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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941화 (1,698/2,000)

1941화. 생사(生死)

*

어두운 대기실에는 등에 뾰족한 가시가 돋은 현투사가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쳐다보았다.

“려비우, 도착했습니까?”

외뿔 거한이 그를 찾는 것을 보고 한립이 무표정하게 다가갔다.

“원래는 실력이 비슷한 현투사와 시합해야 하는데 요즘 시합 일정이 바빠서 적합한 사람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시합 참가 기한을 연장하려면 점수에서 깍일 겁니다.”

“점수가 없다면 나중에 차감해도 됩니까?”

“현투장 규정상 불가합니다만 신입이라 잘 몰랐을 테니 한 번은 봐주겠습니다. 하지만 연체가 된 점수는 나중에 두 배로 깎이니까 다음번 시합은 이겨도 얻는 게 없을 거예요.”

“실력이 비슷한 상대가 없다고 했는데 참가 기한을 연장하지 않겠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러면…… 현급 인수 오린상(烏鱗象) 아니면 통산원(通山猿)과 싸우거나 현규가 60개인 현투사에게 도전해야 합니다. 현투사든 현급 인수든 지난번 상대했던 인수보다 강할 테니 기한을 연장하는 게 나을 거예요.”

“호의는 감사하지만 연장하지 않겠습니다. 현투사는 되었고 현급 인수 중 한 마리와 붙지요.”

외뿔 거한의 설명에 한립이 포권을 했다.

“어떤 게 낫다고 말해 줄 수는 없지만, 육탄전이라 보통 체형이 클수록 강하고 상대하기 어렵기는 합니다.”

“고맙습니다. 저는 통산원을 택하겠습니다.”

“현재 9구역 경기장은 전부 시합 중이니, 그중 하나가 끝나야 시합을 할 수 있습니다. 일단 쉬고 계세요.”

한립이 예의 바르게 나오자 외뿔 거한의 어투도 이전보다 부드러워졌다.

그가 구석의 맨바닥으로 가서 가부좌를 틀고 앉은 지 일각 만에 현투장 한 곳의 시합이 종료되었다.

치열하게 싸우던 현투사 두 명이 전부 죽어 성주부만 큰돈을 벌게 되었다.

한립은 목이 비틀린 사람과 심장이 뚫린 사람의 시체가 실려 나오는 것을 보았다.

“여러분, 한 달이 지났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호린수와 싸워 이긴 인족 현투사를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오늘 두 번째 시합을 펼칠 그는 현급 인수 통산원에 도전합니다. 검사 결과 현규의 수가 서른 몇 개밖에 안 되었던 그가 이번에도 인수를 꺾고 승리할 수 있을까요?”

외뿔 사내가 나서서 모두의 주목을 끌었다.

“려비우, 려비우, 려비우…….”

이름을 말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그땐 운이 좋았던 거다. 다시는 못 이긴다.”

“죽어라, 비열한 인족! 산악원에게 온몸이 터져 죽어버려!”

그러나 더 많은 이들이 악담과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한립은 무표정한 얼굴로 통로 안에 서 있었다.

“려비우와 통산원의 시합이 곧 시작됩니다. 흥미가 있으신 분들은 서둘러 돈을 걸어주세요! 시합이 시작되면 기회는 사라집니다. 배당률 5대 1로 시작합니다!”

외뿔 거한의 충동질에 관중석의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높은 배당률 때문인지 적잖은 이들이 한립에게도 돈을 걸기 시작했다.

오늘도 귀빈석에는 갑옷을 입은 신양이 검은 의자에 기대 있었으나 함께 구경하던 호분이나 끼고 다니던 여인은 보이지 않았다.

“려비우, 지난번에는 운이 좋아 이겼나 본데 목숨 아까운 줄을 모르는구나. 현급 인수에 도전하다니 그것도 잔혹하기 유명한 통산원에게! 이번에는 미안하지만 통산원에게 걸어야겠다.”

눈을 가늘게 뜬 신양이 중얼거렸다.

한립은 관중석에서 들려오는 소리에는 신경 쓰지 않고 현투장 반대편의 석문을 바라보았다.

크하하항!

육중한 석문이 천천히 올라가고 무언가가 보이기 전에 광분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지난번 호린수보다 두 배는 크고, 털 대신 푸른 비늘 갑옷을 두른 거대 원숭이가 주먹을 쥐고 나타났다.

그 팔뚝이 한립의 몸통보다 굵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선명한 흉터 자국이 가득한 통산원은 수많은 현투사와 다른 짐승들을 상대해 본 게 분명했다.

예상보다 강해 보이는 통산원을 보고 한립은 미간을 좁혔다.

통산원은 호린수처럼 다짜고짜 달려들지 않고 천천히 현투장 가장자리를 따라 이동하며 그를 관찰했다.

사람과 짐승이 그리 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시간만 보내자 관중들은 욕을 내뱉었다.

그때 통산원이 몸을 일으켜 굵직한 두 팔로 바닥을 내리쳤다.

