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화. 서신과 병
*
“현급 요핵 세 개요? 골 수사께서 이리 인색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제 환영이라는 별호는 전부 <우화비승공>의 힘을 빌려 얻은 것인데, 그 가치가 어찌 <대령금강결>과 같다 할 수 있겠습니까.”
한립은 일부러 황당하다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공법에 더해서 지급 현수의 요핵까지 드리면 되겠습니까?”
“좋습니다.”
이번에는 한립도 더는 머뭇거리지 않고 수락했다.
“하하, 잠깐만요. 제게도 작은 요구사항이 하나 더 있답니다. 공법을 전수해주시면서 수련 상의 깨달음도 함께 들려주시지요.”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우화비승공>은 물론, 제가 알려드리는 수련 상의 깨달음도 스스로의 수행에만 써야지 남에게 전해서는 안 됩니다. 맹세하시면 거래를 하고 아니라면 그냥 말겠습니다.”
“청양성에서 단 하나뿐인 공법일 거라 생각합니다. 수사가 말씀하지 않으셔도 제가 다른 이에게 전할 리 없지요.”
골천심은 그 자리에서 맹세했다.
한립은 그녀와 의식 교류를 통해 공법을 교환하고 지급 요핵도 받아냈다.
쌍방이 모두 흡족한 결말이었다.
반나절을 더 돌아본 한립은 거래할 만한 것이 없자 독룡에게 인사를 하고 먼저 그곳을 떠났다.
“려 수사, 교환하고 싶은 물건이 있습니까?”
거처가 아닌 교환 대청으로 온 한립에게 기다란 돌 탁자 뒤에 앉은 투항민 복장의 마른 청년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물었다.
이제 현투장에서 한립의 명성은 높았다.
“오늘은 물건이 아니라 성지로 가서 수련하려 합니다.”
한립은 호패를 보였다.
호패에는 현점 118점이 표시되어 있었다.
마른 청년은 호패를 받아 은색 방망이로 현점을 제하고 돌려주었다.
“이리로 가시죠.”
마른 청년은 옆의 일꾼에게 일을 맡기고, 그를 성지 통로로 안내했다.
굳게 닫힌 통로의 석문에 그가 남색 영패를 가져다 대자 오목하게 들어간 모양과 꼭 맞았다.
웅웅.
별빛이 영패에서 흘러나와 석문에 퍼졌다.
“갑시다.”
그들이 천천히 열린 석문 안으로 들어가자, 석문은 곧장 닫혀 버렸다. 어두운 통로에는 위로 통하는 계단이 있었다.
한참을 걸어 올라가 통로를 빠져나가자 석실이 나왔는데, 지붕이 뚫려 있어 어느 산 정상의 오목한 지형처럼 보였다.
골짜기 중간에는 둥근 연못이 있고, 그 주위로 열댓 그루의 이상하게 생긴 나무들이 서 있었다.
가지와 줄기 그리고 잎사귀까지 새하얀 나무는 하얀 옥으로 조각해놓은 것만 같았고, 나무줄기의 하얀 문양이 바닥을 타고 연못으로 이어졌다.
밤이 내려앉은 하늘에는 별빛이 비치고 있었고, 나무들은 하얀빛을 발산해 주변의 별빛을 모아 문양을 타고 연못으로 흘려보냈다.
연못에 가득 찬 별빛이 왜 이름이 성지인지 알 수 있게 해주었다.
그 옆에 앉은 백포 사내는 서른 살쯤으로 피부에 혈색이 없고 눈썹과 머리카락까지 전부 하얀색이었다.
“대인, 려비우가 현점 100점을 내고 성지에 들어가 수련을 하기를 청합니다.”
마른 청년이 공손히 예를 올렸다.
백포 청년이 눈을 뜨고 한립을 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예를 올린 마른 청년이 돌아간 뒤 백포 청년은 손바닥만 한 모래시계를 꺼내 옆에 뒤집어 놓았다.
모래시계 안에서 모래가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그걸 본 한립은 바로 연못으로 풍덩 뛰어들어 구슬 같은 하얀 물방울들을 일으켰다.
처음 온 것이 아니라 이곳 규칙을 잘 알고 있었다.
100점을 주고 들어오면 딱 한 시진만 이용할 수 있었고, 모래시계가 딱 한 시진을 쟀다.
연못에 앉아 가부좌를 튼 그는 <우화비승공>을 운용했다.
몇 년 동안 오직 <우화비승공>에만 집중했는데 3달 전부터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고비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새로운 현규는 절반만 열리고 더는 변화가 없었다. 그래서 한동안 모은 현점으로 성지에 온 것이다.
