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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943화 (1,700/2,000)

1943화. 내기

*

통로를 따라 아래로 내려간 한립은 어둑한 대기실에 도착했다.

독룡이 외뿔 거한과 나란히 서서 무언가를 상의하다 그가 내려온 것을 보고 고개를 들었다.

“독룡과의 일은 들었습니다. 두 사람을 위해 무대를 마련할 테니 잠시 기다리세요. 지금은 현투장이 모두 사용 중입니다.”

외뿔 거한이 한립에게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알아서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아 버렸다.

독룡은 그가 끝까지 표정에 변화가 없자 미간을 좁히다 비웃음을 흘리고 다른 곳으로 가서 앉았다.

* * *

반 시진이 지나 한 경기가 끝이 났다.

거의 동시에 일어난 한립과 독룡은 외뿔 거한의 안배에 따라 무대에 올랐다.

외뿔 거한은 숨김없이 한립과 독룡이 은원을 해결하기 위해 전투를 벌일 것이라 선언했다.

둘 다 나름 현투장의 유명인사로 독룡은 9구역의 수석 현투사이고, 한립은 신입이라도 백전백승의 전력을 지녀 관중들은 재미난 구경을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이미 편이 갈려 독룡과 려비우의 이름을 외치면서 응원을 하는 중이었다.

시합 시작 전 공개된 그들의 배당률은 1대 2였다.

“꽤 인기가 있구나. 물론 이런 왁자지껄한 응원 소리를 들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만.”

독룡은 환호성을 들으며 즐기는 듯했고, 한립은 그와 떨어져 말없이 서 있었다.

일부러 넋을 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대에 오른 이후 독룡이 방대한 살의를 발산해 그를 압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농염한 살의가 파도처럼 밀려들어 피로 얼룩진 땅에 수많은 백골이 산을 이룬 환영이 보일 정도였다.

한립은 수많은 이들과 싸워보았지만 이런 살기를 지닌 이는 거의 없었다. 그간 얼마나 많은 이들을 죽이며 여기까지 왔는지 알 수 있었다.

독룡은 한립이 살기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을 보고 의아한 눈빛을 했다.

그때 교환 대청 출구에서 골천심, 도강, 손빙하 등이 모여 아래쪽 무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많은 현투사들이 내기를 하러 내려가 주변 사람들이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의지는 굳센 편인 듯합니다. 독룡의 수라살경(修羅殺境)에 반응도 없고 말이에요.”

도강이 눈을 반짝였다.

골천심은 담담히 말이 없었고, 그 옆의 자의 여인은 그러든가 말든가 하는 얼굴이었다.

손빙하도 냉담한 얼굴로 말없이 무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번 시합이 어떻게 될 것 같으십니까?”

도강은 골천심을 향해 웃으며 물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독룡이 우세해 보이지만, 승부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허다합니다. 려비우에게 승산이 없다 여기지 않습니다.”

“려비우가 이변을 일으키기라도 할 거란 뜻입니까? ……골 수사의 안목은 무서울 정도로 날카로워서 승부를 미리 잘 맞히는 편이시지요. 어디 저와 내기를 하심이 어떠십니까?”

“무엇을 걸고 말입니까?”

골천심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그 말에 곁의 자의 여인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했고, 다른 이들도 관심을 보였다.

“몇 해 전에 우연히 지급(地級) 흑문린구(黑紋鱗龜)의 등딱지를 얻었습니다. 그거면 되겠습니까?”

“미리 준비하고 오셨군요. 지급 흑문린구는 희귀한 보물로 마침 제가 필요로 하던 물건입니다. 그래서, 제게는 무엇을 원하십니까?”

도강의 말에 잔잔하던 골천의 눈빛에 미약하게 파문이 일었다.

“골 수사께서 지닌 봉황혈옥(鳳凰血玉)을 써버리신 것은 아니겠지요?”

도강이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나오셨군요. 수사의 운이 나쁘지 않습니다. 아직 사용하지 않고 지니고 있습니다.”

골천심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답했다.

“그래서 내기를 하시겠습니까?”

“도 수사의 흥을 깰 수 있나요. 내기하시지요.”

“좋습니다! 약속은 꼭 지키셔야 합니다.”

골천심이 내기에 응하겠다고 하자 도강의 눈에 희색이 어렸다.

“언니, 정말 괜찮겠어요?”

자의 여인이 걱정스레 속삭였지만 골천심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도강도 그것을 보고 뭔가 마음이 불편해졌지만 이미 내기를 한 것, 이제 무를 수도 없었다.

“손 수사께서는 같이 안 하십니까?”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 버린 도강이 손빙하에게 물었다.

