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화. 해 도인
*
한립은 사내들의 몸에서 현규가 빛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들 중 가장 부족한 자가 열댓 개의 현규를 뚫었고, 우두머리로 보이는 금강석처럼 단단한 흑명 거한은 못 해도 오륙십 개의 현규를 지닌 듯했다.
금강 거한의 현규 위치는 특이해서 앞가슴과 배 외에 나머지 절반가량은 오른팔에 집중되어 있었다.
“적린공경에 수감된 죄수들일까요? 드디어 찾아냈습니다!”
석천공이 기뻐하며 소곤거렸다.
“아무 대책 없이 모습을 드러내기보다는 상황을 좀 지켜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침음하던 한립이 말했다.
뼈 무기들은 생긴 것은 조잡해 보여도 무척 날카로워서 사내들이 쉼 없이 도망 다니며 공격하자 호랑이 괴수의 단단한 비늘도 갈라져 피가 튀었다.
상처가 늘어날 때마다 호랑이 괴수의 움직임도 느려졌다.
크헝!
사내들의 포위 공격에 온몸이 피로 물든 호랑이 괴수가 포효하더니 두 눈이 홍등처럼 붉게 반짝이고 등의 뼈 가시들이 웅웅 진동했다.
“검린호(劍鱗虎)가 절기를 쓰려 합니다!”
“흐핫!”
한 사내의 외침에 우두머리 금강 거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푸른 연기처럼 변해 넓적한 거대 뼈 검으로 호랑이 괴수의 어깨를 내리쳤다.
호랑이 괴수는 어깨가 갈라지며 다시 한번 괴성을 질렀고, 짐승의 등에서 뼈 가시들이 엄청난 속도로 튀어나와 금강 거한을 노렸다.
슈슈슉!
거대 호랑이의 뼈 가시 공격을 진작에 경계하고 있던 금강 거한이 넓적한 뼈 검으로 허공을 찔렀다 거두며 대량의 검 그림자들을 만들었다.
연달아 금속성의 충돌음이 울려 퍼지고 뼈 가시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하얀 검 그림자들도 흩어졌지만, 거한은 뒤로 물러나지 않고 쿵! 하고 땅을 박차 올랐다.
쿠쿵.
땅이 쩍쩍 갈라지고 금강 거한의 잔영이 사라졌다가 호랑이 괴수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
동시에 그의 오른팔에서 현규들이 반짝이며 실낱같은 수정빛들이 흘러나와 호랑이 괴수의 머리로 떨어졌다.
뼈가 갈라지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금강 거한의 오른팔이 호랑이 괴수의 머리를 뚫고 들어가 어깨까지 닿아 있었다.
크하항!
호랑이 괴수는 외마디 절규소리를 지르며 드디어 버티지 못하고 땅에 쓰러졌다.
그들의 전투를 살펴보던 한립은 동공을 수축했고, 석천공도 표정이 달라져 그와 눈을 마주쳤다.
호랑이 괴수의 실력이 상당해서 그들이 맞붙었어도 금강 거한만큼 쉽게 이길 수는 없었다.
쓰러진 짐승을 두고 나머지 사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금강 거한은 붉고 하얀 액체가 묻은 손을 털어내고 주먹 크기의 하얀 요핵을 꺼내 허리춤의 가죽 주머니에 넣었다.
“신 형님의 병과현공(兵戈玄功)이 나날이 강력해집니다! 검린호도 일격에 죽이시고요. 오래지 않아 공적점으로 사성명패(四星銘牌)를 받으실 수 있겠어요. 그때 가서 저희를 잊으시면 안 됩니다?”
뺨에 소뿔 모양의 문신을 한 청년이 금강 거한의 백골을 주워와 양손으로 바치며 웃음 지었다.
다른 이들도 뼈 가시들을 주우며 아첨을 하고 있었다.
“하하, 나 신양을 도와 앞으로도 열심히 일해 준다면 너희의 공을 잊지 않을 것이다.”
금강 거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너희는 검린호를 토막 내서 쓸만한 성골(星骨)을 모아 거점으로 돌아가라. 오늘 사냥은 여기까지다.”
“신 형님은요?”
신양의 말에 문신 청년이 의아해했다.
“난 처리할 일이 있으니 따를 것 없다.”
신양은 피식 웃음 지으며 고개를 돌려 한립 무리가 숨어 있는 바위 쪽을 바라보았다.
“이런, 들켰습니다!”
한립은 바로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석천공과 해 도인도 마찬가지였다.
세 사람은 빠르게 산맥 깊은 곳으로 달아났다. 지형이 복잡해서 신양이 쫓으려 해도 어려움이 있을 터였다.
