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화. 함정
*
“시간이 끝났다.”
반 시진 후, 한립을 데려온 두 병사가 걸어왔다.
한립은 혈지에서 일어나 나오며 진림을 향해 공수를 해보였다.
“진 수사, 오늘 감사했습니다.”
“뭐 시간이 지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들인데요.”
진림도 그를 향해 포권을 했다.
한립은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치료에 소홀히 하지 않아 완전히 몸을 회복하고 교환 대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한립은 호패를 꺼내 21점의 현점을 탑라수 요핵 7개로 바꾼 다음 9구역으로 향했다.
독룡의 실력을 알았으니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려 수사, 현급 호린수를 죽였다는 이야기 들었습니다. 대단하십니다!”
“어려 보이는데 그만한 실력을 지니다니 이거 부럽습니다!”
처음과 달리 몇몇이 환영을 해주었고 말이 없는 이들도 미소를 띠었다.
“별말씀을요.”
한립은 바람에 날리는 갈대처럼 달라지는 그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괜히 적을 만들 필요 없어 몇 마디 대꾸를 해주었다.
그 와중에 독사 같은 시선을 보내는 자가 있어 보니 역시나 도파였다.
그가 마주 보자 도파의 눈에도 얼핏 두려움이 어렸다.
다른 이들은 싸움이 날까 봐 슬쩍 거처로 돌아갔지만 한립은 진림의 말을 떠올리고 말없이 석실로 들어가 버렸다.
332호에 앉은 한립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쓸데없는 고민을 하기보다는 <우화비승공>을 운용해 체내의 호린수 요핵을 연화시키는 것이 우선이었다.
요핵의 성신지력을 오래 보존하는 여러 가지 비법이 있었지만 그래도 신선할 때 기운을 취하는 것이 최고였다.
오늘 시합에 나가보니 생각보다 고되진 않았지만 살아남으려면 어서 육신의 힘을 길러야만 했다.
현급 인수의 요핵답게 호린수 요핵은 상당한 성신의 힘을 지니고 있었는데 탑라수 요핵과 마찬가지로 기운이 난동을 부려 온전히 흡수하기 어려웠다.
‘호린수 요핵이 지닌 성신지력도 이렇다니, 일정 연령이 된 인수의 요핵은 다 이렇단 말인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장천병의 흡입력이 도처로 흩어진 성신지력을 모아 주었다.
이미 규칙을 간파한 한립은 장천병이 분산된 별빛을 하나로 모으는 것처럼 요핵의 성신지력도 정제를 한다는 것을 알고 흡족해했다.
장천병이 없었으면 탑라수 요핵은 천분의 일, 그리고 호린수 요핵은 기껏해야 백분의 일정도 밖에는 흡수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인수 요핵을 삼켰을 때도 석천공보다 효과가 더 좋았던 것이다.
한립은 <우화비승공>을 운용해 성신지력으로 세 번째 현규를 뚫기 시작했다.
며칠 뒤, 그의 종아리에 밝은 빛이 감돌고 세 번째 현규가 뚫리려는 현상이 나타났다.
눈을 꼭 감은 한립의 머리 위에서 나무뿌리가 하얀빛을 뿜어 별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하얀 빛 속에 기척 없이 같은 색깔의 작은 벌레 세 마리가 섞여 나왔다. 머리카락처럼 얇고 투명한 몸을 지닌 벌레는 하얀 별빛과 거의 구분되지 않았다.
한립은 수련에 집중하느라 의식으로 주변을 경계하고 있지 않았다.
스슷.
세 마리 곤충은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에 떨어져 가뭄이 든 논에 단비가 내린 듯 스며들었다.
하얀 곤충들은 그의 몸속에서 꿈틀거리며 살을 뚫고 심장 쪽으로 다가갔다.
“이런!”
하얀 곤충이 몸에 닿는 순간 눈을 번쩍 뜬 한립은 심장 주변의 흑겁충이 빼곡하게 난 다리를 부르르 떨면서 깨어나려는 조짐을 보이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의 생명과 연관된 흑겁충에게 무슨 일이 생기게 놔둘 수는 없었다.
그는 재빨리 머리를 굴리며 두 팔을 부르르 떨면서 전신의 근육에 힘을 주었다.
살을 뚫고 나아가던 곤충들의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지만, 여전히 심장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퍽! 퍽! 퍽!
