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화. 위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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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환 대청 밖.
“진작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어두운 표정의 도강이 골천심을 돌아보았다.
“도 수사 생각에는요?”
골천심이 작게 웃음 지었다.
“과연 고명한 안목을 지니셨습니다. 흑문린구 등딱지는 사람을 시켜 보내지요.”
도강은 차가운 목소리와 자신이 속았다는 얼굴로 몸을 돌려 걸어가 버렸다. 손빙하도 눈을 반짝이고 그곳을 떠났다.
“왜 다들 가버리는 거예요? 려비우가 갑자기 잘 싸우기는 해도 독룡이 아직 치명상을 입은 것도 아닌데요.”
자의 여인이 놀라 물었다.
“승부는 진작에 판가름이 났다.”
골천심의 대답은 자의 여인을 더 놀라게 했다.
“요리, 그간 실력은 많이 늘었건만 안목은 아직 부족하구나.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려비우에게 배우거라. 더는 유치하게 굴지 말고.”
“……네.”
골천심이 대청 안으로 들어가자, 요리는 화가 난 눈빛으로 공손히 답하고 그녀를 따라갔다.
아직 남아서 관람하는 이들 중에는 도파도 있었다. 얼굴이 창백하게 변한 그는 굉장히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도파는 눈치를 살피다 서둘러 교환 대청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대 위, 독룡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립을 노려보면서도 다시 달려들지 못했다.
“독룡 수사, 계속 싸우겠습니까?”
한립이 빙긋 웃으며 전음을 보냈다.
“어떻게…… 안 겁니까?”
독룡도 전음으로 답을 하는데 화는 많이 누그러든 어투였다.
“다 방법이 있지요. 당신의 다리는 강하지만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외부에서 미세한 자극만 주어도 전신의 기혈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요! 실력이 강해 이런 식으로 중상을 입힐 수는 없겠지만, 계속 싸우다가는 누군가 당신의 상태를 눈치챌 겁니다.”
한립의 말에 독룡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독룡이 익히는 연체술은 전문적으로 오른 다리만 강하게 만드는 강력한 공법이었지만 불완전했다.
오래전 급하게 다리에 있던 현규 하나를 응결하다 문제가 생겨 아직도 그의 약점이 되었다.
후에 다른 방법으로 보완해서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았지만 다른 현규에 비해 불완전한 것은 여전했다.
이 비밀을 한립이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게다가 한립이 연달아 두 번 같은 현규를 공략한 것을 일반 사람들은 몰라도 골천심, 도강 그리고 손빙하는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의 경지에 아주 작은 허점이라도 생사와 연결될 수 있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독룡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한립은 독룡의 기색을 살폈다.
그가 상대의 약점인 현규를 알아낸 것은 순전히 운이 좋아서였다.
<우화비승공>의 현규와 일치하는 곳에 있는 현규이고, 막 그 현규를 뚫은 덕에 상대의 다른 점을 민감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제게 수사를 도울 방법이 있으니까요.”
“그게 사실입니까!”
한립의 전음에 독룡은 어찌나 격동했는지 목소리가 떨렸다.
“저도 다리를 위주로 현규를 수련하는 공법을 익히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당신의 문제를 알아보았을 리 없지요.”
한립은 이렇게만 말했다.
<우화비승공>에 적힌 현규를 뚫는 방식에 그의 강력한 의식의 힘이 있으면 독룡의 현규를 복구할 가능성이 7할을 되었다.
“만일 그렇게만 해준다면 우리 사이의 은원은 없던 일로 하고 무슨 조건이든 들어주겠습니다.”
한숨을 내쉰 독룡이 그를 향해 허리를 숙여 예를 취했다. 관중들은 대관절 무슨 상황인지 몰라 웅성거렸다.
“그러지 마시고 조용한 곳을 찾아 대화를 나누시지요.”
한립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독룡은 외뿔 거한을 찾아 자신이 졌다고 선언했다.
외뿔 거한은 놀랐지만 독룡 스스로 패배를 인정했으니 그렇게 선포하는 수밖에 없었다.
얼마 뒤 소란스러운 현투장을 뒤로 하고, 그들은 독룡의 방문 앞에 이르렀다. 독룡이 손을 문에 얹자 하얀빛이 문틈에서 흘러나와 쿠릉! 하고 문이 열렸다.
그 내부는 한립 혹은 진림의 거처보다 훨씬 크고 돌이나 가죽으로 만들어진 가구들도 몇 개 더 놓여 있었다.
“앉으시죠.”
