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화. 때
*
한립은 교환 대청으로 가서 현투장이 있는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교환 대청과 맞은편에 외부로 통하는 넓은 길이 나 있었다.
그 길로 곧장 가면 청양성이었고 성주부는 당연히 그 안에 있었다.
현투사들은 함부로 현투장을 벗어날 수 없었고, 입구에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어 그들을 뚫고 움직이는 것은 무리였다.
한립은 바깥을 쳐다보다 발길을 돌렸다.
흑겁석에 대해 알게 되었으니 탈출계획을 짤 때였다. 빠르게 8구역으로 돌아가 거처로 돌아간 그는 방문을 열고 움찔했다.
그 안에 우두커니 서 있는 사람은 해 도인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무어라 말하려던 한립이 돌연 안색이 달라져 신속하게 뒤로 물러났다.
신형이 흐릿하게 변할 만큼 빠른 움직임이었지만, 그가 뒤로 물러난 순간 이미 머리 위에서 누군가 소리 없이 떨어져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가격했다.
하얀빛을 실처럼 나풀거리는 팔이 허공을 가르며 뿌연 흔적을 만들어 냈다.
가슴에 일장을 맞은 한립은 엄청난 괴력에 석문에 등을 부딪쳤다.
콰쾅!
석문은 그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부서져 나가 한립은 바닥에 커다란 구멍을 남기고 떨어졌다.
몸이 이전보다 더 강해져서 중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가 몸을 일으키려 할 때 쉭! 쉭!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검은 사슬 2개가 날아들어 그의 두 손과 발을 묶었다.
단단한 사슬 때문에 움직일 수 없자 한립은 심장이 철렁했다. 그가 더 발버둥 치기 전에 누군가 그의 앞에 나타나 하얀 손으로 목을 틀어쥐었다.
“그럴 것 없습니다. 도망가지 못할 테니까요.”
냉소를 흘리며 전음을 보내는 사람은 신양이었다.
검은 갑옷을 걸친 병사 두 명이 구덩이 옆에 나타나 각각 검은 사슬의 끝쪽을 쥐었다.
안색이 파랗게 질린 한립은 더는 힘을 쓰지 않았다.
9구역 현투사들은 대경실색했으나 신양 등을 보고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했다.
“어떻게 알아챈 겁니까?”
“알아챌 것도 없었습니다. 당신의 성격에 얌전히 붙잡히지 않을 것을 알았으니까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이런 큰 공을 세울 기회를 내게 양보한 호분이 가소로울 정도입니다.”
한립이 묻는 소리에 신양은 주변 현투사들을 힐끗 보고 전음으로 답했다.
철컥.
흑포 병사가 족쇄와 칼을 한립에게 씌웠다.
“현투장 규정을 어겼기에 성주부로 데려가 심문을 할 것이다. 너희는 당황할 것 없이 할 일을 하면 된다.”
신양은 모두를 향해 선포했고, 지켜보던 이들은 한결 안정된 표정으로 서로 눈치를 살폈다.
“끌고 가라!”
분부를 내린 신양이 바깥으로 걸어갔다.
이때 어디선가 해 도인이 나타나 조용히 신양의 뒤를 따랐는데, 한립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걸 본 한립이 미간을 좁혔다.
흑갑 병사들이 한립을 끌고 9구역을 떠난 뒤, 9구역 안은 끓는 솥처럼 시끄러워졌다.
다들 어째서 한립이 끌려갔는지 의견이 분분했다.
군중 속에서 누군가 조용히 서 있다가 자신의 방으로 떠나는데, 바로 진림이었다.
* * *
신양은 현투장을 벗어나 청양성으로 향했다.
성주부는 청양성의 가장 높은 곳에 있었기에 한립을 압송하는 내내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고개를 숙이고 고분고분 따라가는 한립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의식공격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지만 이곳은 청양성입니다. 어차피 달아나지 못할 것, 서로 공연히 힘 빼지 말고 갑시다.”
신양은 한립의 생각이 빤히 보인다는 얼굴로 냉소를 했다. 그 말에 동공을 수축한 한립이 작게 코웃음을 쳤다.
성주부에 이르자 그곳은 규모는 컸지만 그렇게 사치스럽거나 화려하지는 않았다.
신양은 통보도 하지 않은 채 바로 그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앞서 홀로 걸어가는 신양의 눈빛은 가라앉아 있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고, 그 뒤를 따라가는 해 도인은 아직도 한립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두 손이 등 뒤로 포박된 한립은 병사들에게 이끌려 그들을 따라 성주의 거처까지 걸어갔다.