“흥미 없습니다.”

싸늘하게 생긴 손빙하는 말도 차갑게 했다.

무대 위의 한립은 자신의 생사를 건 결전이 다른 이들의 내깃거리가 되었다는 것도 모르고 독룡을 노려보고 있었다.

팔짱을 낀 독룡은 이미 죽은 사람을 보는 것처럼 그를 마주 보았다.

외뿔 거한이 시합의 시작을 선포한 뒤 한립은 흐릿하게 변해 번개처럼 독룡의 옆쪽으로 다가가 주먹을 뻗었다.

선공을 한 것이다.

독룡보다 훨씬 약했기에 초장에 승기를 잡지 못하면 끝이었다.

독룡은 한립이 공격을 하는데도 별 움직임 없이 두 팔을 뻗었다.

쿠쿵.

그의 주변 공기가 구불구불하게 왜곡되며 투명한 파동 폭발적으로 퍼져나갔다.

살기와 강력한 기운이 융합되어 사방팔방으로 몰아치는 중이었다.

한립은 주먹이 독룡에게 닿기도 전에 강력한 충격에 휩싸였고, 특히 머리를 망치로 세게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어쩔 수 없이 몇 걸음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본 독룡은 피식 웃고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무대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 사방으로 파편이 튀고 거구의 독룡이 사라지자마자 검은 다리가 한립 앞에 나타나 횡으로 허공을 갈랐다.

촤앗!

검은 다리가 지나는 곳에는 눈에 보이는 물결이 일어 한립의 머리를 노리고 긴 다리가 닿지도 않았는데 날카로운 바람이 피부를 갈랐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한립도 실력을 남김없이 발휘해 두 다리의 7개의 현규를 포함한 총 43개의 현규를 밝혔다.

쿵.

한립이 두 다리로 힘껏 바닥을 박차자 역시 커다란 구덩이가 생겼고, 검은 그림자로 변해 빠르게 독룡의 다리를 피할 수 있었다.

독룡은 자신이 헛발질에 흠칫 놀라 발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그리고 검은 그림자로 변해 빠르게 한립을 뒤쫓았다.

두 사람의 속도는 비슷해서 다른 공간이었다면 달아나면 그만이었겠지만 한정된 공간 속이었기 때문에 결국 한립은 따라잡히고 말았다.

독룡이 기합을 넣자 몸이 순식간에 커져 몸에서 반짝이는 현규의 숫자도 71개로 늘었다.

대부분이 복부와 오른 다리에 밀집해 있었다.

그는 3, 40개의 현규가 밀집해 있는 오른 다리를 흐릿하게 움직여 일고여덟 개의 잔영을 만들어 한립을 걷어찼다.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들리고 현투장이 독룡의 다리가 만들어낸 일격에 가볍게 진동했다.

그러나 한립은 당황하지 않고, 두 다리를 교차하면서 바람에 날리는 버들잎처럼 왼쪽과 오른쪽으로 번득번득 움직여 상대의 다리 허상들을 쏙쏙 피해 다녔다.

그걸 본 독룡의 동공이 수축했다.

“저건 무슨 공법이지?”

멀리서 골천심이 의아한 얼굴을 했고, 자의 여인은 입술을 달싹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정보가 잘못되었습니다. 현규가 43개나 되지 않습니까. 아니면 이번 시합을 위해 이미 뭔가를 복용한 것일 지도요.”

도강이 턱을 쓸었다.

* * *

현투장.

한립은 <우화비승공>의 절묘한 수법으로 독룡의 공격을 피하고 있었지만, 상대의 힘이 너무 강해서 그 여파 때문에 얼굴이 창백해졌다.

눈을 가늘게 뜬 그는 오른손의 두 손가락을 독룡의 심장이 있는 쪽으로 뻗었다.

하얀 옥빛으로 변한 두 손가락이 바람 소리를 내며 매섭게 움직였다.

놀란 기색을 숨긴 독룡이 길게 괴성을 지르고 손을 들어 호랑이처럼 한립의 팔뚝을 내리쳤다.

팔에는 현규가 없었지만 힘은 강해서 제대로 맞으면 한립의 팔이 조각날 판이었다.

이때, 한립이 맹렬히 손가락을 틀어 독룡의 단전이 있는 아랫배로 목표를 바꾸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독룡은 전신의 현규를 빛내 실체화된 반짝이는 막을 만들어냈다.

바로 진극막이었다.

푹!

한립의 두 손가락은 놀랍게도 진극막을 뚫고 들어가 독룡의 단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드디어 안색이 달라진 독룡이 오른발로 세게 바닥을 내리찍었다.

