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화. 폐규술(閉竅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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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현투사들은 다들 독룡의 눈치만 살폈다. 그러나 독룡은 한립과 시선을 교환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함께 사라진 그들을 보며 9구역 현투사들은 언제 원수지간이던 그들이 가까워진 것인지 궁금해했다.
“려 수사, 이 일에 대해 어찌 생각하십니까?”
거처로 돌아와 말이 없던 독룡이 먼저 입을 뗐다.
“도파의 죽음은 의문투성이지만, 그날 제게 식심충을 보낸 이가 도파인 것은 확실해졌습니다. 그저 그 뒤에 지시한 인물이 누군지 알 수 없을 뿐이지요.”
“그게 누구든 식심충을 구했다면 대단한 자일 겁니다. 려 수사가 곤란한 상황에 처한 듯하군요.”
“왜 그러십니까? 혹여나 이 일에 연루될까 저와 한 약속을 깨기라도 하실 생각입니까?”
걱정스러운 상대를 보고 한립이 웃음 지었다.
“하하, 그럴 리가요. 수사가 마음이 바뀌기 전에 약속한 대로 요핵 일부를 먼저 드리겠습니다.”
청양성에서 그를 도와줄 사람이 한립 밖에 없는데 독룡도 포기할 수 없었다.
반 시진 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한립은 독룡이 내준 탑라수 요핵 10개 중 하나를 삼키고 <우화비승공>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 * *
6년의 시간이 단숨에 지나갔다.
한립은 많은 시합에 나가 생사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왔다. 덕분에 나날이 실력이 높아졌고 보상으로 얻은 현점 대부분을 요핵으로 바꾸었다.
게다다 독룡이 계속해서 건네주는 요핵의 수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부단히 수련하는데도 현규를 뚫는 속도는 늦어지고 있었다.
뒤로 갈수록 현규를 뚫는데 필요한 성신지력이 많아져서 탑라수 요핵으로는 많은 양이 모여야 겨우 하나를 뚫을까 말까였다.
그렇다고 해도 한립은 벌써 현규 49개를 지녀 누구와 비교해도 빠른 수련 속도를 자랑했다.
평소 한립은 누군가 그걸 알아차려 화를 불러올까 걱정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시합을 마치고 피로한 몸으로 돌아왔는데, 방을 봉인해둔 천성패가 망가져 있었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간 그는 사라진 물건이 하나도 없고, 오히려 방구석에 정체 모를 인수 다리뼈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날카로운 무기로 뼈에 새겨진 문자들은 어떻게 하면 성신지력으로 현규를 받아 남들 눈에 띄지 않게 할 수 있는지 적혀 있었다.
비술은 이름도 적혀 있지 않았고 급하게 썼는지 필체가 거칠었다. 짐승 뼈 말미에는 보고 나서 없애라는 충고가 적혀 있었다.
한립은 내용을 숙지한 다음, 바로 뼈를 으깨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누가 주고 간 것인지 적혀 있지 않았지만 이런 일을 할 사람은 ‘해 도인’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 뒤로 한립은 현규를 닫는 폐규술(閉竅術) 수련해 하나씩 현규의 수를 줄여나갔다.
2년이 더 지난 지금은 딱 43개의 현규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 * *
9구역의 현투장 중 하나에서 인족 한 명이 현급 인수와 싸우는 중이었다.
“환영(幻影), 환영, 환영…….”
관객들의 응원 소리가 현투장을 웅웅 울렸다. 피범벅이 된 오린상이 하얀 뼈 창을 든 청년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평범한 용모에 맑은 눈을 지닌 청년은 당연히 한립이었다.
한립이 든 창은 그의 키만큼 길고 별빛을 반짝였다.
어떤 인수의 뼈 가시 같았다.
오린상은 아직 흉흉한 기세를 풍겼지만 벌써 네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한 손으로 창을 든 한립도 부상을 당해 몸에서 피가 흘렀지만, 마음은 편해 보였다.
두 무릎을 살짝 굽힌 그의 두 다리에서 현규들이 빛을 발하고 속도가 급격히 빨라졌다.
흐릿하게 변한 한립의 돌격에 깜짝 놀란 코끼리 짐승은 거대한 코를 휘둘러 그를 갈기려 들었다.
화려한 움직임 속에 관중들이 볼 수 있는 것은 한립의 잔영뿐이었다.
한립의 하얀 뼈 창이 오린상의 뺨을 뚫었다.
푸푹.
창이 피부를 뚫고 살점을 돌파하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오린상의 거대한 몸이 비틀거리다 쿵! 하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창을 뽑아내며 높이 뛰어오른 한립은 전신의 현규를 밝히고 장창을 투척했다.
쉭!
