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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938화 (1,695/2,000)
  • 1938화. 포기

    *

    거처에 들어박혀 있던 한립은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때 그는 332호 석실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마지막 탑라수 요핵을 삼키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우화비승공을> 발동했다. 그의 다리에 두 번째 현규가 점점 더 밝게 빛나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푹! 하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현규가 맹렬하게 빛나더니 어둑해졌다.

    탑라수 요핵 세 개로 드디어 두 번째 현규를 뚫은 것이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바닥을 탁! 치고 일어나 재빨리 석실 사방으로 이동해보았다.

    속도가 이전보다 빨라지고 무거워 보이던 움직임도 가벼워져 있었다.

    익히면 익힐수록 <우화비승공>의 중요성이 뼈저리게 느껴졌으나 현점이 1점밖에 남지 않아 벌면서 수행을 겸해야 했다.

    마침 그가 침상에 두었던 호패가 검은빛을 반짝이고 웅웅 진동했다. 그 위에는 작은 문자들이 떠올라 있었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어.”

    한립은 피식 웃음 지으며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다른 현투사들이 모여 있다가 그를 쳐다봤지만, 눈길도 주지 않고 교환 대청으로 이동해 다른 통로로 들어갔다.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자 어두운 또 다른 대청이 나왔고, 외부와 연결된 석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머리에 외뿔이 자란 거한이 그가 나타난 것을 보고 다가왔다.

    “려비우 맞습니까?”

    비리비리해 보이는 한립의 모습을 보고 외뿔 거한이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맞습니다.”

    “알겠습니다. 시간을 잘 맞춰 오셨군요. 금방 시합이 시작될 테니 준비하세요.”

    외뿔 거한은 석문을 손바닥으로 밀어 한 사람이 지나다닐 만한 문틈으로 빠져나갔다.

    “여러분 다음 시합은 아주 보기 드문 선수가 출전할 예정입니다. 4천 5백 년 이상 된 호린수(虎鱗獸)는 오늘까지 네 번째 시합으로 앞서 세 명의 현투사를 이기고 그중 두 명을 갈기갈기 찢어 잡아먹은 식인 맹수이지요!”

    외뿔 거한은 목소리를 높여 관중들의 환호를 이끌어냈다.

    한립이 처음 나서는 경기라 나머지 두 경기장은 잠시 시합을 쉬고 그와 호린수 간의 시합만 진행되고 있었다.

    “그 상대인 선수도 만만치 않은데요. 희귀한 선역에서 온 인족 현투사, 려비우 입니다.”

    외뿔 거한의 소개에 환호성이 하늘을 찌를 듯 커졌다.

    “몇 년 만에 인족 현투사입니까!”

    “이야, 정말 보기 드문 경기가 되겠습니다.”

    “후후, 천년 전에 인족 현투사가 현성 현투장에서 물어 뜯겨 죽은 이후로 처음 보는 인족 현투사 같습니다. 인족이 몸이 좀 약해야 말이지요.”

    “비열한 인족이 잔인하게 찢겨 죽는 걸 구경해야겠습니다.”

    곳곳에서 환호성과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호린수와 려비우와의 시합이 바로 시작될 예정이니 흥미가 있으신 분은 돈을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시합이 시작되면 더는 걸 수 없다는 것을 아시겠지요?”

    외뿔 거한은 분위기를 살려 적절한 때에 관중들을 충동질했다. 내기판에 떠오른 한립과 현투수의 초기 배당률은 5대 1이었다.

    “호린수에 백 현폐 걸겠습니다.”

    “저도 호린수에 150현폐요!”

    “300현폐! 호린수!”

    “300이면 마지막 남은 종잣돈 아닙니까? 그걸 다 건 다고요?”

    “이곳에 오기 전에 친했던 벗이 선역에서 온 인족 수사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벗을 생각해서 저놈이 죽기를 바라는 마음에 몽땅 건 겁니다.”

    한립의 신분이 공개되자 관중들의 흥분이 더해졌다. 대부분은 그가 곧 죽을 거라 여기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립과 호린수의 배당률은 12대 1로 변해 있었고, 그 말은 한립이 이기기만 하면 그에게 100현폐를 건 이들은 1,200현폐를 받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

    “드디어 시간이 되었습니다. 시합을 시작합니다!”

    외뿔 거한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렸다.

    쿠릉.

    마찰음과 함께 현투장으로 연결된 석문이 천천히 올라갔다. 어둑한 안쪽으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보이고 환호성이 파도처럼 커졌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한립은 석문을 빠져나와 검은 돌을 깐 현투장으로 올라갔다.

