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화. 청양성(靑羊城)
*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저희 두 사람은 현성에 가담하길 원하니 신 수사께서 추천을 좀 해주길 바랍니다.”
한립은 신양을 향해 공수를 했다. 이에 석천공도 다가와 예를 취했다.
“좋습니다! 두 분은 오늘부터 현성의 형제입니다! 비풍이 그치고 제가 직접 두 분을 청양성으로 안내하지요.”
신양은 무척 기뻐하며 선언했다.
홍발 사내도 어디선가 뛰어와 예를 취했다.
“현성 사람이 되신 걸 환영합니다!”
그들은 화목한 분위기 속에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바깥에서 워낙 바람 소리가 시끄럽고 자꾸 한기가 밀려들어 오래가지 못했다.
흥이 깨진 그들은 곧 각자의 자리로 가서 운공을 해 한기를 쫓았다.
“한 수사.”
한립이 빈 땅에 자리를 잡으려는데 해 도인의 전음이 들려왔다.
“해 수사, 신양의 용수침 때문에 몸이 상한 데는 없으십니까?”
한립은 힐끗 멀지 않은 곳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해 도인을 보고 전음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용수침에 구금이 되었던 뒤로 말이 없어 약간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가 먼저 연락을 취하자 조금 놀랍기도 했다.
“괜찮습니다. 그 금침이 제 기억을 자극했는지 새로운 사실도 떠올랐고요.”
“적린공경과 관련된 것입니까?”
“어떤 것은 그렇고 어떤 것은 아닙니다. 너무 많은 것이 떠올랐는데 그 내용이 산발적이라 정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기억입니까?”
“대부분인 적린공경 깊은 곳에 있는 소요궁(逍遥宮)에 관한 기억이고, 두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습니다. 한 명은 ‘액회’이고 다른 한 명은 ‘사심’이라 불립니다.”
“액회는 현성의 성주입니다. 그와 알고 지냈던 것입니까?”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기억이 모호해서 이름만 떠올랐을 뿐이라서요.”
“너무 기억을 떠올리려 노력할 것은 없습니다. 현성에 가면 조사해볼 수 있을 테니까요.”
기억을 쥐어짜는 해 도인의 목소리가 좋지 않아 한립이 당부했다.
“수사에게 도움이 될만한 다른 기억도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해 도인이 한립에게 미소를 지었다.
“무엇입니까?”
이번에는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해 도인이 천천히 일어나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해 도인이 손가락으로 한립의 이마를 짚자 그의 뇌리 속에 무수한 금색 문자들이 떠올랐다.
눈을 부릅뜬 한립은 반가운 얼굴로 다시 눈을 감았다.
<우화비승공(羽化飛昇功)>이라는 연체공법이었다.
두 다리에 18개의 현규를 뚫을 수 있는 공법으로 몸을 단단하게 해 줄 뿐 아니라 신법을 빠르게 해주어 마치 날개가 달린 듯 맨몸으로 날아오를 수도 있었다.
금색 글자에 몰입해 한식경 만에 눈을 뜬 한립은 흥분을 억눌렀다.
“해 수사, 정말 고맙습니다. 제게 꼭 필요하던 공법입니다.”
<우화비승공>은 개발할 수 있는 현규의 수는 많지 않아도 적린공경처럼 둔술을 쓸 수 없는 상황에 꼭 필요한 공법이었다.
이기지 못하면 이제 달아나면 그만 아닌가!
“일단 수련을 해보세요.”
해 도인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고 곁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더는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
어느새 보름이 훌쩍 흘러갔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한립의 종아리에는 어느새 별빛 하나가 반짝반짝 빛나는 중이었다.
번뜩 눈을 뜬 그의 종아리에서 무언가 뜯어지는 소리가 들리며 현규가 나타나 맹렬히 별빛을 방출했다.
보름 넘게 고생한 끝에 드디어 현규를 늘린 것이다.
한립은 홀로 기뻐하다 무언가를 떠올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신양 등 현성 사람들은 석실 안으로 들어가 수련을 하느라 바깥에는 석천공과 해 도인뿐이었고 석천공도 눈을 감고 다른 수련을 하느라 그에게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한립은 안심을 하며 자신의 종아리를 내려다보았다.
<우화비승공>에는 현규를 뚫는 과정이 무척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고 했는데, 그간 적잖은 요핵을 삼켜 성신의 힘을 충분히 모았다고 해도 겨우 보름 정도 만에 성공한 것은 무척 의외였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한립은 고개를 저어 잡생각을 날렸다.
바깥소리를 들어보니 아직도 비풍이 산과 들을 휩쓰는 무서운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후…….”