오린상의 머리를 완전히 관통한 뼈 창은 현투장 바닥에 깊숙하게 꽂혔고, 한립은 오린상의 등 위에 착지해 있었다.
“환영, 환영, 환영…….”
현투장 관중들의 흥분이 그게 달해 오랫동안 환호성이 이어졌다.
산 벽 쪽에 숨겨진 귀빈실 안에서 흉악한 인상의 흑포 사내가 뒷짐을 지고 그걸 지켜보고 있었다.
검은 비늘이 돋은 뺨에는 아무 표정이 없었지만, 화상 흉터가 있는 뺨은 꿈틀거리며 웃음 짓는 중이었다.
청양성 성주 두청양이었다.
“속도를 위주로 한 공법이라. 아직 실력을 다 드러낸 것 같지도 않고.”
두청양은 한립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리다 귀빈실에서 빠져나왔다.
반 시진 뒤 하얀 뼈 갑옷을 입은 호분이 급히 통로를 지나 성주 거처에 마련된 의사 대전 밖에 도착했다.
“들어오거라.”
문이 자동으로 열리며 안에서 성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둘러 안으로 들어간 호분은 탁자에 마주 앉은 네 명의 사람을 보았다.
왼편에 앉은 대머리 거한과 마른 노인은 그처럼 제3 사냥대 대장, 제4 사냥대 대장이었고, 오른편에 앉은 각진 얼굴의 청년과 머리를 묶어 올린 이들은 성을 지키는 수성대 대장들이었다.
그들과 따로 상석에 두청양이 앉아 있었다.
“성주 대인을 뵙습니다.”
호분의 공손한 인사에 두청양이 삼두육비의 검은 돌조각을 들고 앉으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너희들을 부른 것은 가라혈진(伽羅血陣) 펼치기 시작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몸을 바로 세운 두청양의 말에 호분 등의 표정이 달라졌다.
몇몇은 희색을 드러내며 공수를 했다.
“구체적인 사안은…….”
두청양의 말이 계속될수록 대전 안에 모인 이들의 표정도 신중해졌다.
닫혀 있던 의사 대전의 석문이 열리고 다섯 명의 대장들이 걸어 나왔다. 서로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하나같이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들이 떠나고 다른 쪽 통로의 어둠 속에서 신양이 걸어 나와 서늘한 눈빛으로 입꼬리를 꿈틀거렸다.
한편 경기를 마친 한립을 독룡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치료할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라서 한동안 요양한 다음에 뵈어야겠습니다.”
한립이 자신의 몸을 훑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제 앞에서 그러지 마시지요. 겨우 오린상 한 마리 죽이고 중상을 입을 실력이 아니란 것을 압니다. 이제는 제가 직접 싸워도 이길 가능성이 크지 않으니 말입니다.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대체 현규가 몇 개인 겁니까? 45개? 아니면 47개?”
“중상을 입은 것은 아니라도 회복을 한 다음에 치료하는 것이 나을 겁니다. 게다가 이제는 상태가 많이 좋아져서 제가 옆에서 보조하지 않아도 크게 상관없지 않습니까.”
“사실 다른 일 때문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오늘 현투장 각 구역의 성적이 뛰어난 현투사들끼리 사적으로 교환회를 합니다. 현점, 공법 아니면 물건으로도 거래할 수 있고, 그 밖에 서로 수련 상의 깨달음을 공유하는 자리인데 함께하시겠습니까?”
“교환회요? 성주부에서 단속을 하지는 않습니까?”
“오히려 장려하는 편입니다. 교류를 통해 현투사들의 실력이 늘면 현투장 입장에서도 더 많은 관중을 끌어들일 수 있으니까요.”
“그렇군요.”
독룡의 설명에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다 각 구역의 우수한 현투사들 중에는 스스로 수련을 위해 자원해서 들어온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자유가 보장되고 은밀하게 외부와 연락을 주고받기도 해서 이 안에서 구하기 어려운 물건들을 지니고 있지요.”
“그렇다면 확실히 좋은 기회군요. 함께 가보겠습니다.”
두 사람은 현투장 내의 통로를 따라 개 9구역을 지난 끝에 제1구역에 도착했다.
각 구역의 경계에서 성주부 병사들이 앞을 가로막았으나 그들의 신분을 확인하고 지나가게 해주었다.
“수석 현투사라는 자리에 상당히 혜택이 많습니다.”
한립은 웃으며 말했다.
“하하, 꼭 수석 현투사가 아니라도 실력이 강하면 그만큼 혜택이 주어집니다. 수사도 일부러 실력을 숨기지 않고 몇 시합에서 화려하게 싸워 이기면 제가 길을 안내하지 않아도 교환회에 참가할 수 있을 겁니다.”
“몇 해가 지났는데, 아직 석공과 해 도인 등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으십니까?”