한립은 오른손 손가락 두 개를 펴서 번개처럼 가슴 위쪽 세 곳을 짚었다. 정확히 하얀 곤충들이 있는 자리였다.
움푹 들어간 살 아래에서 곤충들은 짓눌렸지만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흑겁충은 하얀 곤충들이 다가올수록 격렬하게 몸을 떨며 끽끽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마음이 급해진 한립은 단호한 눈빛으로 미간에서 수정 빛을 뿜었다.
세 개의 수정 소검이 튀어나와 그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수정소검들은 그의 살을 가르고 하얀 곤충들을 베었다.
서걱서걱.
하얀 곤충들은 몸이 둘로 잘려 꿈틀거리다 곧 멈추었다. 자연히 흑겁충도 더는 움직이지 않고 안정을 되찾았다.
한시름을 놓은 한립은 기침을 하며 피를 토해냈다. 하얀 곤충을 죽이느라 수정 소검으로 자신을 상처 입힌 결과였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양손으로 수결을 맺어 여섯 조각난 곤충들의 사체를 상처 바깥으로 끄집어냈다.
가슴의 상처가 벌어져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대주천성원공>을 운용해 상처를 봉합한 그는 여섯 조각 난 하얀 곤충 사체를 보고 차갑게 눈을 빛냈다.
염검결로 죽이지 않았으면 그의 심장으로 파고 들어갔을 벌레들이었다. 흑겁충이 하얀 곤충에게 보인 반응도 어떤 결말로 이어졌을지 알 수 없다.
이것들이 현투장에서 자생하는 생물일 리는 없고, 누군가 자신을 해하려고 수를 쓴 것 같았다.
가장 먼저 도파를 떠올린 한립은 고개를 저었다.
심호흡을 해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간 그는 핏자국을 지우고 방에서 나갔다.
밖에는 현투사들이 모여 웃고 떠들고 있었다.
대부분은 한립을 향해 웃으며 인사를 했고, 도파만이 부자연스러운 얼굴로 그를 쳐다보지 않고 있었다.
한립은 그들에게 눈으로 인사를 하고는 도파의 안색을 살피다 진림의 방으로 걸어갔다.
똑똑.
진림의 문을 두드리자 석간 틈에서 하얀빛이 반짝이다가 사라졌다.
끼익.
곧 문이 열리고 진림이 얼굴을 내보였다.
“려 수사셨군요. 허허, 잘 지내셨지요?”
그는 한립이 온 것을 보고 의아한 얼굴을 하다가 바로 웃는 얼굴로 인사를 했다.
“진 수사, 잠시 안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들어오세요.”
한립이 안으로 들어가고 석문이 닫혔다.
“표정이, 무슨 일 있으십니까?”
돌 탁자 옆에 자리를 권한 진림이 눈썹을 끌어올렸다.
“예, 가르침을 구할 일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한립은 방금 수련 중에 당한 벌레의 습격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런 일이 있었단 말입니까? 살아남으신 게 기적입니다!”
깜짝 놀란 진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게 뭔지도 모르고 계시겠지요? 하얀 벌레는 식심충(蝕心蟲)이라고 흉명(凶名)이 자자한 곤충입니다. 식심곡(蝕心谷)의 이상한 골짜기에서 자라는 곤충인데 흑겁충의 천적으로 둘이 만나면 죽음을 불사하고 싸우지요. 수사의 체내에서 두 곤충이 맞붙었으면 아무리 건강하고 튼튼한 몸을 지녔다고 해도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겁니다.”
“제가 명줄이 긴 가 봅니다.”
한립은 코끝을 긁적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도파의 짓일까요?”
진림이 슬쩍 그를 떠보았다.
“그가 아니면 누구겠습니까.”
“보통 현투사들은 허락 없이는 이곳을 떠나지 못합니다. 9구역에서 식심충을 구할 수 있는 자는 도파 밖에 없기는 하지요.”
“특별한 배경이라도 지닌 겁니까?”
“특별하달 것은 없고, 이곳에서 일하는 관사와 친합니다. 그 보잘것없은 연줄을 이용해 바깥에서 현투장에는 없는 물건을 들여와 다른 현투사들과 거래를 하기도 하고요. 거기다 독룡 형님과도 사이가 가까워서 대부분 그는 건드리지 않습니다.”
진림의 설명에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별 것 아닌 자라고 생각해 크게 마음 두지 않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유용한 정보를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진 수사.”