그러나 신양은 코웃음을 치며 잔영을 남기고 그들을 쫓았다.
* * *
민첩하게 산을 넘은 한립 일행은 어떨 때는 맨손으로 절벽을 타고 어떨 때는 낮은 언덕을 뛰어넘었지만, 신양의 속도가 그들보다 빨라 쌍방의 거리가 줄어들었다.
30리, 20리, 10리…….
“달아날 수 없을 듯합니다.”
한립은 신양의 빠른 이동을 감지했지만 당황한 낯은 아니었다. 석천공과 시선을 교환한 그는 산 사이의 비교적 평탄한 땅에 멈춰 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색 신영이 그들과 멀지 않은 곳에서 멈춰 섰다.
“도망치지 않고 어찌 멈춰 선 것이냐?”
신양은 마치 쥐새끼들을 바라보는 고양이라도 되는 듯 포식자의 눈을 하고 있었다.
“수사, 우리는 우연히 당신들의 전투를 목격했을 뿐 악의를 가지고 접근한 것은 아닙니다.”
한립이 공수를 하고 사정을 설명했다.
“괴성(傀城) 것들아, 그런 소리를 하려거든 괴뢰나 숨겨 놓고 하질 그러느냐? 너희는 죽은 목숨이다!”
해 도인을 힐끔 본 신양이 어이없다는 듯 웃고 매처럼 날아올라 오른손을 뻗었다.
콰쾅!
주변 수십 장의 공기가 들끓고 눈에 보이는 하얀 기류가 만들어졌다. 거대한 하얀 손바닥 모양을 이룬 기류가 한립 일행 위로 떨어졌다.
한립은 신양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생각하다 몸에서 36개의 빛을 발한 뒤 주먹을 뻗었다.
그리고 석천공은 검은 장도로 거대 손을 베었다.
퍽! 쾅!
하얀 거대 손은 구멍이 뚫리고 기다랗게 베였지만 남은 부분이 해 도인을 잡아 번개처럼 신양 곁으로 돌아갔다.
해 도인은 아무렇지 않게 거대 손에 잡혀가 오히려 신양을 놀라게 했다.
안색이 달라진 한립이 직접 뛰어들어 신양 옆으로 이동한 뒤 양 주먹을 독사처럼 내질러 상대의 가슴을 노렸다.
석천공도 바람 소리를 내며 다른 쪽에서 신양에게 접근해 검은 장도로 어깨를 내리쳤다.
신양은 두 사람의 협공에도 무표정한 얼굴로 왼손으로 한립의 양 주먹을, 오른손으로는 석천공의 검은 장도를 막았다.
파도와 같은 힘이 그의 팔을 타고 내려가 한립과 석천공을 향해 밀려들었다.
신양의 왼팔도 한립의 주먹과 부딪쳐 천둥소리처럼 커다란 타격음을 냈다.
‘윽…….’
두 주먹이 뜨거워진 한립은 양손의 뼈가 부러진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동시에 신양의 오른손 현규들이 빛나며 오른팔 전체를 보광으로 뒤덮어 절세의 무기처럼 만들었다.
쨍강!
석천공의 검은 장도가 매끈한 면을 남기고 둘로 쪼개졌다. 화들짝 놀랄 만한 일이었다.
검은 장도는 품계가 있는 마기였고, 극히 좋은 재료를 써서 무척 단단했다.
신양의 오른팔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하얀 잔영을 남기며 석천공의 심장을 향해 뻗어 나갔다.
우웅!
기겁한 석천공이 바닥을 힘껏 박차고 가슴과 배에 사십여 개의 은빛을 일으켜 두꺼운 은색 수정막으로 전신을 보호했다.
그의 진극막은 한립과 달리 고슴도치처럼 뾰족뾰족하게 무언가가 튀어나와 있어 굉장히 위험해 보였다.
신양은 석천공의 고슴도치 막을 무시한 채 오른손으로 그대로 석천공의 가슴을 찔러 들어갔다.
콰직!
수정막은 종잇장처럼 찢어졌고 고슴도치 같은 가시들도 신양의 오른팔을 어쩌지 못했다.
쾅!
석천공은 엄청난 충격에 산 벽으로 날아가 커다란 구멍을 남기고 처박히고 말았다.
진극막이 길게 갈라져 가슴에 뼈가 드러날 만큼 심각한 상처가 생겨 선혈이 솟구쳤다.
몸을 비틀고 일어난 석천공은 눈앞의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 자각하고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한립의 표정도 가라앉았다.
