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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936화 (1,693/2,000)

1936화. 또 다른 계획

*

한립 일행은 표정이 변했지만 신양 등은 태연했다.

“놀라지들 마세요. 위층이 청양성의 현투장(玄鬪場)입니다. 지금 대전 중인가 보군요.”

“현투장!”

석천공은 신양의 설명을 듣고 눈을 반짝였다.

그는 원래 이런 내기 대전을 좋아했고, 원황성에서 한립과 처음 만났던 곳도 이와 비슷한 곳이었다.

이에 석천공이 미소를 머금고 자세하게 물으려는데 갑자기 머리가 묵직해지며 어지러움을 느끼고 앞으로 넘어졌다.

자신 쪽으로 그가 쓰러지는데도 신양은 웃음기 어린 얼굴로 뒤로 물러나 그가 바닥으로 엎어지게 두었다.

“당신…….”

한립도 이 말을 남기고 석천공처럼 머리가 무거워졌다.

이를 악문 그는 급히 연신술을 발동하려 했지만, 의식세계가 텅 빈 것 같은 기분에 휩싸여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한립은 눈앞이 검게 변해 기절하기 전, 흉측하게 생긴 커다란 체구의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신양과 전록관들이 그를 향해 공손히 예를 올리고 ‘성주’라 불렀다.

흉측한 거구는 청양성 성주 두청양이었다.

“잘 마무리했다, 신양.”

“성주 대인의 백현수(白玄獸) 뼛가루가 강력했기 때문입니다, 하하…….”

두청양의 칭찬에 신양이 웃음을 흘렸다.

해 도인은 ‘백현수’라는 이름을 듣고서야 하얀 가루가 현규를 통해 흡수되어 한립과 석천공이 기절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와 그걸 알아봤자 늦은 감이 있었지만!

“성주 대인의 밀실로 옮겨 둘까요?”

“다른 계획이 있다.”

신양과 두청양은 해 도인을 앞에 두고도 말을 가려하지 않았다.

해 도인도 조용히 한쪽에 서서 무턱대고 한립과 석천공을 구하려 들거나 달아나지 않았다.

“그럼 저 괴뢰는…….”

신양은 그제야 해 도인의 존재가 떠올랐다는 듯 슬쩍 물었다.

“일단 인족과 마족을 가둬두거라.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지? 그리고 괴뢰는 약간의 자의식이 있다지만 내게는 필요 없으니 네가 알아서 처리하거라.”

두청양은 이 말을 남기고 해 도인을 힐끗 보기만 하고 돌아섰다.

“내 하인이 될 테냐, 아니면 당장 온몸이 뜯겨 고철로 돌아가겠느냐? 네 선택이다.”

신양이 차가운 눈으로 해 도인을 쳐다보았다.

해 도인은 말없이 한립을 한 번 보고는 신양을 향해 포권을 했다.

“전투력은 강하지 않아도 눈치는 있구나. 이렇게 심심한 곳에서 너 같은 괴뢰라도 데리고 다니면 나쁘지 않겠어.”

신양은 더는 해 도인을 상대하지 않고 무릎을 굽혀 소매 속에서 꺼낸 검은 석병 두 개를 각각 한립과 석천공의 팔에 올려 두었다.

병을 깨트리자 그 안에서 손가락 크기의 새까만 지네가 기어 나와 속눈썹 같은 하얀 다리로 한립과 석천공의 팔을 타고 올라 그들의 피부를 뚫고 들어갔다.

해 도인은 두 사람의 소매 아래에서 지네들이 기어 다니다 그들의 심장 주변에 원형으로 불룩한 모양을 만들고 멈추는 것을 지켜보았다.

“신양 대장, 큰 공을 세운 것을 축하드립니다! 청양성 부성주에 이를 날이 얼마 남지 않으신 듯합니다.”

둥근 얼굴 전록관이 공수를 하고 축하했다.

“하하,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신양이 득의양양하게 웃는 소리를 들으며 해 도인은 쓰러진 두 사람을 훑었다.

* * *

오래지 않아 한립은 점차 정신을 차리고 깨어났다.

그리 크지 않은 새까만 석실 안에는 돌로 만든 침상 하나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었고, 그는 뼈로 만든 하얀 칼과 족쇄 그리고 수갑을 차고 있었다.

힘껏 그것들을 뜯어내려 했지만 족쇄와 수갑은 달그락거리기만 했다.

“죄수들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것이라 현규가 백 개 이상인 사람도 끊을 수 없으니 허튼 생각 마세요.”