    광장의 중앙으로 갈수록 오래된 돌바닥에는 핏자국이 스며들어 있었고 희미하게 피비린내가 풍겼다.

    “저 인족 너무 약해 보이는데…….”

    “아니, 호린수한테 한 방에 나가떨어지는 거 아니야?”

    “아니 갑옷도 안 주고, 저렇게 내보내면 시합이 재미가 있으려나.”

    “에이, 시합 구경은 물 건너갔고 그냥 뜯어 먹히는 거나 구경해야 할 판이구만! 어쩐지 배당률이 높더라니!”

    소음 속에서 푸른 피부의 건장한 사내가 옆에 앉은 외뿔 사내를 향해 턱으로 한립을 가리켰다.

    “네가 이길 거라고 건 인족이 저 녀석이지? 돈을 그냥 땅에 버렸다, 버렸어! 저 녀석이 이기면 내가 네 앞에 무릎 꿇고 어르신이라고 불러주마, 하하하!”

    “뭐, 뭐라는 거야! 승패는 끝까지 가봐야 아는 거라고! 기적이 일어날지 누가 알아!”

    외뿔 사내는 어색하게 이렇게 말했지만 그다지 힘이 없어 보였다. 솔직히 그도 배당률이 너무 높아서 걸어본 거였다.

    “하하, 기적이라고? 적린공경에서 그리 오래 살아놓고 아직도 그런 순진한 소리를 하기는!”

    푸른 피부 사내가 박장대소를 했다.

    현투장 곳곳에서는 다들 인족이 호린수에 당해 금방 죽고, 잔인한 피의 잔치가 벌어질 것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 * *

    현투장 관중석 중앙.

    독립적으로 마련된 귀빈석에는 요수 가죽이 깔린 돌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고, 그 앞 탁자에 정체 모를 요수의 신선한 피가 담긴 커다란 돌 잔이 보였다.

    한쪽 의자에는 거무스레한 얼굴의 금강 거한이 앉아 있었고, 그 곁에 가냘픈 몸매의 여인이 기대앉아 그의 팔을 주물렀고, 다른 의자에는 하얀 뼈 갑옷을 걸친 마른 사내가 앉아 있었다.

    검푸른 피부에 회백색 비늘이 돋은 마른 사내의 얼굴에는 짐승의 발톱에 당한 듯한 세 줄기의 상처가 길게 남아 있어 인상이 음침해 보였다.

    검푸른 피부의 마른 사내의 눈은 옆에 금강 거한과 앉은 여인의 몸에서 떠날 줄은 몰랐다.

    “호분, 우리끼리 내기를 하는 게 어떻습니까?”

    금강 거한은 웃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신양,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닙니까. 약해빠진 인족에게 돈을 걸더니 나와도 내기를 하자고요?”

    “하하, 원래 위험천만한 내기일수록 심장을 뛰게 하는 법입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내게 돈을 바치고 싶다는데 거절할 수 있나요. 그래서 내 무엇이 그리 탐나십니까?”

    호분이 씩 웃으며 물었다.

    “지난번에 성주께서 상으로 내리신 인극수(鱗棘獸) 요핵 어떠십니까?”

    신양의 웃음이 짙어졌다.

    호분은 그 말에 잠시 망설였지만 현투장에 선 인족의 체구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요! 대신 내가 이기면 여기 이 미인은 앞으로 나를 시중들어야 할 겁니다.”

    호분은 평소 눈 독 들이던 여인을 가리켰다.

    “하하, 그러세요.”

    신양이 여인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답했다.

    그러자 여인은 호분을 향해 고개를 돌려 두 눈을 곱게 접고 웃음 지었는데, 그리 출중한 미모가 아닌데도 매력이 있었다.

    후오오-!

    그때 현투장에서 포효소리가 들려왔다.

    거목 크기의 흉수가 거대 호랑이의 모습을 하고 검은색과 흰색 두 종류의 비늘로 몸을 가린 채 우리 속에서 튀어나오고 있었다.

    길게 뻗어 나온 창 같은 송곳니를 지닌 짐승은 노기가 가득해 보였다.

    “죽여라! 죽여!”

    “물어뜯어!”

    “달려들어, 죽여 버려!!”

    약간 잠잠해졌던 관중들이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

    현투장 중앙에 선 한립은 당사자였지만 전혀 흥분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차분히 짐승을 마주 보고 선 그는 어떤 기운이나 파동도 발산하지 않는데도 알 수 없는 위압감을 풍겼다.

    크헝!

    강철 바늘 같은 수염이 자라난 호린수는 입술을 달싹이다 두 앞발로 바닥을 박차고 신속하게 달려들었다.

