, 이 죽일 놈!”
그는 부상을 입은 몸으로 신양에게 달려들었다.
“병들어 다 죽어가는 호랑이가 힘을 쓸 수 있을까?”
신양은 신중한 눈빛으로 현규에 빛을 밝히고 두 주먹을 뻗었다.
크아아-!
그때 핏빛 고치 속의 한립이 길게 울부짖었다.
가라혈진이 흡수한 방대한 힘이 빠르게 그의 체내로 흡수되고 있었다.
거의 핏빛 공처럼 부푼 그의 몸은 그대로 터져버리기 직전이었는데, 해 도인을 제외한 그 누구도 한립의 뱃속에서 녹색 빛이 홀연히 깜빡이다 사라진 것을 보지 못했다.
막강한 성신지력을 장천병이 부단히 흡수해서 한립의 부담을 줄여주고 있었다.
의식을 놓기 직전이던 한립은 몸속의 힘이 그를 돕는 것을 알고 전력을 다해 <우화비승공>을 펼쳐 몸속에서 충돌하는 기혈의 힘과 성신지력을 받아들였다.
동시에 그의 두 다리에 하얀빛이 퍼지면서 성신지력들이 응결되었다.
펑!
왼쪽 다리에 새로운 현규가 뚫렸다.
이어서 또 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른쪽 다리에도 새로운 현규가 생긴 것이다.
그 후로도 연속으로 두 번 더 펑펑! 하는 소리가 들리며 양쪽 다리에 번갈아 가며 새로운 현규가 반짝였다.
<우화비승공>을 대성해 두 다리에 18개의 현규가 전부 뚫린 것이다.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해 도인의 목석같은 얼굴에도 불가사의하다는 표정이 스쳤다.
현규를 연달아 뚫은 것은 축하할 일이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화(禍)일지 복(福)일지 제대로 점칠 수 없었다.
<우화비승공>도 <대주천성원공>처럼 일단 대성하면 더는 현규를 뚫을 수 없어 그의 현규의 수량이 54개에서 고정되고 말았다.
아직 흡수하지 못한 성신지력과 기혈의 힘이 갈 곳을 잃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지하동굴 다른 쪽에서 굉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백서른여 개의 현규를 밝힌 신양은 중상을 입은 두청양에게 밀려 입고 있던 백골 갑옷에 선명한 균열이 가 있었다.
부상을 억지로 억누른 채 싸우는 두청양도 속으로 짜증이 치밀기는 마찬가지였다.
쿵!
두청양이 현규가 밀집한 팔을 휘두르자 신양이 두 팔을 교차해 막았다.
두 팔이 부러진 신양은 휙, 날아가 바닥을 구르다 벽에 부딪쳤고 대량의 피를 토해냈다.
“내 네 놈이 반골인 줄은 알았지만, 지금껏 진정한 실력을 숨기고 나를 해치려 준비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네 놈을 꼭 요절을 내고야 말 것이야!”
두청양은 바로 따라붙지 않고 엉망이 된 기운을 고르며 차갑게 경고했다.
“하하, 저의 생사는 성주의 뜻대로 되지 않을 겁니다.”
입가의 피를 닦아낸 신양이 냉소를 흘렸다.
“헛소리 말고 죽어라!”
두 다리의 현규를 밝힌 두청양은 힘차게 땅을 박차고 흐릿하게 사라졌다.
다음 순간, 귓가에서 바람 소리를 들은 신양은 두청양이 두 손가락으로 자신의 태양혈을 찌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깜짝 놀란 신양은 본능적으로 다른 쪽으로 몸을 날려 피하려 했다.
그러나 그걸 놔둘 두청양이 아니었기에 보법을 변화시켜 바짝 따라붙었다.
그때 쿠웅! 하는 폭음이 들려왔다.
지하동굴의 석문이 터져나가고, 노란 신영이 잔해를 뚫고 나타나 신양을 죽이려는 두청양을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펑!
엄청난 충격에 두청양은 쇠망치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반대쪽 벽을 향해 나가떨어졌다.
부들부들 떨며 몸을 일으킨 그는 간신히 참고 있던 부상의 여파로 결국 대량의 피를 뿜어냈다.
가슴을 움켜쥔 두청양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다리를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골천심? 어찌 네 녀석이!”
멀리서 현투장 1구역 수석 현투사인 골천심이 신양과 나란히 서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왜 나라서 의외인가? 지난 3만 년간 이날만을 기다려왔다.”
골천심은 차가운 눈으로 두청양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3만 년? 정체가 무엇이냐.”
“기억력이 좋지 못하구나. 현지성(玄止城)에서 네 놈이 몰래 잡아들인 여인을 잊은 것이냐?”
“현지성……. 설마!”
“그래, 넌 그때도 가라혈진을 이용해 누군가의 피를 빼앗고 죽게 했지. 시체조차 남기지 않았다.”
말을 하는 골천심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너, 안홍옥과 무슨 관계냐?”
“닥쳐라! 내 어머니의 성함을 어찌 너 따위가 함부로 입에 담느냐!”
“그랬군……. 6천 년 전에 스스로 청양성에 찾아와 현투장에 들어오겠다고 한 순간부터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구나. 참으로 인내심도 강하구나?”
“하하. 오늘을 위해 3만 년을 기다렸다 한들 어떠한가. 하늘이 나를 저버리지 않고 복수할 기회를 주셨거늘!”
“호분의 죽음도 네놈들 짓이구나.”
두청양은 고개를 쳐들고 광소하는 골천심과 신양을 쳐다보았지만, 그들은 답이 없었다.
퉷, 하고 입에 고인 핏물을 뱉은 두청양이 입을 열었다.
“모녀가 그리 사이가 좋다니 저승에서 함께 오순도순 지낼 수 있게 해주마…….”
말을 마친 두청양이 눈을 감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후웅.
돌연 그의 몸이 알록달록하게 변하고 작은 비늘들이 빼곡하게 돋아나 다채롭게 빛을 발했다.
해 도인이 그 기운에 이끌려 한립을 쳐다보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환린채사(幻鱗彩蛇)…….”
골천심이 그걸 보고 마치 무언가로 심장을 찔린 듯 고통스러워했다.
“이 버러지만도 못한 도둑놈!”
노호성을 터트린 그녀는 두 다리의 현규를 밝히고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