바깥에서 거구의 신양이 들어왔고, 그 뒤로 검은 피부에 가느다란 눈을 지닌 회포 청년이 고개를 조아리고 뒤따랐다.

“신양, 우리는 당신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고 현성의 일원이 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어째서 우리를 해하려는 겁니까?”

“이런 순간에도 침착하십니다. 허나 그런 우스운 질문을 하다니, 당신들이 먼저 나를 해쳐야만 내가 당신들을 어찌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적린공경은 원래 일종의 감옥입니다. 극악무도한 죄인들이 모이는 곳에서 무슨 정의를 바라고 있느냔 말입니다.”

“알아들었습니다. 우리를 제압해서 앞으로 어찌할 작정입니까?”

“안심하세요, 려 수사. 우리는 죄인들이지 무슨 피에 미친 미치광이들은 아닙니다! 이곳은 청양성의 현투장인데, 적린공경 안에서는 인수 사냥이나 수련을 제외하면 할 게 없어요.

이 무미건조한 생활 속에 유일한 유흥거리가 현투장에서 대전을 구경하고 노름을 하는 것입니다. 뭐, 현투장이 성주 대인의 자금줄이기도 하고요. 이곳에서 인족은 아주 희귀하답니다. 려 수사가 출전해서 싸워주면 분명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려고 몰려들 거예요.”

신양은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이전과 달리 서늘함이 묻어났다.

“나를 잡아 온 이유가 그것이란 말입니까?”

“현성은 원래 불필요한 사람을 품지 않습니다. 이곳에서 살아남고 싶으면 시합에서 이겨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자유를 찾으세요.”

확답을 주지 않는 신양을 보고 한립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이 자는 네게 맡기겠다.”

“맡겨만 주십시오, 신 대인! 제가 잘 교육하겠습니다!”

신양의 명에 회포 청년이 서둘러 답했다.

“그래, 난 이만 가서 쉬어야겠구나.”

신양이 몸을 돌려 바깥으로 걸어 나가려 했다.

“신 수사, 석 수사와 해 수사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가 떠나려 해 한립이 급히 물었지만, 신양은 듣지 못한 척 빠르게 사라졌다.

회포 청년은 예의 바르게 신양을 배웅하고는 표정이 싹 달라졌다. 그는 한립이 목에 쓴 칼을 잡아 일으킨 다음 그의 배를 주먹으로 강타했다.

퍽!

청년은 힘이 좋고 주먹은 매서웠다.

오장육부가 비틀리는 느낌에 한립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가 창백하게 변했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한립이 드물게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한 대 맞아 보니 어떠하냐?”

회포 청년의 조롱에 한립은 기침을 내뱉고 고개를 숙였다.

“얌전하게만 굴면 이렇게 맞을 일은 없을 것이다. 내 말에 따르지 않으면 언제라도 주먹맛을 보게 될 것이야.”

청년은 흡족한 기색을 보이며 열쇠를 꺼내 칼과 수갑 그리고 족쇄를 풀어 주었다. 놀란 한립은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네 가슴을 보거라.”

청년의 냉소에 한립이 고개를 숙여 심장 주변에 살이 불룩 튀어나온 것을 보았다.

그의 심장 위를 검은색의 지네가 웅크려 검은 다리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청양성 독문의 비충(秘蟲)인 흑겁충(黑劫蟲)이다. 감히 달아나려 하거나 흑겁충을 제거하려 하면 그게 네 심장을 파먹을 것이야.”

청년은 한립의 안색이 달라진 것을 보고 기분이 더 좋아진 듯했다.

한립은 빠르게 표정을 수습하고 차분한 얼굴로 돌아갔다.

“흥, 네 호패이니 받거라. 내가 이곳 상황을 설명해 줄 것이니 따라오고.”

흥미가 가신 청년은 검은 영패를 던져 주고는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려비우라는 이름이 새겨진 영패의 반대쪽에는 구(九) 자가 크게 적혀 있고 그 아래로 삼삼이(三三二)이라고 작게 적혀 있었다.

눈을 반짝인 한립은 별다른 질문 없이 고분고분 청년을 따라갔다.

무방비해 보이는 회포 청년의 등을 보자니 기습을 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조금 전 상대가 보인 실력은 약하지 않았다.

최소한 현규의 수에서는 그를 앞서는 자였다.

석실을 나온 그들은 긴 통로를 따라 걸어가 어느 대청 앞에 이르렀다.

검은 돌을 깎아 만든 드넓은 대청의 벽에는 검은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고, 바깥으로 통하는 곳에 빛과 환호성이 흘러들어왔다.