쿠쿠쿵!

현투장이 진동을 하고 무형의 힘이 돌바닥을 밀어내 석판들이 파도처럼 일어나 한립을 향해 날아들었다.

한립은 균형을 잃지 않았지만 지면 자체가 흔들리는데 가만히 서 있을 도리가 없었다.

훅!

바람 소리가 일고 먼지 속에서 통산원의 거구가 사라졌다.

급히 고개를 들자 한립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공기가 묵직해져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위기의 순간 한립은 <우화비승공>으로 뚫은 현규 두 개를 밝히고 흐릿하게 사라져서 십여 장 밖에서 나타났다.

콰콰쾅!

그가 있던 자리에 통산원이 떨어져 현투장 중앙에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다.

먼지가 가라앉기도 전에 검은 그림자가 질주해 주먹으로 한립의 머리를 내려쳤다.

한립은 뒤로 물러나며 전신의 현규를 밝히고 주먹을 내질렀다.

펑!

크고 작은 주먹이 충돌해 폭음을 냈다. 한립의 뼈가 강력한 충격에 으드득거렸다.

크하항!

통산원도 조그만 인족이 이렇게 힘이 셀 줄은 몰랐는지 노호성을 터트리고 주먹에 더욱 힘을 실었다.

간신히 버티고 있던 한립이 튕겨 나가 공중에서 회전하다 현투장 벽에 부딪혔다.

‘으윽…….’

온몸이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상대의 힘을 파악하려 내지른 주먹이 약간 후회가 되는 순간이었다.

통산원은 쉴 틈을 주지 않고 뛰어와 주먹을 떨구었다.

흠칫 놀란 한립이 아래로 몸을 숙여 주먹을 피한 뒤 두 다리를 굽혔다 피면서 하얀빛이 어린 주먹으로 통산원의 왼쪽 무릎을 가격했다.

퍽!

무릎이 바깥으로 비틀린 통산원이 흔들거렸다.

한립은 멈추지 않고 바닥을 박차고 통산원의 이마를 때렸다.

퍽!

균형이 흐트러진 통산원이 머리를 맞고 엎어졌을 때, 한립은 다시 바닥을 박차고 허공에 떠올랐다.

<우화비승공>과 <대주천성원공>을 운용해 높이 날아오른 그는 짐승의 머리 위에 올라타기 직전이었다.

키하학!

통산원이 그걸 알고 쳐낼 시간이 없자 날카롭게 울부짖었다. 날카로운 울음소리는 평소와 달리 한립을 긴장하게 했다.

시뻘건 짐승의 입에서 날카로운 이빨 하나가 하얀빛을 휘감고 그의 가슴을 향해 파고들고 있었다.

한립은 맹렬히 다리의 현규에서 빛을 뿜고 허공을 박차 놀랍게도 허공에서 통산원의 이빨을 피해냈다.

파아앗!

그런데 분명 이빨과 닿지 않았는데 하얀빛이 스친 그의 진극막이 파열되면서 가슴에 기다란 상처가 남고 어깨까지 뼈가 드러났다.

신음을 삼킨 한립은 밀려드는 고통을 생생하게 느끼면서 주먹으로 아래를 내리쳤다.

쾅!

이마를 맞은 통산원의 고개가 뒤로 확 꺾이며 바닥에 처박혔다.

지난번에 얻은 교훈으로 한립도 방심하지 않고 뒤로 쓰러진 통산원의 가슴에 서서 주먹으로 짐승의 머리를 연타했다.

관중석에서는 ‘려비우’를 외치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귀빈석의 신양은 팔짱을 끼고 그를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도대체 몇 대를 갈긴 것인지 통산원의 머리는 바닥에 깊이 박혔고, 한립의 주먹은 피부와 살이 벗겨져 뼈가 드러나 있었다.

주먹질을 멈춘 그가 움직임이 없는 통산원을 보고 화지동천으로 제련한 두 손가락을 세워 짐승의 태양혈을 뚫으려 했다.

펑!

그런데 두 손가락 끝이 딱 막히면서 머리뼈가 뚫리지 않았다.

그 순간 표정이 확 달라진 한립은 미련 없이 짐승의 몸에서 뛰어내려 바닥에 착지했다.

동시에 통산원이 두 팔로 그가 서 있던 자리를 감싸 안았다. 눈치채고 피하지 못했으면 꼼짝없이 잡힐 뻔했다.

크항!

팔꿈치로 쿵! 하고 바닥을 민 통산원이 박힌 머리를 뽑아내고 있었다.

아직 기운이 남아 있는 통산원을 본 관중들은 미친 듯이 응원을 시작했다.

흠씬 두들겨 맞아 코가 내려앉고, 한쪽 눈이 터져 핏물을 줄줄 흘리는 처참한 몰골이었지만 한립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보다는 예전 부상들이 터져 몸을 가누지 못하는 통산원을 보고 동정심을 느끼고 있었다.

‘이곳에서 통산원과 내가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인가?’

크하하항!

