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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942화 (1,699/2,000)

1942화. 골천심

*

보름이 훌쩍 지나 통산원 요핵이 함유한 방대한 성신지력을 흡수한 한립은 탑라수 요핵 7개까지 삼켜 두 다리에 43번째 현규를 뚫는 중이었다.

다른 사람과 비교도 할 수 없이 빠른 속도였다.

언제까지 가능할지는 몰라도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시간을 끌 필요가 있었다.

몸이 회복됐다고 판단한 그는 한 달의 기한이 다 되기 전에 먼저 시합을 신청했다.

이번에는 드디어 인수가 아니라 현규 38개를 지닌 마족 현투사와 싸울 수 있었다.

현규의 수는 그보다 못해도 오른손과 팔에 집중되어 있어 순간적인 공격력은 통산원과 비슷했다.

그러나 약점도 분명해서 속도도 느리고, 몸도 그리 단단하지 못해서 한립이 빠르게 치고 빠지면서 오른팔 외에 사지를 부러트리자 항복을 선언했다.

이제 려비우라는 이름이 9구역에 제법 알려져서 배당률은 떨어졌지만, 그의 시합을 구경하러 오는 이들은 훨씬 많아졌다.

가볍게 이겨 별다른 부상이 없는 한립은 보름 간격을 두고, 또 시합을 신청해 외뿔 거한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이어 3달 조금 넘는 동안 그는 다섯 경기를 치렀다. 그중 두 경기는 악전고투 끝에 겨우 이겼지만, 그의 인기는 나날이 높아졌다.

목숨을 걸고 계속해서 도전하는 그의 의지에 현투장 관중들도 감탄한 것이다.

그날 밤 누군가 <우화비승공>을 익히던 한립의 석실을 두드렸다.

바로 진림이었다.

“진 수사, 얼른 안으로 들어오세요.”

한립은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진림이 공수를 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천성패 값을 드려야 하는데 제가 요즘 현점을 수련하는 데 쓰느라…….”

한립은 민망한 얼굴로 입을 뗐다.

“허허, 다 압니다. 오늘은 떼인 돈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중요한 일로 상의할 게 있어서예요.”

“무슨 일인지 말씀해 보시지요.”

“본론만 말씀드리면 독룡 형님의 출관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 성격에 수사를 그냥 보고 있지는 않을 텐데 대책은 있으십니까?”

진림이 웃음을 거두고 진지하게 물었다.

“대책이랄 게 있습니까. 싸움을 걸어오면 최선을 다해 싸워봐야지요.”

태연한 한립의 대답에 상대가 움찔했다.

“독룡 형님의 실력은 생각보다 강합니다. 제게 방법이 하나 있는데 들어보시겠습니까?”

“어떤 방법입니까?”

“독룡 형님이 강해도 적수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구역의 우두머리급 중 몇몇은 그보다 강자이고요. 제가 우연히 그 중 골천심 대인과 알게 됐는데, 관심이 있으시면 오해를 원만하게 풀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해보겠습니다.”

한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골천심에대해 들은 바가 적지 않았다.

1구역 수석 현투사로 현투장 최고의 실력자로 손꼽히는 자였는데, 그가 여인이라는 점이 꽤 흥미로웠다.

“골 수사와 일면식도 없는 제가 그런 폐를 끼칠 수는 없지요.”

“골천심 대인이 려 수사의 경기를 보고 크게 감동을 하셨나 봅니다. 사실 이번에 독룡 형님과의 일을 해결해 주겠다고 제안한 것도 그분이고요.”

“물론 그 대가가 따르겠지요?”

“껄껄, 역시 척하면 알아들으십니다! 여기서 밤새 앉아 있을 필요는 없겠어요. 골천심 대인은 려 수사가 천골맹(千骨盟)에 들어오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현투장의 열 개 구역에는 여러 세력이 존재했고, 그중 가장 큰 것이 골천심을 중심으로 뭉친 천골맹이었다.

청양성도 이런 결속을 반대하지 않고 은근히 지지하는 듯했다. 자기들끼리 뭉쳐 치고 박고 싸우겠다는데 말릴 것도 없었다.

천골맹을 이끄는 골천심은 유순한 성격은 아니라서 관리 감독이 엄격해 천골맹의 비호를 받게 되면 그만큼 구속도 당할 터였다.

게다가 독룡 문제는 정 안 되면 연신술 신통이 폭로되더라도 해결할 방법은 있었다.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독룡 형님의 실력이 정말 만만치 않아요.”

진림은 한립의 표정을 보고 일이 잘 풀리지 않을 거라고 직감했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저를 대신해 골 수사께 감사하지만 거절하겠다는 뜻을 전해 주셔야겠습니다.”

“휴, 그렇게 결정을 내리셨다면 저도 어쩔 수 없군요.”

한립은 진림을 배웅하고 침상으로 돌아가 가부좌를 틀었다.

두 다리에서 42개의 현규가 반짝이고 있었다.

