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화. 혈지(血池)
*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군요. 늦기 전에 막아야 해요.”
신양은 상대의 팔을 붙들고 억지로 밀어내려 했다.
“규칙을 잊은 겁니까? 시합이 한 번 시작되면 도중에 결코 중단할 수 없습니다. 내게 여인을 빼앗기지 않으려 성주의 뜻을 거스르기라도 하겠단 겁니까!”
호분이 버럭 화를 냈다. 그제야 냉정을 되찾은 신양이 호분의 팔을 놓았다.
“바로 성주 대인을 뵈러 가겠습니다.”
“성주께서 자신이 정한 규칙을 깨려는 자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기억하기 바랍니다.”
호분의 경고에도 신양은 서둘러 귀빈석을 떠났다.
그리고 현투장의 관중 중에서도 쌍동 호린수를 알아보는 이들이 생겨났다.
관중들은 계속해서 인족을 향해 환호해야 할지, 아니면 다시 호린수를 응원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해졌다.
한립에게 걸었던 외뿔 사내는 털썩 자리에 주어 앉았고, 그 옆에서 검푸른 피부 사내는 낄낄거렸다.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지 현투장 중앙의 한립은 팽팽하게 당겨진 실처럼 긴장한 상태였다.
눈동자가 4개로 늘어나고 호린수의 기운이 급격히 달라진 탓이었다.
한립은 반보 뒤로 물러나 양 주먹을 쥐고 짐승을 주시했다.
호린수도 한 번 크게 당해서인지 무턱대고 달려들지 않고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어깨를 들썩인 호린수의 몸에서 수백 개의 흑백 비늘들이 쏘아져 나와 화살처럼 쏟아졌다.
그걸 본 한립은 바닥을 박차고 흐릿하게 사라져 떨어지는 비늘들 왼쪽으로 피했다.
그가 막 착지를 하자마자 호린수가 예상했다는 듯 달려들어 입을 쩍 벌렸다.
급박한 순간 임기응변으로 허리를 비튼 한립은 짐승의 이빨을 피하고 펄쩍 뛰어올라 공중에서 주먹을 날렸다.
퍽!
주먹에서 전해진 괴력에 호린수는 바닥을 나뒹굴었다. 모습을 드러낸 한립의 주먹도 바르르 떨리며 중지와 식지에 상처가 나 피가 새어 나왔다.
그러나 그는 신경 쓰지 않고 짐승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일격에 급소를 쳐서 죽이려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러나 그가 다가갔을 때 호린수는 이미 몸을 뒤집고, 어깨를 털어 대량의 비늘들을 또 쏘아 올리고 있었다.
우뚝 멈춰선 한립이 우측으로 비늘들을 피하고, 두 다리의 현규에서 빛을 발하며 표범처럼 호린수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크헝!
그걸 본 호린수는 입을 쩍 벌려 그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립은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쳐 그 반탄력으로 호린수의 입을 피한 다음, 발끝으로 짐승의 코를 박차고 이마를 향해 뛰어갔다.
그러나 호린수도 고개를 비틀어 그가 뺨 쪽으로 미끌어지게 만들었다.
쉬쉬쉭!
호린수의 뺨에 난 기다란 수염이 날카로운 장검처럼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매끈하게 빛나는 수염에 닿으면 그가 네 등분이 될 것 같았다.
슁.
일촉즉발의 순간, 한립이 오른손 중지와 검지를 세워 하얀 광택이 나는 손가락들을 수염에 대고 밀어냈다.
나머지 두 수염은 한 수염을 밀어낸 반동으로 피할 수 있었다.
“잘한다!”
“그렇지, 그거지!”
긴박감 넘치는 광경에 현투장 관중들도 흥분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신중한 얼굴의 한립은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호린수의 이마에 오르기를 포기하고 왼쪽 귀로 방향을 틀었다.
왼쪽 귀에 이른 그는 귓바퀴를 잡고 그네를 타듯 귀 안쪽으로 휙 들어가 두 발로 힘차게 내리찍었다.
쿵!
대주천성원공과 우화비승공을 아울러 발동해 전력을 다한 일격이었다.
호린수의 몸이 한쪽으로 기울었고, 귓속에서 빠져나온 한립은 하반신이 피에 젖어 비틀거리다 뒤로 넘어갔다.
쌍동 호린수가 휘청거리다가 결국에는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낑낑거리는 짐승의 왼쪽 귀에서 피가 샘물처럼 흘러나오고, 두 눈에서도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니, 둘 다 쓰러지면 누가 이겼다는 거야?”
호분이 그 광경을 보고 씩씩거렸다.