이레 뒤, 천천히 눈을 뜬 한립은 탁기를 뱉어냈다.
몸에 쌓아둔 성신의 힘이 바닥난 것이다.
그동안 포악하게 날뛰던 비풍도 점차 약해져서 한기도 차차 가셨고, 신양 등은 벌써 석실에서 나와 부산스럽게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한립과 석천공에게 호기심을 드러냈고 그들의 사정을 듣고 현성 가담을 환영해 주었다.
그들은 신속하게 준비를 마치고 동굴을 나서자 주변의 산이 훨씬 야트막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비풍의 위력이 얼마나 흉흉했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신 수사, 며칠 더 기다리면 바람이 완전히 그칠 텐데 먼저 출발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한립이 불어오는 바람의 한기를 느끼며 물었다.
“이곳 사정에 아직 익숙하지 않아 하시는 말씀입니다. 비풍이 재앙이기는 해도 좋은 점도 있습니다. 비풍이 지나고 나면 미처 숨을 곳을 마련해 두지 못한 멍청한 인수들이 곳곳에 얼어 죽거나 떨어져 죽어있습니다. 빨리 가서 찾지 못하면 다른 인수들이 찾아내 식량으로 삼을 테니 우리 몫이 사라지는 셈이지요.”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이런 때를 두고 하는 말인가 봅니다.”
신양의 설명에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어디 싹 쓸어 담아볼까요!”
석천공은 벌써 몸이 근질근질한지 손을 싹싹 비비며 기대감을 표현하고 있었다.
* * *
휘이잉.
작열하는 태양 아래 모래바람이 불어왔다.
사냥을 끝내고 돌아가는 무리는 청회색 비늘이 돋은 거대 짐승 몇 마리를 앞세워 바람을 막고, 덩치가 큰 사내 십여 명이 그 사이에서 걷고 있었다.
두꺼운 두건으로 얼굴과 목을 가린 사내들은 푹푹 파이는 모래를 밟고 힘겹게 걸어갔다.
푸른 장포를 입은 청년이 거대 짐승들 사이로 전방의 누런 그림자를 보고 있었다.
“신양 수사, 청양성까지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금방입니다. 저 앞이에요.”
두꺼운 천으로 얼굴을 두른 금강 거한이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경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아, 드디어 도착했군요! 려 형, 성안으로 들어가면 자령 수사의 소식을 알아봐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십쇼! 그렇게 엄청난 미인이면 누구든 기억을 해낼 겁니다.”
백발 사내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청포 사내 한립이 전방을 주시하며 답했다.
수백 장을 걸어가자 바람 소리가 줄어들고, 나란히 서 있던 두 개의 검은 산봉우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산봉우리들은 바람에 침식되어 크고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한립은 두 산봉우리 사이에 형성된 협곡에 검은 성벽이 펼쳐져 있는 것을 보았다.
원형 지붕을 얹은 보루 세 곳 중간중간에 두 개의 길이 뚫려 있고, 그 아래로 튼튼한 검은 성벽이 있었다.
성문 밖에 도착한 신양은 얼굴의 천을 끌어 내리고, 몸에 쌓인 먼지를 턴 다음 바깥에 걸린 청동 종을 때렸다.
댕-
종소리가 울리자 성벽 위의 어느 구멍이 열리면서 몇 사람이 얼굴을 내밀고 소리를 질렀다.
“신양 대장이 돌아오셨다! 문을 열어라!”
그걸 시작으로 기관 소리 같은 게 들리고 묵직하기 그지없는 검은 성벽이 천천히 안쪽으로 열렸다.
“려 형, 석 형, 가시죠.”
신양이 웃으며 말하고 일행과 같이 안으로 들어간 뒤 석문이 닫혔다.
안으로 들어간 한립은 예상했던 것과 다른 광경을 마주했다.
성안은 그리 크지 않았고 성벽마다 거대한 화로가 얹어져 있어 정체 모를 요수 기름이 타닥타닥 타올랐다.
성안 대부분 공간은 각종 톱니바퀴 기계가 차지했고, 중간의 거대한 돌기둥 3개를 따라 나선형 계단 3개가 각각 성벽 위의 보루들로 이어졌다.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꽤 있었는데 각자 분주하게 움직이며 신양 수하들이 가져온 짐승들을 성의 우측으로 옮겼다.
오래지 않아 진홍색 장포를 입은 마족 사내 둘이 각각 한 손에 두꺼운 책자와 붉은 주사를 적신 붓을 들고 다가왔다.
“신양 대장, 많이도 잡아 오셨군요?”
미간이 검 끝처럼 튀어나온 둥근 얼굴 사내가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전록관(田祿官)님들 덕분입니다.”
