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화. 흑겁석(黑劫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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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은 서신의 내용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독룡의 말과 이전에 신양이 보였던 반응 그리고 그의 직감이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수도의 길에 들어선 이래 위기의 순간마다 이런 직감이 그를 구한 적이 많았다.
서신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생각이 들자 가슴을 움켜쥔 그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몸에 흑겁충이 있어 달아나는 것도 불가능했다.
방안을 서성이던 그는 붉은 병을 꺼내 놓고 입을 벌려 장천병을 끄집어냈다.
그는 서신에 적힌 대로 붉은 액체를 마시는 대신 그것을 장천병 안에 넣고 뚜껑을 봉해 통째로 삼켰다.
서신의 내용을 믿는다고 쳐도 무턱대고 정체 모를 붉은 액체를 마실 생각은 없었다.
침상에 앉아 눈을 감은 한립은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현투장은 청양성 안에 마련된 완전히 봉쇄된 공간으로 성지 등 특수한 구역 몇 곳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외부와 연결된 곳은 현투장 입구뿐이었다.
특수 구역들은 금제가 펼쳐져 있거나 실력자들이 지키고 있어 빠져나갈 수 없었다.
그리고 가장 곤란한 것은 흑겁충이었다.
그간 정보를 캐내려 했지만 청양성 성주가 현투사 노예들을 관리하는 방법이라 알려진 게 거의 없었다.
눈을 뜬 한립은 단호한 얼굴로 일어나 바깥으로 나섰다.
“려 수사.”
“려 형.”
9구역 현투사들이 그를 보고 인사를 했다.
현투장에서 실력을 보여줬고, 수석 현투사인 독룡과도 친해 보이자 다들 친해지고 싶어 난리였다.
한립은 그들에게 대답을 해주고 9구역을 나와 교환 대청으로 갔다.
대청을 빙 돈 그는 4번째 구역으로 통하는 길로 들어섰다가 다시 8구역 그리고 1구역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이유 없이 돌아다니다 교환 대청으로 돌아온 한립은 어리둥절했다.
청양성 성주가 그를 어떻게 할 작정이면 분명 감시를 붙여 놓았을 텐데, 그를 따라붙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어느 통로로 들어가 누군가의 방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끼익하고 열린 문 안에서 회색 의복을 입은 청년이 나타났다. 그에게 현투장 소개를 해주었던 축절산이란 이름의 현투장 사람이었다.
“축 수사, 오랜만입니다.”
한립이 웃으며 인사를 했다.
“려비우?”
그를 알아본 축절산이 미간을 좁혔다.
“경계하실 것 없습니다. 제게 현투장 이곳저곳을 소개해 주신 것이 떠올라 인사도 드릴 겸 작은 부탁이 있어 찾아온 겁니다.”
한립은 미소를 지으며 티 안 나게 작은 주머니를 꺼내 그의 손에 건네주었다. 안에는 현급 요핵 몇 개가 들어있었다.
“큼, 안으로 들어가시죠.”
얼굴을 푼 그는 한립을 안으로 들였다.
축절산의 거처는 한립의 방보다 훨씬 크고 이런저런 가구들도 있었다. 정리가 잘 된 것이 깔끔한 성격 같았다.
그가 방안을 둘러보는 동안 축절산이 다기를 꺼내 맑은 차를 따라주었다.
차의 향이 그윽하게 퍼지자 분위기도 따뜻해졌다.
“워낙 물자가 부족한 곳이라 그리 좋은 차는 아니지만 맛이나 보시지요.”
“축 수사께서 내주신 차가 좋은 차가 아니면 제가 평소 마시는 것은 맹물이나 다름없을 겁니다.”
차 맛을 본 한립이 웃으며 칭찬했다.
“마음에 드시면 자주 찾아오셔도 됩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걸음하신 겁니까?”
“제 방에 누가 이런 것을 남겼더군요. 너무 놀라 상의를 하러 왔습니다.”
축절산의 말에 한립이 신중하게 서신을 꺼내 보여주었다.
그가 내용을 확인하고 경악한 순간, 한립이 하얀빛을 일으켜 식지와 중지를 뻗어 축절산의 아랫배를 비수처럼 찔렀다.
동시에 한립의 미간에서 수정 사슬이 튀어나와 축절산의 머리로 파고들었다.
챙! 챙!
새하얀 뼈 검이 축절산 복부 앞에 나타나 한립의 손끝을 막았고, 머리 위에서는 보광이 부적 문양을 이루고 의식 사슬과 충돌했다.
그걸 본 한립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진작 무슨 꿍꿍이가 있을 줄 알았다.”
축절산은 뼈 검을 들고 냉랭하게 외쳤다.