콰쾅!

무대 전체가 심하게 흔들리고, 한립이 밟고선 지면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그를 허공으로 띄웠다.

한립의 눈에도 노기가 스쳤다.

연달아 펼쳤던 모든 공격은 그가 계획적으로 펼친 수였는데 독룡의 힘 때문에 수포로 돌아갔다.

독룡은 몸을 휘리릭 돌려 허공의 한립을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산을 무너트리고 바다를 가를 것 같은 힘이 밀려들어 허공에서 피할 길을 잃은 한립은 전신의 현규에서 빛을 일으킨 상태로 두 주먹을 뻗었다.

펑!

상상 이상의 힘이 느껴졌다.

두 팔에서 극통을 느낀 한립은 포대 자루처럼 날아가 바닥에 떨어졌다.

쿵, 소리와 함께 바닥에 커다란 구멍이 나고 돌멩이가 튀었다.

“하하, 역시 실력 차가 너무 났던가 봅니다. 제가 이기겠어요.”

교환대전에서 도강이 그걸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직 그런 말을 하기에는 이른 듯합니다.”

골천심은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면 어디 기적이 일어나나 지켜볼까요?”

도강이 그런 그녀를 보고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구덩이 속의 한립은 머리가 띵하고 눈, 코,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두 팔에서 끔찍한 고통이 전해졌지만, 그는 급히 고개를 털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고개를 들자마자 독룡이 번개처럼 날아들어 다리를 횡으로 날려 그의 가슴을 노렸다.

다행히 지면에 두 발이 닿은 한립은 다시 <우화비승공>을 펼쳐 버들잎처럼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냉소를 흘린 독룡이 자세를 바꾸고 오른발이 장창처럼 찔러 들어왔다. 수십 개의 현규를 밝힌 오른발에서 노한 파도와 같은 힘이 느껴졌다.

힘이 거의 고갈된 한립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순간 그의 미간에서 보광이 번득이고 작은 검 허상이 흐릿하게 나타났다.

승부를 내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눈빛이 달라진 한립은 미간의 보광을 없애고, 급히 바닥을 발끝으로 찍어 옆으로 물러났다.

동시에 팔을 휘두르는 그의 손에 보광이 어려 있었다.

쉭!

반투명한 수정 사슬이 그의 손바닥을 벗어났다.

의식 사슬은 독룡의 오른발을 감싸고 바닥으로 내리쳤다.

사슬은 진극막을 뚫고 상대의 다리 깊은 곳으로 스며들었고, 오른발이 갑자기 뻣뻣하게 굳은 독룡은 한립을 스쳐 지나갔다.

쾅!

거구의 독룡이 바닥을 부수며 쓰러진 뒤 한립이 번득 십여 장 밖으로 물러나 이상하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일에 관중들도 놀라 조용해졌다.

“갑자기 이게 무슨!”

도강이 눈을 크게 떴고 손빙하의 냉담한 얼굴에도 놀란 표정이 스쳤다. 자의 여인도 입을 벌리고 있었다.

골천심 뒤에 서 있던 진림은 그녀가 이전에 했던 말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골천심만이 미소를 띠고 이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무대 위에 쓰러졌던 독룡은 아무런 부상도 입지 않았기에 한 손으로 바닥을 쾅! 때리며 일어섰다.

노기등등한 얼굴로 한립을 돌아본 그가 다시 달려들었다.

쿵!

발아래에 커다란 구덩이를 만들고 사라진 독룡은 한립의 옆에서 나타나 오른 다리를 휘둘렀다.

이전보다 훨씬 빨라 잔영이 남는 움직임이었다.

한립은 옆으로 피하는 동시에 손바닥에서 의식 사슬을 분출해 독룡의 오른 다리를 감싸고 사슬 끝으로 어느 지점을 찔렀다.

현규가 있는 자리였다.

의식 사슬에 찔린 현규가 발산하는 별빛이 혼란스럽게 흩어지고, 주변의 진극막이 얇아졌다.

독룡은 다시 다리가 마비되어 쿠당탕 바닥을 구르는 수밖에 없었다.

미소를 머금은 한립은 순식간에 의식 사슬을 숨겼다.

승기를 잡고 있던 독룡이 갑자기 왜 그러는 것인지 몰라 관중들도 깜짝 놀라는 중이었다.

한립이 너무 빨리 움직이고 의식 사슬은 반투명해서 대다수가 보기에는 한립이 손을 움직이면 흐릿한 하얀 그림자가 번득이고 독룡이 쓰러져 나뒹구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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