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933화 (1,690/2,000)

1933화. 현성(玄城)

*

“당신들, 혹시 방금 바깥에서 들어온 사람들입니까??”

신양이 현규에서 빛을 거두고 물었다. 더이상 싸울 의지가 없다는 뜻이었다.

“맞습니다. 야양왕조 사람에 의해 적린공경 안으로 버려졌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어째서 우릴 공격하는 겁니까?”

한립이 신중히 말을 고르고 답했다.

“역시 그랬군요. 이거 참, 모든 게 다 오해였습니다! 저는 또 처음 보는 얼굴들이고 괴뢰를 데리고 다니니까 당연히 괴성 인물인지 알고 싸움을 걸었지 뭡니까.”

대답을 들은 신양은 확실히 표정이 온화해져 있었다.

그러나 한립은 석천공과 시선을 교환하며 여전히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그리 걱정할 것 없습니다.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우리의 적은 아닐 테니까 말입니다.”

“모든 것이 오해였다니, 저희도 사소한 일로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없던 일로 하시지요.”

석천공에게 전음을 보내 대화를 나눠본 한립이 공수를 해 보였다. 적린공경이라는 낯선 환경에서 적은 최소화하는 것이 좋았다.

“저는 신양이라 합니다. 두 분의 성함을 듣고 싶습니다.”

“려비우입니다.”

“석공이라 합니다.”

석천공은 특수한 신분 때문에 가명을 말했다.

“려 수사, 석 수사,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원래 싸우면서 친해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하하!”

통성명도 했겠다 신양이 화통하게 웃어버리자 분위기가 풀렸다.

“신 수사, 방금 말씀하신 괴성은 뭐 하는 곳입니까?”

“설명하자면 긴데, 요약해서 우리 적린공경 안에는 운 좋게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크게 두 세력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저와 아까 두 분이 보셨던 사람들은 현성에 속하고 나머지는 괴성에 속하지요. 두 세력의 관계가 그리 좋지 않아 제가 여러분을 만나자마자 공격한 것입니다.”

“그랬군요.”

미소를 띤 신양의 설명에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성과 괴성, 두 가지 이름에는 어떤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까?”

듣고 있던 석천공이 입을 열었다.

“두 분 다 예상은 하셨겠지만 적린공경에는 마기나 다른 힘이 흐르지 않아 이곳의 각종 인수들과 싸우려면 연체술을 익히거나 괴뢰와 같은 외적인 힘을 길러야 합니다. 우리 현성은 연체술에 치중하고, 괴성은 이름 그대로 괴뢰들을 부리는 이들로 이루어져 있지요.”

“역시 그럴 것 같았습니다.”

“적린공경은 환경이 워낙 험악해서 인수들 외에도 적잖은 위험이 존재합니다. 홀로 돌아다니면 생존하기 쉽지 않지요. 혹시 현성에 들어올 마음은 없으십니까? 이미 적잖은 현규를 뚫으셨으니 연체술을 익히시기에는 딱 좋을 텐데요.”

신양은 놀랍게도 만난 지 얼마 안 된 그들을 포섭하려 했다.

“현성에요?”

한립은 놀란 듯 물었지만 속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적린공경의 상황을 알아내려면 현성 아니면 괴성에 들어가야 했는데 신양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주니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겉으로 고민하는 척하며 암암리에 석천공에게 눈짓을 했다.

“저희가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이곳 상황을 모르니 간략하게 설명이라도 해주실 수 있겠는지요?”

석천공은 바로 확답을 주지 않고 물었다.

“현성은 방금 말씀드렸듯이 연체술을 위주로 하고, 액회 대인께서 성주로 계십니다. 그분의 연체술은 손으로 산봉우리를 만들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고, 현규도 천 개 넘게 뚫려 있어 우리 같은 현성 사람들이 그분의 비호 아래 무탈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현규를 천 개 넘게요?”

이번에는 한립도 놀라 헛바람을 들이켰다. 안색이 달라진 석천공은 그보다 더 놀란 상태였다.

연체술 수련은 고되어서 우수한 육체를 타고난 성역 사람들도 풍부한 자원 속에서 현규 800개 정도를 뚫은 이가 한 손가락에 꼽혔다.

솔직히 현규를 천 개 이상 뚫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도 못했다.

“하하, 워낙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나신 분이라서요. 우리 같은 사람이야 평생 노력해도 그분 성취의 절반도 따라가기 힘들 겁니다. 제가 볼 때 두 분도 자질이 뛰어나고 원대한 목표를 지니고 계실 텐데, 현성으로 들어와 깊이 있게 연체술을 탐구해 보시지요.”

신양은 두 사람의 반응에 잔잔히 웃음 지었다.

“신 수사, 저희가 잠시 고려할 시간을 가져도 되겠습니까?”