* * *

한립의 거처를 벗어난 진림은 9구역을 나서서 교환 대청으로 갔다.

고운 자태의 여인 둘이 교환 대청 바깥에 서서 광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청을 등져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각각 보라색 치마와 노랑색 장삼을 걸치고 있었다.

진림이 다가오자 자의(紫衣) 여인은 돌아서 꽤 젊고 아름다운 얼굴을 드러냈다.

“맹주님, 죄송하지만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진림은 자의 여인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는 황삼 여인의 뒤에서 보고했다.

“뭐라? 감히 우리 제안을 거절하다니 독룡의 실력을 모르는 건가? 언니가 살려주겠다고 나섰는데 거절을 하다니!”

황삼 여인이 입을 열기도 전에 자의 여인이 칼 같은 눈빛을 번뜩이며 소리쳤다.

천천히 몸을 돌린 골천심은 평범한 체구에 용모도 빼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반짝이는 두 눈이 아름답고 옥처럼 광택이 흐르는 피부와 침착한 태도가 무척 분위기 있어 보였다.

묘하게도 자의 여인보다 눈길을 끄는 매력이 있는 여인이었다.

“거절할 거라 예상했으니 상관없다. 이제 용쟁호투(龍爭虎鬪)를 구경할 수 있겠어.”

담담히 미소 짓는 골천심의 자태에 진림도 잠시 멈칫했다.

“언니, 려비우라는 자를 너무 대단하게 생각하는 것 아니에요? 현규가 40개밖에 안 되는 인족이 뭐가 대단하다고요.”

“현규의 수는 적지만 실전에서 전투력은 극히 강하다. 강적을 두고도 당황하지 않고 패배할 상황에서도 승리할 길을 찾는 능력은 보기 드물지.”

“그런 기술로 수행을 넘어설 수는 없잖아요. 현규가 훨씬 많은 사람을 만나면 죽음 목숨이죠.”

“그렇긴 하지. 독룡의 실력을 생각하면 승산이 적을 거야.”

골천심이 잔잔히 웃으며 인정하자 자의 여인도 미소를 지었다.

“려비우가 이번에는 화를 피하기 어렵겠습니다.”

듣고 있던 진림이 참다못해 끼어들었다.

“그건 려비우의 안목이 어떨지에 달렸을 거다.”

골천심은 이 말을 남기고 몸을 돌렸고, 자의 여인도 그 뒤를 따라갔다.

‘안목?’

진림만 혼자 남아 말뜻을 되뇌고 있었다.

* * *

하루가 지났다.

독룡 석실의 문이 천천히 열리고 거구가 안에서 걸어 나왔다.

“독룡 형님.”

도파가 진작부터 앞에서 기다리다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9구역 현투사들은 거의 다 모여 있었고 그중에 진림도 있었다.

독룡이 발산하는 위압감에 다들 흠칫 놀랐다.

“독룡 형님, 수행이…….”

도파가 눈을 반짝였다.

“크큭, 중상을 입은 게 오히려 복이 되어 새로운 현규를 뚫었다.”

“지난번에 현규를 뚫은 지 백 년도 안 되지 않으십니까! 엄청난 속도입니다. 그야말로 천재세요!”

도파가 엄지를 치켜세우다 한립 거처를 돌아보며 살기를 드러냈다.

웅성거리는 다른 현투사들 틈에서 진림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숨겼다.

“그 녀석은 저 안에 있느냐?”

“있고말고요! 며칠 동안 나다니지 않는 게 어떻게든 실력을 키워보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나 봅니다.”

독룡의 말에 도파가 적의가 담긴 목소리로 답했다.

평소 한립이 지날 때마다 인사를 건네며 알은 척을 하던 이들도 눈치를 보며 웃음 지었다.

독룡이 성큼성큼 한립의 방으로 걸어가는데, 뜻밖에도 석문이 열리고 한립이 걸어 나왔다.

평온한 그의 표정은 독룡과 도파 그리고 다른 현투사들을 보고도 달라지지 않았다.

“흐흐, 려비우! 죽을 준비나 해라!”

도파가 한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차분하게 방에서 걸어 나온 한립은 도파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독룡 앞에서 멈추었다.

“네 놈이 운이 좋아 독룡 형님을 오늘에서야 만나게 되었구나. 당장 무릎을 꿇고 현점을 모두 바친다면 형님께서 네 놈을 살려주실 지도 모른다.”

그걸 본 도파가 더 열 받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립은 그런 도파를 힐끗 보고는 눈빛이 서늘해졌다가 독룡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태연함에 주변의 모두가 당황해 웃음소리가 그쳤다.

이에 얼굴이 굳은 도파가 무어라 더 말하려다 독룡이 노려보자 실실 웃으며 옆으로 물러났다.

“너처럼 강단이 있는 녀석은 오랜만이구나. 내 취미가 그런 녀석들을 아주 부드럽게 만드는 것이다.”