독룡이 자리를 권하자 한립은 주저하지 않고 앉아 상대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오랜 세월 이걸로 고생했습니다. 정말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독룡 수사, 제 추측대로라면 이런 문제가 생긴 것은 수사가 마음이 급해 수련을 잘못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공법 자체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건 아닐 겁니다. 그리 고명한 비전은 아니라고 해도 가문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정통 경전인데 그럴 리가요.”
“일단 공법 전체의 내용은 필요 없고, 현규를 뚫을 때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부분만 상세히 설명해 보시지요.”
한립의 말에 독룡은 주저하다 관련 내용을 말해주었다.
아주 사소한 내용이나 공법의 묘리가 담긴 중요한 부분도 숨김없이 말했다.
“역시 그랬군요. <현원신행결(玄元神行訣)>은 위력이 패도적이고 현규를 뚫는 속도도 비교적 빠르지만, 근본을 다지기에는 부족함이 많습니다. 수사도 이점을 알아차리고 차근차근 수련했기에 문제가 더 커지지 않은 것일 테고요.”
“그걸 바로 알아차리시고 대단하십니다! 려 수사가 도움을 주시면 후에 반드시 보답할 것입니다.”
“도울 수는 있습니다만, 그게 제게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무슨 조건이든 제가 할 수 있는 한에서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청양성에서 수사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을 겁니다. 특히 9구역 내에서는 저뿐이라고 말씀드리고 싶고요.”
“제 문제를 한눈에 알아보고, 그 원인을 찾아낸 것만으로도 믿음이 갑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결하면 좋겠습니까?”
“모든 것은 현규를 뚫는 방식이 잘못된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우화비승공>이라는 비전을 익히고 있는데 똑같이 두 다리에 현규를 뚫을 수 있는 공법이라 다른 방법을 알려드릴 수 있을 듯하군요.”
“그게 소용이 있겠습니까?”
“물론 현규를 뚫는 방식을 바꾼다고 해서 이미 뚫은 현규를 어떻게 할 수는 없겠지요. 거기다 강력한 의식의 힘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마침 제 의식의 힘이 그리 약하지는 않습니다.”
한립은 고개를 저으며 느긋하게 답했다.
“그렇다면 정말 려 수사 말고는 저를 도울 사람이 없겠습니다. 그만큼 조건도 간단하지 않겠고요?”
그의 표정을 본 독룡이 약간 걱정스레 물었다.
“하하, 크게 걱정하실 것은 없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수련에 필요한 요핵과 작은 도움이니까요.”
“무엇인지 말해보시지요.”
“독룡 수사께서 인맥이 상당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몇 사람의 행방을 알아다 주셨으면 합니다.”
“흠……. 누굽니까?”
“제가 청양성에 들어올 때 동행했던 이들입니다. 한 명은 석공이라 불리고 다른 한 명은 해 도인이라 불리는데 들어보신 적이 있는지요?”
“아니요, 처음 들어보는 이름들입니다. 하지만 수사를 위해 알아 봐 드리지요. 현투사들은 교체가 빨리 되어서 새로 들어오는 이들도 한둘이 아닙니다만 수사와 비슷한 시점에 현투장에 들어온 이들만 알아보면 되니까 그리 어렵지 않을 거예요.”
독룡은 한립의 요구조건이 까다롭지 않은 것에 조금 안심했다.
“그 밖에 독룡 수사께서는 현투장에 계신지 오래니 혹시 성안에 아주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으십니까? 그 여인은…….”
“려 수사, 청양성에서 가장 부족한 것은 고계 요핵이 아니라 여인입니다. 아주 아름다운 여인은커녕 그냥 봐줄 만한 여인도 손에 꼽혀요. 그런 미녀가 등장했다면 아마 청양성 전체가 떠들썩했을 겁니다.”
한립은 자령의 외모를 설명하려 했지만 독룡은 뭔 소리냐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한립은 성주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신양도 평범하게 생긴 여인을 데리고 다니던 것을 떠올리고 독룡의 말이 사실이라 생각했다.
“려 수사, 제가 도울 일은 이게 다입니까?”
“수사를 치료하는 일은 하루아침에 성공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앞으로 어쩔 수 없이 대량의 요핵을 가져다 써야 할 테니 속이 쓰려도 참으셔야 할 거예요.”
“요핵이야 뭐, 현규만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다면 다시 벌면 그만입니다. 더 실력이 늘어 더 높은 수준의 고급 현투에 참여할 수 있으면 그만큼 보상도 커질 테고요.”