현투장 관객 중 극소수의 사람들이 려비우에게 일어나라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고함소리 때문인지 쌍동 호린수가 먼저 일어나 피로 얼룩진 눈을 뜨고 한립에게 다가갔다.
쿵!
안타깝게도 호린수는 세 걸음을 걷다가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두 다리에서 전해지는 엄청난 고통을 참으며 간신히 일어난 한립이 반대로 호린수에게 다가가 머리 위로 올라갔다.
그는 호린수의 이마 위에 서서 화지동천을 연화한 두 손가락을 세워 남은 힘을 짜내 호린수의 머리 속으로 찔러 넣었다.
푹! 푹! 푹…….
처음에는 작았던 상처가 나중에는 주먹만 한 구멍으로 변했다.
그는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미소를 지으며 주먹 크기의 보라색 요핵을 꺼냈다. 요핵 내의 정순한 성신의 힘을 감지한 그는 거리낌 없이 피 묻은 요핵을 꿀꺽! 삼켜버렸다.
정적이 흐르던 현투장에 열렬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외뿔 사내도 후련하게 웃으며 옆의 검푸른 사내의 귀를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어디 어르신하고 불러봐라, 요놈!”
* * *
청양성 성주부.
두청양이 한 손은 뒷짐을 지고, 한 손으로 정체 모를 짐승의 머리뼈 두 개를 굴리며 마찰음을 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양손을 모으고 서 있는 신양을 향해 말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안이다. 그 호린수는 내가 명을 내려 시합에 내보낸 것이고.”
“쌍동 호린수는 현급 인수라 려비우는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호린수에게 잡아 먹히면 그의 진령혈맥은…….”
“살아 있으면 살아 있는 대로 쓸모가 있고, 죽으면 죽는 대로 쓸모가 있는 법이다.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 네 일이나 신경을 쓰거라.”
“예, 물러나 보겠습니다!”
두청양의 느릿한 명령에 식은땀을 흘린 신양이 다급히 인사를 올리고 나갔다.
그가 돌아왔을 때는 벌써 관중들이 속속들이 자리를 떠나면서 격앙된 목소리로 무어라 떠들고 있었다.
반신반의하며 자리로 들어간 그는 호분이 자신의 여인을 옆에 끼고 가슴을 주무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눈썹을 꿈틀한 신양은 현투장 안 이곳저곳이 박살 나고 피로 얼룩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만 봐도 됩니다, 신 형이 이겼어요. 그 녀석이 억수로 운이 좋은지 현급 인수를 죽였습니다.”
호분은 대수롭지 않게 일어나 여인을 풀어 주었다. 신양은 여인을 대충 자신의 의자로 밀어놓고 눈살을 찌푸렸다.
“어떻게 된 겁니까?”
“제길, 나라고 알겠습니까? 내일 사람을 시켜 요핵은 보내드리지요.”
호분이 짜증을 부리고 떠난 뒤에도 신양은 한참을 그 자리에 있었다.
* * *
한립은 상처가 가득한 몸을 이끌고 두 다리의 극통을 참아가며 어두운 대청으로 돌아왔다.
“첫 시합에 성과가 좋습니다. 다시 못 볼 줄 알았는데요. 호패 주시죠.”
외뿔 거한이 기다리고 있다가 그의 호패를 받아갔다. 금색 짧은 몽둥이로 호패를 가리키니 현점이 20점 늘어났다.
‘20점!’
그걸 본 한립은 고생이 아깝지 않을 만큼 기분이 좋아졌다.
호패를 돌려준 외뿔 거한이 손뼉을 짝짝! 두 번 치자 갑옷을 입은 거구의 병사들이 쪽문에서 걸어 나와 한마디 말도 없이 한립을 부축해 어딘가로 데려가려 했다.
“이게 뭐 하는…….”
한립은 팔에 힘을 주었으나 두 병사의 힘도 그에 못지않았고, 그들의 몸은 사람 같지 않게 무척 차가웠다.
의아해진 한립은 그들의 피부가 검푸른색에 들숨과 날숨조차 서늘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괜한 걱정하지 마세요. 부상이 심해 치료를 하러 데려가는 겁니다. 몸이 나아야 계속 싸울 것 아닙니까?”
외뿔 거한이 웃음을 흘렸다.
“치료…….”
한립은 더는 반항하지 않았다.
병사들은 양쪽에서 그의 팔짱을 낀 채 나타났던 쪽문으로 들어가 기다란 통로를 지나 갈림길에서 이리저리 방향을 틀었다.
병사들은 시체를 제련해 만들어낸 존재 같았는데 어떤 식으로 제련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한립을 거의 들다시피 하고도 병사들은 빠르게 이동해 중앙에 핏빛 연못이 있는 석실에 도착했다.
