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화. 흡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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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은 허공에 있었고, 그 아래로 거대한 광장이 펼쳐져 있었다.
중앙에 3개의 타원형 경기장이 삼각뿔 모양으로 배치되어 그 주변으로 깊은 도랑이 파여 있었다.
경기장과 도랑 주위로 광택이 흐르는 벽이 새워져 있고, 그 위로 검은 울타리가 설치되어 있어 위압감을 주었다.
그 울타리 뒤에 층층이 설치된 관중석에 수많은 좌석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관중석 중앙의 넓은 공간이 노름꾼들의 싸움터였다.
그곳에는 커다란 나무판에 현투사의 이름과 각각이 건 금액의 배당률이 적혀 있었다.
“채정에게 현폐(玄幣) 50 겁니다!”
“인랑수(鱗狼獸)에 현폐 70!”
그 주위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앞다투어 돈을 걸었다.
3개의 경기장 중 두 곳은 현투사와 인수가 싸우고 있고, 나머지 한 곳에서는 현투사끼리 싸우는 중이었다.
현투사들의 옷이 얇아 적과 맞붙을 때마다 피가 튀고 전투는 매우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금방 한 곳에서 대전에 마무리되었는데, 현투사가 거대한 늑대 인수의 공격에 갈기갈기 찢겨 전투장은 피범벅이 되었다.
관중들은 흥분한 얼굴로 소리를 지르거나, 내기에 진 이들은 욕설을 퍼부었다.
회포 청년은 이기든 지든 현점을 얻을 수 있다고만 했지 목숨을 잃을 수 있다고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조용히 지켜보던 한립은 몸을 돌려 대청 내의 환산표가 그려진 벽으로 향했다.
“쟁수(猙獸) 요핵, 5백 년짜리, 5현점”
“태웅수(泰熊獸) 요핵, 8백 년짜리, 10현점”
“교린단(蛟鱗丹), 1천 년짜리 교린수 요핵이 주재료, 18현점”
“금봉호골인…….”
청양성으로 오는 길에 신양은 적린공경의 여러 가지 일을 숨겼지만 적어도 흉수에 대해서만은 사실대로 말했던 것 같았다.
적린공경 내의 인수들은 태생적으로 타고난 능력이 다양하고 연기기 혹은 대승기 이상의 실력을 지닌 채 태어나 별빛을 흡수하며 수행을 높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수들을 연령에 따라 분류하며 나이가 많을수록 실력도 강하고 요핵에 포함된 성신의 힘도 많았다.
목록에는 만 년 혹은 수만 년 된 인수의 요핵도 있었지만 교환에 필요한 현점으로 천문학적인 숫자가 적혀 있었다.
아무리 눈이 번쩍 뜨이는 물건이라도 겨우 10 현점 밖에 보유하지 못한 그는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욕심을 가라앉혀야 했다.
고개를 가로젓던 한립의 시선이 움직였다.
‘음?’
“2천 년 된 탑라수(塔羅獸) 요핵은 3현점?”
그는 당장 돌 탁자 앞으로 걸어갔다.
“2천 년 된 탑라수 요핵 3개를 교환하고자 합니다.”
그가 신분 영패를 꺼내 투항민 복장을 한 일꾼에게 말을 건네자 주변의 현투사들이 일제히 그를 돌아보았다.
대부분이 이상하다는 얼굴 아니면 비웃는 표정이었다.
“새로 오셨죠? 제가 아무 말도 안 해줬다고 나중에 가서 딴말하지 마세요. 탑라수 요핵으로 흡수할 수 있는 성신의 힘은 극히 적습니다. 요수의 특수한 체질 때문에 요핵 내의 성신의 힘을 흡수하기가 무척 어렵거든요.”
투항민 일꾼이 힐끗 그를 보고 말해주었다.
‘아, 그래서 저렴했던 것이구나…….’
“알려주어서 고맙습니다.”
한립은 웃으며 감사를 표했지만 뜻을 바꾸지는 않았다. 어차피 탑라수 요핵이 가장 저렴했다.
일꾼은 더는 말리지 않고 짜리몽땅한 은색 방망이를 꺼내 그의 영패에 댔다. 그러자 현점이 1점으로 바뀌고 한립은 달걀 크기의 요핵 세 개를 얻을 수 있었다.
요핵을 받은 그는 바로 9구역으로 이동했다.