“고급 현투가 무엇입니까?”
“제가 려 수사를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현규의 수가 너무 적어 고급 현투를 생각할 때는 아닙니다.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곧 알게 될 테고요.”
“한 가지 더, 도파를 제가 처리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독룡은 그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한립은 말없이 한 손을 들어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려 수사, 도파가 성격이 좀 그렇기는 해도 다른 이들의 충동질이 없었다면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았을 겁니다. 수사에게 무례했던 벌을 받는 것은 마땅하겠지만 죽을죄는 아니지 않습니까?”
“아뇨, 살고 싶었다면 식심충을 이용해 제 목숨을 노리지는 말아야 했습니다.”
“식심충이요? 그건 또 무슨 소리십니까!”
독룡은 정말 깜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그걸 본 한립도 이상하게 생각되어 식심충이 그를 기습했던 일을 자세히 이야기해주었다.
“제가 도파를 두둔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말 이 일은 뭔가 이상합니다. 오해가 있는 듯해요.”
“오해라니,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인지 듣고 싶습니다.”
“도파 그 친구가 현투장에 잡다한 물건들을 공수하기는 해도 절대 심심충 같은 희귀한 물건을 구할 능력은 못 됩니다. 식심충의 가치는 흑겁충과 맞먹는데 그럴 능력이 되었으면 도파가 여기 남아 있겠습니까?
게다가 제가 폐관에 들어가기 전 경거망동하지 말라 단단히 일러두었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제 명령이라면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는 녀석인데, 어찌 제게 묻지도 않고 그런 일을 벌였겠습니까.”
“듣고 보니 이상하기는 합니다.”
한립도 얼굴을 굳히고 고민했다.
“간단하게 해결할 방법이 있습니다. 저와 지금 가서 도파를 만나 대질을 해봅시다. 려 수사의 말이 사실이면 제 손으로 도파를 끝내겠지만, 아니라면 살길을 열어 주세요. 그래도 저를 오래 따라다닌 수족입니다.”
“그가 벌인 일이 아니거나 누군가의 지시를 받은 일이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독룡의 제안에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막 거처를 빠져나와 걸어가는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응? 도파의 거처에 왜 모여 있는 거지.”
독룡이 의문을 표하고 한립도 시선을 마주쳤다. 모여 있던 현투사들은 그들이 나타나자 길을 터주었다.
독룡을 따라 도파의 방으로 들어간 한립은 돌침대 위에 도파가 가슴을 드러내고 눈을 뜬 채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심장 쪽 살점들이 엉망으로 뜯겨 있었고, 부릅뜬 눈에서는 눈알이 빠져나온 상태였다.
“어찌 된 것이냐?”
독룡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기……. 며칠 전에 도파에게 백옥석 가루가 필요하다고 말해두어서 오늘 찾으러 왔다가 문이 열려있기에 들어온 겁니다. 제가 발견했을 때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입이 툭 튀어나오고 체구가 작은 청회색 피부의 사내가 겁을 먹고 설명했다.
그 말에 말없이 걸어간 한립은 도파의 상의를 들춰내 왼쪽 어깨에 작은 구멍 두 개가 뚫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반 토막 난 검은 지네의 꼬리와 하얀 실 같은 벌레의 잔해가 남아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건 흑겁충과 식심충!”
누군가 두 곤충을 알아보고 소리쳤다.
한립은 도파가 뚜껑이 열린 뼈로 만든 네모난 함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가져다 살폈다.
“식충수(食蟲獸)의 코뼈로 만든 겁니다. 식심곡에서 식심충을 먹고 사는 짐승인데 코로 식심충을 빨아들여서 진득한 점액으로 녹여버리죠. 그래서 그 코뼈로 만든 함에 식심충을 가둘 수 있습니다.”
독룡이 다가와 설명했다.
“도파가 식심충을 키웠단 말입니까? 죽으려고 환장한 것이 아니고서야…….”
난쟁이 사내가 중얼거렸다.
“스스로 불길에 뛰어든 꼴이군요.”
또 다른 현투사도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제 내가 부탁한 검극수 뼈는 누가 구해준단 말입니까! 보라수 요핵을 세 개나 주고 부탁했는데.”
몸집이 큰 회색 피부 사내가 투덜거렸다.
“내 귀린갑도 받기는 틀렸군요.”
이런 탄식들이 이어졌다.
그때 현투장 병사들이 몰려와 현투사들을 방 밖으로 내쫓고 도파의 시체를 확인한 뒤 바깥으로 데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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