두 사람을 격퇴한 신양도 바로 공격을 재개하지 않고, 석천공이 든 검은 장도와 해 도인을 번갈아 보다가 오른손에 묻은 핏자국으로 시선을 돌렸다.
팔을 들어 코를 킁킁거린 그는 뭔가에 놀란 얼굴이었다.
그리고 한립은 무슨 금제에 걸린 듯 꼼짝하지 못하는 해 도인을 보고 있었다.
한립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신양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해 도인을 구하지 않고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쥔 한립의 몸에서 으드득거리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고 가슴과 배의 서른여섯 개 현규가 강력한 빛을 뿜었다.
금빛에 휩싸인 그의 몸에서 거원 허상이 떠올랐다가 흡수되었고, 피부에 기다란 금색 털들이 자라며 몸집이 몇 배로 커졌다.
광폭한 기운이 거원의 몸에서 터져 나와 주변 공기들을 거품처럼 터트렸다.
“려 수사!”
석천공은 한립의 변신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눈썹을 끌어올린 신양은 입가에 찬사를 뜻하는 미소를 짓더니 손가락을 까딱이고 있었다.
크아앙!
금색 거원이 두 주먹으로 연달아 허공을 때렸다. 그러자 금색 주먹 허상들이 비처럼 신양에게 떨어졌다.
그걸 본 신양은 뜻밖에도 고개를 피식 웃으며 커다란 왼손을 펴서 허공을 내리쳤다.
금색 주먹 허상들은 앞에 장벽이 나타나기라도 한 듯 그대로 멈춰 섰다.
퍼퍼퍼펑!
주먹 허상들이 터져나가고 그 여파가 수백 장을 퍼져나가 허공을 웅웅 울렸다.
그런데 갑자기 금색 거원이 보이지 않았다.
다음 순간, 신양의 뒤에서 금색 거원이 귀신처럼 나타나 양 주먹으로 신양의 등을 가격했다.
인상을 찡그린 산양은 휘릭 몸을 돌리며 보광이 어린 오른팔을 거원의 양 주먹을 향해 뻗었다.
그 순간 현규들을 반짝인 거원의 방대한 몸이 급격히 몇 배로 줄어들어 원래의 체구로 돌아갔다.
한립은 사람의 모습으로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추고 있었다.
예기치 못한 변화에 신양의 오른팔은 허공을 갈랐고, 한립은 그 틈을 타서 민첩하게 신양의 옆구리를 스쳐 지나가 해 도인을 안아 들었다.
“나를 속였구나!”
그걸 보고 열이 받은 신양이 방향을 틀어 전광석화처럼 두 팔을 움직였다.
우드득!
두 팔이 배로 길어져서 순식간에 한립을 허리를 찔러 들어갔다.
손가락 끝에서 손톱들이 하얀빛을 번득였고, 특히 신양의 오른팔 손톱들이 눈부신 빛을 머금어 주변 공기를 물결치게 했다.
바깥세상보다 훨씬 강한 공간압력을 지닌 적린공경 안에서 신양의 오른손은 공간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한립은 급히 진극막을 일으켰으나 신양의 손아귀를 피할 수 없었다.
이때 그의 몸에서 천룡, 진봉, 청란, 현무 등 일고여덟 가지의 진령 허상들이 줄줄이 떠올라 다양한 색깔의 빛을 반짝였다.
신양의 열 손가락이 갑자기 주르륵 빛의 장막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갔다.
한립은 그 틈에 위쪽으로 펄쩍 뛰어올라 신양을 피하고 뒤로 물러나 상대를 주시했다.
여러 가지 빛의 장막이 사라지자 한립의 얼굴은 창백하게 변해있었다. 무리해서 경칩 12결을 운용한 결과였다.
선령력을 일으킬 수 없는 상황에서 체내의 기혈의 힘을 이용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신양도 제자리에 서서 그를 쫓지 않고 이채를 띠고 그를 훑는 중이었다.
“려 수사, 괜찮으십니까?”
석천공이 한립 옆으로 달려와 부끄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마족 황실의 무궁무진한 지원을 받아 현규를 4, 50개나 뚫은 자신이 실제 전투에서는 한립보다 훨씬 못하다는 게 부끄러웠다.
“괜찮습니다.”
한립은 손으로 허리춤을 훔쳐 피를 닦아 냈다.
깊지는 않았지만 다섯 줄기의 기다란 상처가 나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저 죄수의 실력이 너무 강하니 어찌합니까. 정 안 되겠으면 셋째 형님이 주신 수단을 써서 저자를 죽이겠습니다.”
전음을 보내는 석천공의 눈빛에 흉악한 기운이 감돌았다.
한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직 연신술이라는 비장의 수를 쓰지 않았기에 신양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