“그때 말했던 아름다운 여인은 청양성에 나타난 적이 없는 것 같고, 석공 수사도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소식이 없습니다. 그저 해 도인만이 지금은 신양을 따르는 듯싶더군요.”
독룡의 한숨 섞인 말에 한립이 침묵했다.
자령을 찾아 적린공경에 들어와 이렇게 오랜 세월 갇히게 될 줄은 몰랐다.
두 사람은 말없이 걸어가 1구역의 넓은 대청으로 들어갔다.
북적북적한 대청 안은 시장처럼 소란스러웠다.
바닥에는 많은 이들이 판을 깔아 놓고, 인수의 뼈로 만든 병장기나 갑옷 그리고 뼈나 돌로 만든 함에 담긴 단약 등을 팔았다.
“예전에 손빙하의 인수 골도를 봐뒀는데, 오늘은 판매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거기부터 가보려는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저는 그냥 무엇이 있나 둘러보겠습니다.”
한립이 고개를 젓는 것을 보고 독룡이 먼저 떠났다.
그간 모은 현점이 꽤 되었지만 단약은 거의 필요 없었고 병장기도 많이 필요 없어 대부분 요핵만 사 모았다.
천천히 거닐며 구경하는데, 제법 예쁘장하게 생긴 노란 장삼을 입은 여인이 손발이 굵직굵직한 검은 얼굴 거한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보였다.
1구역 수석 현투사 골천심과 4구역에서 이름깨나 날리는 흑면살신 도강이었다.
골천심이 그를 보고 도강에게 한마디를 건네고는 다가왔다.
“려 수사, 시합을 치르고 바로 오시는 길 같습니다.”
그녀는 웃는 얼굴로 말을 붙여왔다.
“맞습니다. 독룡 수사가 알려주시지 않았으면 이런 교환회가 있는지도 몰랐을 겁니다.”
“하하, 수사의 시합은 저도 몇 번 지켜본 일이 있습니다. 수사에게 걸어서 도강 수사나 다른 이들에게 적잖은 물건을 따냈지요.”
“그럼 제 몫도 떼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한립은 농담조로 물었다.
“원래 내기는 자신의 운과 안목에 따라 결과가 좌우되는 법입니다. 수사도 제게 걸어 보상을 받아 가시면 되겠네요.”
골천심의 말에 한립이 대답을 하려는데 머릿속에 그녀의 전음이 울렸다.
“려 수사에게 제가 거래를 원하는 물건이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신입인 제게 골 수사의 눈에 들만한 물건이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두 다리에 현규가 집중되어 ‘환영’이라는 별호로 불리고 있는 것을 압니다. 이제 독룡 수사와 나란히 9구역의 두 우두머리로 불린다니, 그 수련공법이 궁금하군요.”
“수련공법을 거래하고자 하십니까?”
한립은 미간을 좁혔다.
“그렇습니다.”
“죄송하지만, 제가 수련 중인 <우화비승공>을 거래할 생각은 없습니다.”
“급히 거절하지 마시고 일단 조건이나 들어보시죠?”
골천심이 조급한 기색 없이 미소 지었다.
“말해보시지요.”
“제게 두 팔에 현규를 밀집시키는 공법이 있다면 관심이 있으실까요?”
“아직 우화비승공도 제대로 수련하지 못했는데, 새로운 공법을 얻어 어디에 쓴단 말입니까.”
“<우화비승공>이 두 다리에 현규를 집중적으로 늘려주는 공법이라도 속도만 늘어서는 분명 한계가 있을 겁니다. 게다가 제가 교환하고자 하는 공법은 힘을 위주로 하는 <대력금강결(大力金剛訣)>입니다.”
골천심의 말에 한립도 눈썹을 끌어올렸다.
<대력금강결>에 대해 독룡에게 들은 적이 있는데, 도강이 수련했던 공법이라고 했다.
골천심도 그에게 공법을 얻어 거래하려는 듯했고 말이다.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우화비승공>만 익혀서는 현급 이하의 인수들은 잡아도 지급 인수들은 어려울 거예요. 실력이 강한 인수와 현투사일수록 몸이 무척 단단할 텐데 속도만 빨라서야 승부를 볼 수 있겠습니까?”
“골 수사의 말씀이 맞습니다. 저도 힘을 위주로 하는 <대력금강결> 같은 공법이 필요하던 차입니다. 허나 <우화비승공>은 제가 무척 특수한 경로로 얻은 것이라 이렇게 거래를 하기에는 손해를 보는 듯하군요.”
“저도 상당한 대가를 치르고 <대력금강결>을 구했습니다. 그 가치는 <우화비승공>에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수사께서 그리 말씀을 하시니 현급 요핵 세 개를 더 드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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