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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935화 (1,692/2,000)

1935화. 평가

*

신양은 나선형으로 꼬인 계단으로 그들을 데려가 곧장 3층으로 올라갔다.

공간은 이전보다 작아도 아래층들보다 사람은 많아서 널찍하게 뚫린 통로 옆으로 여러 동부의 입구가 나 있었다.

신양은 통로 중앙의 꽤 큰 집을 보유하고 있었다.

한립 일행이 신양을 따라서 안으로 들어가니, 바로 여인 하나와 사내 셋이 나와 공손히 그들을 맞이했다.

사내들은 노복의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여인만 청회색의 고운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리 아름다운 용모는 아니었다.

“투항민이자 제 개인 자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려 형이나 석 형께서 마음에 드시면 하녀를 데려다 즐기셔도 됩니다. 이곳은 여인이 아주 희귀해서 홀로 여인을 독차지하기가 힘든 곳이거든요.”

신양은 기탄없이 여인을 훑고 그들에게 권하기까지 했다.

“먼 길을 오느라 피곤해 저희는 그냥 쉬어야겠습니다.”

한립은 미소를 잃지 않고 완곡하게 거절했다.

“객실로 가서 쉬시지요. 성주의 허락이 떨어지면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너희들은 귀빈을 잘 모시거라.”

신양이 명을 내리고 사라지자 평범하게 생긴 여인이 물뱀처럼 허리를 비틀어 그들을 다른 길로 안내했다.

거처가 정해지자 석천공과 해 도인은 바로 자신의 방을 나와 한립의 방에 모였다.

“려 형, 현성에 들어갔다가 우리의 행동도 구속되는 것 아닐까요?”

한립과 돌 탁자를 두고 마주 앉은 석천공이 말했다.

“구속까지는 몰라도 이런저런 임무는 내려질 겁니다. 시간이 지체되기는 하겠지만 이런 극악한 환경에서 모두 살아남으려면 대가를 치르기는 해야겠지요.”

“저는 무슨 귀순민인지 뭔지가 될 생각이 없습니다.”

“상황을 봐가며 결정하지요. 이곳은 처음이라 정보가 적으니 조심해서 행동해야 할 테고요.”

“혹시 저들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할까 걱정되십니까?”

“성역에서 죄인이라 생각해 이곳으로 유배 보낸 자들이 전부 선량한 사람들은 아닐 겁니다. 마음만 좋고 손속이 모질지 못했다면 지금까지 살아남지도 못했을 테고요.”

“맞습니다. 아무래도 방심할 수 없지요.”

한숨 섞인 한립의 말에 석천공이 웃음 지었다.

“려 수사, 석 수사, 신양이란 사람은 어때 보이십니까?”

같이 앉아서 말이 없던 해 도인이 입을 열었다.

“접촉한 시일이 짧아 잘은 모르지만 그리 나빠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석천공이 이렇게 답했다.

“해 수사, 무슨 이상한 점이라도 발견하신 겁니까?”

“아닙니다. 그냥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는 우리를 위해 현성의 규칙을 어기는 모습이 조금 과하지 않나 생각이 들어서요…….”

한립의 물음에 해 도인이 생각에 잠겼다.

“그게, 그리 이상합니까? 우리의 환심을 사려는 것일 수도 있는데요.”

석천공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모든 일을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도, 결코 마음을 푹 놓아서는 안 될 겁니다.”

한립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 * *

청양성 좌익산(左翼山) 내부 최고층의 거대 정당.

불길이 이글거리는 짐승의 두개골로 만들어진 화로가 벽마다 걸려 내부를 비추었다.

그 한가운데 벽을 등지고 적린공경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복잡한 문양을 지닌 돌 탁자가 놓여 있었다.

밤하늘의 별들을 새겨 놓은 것이었다.

탁자 뒤로 요수 가죽을 깐 커다란 검은 돌의자가 놓여 있고 그 위에 우람한 체구의 흑포 사내가 앉아 있었다.

얼굴의 절반은 검은 비늘이 돋고, 나머지 절반은 화상을 입은 것처럼 생긴 사내는 근육질의 몸이 다른 사람들보다 두 배는 크고 무척 흉측하게 생겼다.

그러나 그의 두 눈만은 아주 특별해서 흰자가 넓고 극히 작은 검은 눈동자 주변으로 은백색 광택이 났다.

그 사내 앞에서 신양이 허리를 굽히고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성주 대인, 세 사람에 대한 정보는 여기까지입니다.”

성주라 불린 사내는 청양성의 주인인 두청양이었다.