검을 든 그의 다섯 손가락이 움직이자 하얀빛들이 흘러나와 하얀 검기를 이루고 한립을 향해 날아들었다.
“검기!”
마기나 선령력을 운용할 수 없는 적린공경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립은 놀랐지만 늦지 않게 뒤로 피해 하얀 검기는 허공을 갈랐다.
표정이 확 달라진 축절산이 급히 뒤를 돌아보며 하얀빛을 머금은 뼈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하얀 뼈 검을 제대로 내려치기 전 손바닥이 칼날처럼 날아들었다.
펑!
가슴이 뜨거워진 축절산은 바람에 날리는 잡초처럼 뒤로 튕겨 나가 벽에 부딪혔고 갈라진 가슴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벽에 부딪힌 충격으로 울컥 피를 뿜은 그의 손에서 뼈 검이 날아갔다.
“너…….”
놀란 축절산이 뭐라고 하기 전에, 머리 위로 한립의 신영이 귀신처럼 나타나 주먹을 내리쳤다.
무기를 잃은 축절산은 두 팔로 막으려고 했지만, 그 전에 주먹이 머리로 떨어졌다.
꿍!
운석에 맞은 듯 나가떨어진 그는 입에서 피를 뿜고 동공이 흔들거리다 기절했다.
그러나 그의 머리를 지키던 부적은 여전히 멀쩡했다.
눈을 가늘게 뜬 한립의 미간에서 반투명한 수정 소검이 튀어 나가 팔뚝 길이의 의식 검으로 변하더니 부적을 향해 떨어졌다.
서걱.
부적이 만들어낸 보호막이 의식의 검 앞에 종이처럼 찢겨 나갔다.
한립은 수결을 맺어 의식의 검을 의식 사슬 몇 개로 가른 다음, 축절산의 머리로 스며들게 했다.
혼백이 의식 사슬에 칭칭 감긴 축절산은 몸을 꿈틀거리다 완전히 마비되었다.
일을 마친 한립은 문을 살짝 열고 문틈으로 바깥을 살폈다.
그의 거처와 마찬가지로 이곳도 의식이 드나들 수 없고, 방음효과가 좋아 공격을 한 것이었다.
과연 전투가 벌어졌는데도 아무도 거들떠보는 이가 없었다.
이에 한립은 안심하며 방문을 닫고, 축절산 앞에 앉아 미간을 가리켰다.
천천히 눈을 뜬 축절산의 눈빛이 맑아져 있었다.
“려비우, 죽고 싶은 것이냐! 흑겁충이 네 심장을 갉아 먹을 것이다.”
한립은 대꾸 없이 오른 주먹으로 축절산의 배를 가격했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축절산은 진땀을 흘리며 새우처럼 몸을 말았다.
“이건 그때 당한 걸 갚아주는 것이다.”
“컥…….”
무표정한 한립의 말에 축절산은 기침만 할 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서신에 적힌 것이 사실이냐? 솔직히 답하지 않으면 네 검을 이용해 사지를 잘라내 주겠다.”
한립은 바닥에 떨어진 하얀 뼈 검을 들어 올리며 상대를 협박했다.
“너 같은 노비가 나를 해쳤다가는 흑겁충이 네 놈을 산채로 갉아 먹어 죽을 것이다!”
간신히 기침을 멈춘 축절산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냉소를 흘린 한립의 손이 번득 움직였다.
왼쪽 손목이 가벼워진 축절산은 손이 잘려나가 피를 분수처럼 뿜었다.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던 축절산이 참혹한 비명을 지르려는 순간 하얀빛이 번득 지나가고 혀가 떨어져 나갔다.
“내가 인내심이 그리 많지 않아서 말이야. 다음은 오른손이다. 서신에 적힌 것이 사실이냐?”
한립은 서늘하게 물었고, 축절산은 몸을 떨면서도 피가 흐르는 입을 꾹 다물었다.
“흠, 대답은 들은 것으로 하지.”
“아, 안 돼! 말해주겠습니다. 사실이에요. 성주는 당신의 진령혈맥을 이용해 현규를 뚫는다고 했어요. 자, 자세한 사정은 저도 모릅니다. 정말이에요!”
한립이 다시 뼈 검을 들어 올리는 것을 본 축절산이 발작하듯 전음을 보냈다.
“려, 려 수사……. 난 현투장에서 일하는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상부에서 시키는 대로 한 것뿐이지 수사를 어떻게 할 마음은 없었어요. 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
축절산이 부들부들 떨며 전음으로 애원했다.
“네가 알고 있는 것을 다 말해주기만 하면 죽이지 않겠다.”
살짝 얼굴을 푼 한립이 이렇게 말했다.
“고……. 고맙습니다.”
“청양성 성주는 어째서 지금까지 나를 가만히 놔둔 거지?”