“성주 대인, 신양입니다. 뵙기를 청합니다.”
신양은 닫혀 있는 석문 앞에서 이렇게 고했다.
석문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쿠쿵.
신양이 다시 한 번 고하려는데 육중한 석문이 마찰음을 내며 천천히 열렸다.
“들라.”
누군가 분노를 억누른듯한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손가락을 까딱인 신양을 보고 병사들은 한립을 두고 물러났다. 신양은 가엾다는 표정으로 한립의 어깨를 밀어 동부 안으로 함께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대전 안에는 성주 두청양 외에 네 사람이 더 있었다.
호분과 함께 두청양이 불러들였던 사냥 대장들이었다.
“어째서 지금 그 녀석을 끌고 온 것이냐?”
두청양이 불쾌한 낯으로 물어다.
“성주께 아룁니다.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다 이 자가 탈출하려는 것을 발견해 잡아 오는 길입니다.”
포권을 한 신양이 사정을 알렸다.
“오, 그런 일이 있었다고?”
두청양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주변의 네 사람이 시선을 교환하며 두려워했다.
“최근 현투장 경계가 소홀해진 듯합니다. 인원을 늘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신양이 공수하며 우려를 표했다. 그 말에 두청양 옆에 있던 각진 얼굴 청년이 신양을 힐끗 보았다.
현투장 일은 그가 맡고 있었기에 한립이 탈주했다면 큰 벌을 받았을 것이다.
“네가 아주 잘 해주었다. 기억해 두마.”
두청양은 미소도 보이지 않고 입으로만 칭찬했다.
다른 이들, 특히 각진 얼굴 청년은 성주가 이 일을 깊게 파고들지 않자 남몰래 한숨을 돌렸다.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신양이 허리를 굽혔다.
그를 본 두청양은 망설이다 헛기침을 했다.
“큼, 마침 상의할 일이 있으니 남거라.”
“무슨 일이든 명령만 내려주시면 따르겠습니다, 성주님.”
두청양이 손짓을 해 가까이 다가오라는 표시를 하자 신양은 한립을 해 도인에게 맡기고 다가섰다.
“오늘 오전 호분이 자신의 거처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호분이 죽었단 말씀입니까? 어떻게 말입니까?”
깜짝 놀란 신양은 안색이 확 달라져 물었다.
“알 수 없지. 외상이나 싸운 흔적은 없고 두 귀에서 피가 흐른 흔적만 남아 있었다.”
그의 반응을 세밀하게 관찰하던 두청양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독살당한 걸까요? 그럴 리가요. 호분이 얼마나 몸이 튼튼한데 독약으로 죽일 수 있단 말입니까?”
“그건 아직 알 수 없다. 그에게 시키려던 일이 있었는데, 이번에 탈주범을 잡은 공을 생각해 그 일을 네게 맡기려 한다. 호분을 대신해 가라혈진을 맡을 수 있겠더냐?”
“감사합니다, 성주 대인!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의식을 거행하기 전 아직 시간이 있으니 혈진을 펼치는 일은 앞으로 네가 책임지거라. 호분의 죽음은 내가 따로 조사할 것이니, 너희는 청양성 안을 엄중히 방비하고 모든 일은 가라혈진을 최우선으로 해야 할 것이다.”
“예!”
두청양의 시선을 받은 모든 이들은 포권을 하고 답했다.
그 후, 신양은 한립을 데리고 현투장이 아니 음산한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 * *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
어두컴컴한 지하 감옥, 갑자기 옥사의 문이 열리고 두 명이 들어왔다.
“려 수사, 오랜만입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익숙한 목소리는 신양의 것이었고, 그 뒤를 따르는 사람은 해 도인이었다.
“때가 된 것입니까?”
천천히 고개를 든 한립이 담담히 물었다. 그 말에 움찔한 신양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말없이 일어난 한립은 몸의 먼지를 털고 스스로 옥문을 걸어 나왔다. 그러자 바깥에 있던 병사들이 다가와 그를 중앙에 두고 포위했다.
“물러나거라!”
신양의 질책에 병사들이 물러서고 한립은 신양과 나란히 걸어갔다.
해 도인 등이 그들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려 수사, 이런 곳에서 우리가 만난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라 할 수 있는데, 아직 못다 이룬 숙원이 있다면 말해 보시지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돕겠습니다.”
미소를 띤 신양은 농을 하듯 말했다.
“저를 청양성 밖으로 풀어달라고 한다면 들어주시겠습니까?”