“흐흐, 인족과 마족 그리고 자의식이 있는 괴뢰까지 있다니……. 그들에 관한 정보가 외부로 새어나가지는 않았겠지?”

두청양은 상반신을 앞으로 기울이고 양손으로 턱을 받쳤다.

“제가 이미 수하들의 입단속을 해두었습니다!”

“그래. 현성에서 괴성과 무언가를 두고 싸우다 얻는 데 실패해서 액회 대인이 기분이 상하셨다는데, 이 소식이 바깥으로 퍼지면 한 명도 청양성에 남겨두지 못할 것이다.”

“마족 사내는 별 것 없지만 인족은 내줄 수 없지요. 진령혈맥을 지니고 있어 다른 이의 손에 들어가면 정말 아까울 겁니다.”

“잘해주었다. 앞으로도 다른 말 나오지 않게 깔끔하게 처리하거라.”

“예! 성주대인.”

두청양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 나른하게 하는 말에 신양이 포권을 하고 공경스럽게 답했다.

* * *

저녁 무렵 한립이 방에서 <우화비승공>을 익히고 있는데 누군가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보니 신양이 미안한 얼굴로 문밖에 서 있었다.

“려 형,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두 분의 평가를 면해드리려 했는데 성주 대인께서 아시고 화를 내시지 뭡니까. 규정에 따라야 성의 질서가 유지된다면서요.”

“괜찮습니다. 청양성에 들어왔으면 당연히 이곳의 규칙에 따라야지요. 평가를 받겠습니다.”

한립은 상대를 안으로 들이며 답했다.

“그래도 평가에서 귀순민 이상의 성적만 내시면 두 분 다 제 사냥대에 들어와 함께 있을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오, 귀순민 이상의 성적이요?”

“구체적으로 말해서 현규의 수량을 봅니다. 16개 이상이면 귀순민 자격을 지니고 그 아래로는 투항민이지요. 만일 현규의 수가 54개 이상이면 성을 수비하는 부대의 대장이 될 수 있고, 72개 이상이면 사냥대의 대장이 될 수 있습니다.”

설명을 들은 한립은 신양이 현규를 5, 60개만 노출했던 것을 떠올리며 그의 실력이 그 이상이라는 확신을 했다.

“평가는 언제 받으면 되는 것입니까? 전록관들의 말을 들으니 성에 새로 들어와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같던데요.”

“급할 것 없습니다. 려 형과 석 형 모두 피곤하실 테니, 오늘 밤은 푹 쉬시고 내일 평가를 받으시지요.”

신양이 웃음 지었다.

“알겠습니다. 배려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신 수사.”

“아닙니다. 평가를 면제해 주겠다고 호언장담해놓고 뜻대로 되지 않아 부끄럽습니다.”

“하하, 그러실 것 전혀 없습니다.”

한담을 나누던 신양이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대화의 내용을 되뇌던 한립은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아 요핵을 하나 삼키고 수련을 했다.

* * *

다음 날. 해가 뜨자마자 한립 일행 셋은 신양을 따라 청양성 3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 검은 보궐을 지나 오른쪽 산으로 향했다.

왼쪽 산처럼 총 4층으로 이루어진 내부공간이 있었다.

1층의 거대한 동굴로 들어가니, 거대 요수 우리가 보이고 그 안에 몸집이 큰 각양각색의 짐승들이 살고 있었다.

그중에는 신양의 부대가 사냥을 나갈 때 데리고 있던 청회색 짐승도 있었다.

회색 장포를 입은 많은 투항민들이 바삐 다니면서 짐승들을 씻기고 밥을 주는 등의 일을 했다.

그들은 오래 1층에 남아 있지 않고 바로 2층으로 향했다.

아래층보다 약간 협소해진 공간에도 역시 거대 석실 우리가 있었다.

1층과 다른 점은 우리 안의 짐승들이 사람의 손을 타지 않고 울부짖거나 우리에 몸통박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를 지키는 이들은 대부분 노예의 복장을 한 투항민이었지만 간간이 책임자로 보이는 귀순민들도 있었다.

신양은 그들을 데리고 3층으로 올라가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에는 한립도 익숙한 얼굴의 미간에 뾰족하게 뿔이 튀어나온 둥근 얼굴 사내와 냉랭한 표정에 큰 귀를 지닌 각진 얼굴 사내가 진홍색 장포를 입고 있었다.

어제 본 전록관들이었다.

신양은 그들과 몇 마디를 나누다 전록관들의 안내에 따라 따로 마련된 석실 안으로 들어갔다.