신양도 마주 웃으며 답했다.
귀가 기다랗고 각진 턱을 지닌 전록관이 냉랭히 한립 일행을 훑었다.
“귀순 백성입니까, 아니면 투항 백성입니까?”
“제가 요청한 손님들이시고 청양성으로 들어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신분인지는 성주 대인을 만나 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규칙에 따르면 성에 들어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등급을 평가하는 겁니다. 이렇게 일을 처리하시면 안 될 텐데요?”
각진 얼굴의 전록관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다른 전록관이 서둘러 동류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신양 대장이 하시는 일이 못 미더울 게 있습니까? 성주께서 중시하시는 사냥대장 중 한 분이십니다. 성주님을 직접 뵌 다음에 평가해도 늦지 않아요.”
“…….”
각진 얼굴 전록관도 성주가 중시하는 사람이라는 말에는 더는 아무 소리 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약간 지체가 되어도 무방할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번에 가져온 사냥감들을 확인해 주시지요. 이건 제 작은 성의입니다.”
신양은 소매 속에 숨겨 두었던 요핵 두 개를 둥근 얼굴 전록관에게 은근슬쩍 건넸다.
“괜찮다는 데도, 항상 이러십니다.”
둥근 얼굴 전록관은 웃음 가득한 얼굴로 요핵을 받아갔다.
“성주님을 뵈러 가기 전에 잠시 쉬시지요.”
그들이 떠나고 신양이 한립과 석천공을 향해 말했다.
“저들은 뭐 하는 사람들이었습니까?”
“청양성에 머무는 전록관들입니다. 사양대의 수확이나 새로 성에 들어오는 성민을 기록하는 임무를 수행하지요.”
“귀순 백성과 투항 백성은 무슨 말인지요?”
“려 형께서는 청력도 좋으십니다. 귀순 백성은 지위가 약간 더 높아 성을 지키는 부대나 사냥부대에도 들어가 더 많은 자원을 받을 기회가 있지만, 투항 백성은 지위가 낮아 잡일밖에 하지 못합니다.”
“그럼 평가라는 것은…….”
“하하, 가면서 이야기 드리겠습니다!”
신양은 그들을 성 왼편으로 안내하며 이야기를 했다.
“청양성 규정에 따르면 새로 들어온 성민들은 평가를 받아 등급이 책자에 기록됩니다. 그럼 그걸 토대로 무슨 일을 할지 안배가 되고요. 하지만 두 분의 실력은 제가 직접 확인했기에 바로 성주께 보고를 올리고, 제 휘하에 두려 합니다. 두 분도 따로 떨어져 지내는 것은 원치 않으실 것 같아서요.”
“그렇게 하면 성의 규칙을 어기는 것 아닙니까?”
석천공이 걱정스레 물었다.
“규칙은 규칙이고 사람 사는 게 어디 그렇게 단조롭기만 합니까? 평가를 해서 두 분이 더 높은 성적이 나와 다른 부대로 가버리면 제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고요. 허나 평가가 필요할지 말지는 성주 대인의 의사를 따라야 합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려 형과 석 형의 실력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부대를 이끄는 신임 대장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때 가서 제가 추천을 해드렸던 일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하하하.”
네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세 개의 석문을 지나 산에 뚫린 원형 입구에 도착했다.
한립은 그제야 이곳이 소위 청양성이고, 아까 보았던 것은 성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굴 안쪽으로 커다란 사람 석상 두 개가 마주 보고 있었는데 외모가 인족과 거의 비슷한 대신 얼굴이 모호했다.
“성주님을 본 따 조각해 둔 것입니까?”
“틀리셨습니다, 려 형. 이 석상들은 아주 오래된 것이라 청양성이 생기기 전부터도 존재했지요. 이게 대체 누군지는 청양성 성주께서도 모르십니다. 현성의 성주이신 액회 대인 말고는 아무도 모를걸요?”
“그렇군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청양성 왼쪽 봉우리는 총 4층으로 나뉘는데 저희가 있는 곳은 주련층(鑄煉層)입니다. 갑옷이며 병장기를 만드는 곳이기도 하고 각종 수기단(獸奇丹)도 이곳에서 만들지요. 대부분 병장기와 단약이 모두 성주님께 귀속되고 그 분이 분배하십니다. 소량만 성안의 몇 안 되는 상가로 흘러 들어가 거래가 되고요.”
“다른 층들은요?”
“그 위층은 투항민들이 사는 곳이고, 다시 그 위로 귀순민이 생활합니다. 마지막 층에는 성주 대인의 성부가 있고요. 여러분은 일단 제집으로 가서 휴식을 취하시다 성주님을 뵈러 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한립은 포권을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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