어두운 통로를 따라가다 보니 넓은 원형 공간이 나왔고 2, 30개의 개별 석실이 뚫려 있었다.
동굴 천장에는 하얀빛을 내는 돌 몇 개가 박혀 일부 구역을 밝혀 주었지만 대부분은 어둑했다.
열댓 명의 현투사들이 동굴에 앉아 큰 소리로 떠들고 종종 크게 웃음을 터트리다가 낯선 얼굴이 나타나자 아래위로 훑기 시작했다.
한립은 그들을 상대하지 않고 바로 ‘삼삼이(三三二)’ 라 표시된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 순간, 얼굴에 칼자국 흉터가 있는 거한이 앞을 가로막고 발로 문을 뻥 차서 쾅! 하고 닫아버렸다.
“꼬마야, 큰형님께 인사도 올리지 않고 방에 들어가려 하느냐? 예의도 없구나!”
흉터 거한이 거만한 얼굴로 말했다.
“인사요?”
한립은 무표정하게 반문했다.
“새로 왔으면 현점을 10점 받았겠지. 그걸 내게 바치면 내가 독룡 형님께 전할 것이다. 그게 이곳의 규칙이다.”
흉터 거한은 주먹 관절을 풀기 시작했고, 다른 이들은 히죽거리며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립은 그들을 쭉 살피고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귀가 먹은 것이냐! 아니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냐!”
흉터 거한이 다시 한 번 주먹으로 한립의 방문을 쳐서 쾅! 소리를 냈다.
“비켜라. 어딜 개가 사람의 앞길을 막아서는 것이냐.”
그제야 한립이 눈살을 찌푸리고 담담히 입을 열었다.
“으하하! 도파, 저 녀석이 당신을 안중에도 두지 않습니다.”
험상궂은 얼굴을 한 동글동글한 뚱보가 웃음을 터트렸다.
“도파, 신입 교육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대나무처럼 바짝 마른 사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연달아 조롱과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도파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 열 받은 황소처럼 변했다.
안 그래도 덩치는 큰데 9구역에서 실력은 중하위권이라 남들의 비웃음을 많이 사곤 했고, 한립처럼 비리비리해 보이는 신입이 들어오면 괴롭히고 모욕을 주기를 좋아했다.
“넌 이제 죽었다!”
도파가 노기등등하게 외치며 손날을 칼처럼 사용해 한립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를 단박에 두 동강 내려는 듯했다.
눈빛이 서늘해진 한립이 주먹을 내질러 그의 팔을 쳤다.
빠각!
도파라는 거한의 팔이 부러져 이상한 방향으로 휘어지더니 손날이 반대로 그의 가슴을 때렸다.
크게 신음을 흘린 도파가 쿵쿵쿵 열댓 걸음을 물러나다가 등이 벽에 닿고서야 울컥 피를 토하고 멈춰 섰다.
거한은 경악한 표정으로 멍하니 한립을 쳐다보았다.
다른 현투사들도 깜짝 놀라 그 중 몇몇이 자리에서 일어나 각양각색의 표정으로 한립을 노려보았다.
한립은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신의 방문을 열고 쾅! 하고 문을 닫았다.
석실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아 돌로 만든 침상과 탁자 그리고 의자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가구가 없었다.
천장에서 하얀 나무뿌리가 빛을 흘려보내 석실을 비추는 게 다였다.
“별빛!”
신기한 광경이었다.
나무뿌리를 타고 올라가 성신지력의 근원을 알아내려 했지만, 석실이 특수 재료로 되어 있어 의식을 차단했다.
“성신의 힘을 전달할 수 있다니 놀랍구나.”
나무뿌리 자체가 별빛을 머금고 있다기보다는 성신지력을 전달하는 도구에 불과했고, 발산되는 별빛이 많지 않아 그냥 평범한 수련을 할 만한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나무뿌리에서 시선을 옮긴 한립은 석실 내부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침상에 앉았다.
그곳에는 짧은 바지와 피풍의로 이루어진 현투사 복장이 두 벌 놓여 있었다.
자연히 인상이 찡그려졌지만 한립은 입고 있던 옷을 벗고 현투사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한립은 원래 옷을 잘 개서 침상 머리맡에 두고 목구멍에서 암녹색 병을 끄집어냈다.
바로 장천병이었다.