석실은 신양의 거처보다 훨씬 컸는데, 방이 나뉘어 있지 않고 텅 비어 있어 실내 격투장으로 보였다.

“괴뢰는 평가를 받을 것 없고, 두 분 중에 누가 먼저 하시겠습니까?”

귀 큰 전록관이 냉랭히 물었다.

“어차피 받아야 할 거라면 제가 먼저 받겠습니다.”

한립이 말을 꺼내기 전에 석천공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좋습니다. 석 수사 이쪽으로 오르시지요.”

둥근 얼굴 전록관이 미소를 띠고 말했다.

방 중앙의 바닥에 불룩 튀어나온 방원형 공간은 하얀 수정 가루를 발라놓은 것처럼 등불 아래에 광택이 흐르고 있었다.

석천공은 그 방원형 공간 위로 올라가 가운데 섰다.

“석 수사, 익히신 공법을 일으켜 현규를 최대한 많이 밝혀 주시면 됩니다.”

둥근 얼굴 전록관의 안내에 고개를 끄덕인 석천공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기합을 넣었다.

이어서 영롱한 하얀빛이 그를 뒤덮고 현규들이 차례로 빛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한립은 의식으로 방원형 검은 대와 하얀 수정가루를 훑고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석천공을 살폈다.

10개, 20개, 30개…….

석천공이 뚫은 현규의 수는 그보다 많을 듯싶었다.

과연 마지막으로 45개의 현규가 빛을 발했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무형의 힘이 방출되어 발아래 하얀 수정가루들을 날렸다.

입꼬리를 끌어올린 그가 공법을 거두려다 안색이 달라졌다.

하얀 가루들이 무언가에 홀린 듯 분분히 날아올라 그의 몸에 붙었기 때문이다.

거리가 너무 가깝고 그 속도가 빨라 피할 수도 없었다.

다음 순간, 석천공의 몸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리고 46, 47, 48번째 현규가 차례로 빛을 발했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한립이 미간을 좁혔다.

“놀라실 것 없습니다. 석판 위의 하얀 가루는 특수한 짐승의 뼈를 갈아 만든 것으로, 원래는 단약을 제련하는 데 쓰이는 재료입니다. 현규를 자극해 열리게 하는 효과가 있지요. 이곳에 가루를 뿌려둔 것은 평가를 받는 사람의 진짜 실력을 알아내기 위해서입니다.”

신양은 온화하게 설명해주었다.

석판 위의 석천공도 그 이야기를 듣고 그냥 가루들을 들러붙게 두었다.

현규들은 52개까지 빛을 발하다 멈추었다. 그걸 본 한립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

해 도인은 하얀 수정가루를 보고 무언가가 떠오르려 했지만, 도저히 뭔지 알 수 없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석천공은 실력을 어느 정도 숨기려 했다가 들통이 나버리자 그리 좋지 않은 얼굴로 석판에서 내려왔다.

“석 형, 너무 기분 상해하지 마십시오. 이 가루들은 현규의 수를 정확히 알 수 있게 하는 효과 외에도 수련을 촉진해주는 능력을 지닙니다. 오늘이 지나면 사용하고 싶어도 못 사용한단 말입니다.”

신양이 그걸 보고 달래자 석천공도 몸의 변화를 살피고 표정이 누그러졌다.

“석공, 현규 52개.”

둥근 얼굴 전록관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큰 귀 전록관이 얼른 책자를 펼쳐 붓으로 석천공의 성적을 기록해 두었다.

“이제 려 수사 차례입니다.”

둥근 얼굴 전록관의 시선이 한립에게 닿았다.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석판에 올라 석천공이 있던 자리에서 <대주천성원공>을 발동했다.

37개의 현규가 모두 빛을 발하고 바닥의 하얀 가루들이 날아올라 그에게 붙었지만 어떤 변화도 생기지 않았다.

그걸 본 신양은 놀란 눈빛이었다.

그는 한립의 현규 수가 석천공 이상일 거라 예상한 듯했다.

“려비우, 현규 37개.”

둥근 얼굴 전록관의 선포에 귀 큰 전록관이 기록을 하고 신양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의 평가를 마쳤습니다. 이제 귀순민의 신분을 얻으셨으니 신양 수사의 휘하에서 지내시면 되겠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둥근 얼굴 전록관이 그들을 향해 공수했다.

“인재가 들어오다니 청양성의 복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신양도 축하하는데 머리 위에서 쿠쿵! 하는 소리가 들리고 석실 전체가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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