한립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려 수사, 어쨌든 충동적으로 굴지 마세요. 도파는 몰라도 그 뒤에 독룡이 있습니다. 독룡 입장에서 도파는 말 잘 듣고 쓸데가 많은 개나 마찬가지거든요.”
“독룡이 어차피 가만있지 않을 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참는다고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른 건 몰라도 현투장의 규정은 지켜야 합니다. 현투사들까지 싸우고 원수 관계로 지내든 말든 아무도 상관하지 않지만, 누군가 목숨을 잃으면 큰일이 납니다. 현투사들은 시합에서만 서로를 죽일 수 있어요.”
그 말을 들은 한립이 천천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하, 그대로 뛰쳐나가서 무슨 일을 벌이시려는 줄 알고 놀랐잖습니까.”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에이, 좋습니다. 좋은 사람 노릇 한번 끝까지 해보지요.”
진림은 망설이다 방 안쪽으로 걸어가 검은 돌 상자를 들고나왔다.
“도파가 또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니까, 이걸 갖고 계세요.”
“이건…….”
한립은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를 검은 상자를 받지 않고 말끝을 흐렸다.
“천성패(天星貝)입니다. 교환 대청에서 보셨지요? 이 이상한 곳에서 마기를 사용하거나 금제를 펼칠 수는 없어도 간단한 기관은 설치할 수 있습니다. 나름 귀한 물건이에요.”
진림은 씩 웃음 지었다.
천성패라는 이름은 들으니 한립도 교환 대청에서 교환에 필요한 현점이 높아 눈여겨보았던 것이 기억이 났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제게 여러 정보를 알려주신 것만 해도 분에 넘칩니다. 그런데 이런 귀한 물건을 그냥 받을 수는 없습니다.”
“하하, 오해십니다. 저도 그냥 드리고 싶은데 그건 어렵고요…….”
“말씀하시지요.”
“툭 까놓고 말해서 천성패를 오래전에 사서 안에 함유된 성신지력을 거의 다 사용했습니다. 나중에는 원한을 맺은 사람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더 좋은 물건을 구해 두었고요. 그래서 천성패는 아예 쓸 일이 없어졌죠. 려 수사가 현투장에는 처음이라 현점이 많지 않을 테니 딱 반값에 팔겠습니다.”
“진 수사, 이번에 승리해 얻은 점수는 전부 요핵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탑라수 요핵으로 교환을 원치 않으시면 다른 물건은 없습니다.”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흠, 여기서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어려운데 일단 가져다 쓰세요. 나중에 두 시합 정도 더 나가신 다음 값을 치르셔도 됩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진 수사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고민 끝에 이를 수락한 한립은 검은 상자를 받아 열어보았다.
하얀 조개에 복잡한 문양이 들어가 있었다.
“제가 사용하던 거라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쓰시기 전에 피를 한 방울 떨어트려 주면 려 수사를 주인으로 인식할 겁니다. 석문 안에 두면 알아서 성신지력을 발산해 보호막을 펼치고 누군가 강제로 때려 부수지 않는 한 수사만 드나들 수 있게 막아줄 겁니다. 당연히 식심충 같은 것들도 못 들어올 테고요.”
“이 은혜는 제가 기억해 두겠습니다.”
한립은 포권을 하고 진림의 거처를 떠나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피를 떨구자 조개에서 퍼져나간 하얀빛이 별빛 보호막을 이루었다. 이를 확인한 한립은 빈틈없는 보호막에 무척 만족했다.
진림의 말과는 다르게 천성패에 성신지력이 꽤 많이 남아 있었는데, 그와 돈독한 사이를 유지하려 일부러 그렇게 말하고 준 것 같았다.
* * *
한 달은 금방 지나가 나무뿌리에서 흘러나오는 하얀빛을 맞으며 돌침대에 앉은 한립은 몸에 현규의 수가 41개로 늘어나 있었다.
호린수 요핵에 현점으로 바꿔온 탑라수 요핵 7개까지 복용한 그는 장천병의 보조로 순조롭게 두 개의 현규를 더 뚫었다.
전부 두 다리에 분포해 있었다.
웅웅.
옆에서 들려온 진동 소리에 그는 천천히 눈을 뜨고 검은빛을 반짝이는 호패를 들어 올렸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나 석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9구역 내에서 다른 시합이 진행 중인지 평소보다 더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한립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교환 대청으로 나와 대기실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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