한립이 숙고를 하는 척하며 묻는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해 고개를 들어보니 신양이 갑자기 심각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맑던 하늘이 언제부터인지 어둑해져서 비구름이 몰려들 것 같았다.

“신 수사, 무슨 일입니까?”

석천공이 하늘이 심상치 않자 얼른 물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올해는 어찌 이리 빨리…….”

신양은 그의 물음도 듣지 못한 듯 혼자 중얼거렸다.

“신 수사! 괜찮으십니까?”

“예?”

한립이 목소리를 높이자 그제야 신양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들을 돌아보았다.

“아아, 당연히 됩니다. 천천히 고민하셔도 되고말고요. 그런데 이곳은 오래 머물 수 없을 듯하니 저를 따라 일단 가시지요.”

그들의 말에 신양은 약간 초조한 기색으로 답하고 있었다.

“저 먹구름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석천공이 미간을 좁혔다.

“평범한 먹구름이 아니라 적린공경 특유의 재앙인 비풍(贔風)이 도래할 조짐입니다. 매년 있는 일인데 올해는 평소보다 빠르군요! 사람의 힘으로는 대항할 수 없는 바람이라 어서 저와 동료들이 인근에 마련해 놓은 지하 거점으로 숨어야겠습니다.”

“비풍!”

석천공이 신양의 말을 듣고 표정이 변했다.

“석 수사, 비풍에 대해 들은 적이 있으십니까?”

한립은 전음으로 물었다.

“셋째 형님이 갖고 계신 오래된 서적에서 관련 기록을 본 적 있습니다.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지는 않지만 아주 강력한 풍재(風災)라더군요.”

“폐가 되지 않는다면 신 수사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한립은 결정을 내리고 신양에게 답했다.

“폐는 무슨. 야양왕조에 의해 여기로 유배된 사람들끼리 서로 도와야지요. 자, 서둘러 갑시다!”

신양은 급히 길을 재촉하며 웃음 지었다.

“신 수사, 먼저 제 괴뢰에 걸린 금제부터 풀어주시지요.”

한립이 해 도인을 내밀며 말했다.

“아! 제가 그걸 까먹을 뻔했습니다.”

아차! 싶었는지 자신의 이마를 때린 신양이 해 도인 팔꿈치 관절에서 금색 바늘을 쑥 뽑아냈다.

머리카락처럼 얇은 장침에는 미세한 문양들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용수침(龍鬚針)입니다. 현성의 높으신 분이 개발한 것인데 괴뢰를 상대하기 제격이지요.”

신양은 빠르게 해도인 몸 곳곳의 관절에서 금색 바늘을 뽑아냈다.

신양이 아홉 번째 바늘을 뽑아냈을 때 해 도인이 자연스럽게 일어섰다.

그걸 본 신양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왜 그러십니까, 신 수사?”

“용수침에 구금을 당했던 괴뢰는 보통 침을 뽑아도 한동안 휴식을 취해야 천천히 그 기능이 회복됩니다.”

“아마 구금당했던 시간이 길지 않아서 그런 모양입니다.”

한립은 대충 얼버무렸다.

“가시죠!”

신양도 더는 길게 이야기를 하지 않고, 금색 바늘들을 넣고 빠르게 발을 놀렸다.

한 시진이 지나 네 사람은 어느 산골짜기에 들어섰다.

골짜기 자체가 평지보다 움푹 들어가 있고,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일부러 찾아오지 않으면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점차 하늘의 먹구름이 짙어지고 그 안에서 검은 뇌전들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시작된 광풍은 휘이이이 하는 무서운 소리를 내며 불었다.

아직 바람의 세기는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뼈를 시리게 하는 한기가 몰려와 바람을 거슬러 움직이는 그들의 표정을 어둡게 했다.

겨우 목적지에 도착한 신양은 한립 일행을 산 벽으로 데리고 가서 동굴을 가리고 있던 회색 바위를 옆으로 밀어 치웠다.

“신 형님, 드디어 돌아오셨습니다! 엇, 저들은…….”

붉은 머리를 한 청년이 끝 모를 어두컴컴한 통로에서 튀어나와 한립 일행을 향해 경계심 어린 눈초리를 보냈다.

“려 수사와 석 수사이다. 막 유배를 당해 이곳에 온 분들이지. 마침 비풍이 시작되었기에 잠시 몸을 피했다 가라고 모셔온 길이다.”

“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어서 안으로 들어와 쉬시지요. 지금은 비풍이 제대로 불기 전이라 이렇지만, 곧 10배 이상 강한 바람이 불 것입니다.”

‘10배!’

웃으며 그들을 향해 인사하는 홍발(紅髮) 청년의 말에 한립은 흠칫 놀랐다.

지금도 맨몸으로 견디기 어려운데 10배면 목숨을 잃지는 않아도 거의 초주검이 될 터였다.