방대한 성신지력이 그의 의지에 따라 현규로 흘러들었다.
머릿속에서 쿠릉! 하는 소리가 울린 한립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지만 현규는 반응이 없고 성신지력만 흩어졌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라 한립은 <우화비승공>을 운용해 성지의 성신지력을 흡수해 다시 도전했다.
쿠쿠쿵.
성신지력이 한 번 또 한 번 현규로 밀려들었다.
어느새 반 시진이 지나갔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한립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과연 쉽지 않구나…….’
한립은 실망하지 않고 주먹 크기의 요핵을 꺼내 들었다. 골천심과 거래를 해 얻은 지급 요핵이었다.
요핵 안에서 하얀 별빛이 소용돌이쳤다.
그가 골천심과 거래한 것은 <대력금강결>도 필요했지만 지급 요핵이 꼭 필요해서였다.
요핵을 삼킨 그는 방대한 성신지력을 장천병을 이용해 연화시켰다.
쿵!
그의 머릿속에서 발작적으로 의식의 힘이 쏟아져나왔다.
전신의 기혈도 미친 듯이 들끓어 현규 근처로 몰려들고, 단전 내부도 요동쳤다.
솨아아-
그를 중심으로 연못에 소용돌이가 치기 시작했다. 연못 옆에 앉아 있던 백포 사내가 눈을 뜨고 놀라워했다.
“무슨 수련을 하기에 이렇게 요란한 거지?”
혈지 내에서는 의식으로 다른 이를 조사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어 그냥 쳐다 볼뿐이었다.
시간이 지나 모래시계의 모래가 거의 남지 않았는데, 한립은 여전히 성지에 앉아 복부의 어느 지점에서 별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강력한 성신지력 파동이 그가 아주 중요한 순간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미 모래시계의 모래가 바닥났지만 백포 사내는 망설이다 그를 깨우지 않았다.
다시 반 각이 흘러 한립의 배에서 카착! 하는 소리와 함께 현규가 뚫렸다.
두 다리의 다른 현규들이 함께 빛나 온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눈을 번쩍 뜬 한립은 기쁜 얼굴로 연못에서 떠올랐다.
두 다리의 현규들이 별빛처럼 빛을 내 그를 떠받치고 있었다.
“호오!”
백포 사내가 그걸 보고 신기해했다.
그 소리에 기쁨을 감춘 한립은 번득 움직여 백포 사내 앞에 섰다.
“수사의 배려로 성지 안에서 정해진 시간보다 오래 머물 수 있었습니다. 현점을 얼마나 더 지불하면 될까요?”
한립은 백포 사내 옆의 모래시계를 보고 공수를 했다.
“어차피 반 각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현점은 되었습니다. 그보다 내 질문에 답을 해주었으면 좋겠군요.”
“제가 답할 수 있는 질문이라면 대답을 하겠습니다.”
“려 수사가 수련한 공법의 이름을 알 수 있겠습니까?”
“<우화비승공>이라 합니다.”
어차피 골천심에게 말했던 것이라 숨길 이유도 없었다.
“<우화비승공>! 선인이 우화등선(羽化登仙)을 한다는 말에서 따온 이름이군요. 앞으로 환영이라는 이름이 더욱 빛나겠습니다.”
“과찬이십니다. 매일매일 삶과 죽음을 오가는 현투장에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지요.”
“현투장이 자유는 없지만, 오히려 공평하게 경쟁하기에는 좋은 곳입니다. 바깥에서도 한순간의 실수로 목숨을 잃는 일이 허다하니까요.”
“맞는 말씀입니다. 수행이라는 것이 본디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인데 장소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한립은 웃음을 짓고 백포 사내와 한담을 나누다 떠났다.
그가 떠나는 것을 지켜본 백포 사내는 무어라 중얼거리다 다시 눈을 감았다.
* * *
성지를 떠난 한립은 몸이 너무 가벼워서 날아갈 것 같았다.
슬쩍 떠오른 그는 두 발로 허공을 밀어냈다.
파하! 하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앞으로 쏘아져 나가던 그는 벽에 부딪히기 전 빙글 돌아 다시 허공을 박차고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새로운 장난감을 구한 아이처럼 한립은 신이나 통로를 종횡무진을 했다. 한참을 그렇게 놀고 나서도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우화비승공>으로 날 수 있다니 바깥에서라면 몰라도 적린공경 안에서는 이보다 더 좋은 능력이 없었다.
마음을 진정시킨 그는 거처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려 했다.