그때 현투장이 쩌렁쩌렁 울리게 괴성을 지른 통산원은 그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며 뛰어올라 두 주먹을 내질렀다.

두 팔의 비늘들 사이로 하얀 보광이 흘러나와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립도 우화비승공을 전력으로 운용해서 다리의 모든 현규들을 밝히고 수십 장을 물러났다.

쿠콰콰쾅!

현투장이 부들부들 덜리고 무수히 많은 권풍들이 뻗어 나갔다.

엉망이 된 현투장에 한립이 멀쩡하게 서 있는 것을 발견한 통산원은 괴성을 지르며 자신이 부숴놓은 바닥 돌들은 미친 듯이 집어 들어 던지기 시작했다.

퍽!

한립은 수많은 돌을 다 피하지 못하고 양손을 가슴 앞으로 교차해 부상을 최소화했다.

어느 순간 끈 떨어진 연처럼 날아간 그는 현투장 벽에 부딪혀 오장육부가 뒤틀렸다. 목구멍으로 피가 넘어오는 것을 느낀 한립이 핏물을 뱉기 전에 검은 그림자가 달려들었다.

밀려오는 고통에도 그는 두 발로 땅을 쿵! 찍고 솟아올라 위험을 피하려 했다. 그의 의지와 달리 통산원의 주먹이 바람을 날리며 머리 위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한립은 성신지력을 최대한 끌어올려 두 팔로 머리 위를 막는 수밖에 없었다.

퍽!

이번에는 한립의 몸이 비석처럼 꼿꼿하게 지면에 박혔다.

통산원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연달아 주먹을 날렸다.

쿵! 쿵! 쿵……!

현투장에 먼지가 자욱해지고 관중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쯧쯧, 이렇게 죽는구나. 성주께서는 대체 무슨 생각이신…….”

신양이 혀를 차고 일어나려다 인상을 찡그리고 무언가를 발견했다.

뿌연 먼지 속에 모호하지만 피범벅이 된 한립이 양손을 가슴 앞에서 교차해 심장과 주요 장기들을 보호하고 서 있는 게 보였다.

눈을 번쩍 뜬 한립은 이마에서 수정빛을 번득였다.

핑!

수정 소검이 허공을 가르고 통산원의 주먹을 타고 들어가 하나 남은 눈알을 뚫고 나왔다.

푹.

통산원은 마지막 주먹질을 하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먼지가 가라앉고 고요해진 경기장에 거대한 짐승이 쓰러져 마지막 굉음을 냈다.

‘허약한’ 인족 려비우는 피범벅이 된 몸으로 열심히 통산원의 머리로 기어 올라가 뚫린 눈알로 팔을 쑥 집어넣어 주먹만 한 요핵을 꺼냈다.

관중들은 얼이 빠져 있었다.

어떻게 그가 이겼는지 정확히 본 사람이 없었다.

“이겼다고?”

신양도 눈을 부릅뜨고 생각에 잠겼다.

한립에게 돈을 건 이들은 기뻐하며 소리를 지르고 난리가 났다.

그 와중에도 한립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피 묻은 요핵을 입속에 집어넣었다.

‘아…….’

눈, 코, 입, 귀에서 피를 줄줄 흘리던 그는 눈앞이 깜깜해져 의식을 잃고 말았다.

* * *

정신을 차린 한립은 보글거리는 혈지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팔이 잘린 것처럼 아픈 것은 당연했고, 가슴도 답답해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다. 손을 들어 얼굴을 만지자 얼굴은 벌써 다 나아 있었다.

“특별히 원래 시간보다 일각 더 머물 수 있게 조치를 해두었습니다. 더 몸을 지지고 싶으면 점수를 써야 할 거예요.”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외뿔 거한이 서 있었다.

“수사의 ‘조언’으로 제가 여기 들어와 있는 겁니다.”

한립은 담담히 답했다.

“하하, 이거 사람 마음도 몰라주고. 저쪽에 있는 사람이나 보고 그렇게 말하세요.”

외뿔 거한은 냉소를 흘리며 눈짓을 했다.

한립이 힘겹게 혈지 가장자리를 짚고 일어나 보니 누군가의 잔해로 보이는 살점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운이 나빠 통산원을 수사가 먼저 선택해 버리는 바람에 대형 오린상과 싸우다 그 꼴이 난 겁니다.”

“……저 사람이 있는데 왜 나와 시합을 붙이지 않은 겁니까?”

“저 사람은 성주부 현투사가 아니라 자유롭게 활동하는 현투사입니다. 수련을 위해 강력한 인수와 싸우겠다고 선택한 것을 존중해 준 거예요. 원래 현투장에 들어간다는 게 목숨을 건다는 뜻이니까요.”

외뿔 거한은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한립은 조용히 혈지를 빠져나와 교환 대청으로 향했다.

제대로 된 현급 인수와 싸워서인지 현점을 10점이나 더 받을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다 써버리지 않고 탑라수 요핵 7개만 교환해서 석실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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