신양을 따라 들어가니 쌀쌀하기는 해도 산 벽이 가로막고 있어 바깥보다는 따뜻했다.

“방패, 입구를 단단히 막고 더는 지키고 있을 것 없으니 아래로 내려가자꾸나. 비풍의 한기가 몸에 스며들면 없애기 어려우니 말이다.”

“예!”

홍발 청년은 신양의 명에 감동한 기색으로 얼른 입구를 바위로 다시 막아두고 그들을 따라나섰다.

구불구불하게 아래쪽으로 이어진 산속 동굴은 처음에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듯했으나 그 후로는 사람들이 인공적으로 뚫어 백여 장이 더 이어졌다.

아직 그 끝에 이르지 않았는데도 공기가 훨씬 훈훈해져 몸의 긴장이 풀어졌다.

“신 수사, 저희를 들여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립과 석천공이 신양을 향해 인사를 했다.

그를 만나지 못했으면 비풍이 오는지도 모르고 큰일을 당할 뻔했다.

“아닙니다. 아까 말했듯이 다 같은 처지인데 당연히 도와야지요.”

신양은 크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네 사람은 일각 정도 더 아래로 내려가 가장 밑바닥인 커다란 동굴에 도착했다.

평평한 바닥에 타원형 돌 탁자와 8개의 돌의자가 놓인 넓은 공간 곳곳에는 간단하게 석실이 파여 있었다.

“려 수사, 석 수사, 비풍은 한 번 불기 시작하면 한 달은 계속됩니다. 그동안 편안하게 쉬시면서 현성에 들어올지 결정을 내리시지요.”

“알겠습니다.”

석실은 각각 주인이 있었기에 한립과 석천공은 들어가지 않고 동굴 한쪽에 적당한 곳을 찾아 앉았다.

신양도 그들을 보고 석실로 들어가지 않고 바닥에 자리를 잡았다.

거의 산을 사이에 두고 있음에도 곳곳의 통로를 통해 바람 소리가 들리고 지면이 흔들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틈틈이 산 전체가 흔들려 돌부스러기 같은 게 떨어지기도 했다.

콰콰쾅!

바로 옆에서 거대한 종을 울리는 것처럼 비풍이 세상을 뒤흔들었다.

바깥 상황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한립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적린공경 안에서 몇 달 동안의 생활은 인수들의 습격받는 것 말고는 순탄하다 할 수 있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려 수사, 현성에 들어갈 생각입니까?”

석천공이 가까이 붙어 앉아 전음을 보내왔다.

“수사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이제 보니 적린공경 안이 생각보다 더 위험합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들쑤시고 다니는 것보다는 현성에 들어가 정보를 구하는 것이 낫겠어요. 다만 현성과 괴성이 적대관계라니 이곳에서 자령 수사를 찾지 못하면 괴성으로 넘어가 수소문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어차피 적린공경 안의 세력이 현성 아니면 괴성이라니 일단은 현성을 택하는 것이 이득일 듯합니다.”

“저도 비슷한 생각이니 려 수사가 결정하시지요. 이야기를 들으니 현성이 어떤 곳일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까?”

“신양이 현성 성주인 액회 대인이 현규 천여 개를 뚫었다지 않았습니까? 현성에는 수많은 체련 공법이 있을 겁니다. 야양왕조의 황가 창고에도 없을 수많은 현규수련법들을 가지고 바깥으로 나갈 수만 있다면 앞으로 셋째 형님이 보위에 오를 때 보탬이 되지 않겠습니까!”

석천공은 눈을 반짝였다. 그의 말에 한립은 웃음이 절로 나왔다. 상의를 마친 한립은 자리에서 일어나 신양에게 걸어갔다.

“려 수사.”

신양도 그들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기에 바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상의를 해보았는데 현성의 일원이 되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 전에 묻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지만 말입니다.”

한립은 정중히 말을 꺼냈다.

“말씀하시지요.”

“현성에 들어가려면 대가를 치러야 하거나 아니며 모종의 계약이나 규칙이 있는 것인지요?”

“그게 걱정이셨다면 안심하셔도 됩니다! 액회 대인께서 현성을 건설하신 목적은 모두 모여 서로를 돌보는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연히 가입에 대가가 따르지 않고 규칙이라면 딱 하나뿐입니다. 한번 현성에 들어온 이상 배신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알아들었습니다. 그것 외에 한 가지 더 가르침을 구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제 일행인 자령이라는 여수사가 수십 년 전에 적린공경으로 유배를 당했습니다. 혹시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자령이요? 흠,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신양이 곰곰이 기억을 더듬다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너무 실망하지는 마시고요. 현성은 주성(主城) 외에도 몇 군데의 부속 성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부속성인 청양성(靑羊城) 사람이라 어디에 누가 있는지 다 알지 못합니다. 적린공경 안에는 전송진이 통하지 않아 성끼리 교류가 잘 안 되는 편이라서요.”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