    그 속도가 아주 빨라 눈 깜짝할 사이에 날카로운 발톱이 한립 앞에 도달해 있었다.

    한립은 한 발 뒤로 물러나며 전신의 38개 현규를 밝히고 호린수의 턱을 향해 돌려 차기를 했다.

    퍽!

    호린수의 거대한 몸이 놀랍게도 그의 발길질에 멈추었다.

    호린수의 일격에 무기도 갑옷도 없는 인족이 죽을 거라 생각한 관중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귀빈석의 호분이 입을 쩍 벌리고 그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바로 그때, 호린수의 머리가 쇠망치처럼 쿵! 바닥으로 떨어져 먼지가 일고 돌바닥이 부서져 파편이 튀었다.

    한립의 모습은 먼지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 박치기를 한 호린수가 먼지 속에서 튀어나와 거대한 송곳니로 한립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두 손으로 송곳니를 막은 한립은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지만, 짐승의 힘에 바닥에 기다란 고랑을 남기며 밀려나 등이 벽에 부딪쳤다.

    암벽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약간 시원하면서 더없이 단단했다.

    가슴을 크게 오르락내리락 하며 탁기를 뱉어낸 한립은 두 팔에 힘을 주어 호린수의 송곳니를 아래쪽으로 내리꽂았다.

    쩌억.

    호린수의 송곳니가 바닥에 깊이 박혀 잠시 동안 머리를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

    그 틈에 몸을 날린 한립은 호린수의 코를 밟고 짐승의 머리 위로 날아올라 재빨리 몸을 비틀었다.

    그의 주먹이 호린수의 머리를 강타하고 있었다.

    쿠쿵!

    무형의 파랑이 호린수의 머리에서 퍼지고, 두 송곳니가 동시에 깊숙하게 바닥에 박혀 들어갔다.

    쾅!

    그 다음 주먹이 이어졌다.

    쾅! 쾅! 쾅!

    한립이 가볍게 내려칠 때마다 호린수가 머리를 부르르 떨면서 바닥이 쪼개지고 피가 줄줄 흘러 개울을 이루었다.

    그러자 현투장 안은 고요해졌고 사람들은 눈을 부릅떴다. 겨우 일각 아니 반 각도 채 지나지 않아 승부가 났기 때문이었다.

    머리를 열댓 번 두드려 맞아 엎어져 버린 호린수는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어 승부를 뒤집을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천천히 허리를 편 한립은 신양이 앉은 귀빈석을 향해 냉랭한 눈빛을 보냈다. 피범벅이 된 그의 주먹에는 단 한 방울의 피도 묻어 있지 않았다.

    곧 정적을 깨고 환호성이 쏟아졌다.

    “려비우! 려비우! 려비우…….”

    “려비우가 이겼다! 대박 났어!”

    한립에게 돈을 건 외뿔 사내가 격동해 만세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인족 녀석…….”

    호분은 한립이 이긴 것을 보고 입을 비죽이며 무어라 욕지거리를 했다.

    신양은 품속 여인의 다리를 쓸어 올리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연신 웃음을 흘렸다.

    “신양, 솔직히 말하는 게 좋을 겁니다. 뭔가 알고 저 녀석에게 건 것이지요?”

    “제가 뭘 알았겠습니까. 하하, 원래 현투장에서는 별일이 다 일어나는 법입니다. 오직 운과 자신의 안목을 믿고 돈을 거는 것이고요.”

    따져 묻는 호분의 말에도 신양은 느긋하게 답했다. 그런데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변이 발생했다.

    후오오!

    축 늘어졌던 호린수의 흑백 비늘이 뒤집어지더니 무수한 칼날처럼 선 것이다. 이에 그 머리 위에 있던 한립은 바닥으로 내려와야 했다.

    흠씬 두들겨 맞아 기력이 없어 보이던 호린수의 눈이 뒤집히더니 흰자에 검은 눈동자가 한 개씩 더 떠올랐다.

    “저건 쌍동 호린수!”

    신양이 놀라 달라붙는 여인도 밀쳐놓고 벌떡 일어섰다.

    “으하하! 쌍동 호린수! 오늘 아주 좋은 구경을 하겠습니다!”

    이제는 호분이 실컷 웃을 기회였다.

    “변이 쌍동 호린수는 현급(玄級) 인수에 맞먹습니다. 이대로 시합을 진행해서는 안 되겠어요.”

    신양은 호분과의 내기도 개의치 않고 심각한 얼굴로 아래쪽으로 내려가려 했다.

    “신 형, 지금 뭐 하려는 겁니까?”

    호분이 팍! 인상을 구기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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