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화. 종적을 감추다
*
“알겠습니다!”
석천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아 소매로 요핵을 깨끗이 닦고는 꿀꺽 삼켰다.
잠시 후, 눈을 뜬 그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려 형도 이렇게 요핵을 삼키지 않았습니까? 어째 저는 별 느낌이 없습니다.”
“……요핵의 크기가 너무 작아 그럴 겁니다. 다른 짐승들을 많이 잡아먹는 요수일수록 요핵이 크고 가지고 있는 성진의 힘도 진할 겁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밤에 몰려나온 짐승들을 보아하니 아까 본 도마뱀과 지네 요수가 이 섬에서는 가장 강자였던 듯합니다.”
“어차피 이곳을 떠날 생각이었으니 앞으로 기회가 있을 때 시도해 보면 될 것입니다.”
“맞습니다, 눈 나쁜 짐승이 달려들기만을 기다리면 되지요!”
석천공은 손을 비비면서 웃음 지었다.
다음 날 아침.
한립은 섬 변두리에서부터 부행조를 타고 검은 안개 구역으로 뛰어갔다.
펑! 펑! 펑……!
부행조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폭음이 울리고 흙먼지가 일어났다.
부행조는 점점 빨리 달리다 섬을 벗어나 검은 안개 구역에 이르자 두 날개를 펼쳐 힘껏 파닥이기 시작했다.
묵직한 압력이 도처에서 밀려들었지만 부행조 발아래 기혈에서 부단히 기운이 분출되고, 두 날개의 힘으로 추진력을 얻어 고꾸라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안개 구역을 건너는 것이 힘든데 한립까지 태운 부행조는 어제보다 확실히 느린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새의 등에 바짝 붙어 몸을 깃털 아래 숨긴 한립은 온몸의 근육이 경직될 만큼 긴장하고 예기치 못한 변고에 대비했다.
두 섬의 거리는 그의 예상보다 가까워서 부행조는 능숙하게 그를 다른 섬 연안에 내려 주었다.
부행조 등에서 풀쩍 뛰어내린 한립은 바로 공간압력이 가중되는 것을 느꼈다.
가볍게 숨을 고른 그는 잠시 시간을 갖고, 부행조를 돌려보내 석천공과 해 도인을 순서대로 태우고 돌아오게 했다.
그들도 섬에 내리자 공간압력의 변화에 인상을 찡그렸다.
“이전 섬보다 면적도 크고 공간압력도 증가했습니다.”
석천공이 입을 열었다.
“그만큼 섬에 사는 짐승들의 실력도 강하겠지요. 이동하는 동안 조심하는 게 좋겠습니다.”
한립은 고생한 부행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그래도 려 형의 부행조 덕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다른 부행조들을 더 잡으면 이동속도를 높일 수 있겠어요. 어서 유민들을 찾아야 자령 수사의 소식도 알아볼 것 아니겠습니까.”
“의식으로 살펴보니 수십 리 밖의 협곡에 어제 보았던 부행조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바로 출발하시지요.”
한립의 제안에 석천공과 해 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나절 뒤 그들은 각자 부행조를 한 마리씩 타고 협곡을 날아올라 수백 마리 부행조들의 추격을 받으며 중앙으로 이동했다.
* * *
어느새 두 달이 지나갔다.
바위가 겹겹이 솟은 산에 3마리 부행조가 모여 쉼 없이 바닥을 쪼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 바위 아래, 청회색 비늘 갑옷을 입은 뾰족한 상아를 지닌 코끼리 두 마리가 쓰러져 입에서 피를 쏟고 있었다.
두 마리 코끼리 모두 머리에 구멍이 뚫려 요핵이 제거되어 있었다.
바위에 등을 돌리고 앉은 한립과 석천공은 현규에서 빛을 반짝이며 눈을 떴다. 해 도인은 무표정하게 먼 곳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비늘 갑옷 요수들은 체내의 요핵이 체내의 성진의 힘을 늘려주고 몸을 강화해주기는 하지만 현규를 뚫을 만큼 그 효과가 강력하지는 않군요.”
길게 숨을 내쉰 한립이 말했다.
“그렇기는 해도 요핵을 잔뜩 먹었더니 도움이 되기는 합니다. 천지 공간의 압력이 처음보다 훨씬 견디기 쉬워졌어요. 적린공경에 들어와 요수들을 사냥하고 요핵을 삼키지 않았으면 움직이기 어려웠을 겁니다.”
“면적이 더 큰 육지에 다다르면 다니기 더 쉬워질 테지요.”
“려 수사, 전갈 무리가 또 쫓아옵니다. 이 속도면 1각도 걸리지 않아 이곳에 도달하겠습니다.”