현규를 뚫고 수행이 크게 늘었지만, 그만큼 의식의 힘을 소모해서 한 3일은 기절한 듯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막 침상에 누우려던 그가 돌 탁자를 보고 흠칫 놀랐다.
그 위에는 봉해진 서신과 손가락 크기의 붉은 병이 놓여 있었다.
새로 구한 천성패가 멀쩡하게 별빛 보호막을 치고 있었는데 누군가 다녀간 것이다.
한립은 졸음이 싹 가신 얼굴로 탁자로 걸어가 의식으로 문제가 없는지 확인한 다음 서신부터 열어보았다.
봉투 안에는 연보라색 종기가 들어 있었다.
표정이 급격히 달라진 그는 번득 석문으로 가서 귀를 대고, 바깥의 동정을 확인한 다음 다시 탁자로 돌아왔다.
‘청양성주가 당신의 진령혈맥을 노리고 있다. 조만간 위험에 처할 테니 목숨을 구하고 싶다면 병 안의 내용물을 마셔라.’
내용을 읽은 한립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대체 누가 이런 서신과 병을 남겨 두었단 말인가?’
해 도인을 떠올린 한립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그의 방을 다녀간 자는 지난번에 폐규술(閉竅術)을 전해 주고 간 사람과 동일인이 아니었다.
그리고 해 도인이 이런 걸 남겼으면 어떤 표식이라도 해서 그가 오해하지 않도록 했을 것이다.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던 그는 심호흡을 했다.
누가 서신과 병을 두고 갔든지 중요한 것은 서신의 내용이 맞는지였다. 그는 신양을 떠올렸다.
그 앞에서 진령혈맥을 사용했을 때 표정이 이상했던 것이 생각났다.
‘청양성주는 왜 진령혈맥이 필요한 거지? 전투력을 높이기 위해?’
병 안에서 찰랑거리는 액체는 피처럼 보였지만 피비린내는 나지 않았다.
도무지 무엇인지 알 수 없어 한립은 서신과 병을 품에 넣고 진림의 거처로 향했다. 그러나 한참 문을 두드려 보아도 기척이 없었다.
인상을 찡그린 한립은 잠시 고민하다 독룡의 거처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려 수사, 무슨 일입니까?”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 찾아왔습니다.”
뜻밖이라는 독룡의 표정을 보고 한립은 차분히 말했다. 독룡은 그를 안으로 들여 차까지 내주었다.
“혹시 진령혈맥에 대해 아십니까?”
“진령혈맥이요? 당연히 들어는 보았습니다. 진령은 천지에서 자연적으로 탄생하는 기이한 짐승으로 평범한 요수보다 훨씬 강하고, 그 진령혈맥을 보유한 사람도 일부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면서요. 성역에는 진령이 거의 없지만 선역에는 그래도 꽤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아니요, 최근에 누군가 진령혈맥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서 호기심에 물어본 것입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서는 독룡 수사가 가장 박식하니까요.”
몇 년간 알고 지내면서 독룡의 성격에 대해서도 파악을 해두었다. 일처리도 빠르고 안목도 있었는데, 유일하게 칭찬에 약한 편이었다.
“하하, 진령혈맥이야 더없이 귀한 물건이지요. 특히 우리 같은 연체사들에게는 더더욱요.”
“그렇습니까?”
“진령혈맥을 지니면 다른 이들보다 몸이 강해지고 변신한 뒤에 능력이 더욱 강해진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일 겁니다. 하지만 다른 효과는 아는 이가 드물지요.”
한립이 관심을 보이자 독룡이 비밀스럽게 말했다.
“오, 가르침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도 우연히 들은 이야기인데, 현규를 뚫는 데 도움이 된다는군요.”
“그게 정말입니까?”
“직접 본 일이 없어서 사실인지는 모릅니다. 성역에서 진령혈맥을 지닌 사람을 찾기는 하늘에서 별 따기거든요. 또 진령혈맥만 지니고 있어서는 안 되고 상응하는 공법을 익혀야 가능한 일일 겁니다.”
“덕분에 궁금증이 가셨습니다. 저는 그럼, 일이 있어서 가보겠습니다.”
눈을 빛낸 한립이 인사를 하고 일어섰다. 그는 독룡이 마중을 하기도 전에 훌쩍 바깥으로 나갔다.
독룡은 뭔 일인가 하고 고개를 저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거처로 돌아온 한립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가 이토록 빨리 많은 현규를 보유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다. 이게 사실이면 청양성 성주가 그의 혈맥의 힘을 탐할 이유도 충분했고 말이다.
다만 의문인 것은 어째서 잡자마자 진령혈맥을 취하지 않고 현투장에 보냈느냐는 것인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