대청 안쪽에 기다란 하얀 돌 탁자를 두고 앉은 진홍색 복장의 마족들은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인 듯했다.

그 앞에 몰려든 이들은 전부 맨몸에 넉넉한 피풍의를 걸치고 짧은 바지를 입은 채 줄을 서 있었다.

대청 왼쪽과 오른쪽 벽에 각각 문들이 있고, 그 뒤로 여러 통로가 연결되어 있었는데 어디로 통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여길 잘 기억해 둬라. 현투장 본부라 너한테는 가장 중요한 곳이니까. 시합이 열리는 경기장은 바깥에 있고 이곳에 있는 이들은 너와 같은 현투사(玄鬪士)들이다.”

“현투사들이 많군요.”

“물론이지! 우리 현투장은 상당수의 현투사들을 보유하고 있다. 너처럼 노예도 있고 수련을 위해 자원한 현성의 백성도 있다. 쉽게 구별하기 위해 10부류로 나뉘는데 너는 9구역 332번째 현투사이다.”

“그랬군요. 저들은 어째서 이곳에 모여 있는 것입니까?”

영패를 받았을 때 그럴 거라 짐작한 한립은 다른 질문을 했다.

“네 호패의 이름 아래 뭐가 있지?”

“십(十) 자가 있습니다.”

“그게 현점(玄占)이라는 것이다. 대전에 참여하는 현투사에게 주어지는 보상으로 이기든 지든 약간의 현점을 획득하게 되지. 물론 이기면 더 많이 얻게 되고, 너처럼 신입은 기본으로 10점을 획득한다. 이곳에서 각종 물품, 무기, 요핵, 단약을 바꿀 수 있는 귀한 점수이니 잘 관리하는 것이 좋다. 어떤 식으로 교환이 가능한 지는 이 표를 보면 알 거다.”

회포 청년은 하얀 돌 탁자 옆의 벽을 가리켰다.

그걸 본 한립의 눈이 밝아졌다. 무기나 치료용 단약을 되었고 요핵이 무척 필요했다.

“그 밖에 현점으로 성지(星池)에 들어갈 기회를 교환할 수도 있다.”

청년은 한립의 반응에 만족하는 듯 덧붙였다.

“성지는 무슨 장소입니까?”

“청양성 성주께서 특별히 만드신 연못으로 하늘의 성신지력을 흡수하는 곳이다. 성지 안에는 성신의 힘이 풍부해서 그 안에서 수련하면 요핵을 삼키는 것보다 더 도움이 되고 현규를 뚫는 데도 유리하다.”

성지를 이야기하는 청년의 눈에 열기가 떠오른 것을 보고 한립도 관심이 커졌다.

“물론 성지에서 수련하려면 매번 현점 백 점이 필요하니 너는 꿈도 꾸지 못하겠지만.”

한립은 상대의 비웃음에도 묵묵히 머리를 굴렸다.

청년의 소개를 들어보니 현투사가 된 게 그렇게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요핵을 획득해 실력을 키워 흑겁충을 제거하고 자령, 석천공, 해 도인 등을 구할 방법을 차차 찾으면 될 것이다.

신양의 말대로 충분히 가치를 증명해 현투사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더 쉽게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테고 말이다.

“이곳의 무기와 요핵 등은 바깥에서 거래되는 것들보다 품질이 좋은 편이다. 거기다 성지까지 있으니 실력만 있으면 현투장 생활이 바깥보다 나을 수도 있단 뜻이지.”

“저도 그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내가 해 줄 말은 여기까지니까 나머지는 천천히 알아서 익히거라. 저쪽 통로가 9번째 구역의 휴게소로 통한다. 그곳에 네 방이 있을 테니 가보거라. 대전이 잡히면 영패에 나타날 것이다.”

회포 청년은 대청 왼쪽의 많은 문 중 하나를 가리켰다.

한립은 위쪽에 ‘9’라고 적힌 통로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통로 위에도 다른 숫자들이 쓰여 있었고, 몇몇 개만 다른 표식이 되어 있었는데 성지로 통하는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넌 내가 데려온 현투사다. 앞으로 대전에 힘쓰지 않고 이곳에서 말썽을 피우면 쓴맛을 보게 될 것이야!”

회포 청년은 마지막으로 한립에게 다가가 싸늘하게 경고를 했다.

“알겠습니다.”

한립의 대답에 청년은 표정을 풀고 바깥으로 나갔다.

한립은 그가 가고도 잠시 그 자리에 있다가 환호성이 들리는 대청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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