독룡은 무표정하게 말하며 팔짱을 낀 두 주먹을 으드득 소리가 나게 쥐었다.

“그런 쓸데없는 말로 도발할 것 없습니다. 여기서 할 건지 아니면 장소를 옮길 건지나 말하세요.”

한립이 고개를 흔들고 평온하게 입을 열었다.

“담도 크구나. 그래, 현투장에서도 그럴 수 있는지 보자.”

동공을 수축한 독룡이 지긋이 그런 그를 바라보다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한립이 말없이 그를 따라 걸어가 결국에는 나란히 걷게 되었다.

모여 있던 이들은 한립이 그렇게 나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놀라다가 누군가 따라가 보자는 말에 우르르 몰려나갔다.

코웃음을 친 도파도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교환 대청에는 한립과 독룡의 대결이 다른 구역에서도 소문이 났는지 몰려나온 구경꾼들로 가득했다.

교환 대청을 가득 채운 이들 중에는 독룡 이상의 기운을 지닌 자가 셋이나 되었다.

“골 수사, 도 수사, 손 수사 오늘은 어쩐 일로 여기 계십니까?”

독룡이 가다 말고 그들을 향해 빙긋 웃음 지었다.

중간의 노란 장삼을 걸친 여인은 피부가 백옥 같고, 특유한 대범하고 우아한 느낌을 지녀 군계일학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바로 골천심이었다.

골천심 왼쪽의 흑포 사내는 독룡보다는 훨씬 체구가 작고 심지어 한립보다도 키가 작았지만, 손발이 기이하게 굵어 허벅지는 한립의 허리통만 했다.

그리고 골천심 오른쪽의 남색 피부를 지닌 청년은 꽤 잘생긴 외모에 지렁이 같은 구불구불한 문양이 들어가 있고 음산한 인상이었다.

“1구역의 골천심도 구경을 나왔잖아.”

“4구역의 수석 현투사 흑면살신(黑面煞神) 도강, 6구역 빙황권(氷皇拳) 손빙하도 있습니다.”

9구역 현투사들이 그들을 보고 웅성거렸다. 한립은 빠르게 두 사내를 훑고는 골천심을 보았다.

그녀도 마침 그를 보고 있어서 시선을 마주친 한립은 무언가 기이한 힘을 느껴 흠칫 놀랐다.

연신술이 저절로 운용되어 방대한 의식이 움직인 뒤에야 기이한 느낌이 사라졌다. 골천심은 눈을 반짝이고 바로 독룡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독룡 수사, 9구역 수석 현투사라는 분이 신입과 꼭 기량을 겨루셔야겠습니까.”

“1구역 신입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설치고 다녀 골 수사를 거슬리게 해도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겠습니까?”

독룡의 서늘한 반문에 골천심은 유유히 미소를 짓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 분과 오래 대화를 나누지는 못하겠군요. 이 녀석의 목을 비틀어 버린 후에 뵙겠습니다.”

독룡은 공수를 하며 한립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는 듯 말하고 현투장으로 걸어갔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평온한 얼굴의 한립은 독룡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골천심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호의에 고마움을 표하고 독룡을 따라가려 했다.

“잠깐.”

골천심이 갑자기 그를 불러세웠다.

걸음을 멈춘 한립이 돌아보자 골천심 곁의 보라색 옷을 입은 여인이 썩 원치 않는 얼굴로 다가와 하얀 옥병을 건네주었다.

“독룡과 당신의 은원은 나와 무관하지만 둘 사이의 실력 차이가 너무 커서 두고 볼 수 없군요. 항룡단(亢龍丹)입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육신의 힘을 키워줘 격차를 줄일 수 있을 거예요. 물론 부작용이 있어 한두 달은 요양을 해야겠지만요.”

골천심이 입을 열었다.

“항룡단이라, 골 수사께서 참으로 통이 크십니다.”

도강은 헛웃음을 흘렸고 손빙하도 놀란 기색이었다.

두 사람의 반응에 한립은 항룡단이 대단한 물건이고, 석파공이 주었던 혈조단과 비슷한 효과를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저 둘 중 어느 단약이 더 효과가 좋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흥, 실력도 형편없는데 언니가 왜 당신을 마음에 들어 하는지 모르겠네요! 어서 항룡단이나 가져가요!”

자의 여인이 한립에게 항룡단을 주는 것이 불만인지 투덜대면서도 명령조로 말했다.

“골 수사의 호의에는 감사드리지만, 독룡과 시합을 통해 은원을 해결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면 공평하게 경쟁해야지 다른 사람의 은혜를 입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립은 그녀를 무시하고 골천심을 향해 답했다. 말을 마치고 걸어가면서도 자의 여자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항룡단이 없으면 독룡의 일격도 못 막을 놈이!”

치욕에 얼굴이 붉어진 자의 여인이 한립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허허, 참으로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그만큼 명줄도 길지 모르겠어요?”

도강은 한립이 아래로 내려가자 골천심을 보고 허허 웃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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