“모릅니다. 저는 그냥 시키는 대로 수사를 현투장에 가두었을 뿐이에요.”
“청양성 성주는 언제 내게 손을 쓰려 하지?”
“그것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냥 한동안 수사의 동향을 주시하라는 명을 막 받았을 뿐이에요.”
“내가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면 바로 잡아들이라는 명령과 함께 말이지? 그래서 내게 내준 차에 수작을 부린 것일 테고. 차를 삼키지 않았으니 괜히 시간 끌려 할 것 없다.”
피식 웃음 지은 한립이 찻물을 뱉어냈다.
그 모습에 황급히 고개를 저은 축절산은 감히 그를 올려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 질문이다. 흡족한 답변을 하면 목숨만은 살려줄 것이다.”
“뭡니까?”
희색을 드러낸 축절산이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하면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고 흑겁충을 꺼낼 수 있지?”
한립은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또박또박 물었다.
“흑겁충은 성주대인께서 제련하시는 기이한 곤충으로, 흑겁충에 대한 것은 최고 기밀입니다. 성주대인 밖에는 해결하지 못하시고, 스스로 흑겁충을 제거하려 했던 자들은 전부 참혹한 결말을 맞았다고 들었습니다.”
표정이 달라진 축절산이 서둘러 전음으로 답했다.
예상하던 답변이었지만 한립의 얼굴이 굳어갔다.
“진짜 맹세코 사실입니다. 게다가 무슨 방법이 있다고 해도 흑겁충처럼 중요한 일을 성주 대인께서 제게 말씀해주셨겠습니까?”
의식 사슬로 축절산의 혼백을 구속하고 있는 한립은 어느 정도 감정 상태를 읽어내고 있었다.
혼백 파동이 일정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선령력만 쓸 수 있었으면 추혼술을 했을 텐데 성가시기 그지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현투장을 관리하는 네가 흑겁충에 대해 전혀 모를 리는 없겠지. 이전에 현투사가 도망가면 흑겁충이 발작을 일으킨다고 했다. 그 이유가 뭐지?”
질문이 달라지자 축절산은 머뭇거리며 바로 전음을 보내지 않았다. 눈빛이 서늘해진 한립이 손에 든 하얀 뼈 검을 움직였다.
오른손 손목이 절반 정도 잘려 너덜너덜해진 축절산이 참혹하게 비명을 지르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인내심이 많지 않다고 말했을 텐데! 사지 없이 살아볼 테냐? 네가 절대 새 사지를 만들어내지 못하게 할 방법도 있다.”
“말할 테니 제발 오른손은 자르지 마십시오!”
“어서 말하거라!”
한립은 축절산의 오른 손목에 검을 박아놓고 소리쳤다.
“성주부에 흑겁석(黑劫石)이란 돌이 있습니다. 그 돌이 청양성 전체에 특수한 혼백 파동을 발산해서 흑겁충은 그 범위 내에서 깊은 잠에 빠지게 됩니다. 일단 흑겁석의 영향 범위를 벗어나면 흑겁충이 깨어나기 때문에 누군가 도망갈까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흑겁석? 그럼 그걸 갖고 있기만 하면 흑겁충이 영원히 발작하지 못한다는 것 아니냐.”
“음……. 이론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저도 될지 안 될지는 모릅니다. 성주 대인의 능력에 다른 수를 써두셨을 수도 있고요.”
축절산이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렸다.
인상을 찡그린 한립은 고민을 하다 입을 열었다.
“흑겁충에 대해 또 아는 것이 있으면 전부 말하거라!”
“이게 답니다. 정말 다른 건 모릅니다.”
눈시울이 붉어진 축절산이 억울하다는 듯 전음을 보내왔다.
“좋다. 내 다른 녀석을 붙잡아 심문해서 똑같은 소리를 하면 목숨을 살려주고 조금이라도 나를 속인 게 있다면 토막을 내서 현투장 인수의 밥으로 던져주겠다.”
한립이 으름장을 놓았지만 축절산은 겁에 질리기보다 한시름 놓았다는 얼굴을 했다.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퍽!
한립은 축절산을 때려 기절시킨 다음, 주문을 외워 수결을 맺은 손으로 미간을 가리켰다.
축절산의 미간에서 우리 모양의 주술문자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혼백 봉인으로 3일은 곯아떨어질 테니 그가 달아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터였다.
마음이 약해서 축절산을 살려둔 게 아니라 청양성 성주가 자기 사람들에게 무슨 수를 써놔 괜히 죽였다가 이목을 집중시킬까 걱정해서였다.
축절산을 침상 아래 밀어 넣어 숨기고, 방 안의 핏자국을 제거한 그는 평온한 표정으로 방 안에서 걸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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