이때 해 도인이 경고했다.
“끈질긴 놈들, 그 수가 많지만 않았어도 진작 도륙을 내는 건데 말입니다.”
“곧 육지입니다. 거기까지는 쫓아오지 못할 테니 신경 쓰지 말고 가시지요. 자, 출발합시다.”
짜증을 부리는 석천공을 보고 한립이 웃음 지었다.
* * *
몇 개월 뒤 이른 아침.
적갈색 사막이 시야 끝까지 펼쳐진 곳에서 검은 비늘이 돋은 짐승이 죽은 도마뱀의 사체를 뜯어 먹고 있었다.
검은 짐승은 어깨를 움찔하고 고개를 들어 황야 변두리의 뿌연 안개 속을 쳐다보았다.
안개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검은 짐승은 그걸 보고 한참을 도망가다 뒤를 돌아보았다.
무우…….
굵직한 울음소리와 함께 거목 크기의 흑청색 거대 거북이 검은 모래를 해치고 나타났다.
거북의 등딱지는 기이하게 갈라져 있었고 특별한 광택이 나서 햇볕 속에서 청록색 빛을 반사했다.
거대 거북의 등딱지 위에 세 사내가 타고 있었다.
푸른 장포를 입은 평범한 용모의 청년과 보라색 옷을 걸친 백발의 준수한 청년 그리고 도사 복장을 한 사내.
검은 비늘이 돋은 이리는 감정 없는 눈으로 주위를 살피다 도사 복장의 사내와 눈을 마주치자 어깨를 웅크린 채 먹다 남은 고기를 포기하고 멀리 달아나 버렸다.
거북에 탄 셋은 당연히 한립, 석천공 그리고 해 도인이었다.
몇 개월 만에 군도를 벗어나 갈곡대륙(褐谷大陸)에 이를 수 있었다.
강력한 기운을 풍기는 생령이 사는 곳은 피했지만, 소형 비늘 짐승, 인수(鱗獸)들의 습격은 백 번 이상을 당했다.
대형 인수들이 습격한 때도 있었기만 대부분 부행조의 뛰어난 달리기 실력으로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피할 수 없을 때는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중 두 번의 전투가 위험했는데, 첫 번째에는 격전을 치른 끝에 천갑산 류의 거대 짐승 두 마리를 죽여 꽤 큰 요핵을 구할 수 있었다.
다른 한 번은 땅속에서 갑자기 습격해온 거대한 비늘 지렁이에게 부행조 세 마리를 전부 잡아먹히고, 한립 일행은 장장 보름을 도망쳐 거대 짐승의 영역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들은 그 후로 한 달 넘게 걸어 다니다가 한립이 ‘답공구(踏空龜)’라 이름 지은 짐승을 만났다.
답공구도 부행조처럼 천지의 압력에 적응해 검은 안개 구역을 선계의 바다거북처럼 지나갈 수 있었다.
이 거북의 특수한 능력을 이용했기 때문에 그들은 마지막 섬과 대륙 사이의 천장 규모의 검은 안개 구역을 지나 이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금 그들이 거북 등에서 말이 없는 것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대륙에 이른 뒤 열 배 이상으로 증가한 중압감에 묵묵히 적응하고 있어서였다.
한립은 숨쉬기가 벅차고 오장육부가 쪼그라드는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고, 석천공 역시 몸 곳곳에 약간의 비늘을 일으켜 마족 본체의 모습을 일부 드러내고서야 겨우 견디고 있었다.
괴뢰의 몸인 해 도인은 상대적으로 그들보다는 견디기 쉬워했다.
한립은 대륙에 이른 뒤, 의식에 대한 제약도 강해져서 겨우 7, 8리까지밖에는 살필 수 없었다.
이제껏 한 번도 유민을 만난 적이 없고, 자령의 흔적도 찾을 수 없자 그도 일말의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비경 안의 환경이 그의 생각보다 험악한데 수행을 전혀 사용할 수 없는 이곳에 자령이 버려졌다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한립은 문득 눈썹을 끌어올리며 그의 통제를 받는 답공구를 멈춰 세웠다.
“려 형, 또 습격인 겁니까?”
석천공은 그가 멈춰 서자 의아해했고, 해 도인도 그를 보고 있었다. 한립은 석천공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멀리 야트막한 산 하나를 바라보았다.
팍!
석천공이 그를 따라 산을 보다가 입을 열려 했을 때, 한립은 먼저 손을 들어 거북의 등딱지를 때렸다.
의식의 힘으로 통제를 받는 탑공구는 즉시 떠올라 허공을 가르는 배처럼 매끄럽게 날아갔다.
작은 산을 앞두고 한립은 거북 위에서 뛰어내려 땅에 쿵! 하고 떨어졌다.