한립이 표정 변화 없이 물었다.
“그거야 당연히, 안 되지요. 하하, 수사가 수련한 공법을 제게 전수해 준다면 이 괴뢰가 당신의 시신을 온전히 거둘 수 있게는 해드리겠습니다. 인수들의 밥이 되는 대신에요.”
신양은 웃음 지었고, 한립은 냉소를 보인 다음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산속에 난 통로를 따라 계속 아래로 내려가 꽤 넓은 지하 공간에 도착했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 같은 동굴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비리고 단 냄새와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동굴 안쪽 바닥에는 오각형 모양의 기괴한 제단이 있었는데, 중앙에 움푹 들어간 2개의 구멍 주위로 5개의 원통형 기둥이 튀어나와 주먹 크기의 요핵을 품고 있었다.
광택이 흐르는 요핵들은 전부 최고의 품질을 지닌 지급 요핵이었다.
두청양과 다른 네 명의 대장들이 제단 옆에 서서 그들이 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성주대인, 데리고 왔습니다.”
신양이 공손히 예를 올리자 붉은 장포를 걸친 두청양이 엄숙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머리 거한이 앞으로 나와 한립을 밀어 제단의 움푹 파인 구멍 속으로 걸어가게 했다.
두 발이 구멍에 닿은 한립은 무언가 진득하게 묻어나는 느낌에 고개를 숙였다. 구멍에 쌓인 검은 아교 같은 물질은 오랫동안 침적되어온 검은 핏물이었다.
“다들 진법으로 오르라.”
두청양의 명에 신양 등이 몸을 날려 각각 다섯 개의 원뿔 위로 올라섰다.
두청양도 천천히 제단의 또 다른 구멍 안으로 걸어 들어가 한립과 마주 보고 가부좌를 틀었다.
비록 표정에 변화는 없었지만 한립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시작하라!”
두청양의 명이 떨어졌다.
신양 등이 대답하고는 분분히 원기둥에 앉아 주문을 외며 한 손을 지급 요핵 위에 올렸다.
웅.
들릴 듯 말 듯 진동이 울리고 제단이 바르르 떨렸다. 다섯 명 앞의 요핵이 밝게 빛나며 강렬한 파동을 내뿜었다.
성신지력이 제단에 새겨진 문양을 타고 한립이 있는 구멍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훅! 훅! 훅…….
한립 발아래 끈적한 검은 핏물이 성진지력을 품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더니 그의 다리를 타고 허리까지 솟구쳤다.
참기 어려운 열기에 한립은 낮게 신음을 흘렸다.
몸 안의 기혈들이 바글바글 끓는 것 같았고, 진령혈맥도 요동쳤다.
쿵. 쿵. 쿵. 쿵…….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입이 말라 벗어나고 싶었지만, 몸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산악거원, 뇌붕, 청란 등등의 진령 허상들이 그의 통제를 벗어나 화려하게 떠올랐다.
그걸 지켜보는 맞은 편의 두청양은 활짝 웃음 지으며 탐욕을 드러냈다.
“으하하, 이렇게 많은 진령혈맥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 그간 참아온 보람이 있었어!”
두청양이 참지 못하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인상을 찡그린 한립은 급격히 표정이 변해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선 움푹 파인 구멍에서 한 줄기 피가 연결된 두청양의 구멍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핏물은 두청양 아래로 흘러가 부글부글 끓더니 동그란 구슬처럼 변해 그를 둘러쌌다.
“크하!”
주먹을 불끈 쥔 두청양은 핏빛으로 변한 눈으로 포효했다.
점점 몸 안의 무언가가 비어가는 느낌을 받은 한립은 이대로 가다가는 오랜 세월 지켜온 진령혈맥을 전부 빼앗길 것이라고 직감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구나.’
그는 뱃속에 숨겨둔 장천병을 뒤집어 그 안에 숨겨둔 핏빛 액체를 받아들였다.
그 순간, 그의 피부가 솥에서 쪄지는 게처럼 붉게 변해 푹푹! 김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두청양은 한립의 혈액이 증발하는 현상을 보고도 개의치 않았고, 그저 진령혈맥이 몸 안으로 흡수되는 상쾌한 기분을 즐겼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눈을 부릅뜬 한립의 피부가 쩍쩍 갈라지더니 거북 등딱지처럼 변해갔다.
다른 진령혈맥들은 안정적인 편이었는데 현무혈맥이 혈관으로 미친 듯이 흘러들어 익숙한 고통을 선사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피가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현상은 멈추지 않고 오히려 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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