청양성에 도착하기 전 예기치 못한 변고에 대비하고 위해 장천병을 삼켜 두었었다. 그랬기에 다행히 장천병이 신양 등 다른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았다.
미소를 머금은 그는 병을 다시 삼키고 하얀 나무뿌리 아래 앉았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수련이었다.
그는 곧장 탑라수 요핵 하나를 꺼내 살피다 입을 벌려 삼켰다. 그러자 뱃속에서 녹은 탑라수 요핵이 강대한 성신으로 힘으로 변했다.
성신의 힘은 길들이지 못한 야생말처럼 몸 곳곳으로 튀어 나가며 바깥으로 흩어지려 했다.
다른 요핵을 삼켰을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한립은 서둘러 <우화비승공>을 운용해 성신의 힘을 흡수했다.
전력을 다하는데도 일꾼이 말했던 것처럼 성신의 힘을 거의 흡수하지 못하고 다 흩어질 판이었다.
그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웅!
뱃속의 장천병이 진동을 한 뒤, 병 입구에서 부드러운 빛이 나와 흩어지려던 성신의 힘을 한 곳으로 끌어 모으고 있었다.
멈칫한 한립은 상황을 깨닫고 기뻐하면서 <우화비승공>으로 성신의 힘을 흡수하는 데 집중했다.
하지만 그가 성신의 힘을 얼마 흡수하지 못했을 때 나머지 성신의 힘이 장천병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탑라수 요핵의 성신의 힘이 장천병 안으로 흘러들자, 병 안에 점점 녹색 액체 방울이 맺혔다.
액체 방울이 생긴 순간, 나머지 성신의 힘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장천병 주변에서 배회했다.
그걸 본 한립이 숨을 고르고 <우화비승공>으로 나머지를 흡수했다.
석실 천장의 하얀 나무뿌리에서 발산되는 성신의 힘도 모여들어 그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성신의 힘을 융합한 <우화비승공>의 두 번째 현규가 서서히 떨리면서 열리려고 하고 있었다.
한립이 수련에 열중할 때 9구역의 분위기는 이상하고 묘했다.
도파는 꽉 막힌 석실 앞에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뒤틀렸던 팔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검붉은 멍이 들어 있었고, 틈틈이 한립의 석실을 노려보는 그의 눈에 흉흉한 빛이 스쳤다.
모여서 떠들고 있던 다른 현투사들도 그를 경시하는 눈빛을 보내고는 분분히 자리를 떠났다.
* * *
끼익.
반나절이 지나 도파가 앉아 있던 앞의 석실의 문이 열렸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 도파는 문 앞에서 누군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문을 열고 나타난 이는 애꾸눈 사내로 도파보다도 머리 두 개는 더 크고 사람인지 곰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덩치가 어마어마했다.
가슴에 푸른 곰 머리 문신을 한 애꾸눈 사내는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기세가 느껴졌다.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독룡 형님!”
도파는 곧바로 털썩 그 앞에 무릎을 꿇고는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팔은 어찌 된 것이냐?”
독룡이 그의 팔을 보고 안색이 가라앉았다.
“어떤 신입이 이리 만들었습니다. 어찌 된 일이냐면…….”
도파는 한립과 충돌한 일을 각색하여 이야기를 덧붙여 상세히 말했다.
결론은 그가 현점을 독룡에게 바치라고 하자, 독룡을 무시하고 그를 때려서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는 소리였다.
“도파의 말이 사실이냐?”
미간을 좁힌 독룡이 마침 옆을 지나던 현투사에게 냉랭히 물었다.
“뭐 얼추 비슷합니다. 새로 온 주제에 거만하기가 이를 데 없더라고요.”
지나던 현투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알겠다. 어째 나날이 신입들이 버릇이 없어지는구나.”
독룡이 즉시 한립의 석실로 가려는데 그의 허리춤에 걸린 호패에서 검은빛이 반짝였다.
“운 좋은 녀석.”
코웃음을 친 그는 자신의 거처로 걸음을 돌렸다.
“형님?”
“시합하러 가야 한다. 시합이 끝나는 대로 네 팔을 부러뜨린 대가를 치르게 해줄 것이니 기다리고 있거라.”
“아닙니다. 형님은 일단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시고 시합에만 집중하셔야죠!”
도파가 손을 내저으며 독룡을 응원했다. 이에 독룡은 332호 방을 돌아본 다음 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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