거대한 압력이 느껴졌지만 그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작은 산을 향해 뛰어갔다.
그걸 본 석천공이 해 도인과 시선을 마주치고는 차례로 거북의 등에서 내려 한립의 뒤를 쫓았다.
작은 산 중턱에는 사람 절반만 한 동굴이 숨겨져 있었고, 한립은 그곳을 향해 뛰었다.
해 도인보다 먼저 도착한 석천공이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한립이 이미 허리를 굽혀 안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급히 그를 따라갔다.
작은 통로를 지나자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작은 집 두 개를 합쳐 놓은 것처럼 넉넉한 공간에 위로 몇 개의 커다란 구멍들이 뚫려 있어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한립은 동굴 바닥에 쪼그려 앉아 네 구의 시체 중 하나를 살피고 있었다.
가까이 걸어간 석천공도 시체들을 보며 그중 2개가 사람과 흡사한 괴뢰의 잔해로 머리통이 박살 나고 가슴이 뚫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머지 진짜 시체들은 헐벗은 상반신에 회색 비늘이 돋아 있었다. 죽은 지 오래되어서인지 수분이 증발해 바싹 말라 있었다.
“이게…….”
해 도인이 마지막으로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유배된 유민들 같습니다.”
석천공이 중얼거렸다.
“석 형, 뭔가 알아내신 게 있습니까?”
한립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먹을 꽉 쥐고 물었다.
“사람도 둘, 괴뢰도 둘인데 시체에 난 상처로 보아 서로를 공격한 것 같습니다.”
“제 짐작도 같습니다. 이들이 싸우게 된 이유는 아마 누군가를 차지하기 위해서일 거고요.”
“누군가라면…… 사람을 두고 싸웠단 말입니까?”
“자령이 남긴 면사를 찾았습니다.”
한립은 꽉 쥐고 있던 손을 풀어 검은색 면직물로 된 여인의 면사를 보여주었다.
“어떻게 자령 수사의 물건이라 확신하십니까?”
“면사에 피가 남아 있었습니다. 이 기운을 제가 잘못 알아보았을 리 없지요. 두 죄수가 그녀를 두고 싸웠으니 그녀는 그들이 속한 어느 세력에 의해 납치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시체를 보아 죽은 지 오래된 것 같은데, 자령 수사는 어디에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지나온 길에서는 어떤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으로 봐서는 흑수역 쪽 입구로 적린공경에 들어온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럴 지도요. 국 부인이 자령의 행방을 말해준 것만으로도 셋째 형님 체면을 살려준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된 것인지는 일부러 말하지 않았을 겁니다.”
한립이 한숨을 쉬자 석천공도 근심을 드러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구를 지키는 이가 사실대로 말할 것 같지 않아 묻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그래도 흔적을 찾았으니 곧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맞는 말씀입니다. 대륙에 도착했으니 언젠가는 찾을 수 있겠지요.”
* * *
보름 후, 세 사람은 기복이 심한 산맥 지대에 이르렀다.
그곳은 답공구를 타고 이동하기에 적합하지 않아 한립은 어쩔 수 없이 거북에 대한 의식 통제를 거두고 풀어주었다.
그들은 걸어서 길을 가다 어느 협곡에 도착했다.
가장 앞서 걷던 한립의 얼굴에 희색이 떠올랐다.
“왜 그러십니까?”
석천공이 그걸 눈치채고 묻자 한립이 손가락을 입에 얹고 조용히 하라는 눈짓을 했다.
그리고 좌측 전방으로 몸을 날린 한립을 따라 석천공과 해 도인이 따라붙었다.
빠르게 십여 리 거리를 달려 작은 산의 산봉우리에 오른 그들은 바위에 몸을 숨기고 멀리 산 사이의 평지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서는 쿵쿵거리는 굉음과 먼지가 일고 있었다.
호랑이 괴수가 암갈색 비늘 갑옷을 두르고 굵직한 네 다리에 달린 발톱을 낫처럼 휘둘렀다.
특이하게도 등에 9개의 검은 뼈 가시가 튀어나온 짐승이었다.
괴수와 싸우는 8명의 사내들은 피부색이 진하고 피부가 두꺼웠으며 체격이 유난히 커서 한립보다 머리 두세 개는 더 커 보였다.
단출한 회색 뼈 갑옷을 걸치고 뼈로 만든 검이나 병장기를 든 사내들은 동작이 아주 민첩해서 호랑이의 공격을 잘 피해 다녔다.
호랑이 괴수도 속도가 느리지 않았는데, 몸에서 빛이 나는 뼈 갑옷을 입은 사내들의 움직임은 잔영이 남을 정도로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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