마치 온천이 솟는 것처럼 안쪽에서 부글부글 핏물 거품이 올라왔다.
피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 전혀 역하지가 않고 오히려 정신을 일깨우는 듯했다. 이에 한립이 주위를 살피는데 병사들은 대뜸 혈지(血池) 안에 그를 던져 넣었다.
풍덩!
혈지에 들어간 한립은 피부가 새빨갛게 변하고 얼굴이 일그러졌다. 온도가 엄청나게 뜨거워서 피부를 불로 지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뜨거운 기운이 그의 체내로 흘러들어 상처 입은 부위를 치유했다.
“반 시진 후면 나와야 한다.”
병사 중 한 명이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소리에 한립은 급히 체내의 기혈을 움직여 연못의 뜨거운 기운이 빠르게 흐를 수 있도록 유도했다.
일각 후, 혈지의 효과가 탁월해서 벌써 상처가 절반이나 나아 있었다.
한립이 기뻐하고 있을 때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온천을 하듯 눈을 감고 있던 한립은 눈꺼풀을 들어 올려 병사들이 다른 현투사를 데려오는 것을 보았다.
중상을 입어 얼굴빛이 창백한 청년은 왼쪽 이마를 시작으로 뺨을 지나 턱까지 나선형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온몸에 부상이 가득했는데 특히 배에 두 개의 커다란 구멍이 뚫려 몸에 세 등분이 되기 직전으로 내장이 다 보일 정도였다.
병사들은 역시나 일언반구도 없이 냅다 나선 문양 사내를 혈지에 던져 넣었다.
풍덩!
사내는 이곳에 와본 적이 있는지 당황하지 않고 바로 기혈을 순환해 혈지의 기운으로 부상을 회복했다.
배의 구멍들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벌써 살점과 피부가 연결되는 중이었다. 나선 문양 사내가 한립의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허허, 려비우라는 분 맞지요? 이렇게 만나 뵙습니다.”
“누구시죠?”
한립은 어디서 본 것 같은 청년의 얼굴에 기억을 더듬었다.
“진림이라 합니다. 저도 9구역 현투사예요. 도파와 다툴 때 저도 그 자리에 있었고요. 우연히 호린수랑 싸우는 걸 봤는데 현급 인수를 격살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9구역에 그럴 실력이 되는 사람은 몇 없거든요.”
진림은 진심으로 탄복했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운이 좋았습니다.”
한립은 습관적으로 겸손하게 답했다. 상대는 그와 친분을 쌓고 싶은 모양이었다.
현투장에 들어온 후에 수련하느라 바빴고, 9구역 현투사들은 시비를 걸거나 아니면 그를 피하기 바빠 이렇게 친근하게 다가온 사람은 처음이었다.
안 그래도 정보를 얻고 싶었던 한립은 진림과 이야기를 나누며 도파와 있었던 일을 언급했다.
진림은 도파가 독룡을 찾아가 읍소한 일에 대해 알려주었고, 한립은 그걸 듣고서야 9구역 현투사들의 태도를 이해했다.
“려 수사가 실력이 있다는 것은 알겠지만 도파는 조심해야 할 겁니다. 워낙 속이 좁고 복수에 눈이 먼 자라서요. 그와 독룡의 관계가 돈독하고 독룡도 9구역에서 자신의 위엄을 지키느라 가만있지는 않을 거예요.”
진림은 소곤소곤 당부했다.
“조언 감사합니다. 독룡의 실력은 어떠합니까?”
“제가 알기로 현규를 70개나 뚫어서 10개 구역의 우두머리 중에서 중상위에 속합니다.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아직 수사는 독룡의 적수가 못되니까 그냥 좋게좋게 넘어가세요. 처음 현투장에 와서 다른 이들의 눈치를 좀 살핀다고 해도 그리 체면을 상하는 일은 아닙니다.”
진림이 머뭇거리다 해주는 말에 한립이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크게 걱정할 건 없는 게, 독룡 형님도 얼마 전 시합에서 최상급 현급 인수에 패해서 두세 달은 몸을 사릴 거예요.”
“제가 운이 좋았군요.”
“규정상 현투사들은 매달 적어도 한 번 이상 시합에 나가야 합니다. 려 수사는 방금 한 시합을 마쳤으니 한 달은 쉴 수 있을 거예요. 그동안 실력이 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요.”
“그런 규정이 있습니까?”
“진짜 크게 다쳐서 현투장에서 시합에 부적합하다는 평가를 받아야 그 이상 시합을 미룰 수 있습니다. 이번에 독룡 형님이 폐관 수련에 들어갔던 것도 그 덕이고요.”
한립이 현투장에 관한 이런저런 질문을 할 때마다 진림은 얼버무리지 않고 잘 설명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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