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화. 멀고 먼 길
*
흑수역 내 암녹색 산들이 잇달아 이어진 산맥에 누른 모래 언덕이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마치 암녹색 머리카락들이 빼곡한 머리에 생긴 같았다.
석천공과 그 위에 있던 한립은 투명한 반구형 금제와 강력한 공간 파동을 감지했다.
“석 형, 이곳이 입구입니까?”
“맞습니다. 오래전 부황께서 봉인하라 명을 내리셔서 금지구역이 되었지요.”
“안에 유배 중인 이들이 달아날까 봐 그런 것입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텐데, 성역 사람들이 우연히 모래 언덕에 빨려 들어가 적린공경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그렇군요.”
“일단 금제 입구로 가죠!”
석천공은 모래 언덕 바깥의 대전 앞으로 내려갔다.
“적린금지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니 돌아가 주십시오.”
그러자 그곳을 지키던 마족 병사가 나타나 그들을 막아섰다. 석천공은 신분을 밝혔고 곧 주둔하던 금선경 수사가 나타났다.
작은 키에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마족 노인은 석천공을 향해 공손히 예를 표했다.
“금지를 지키고 있는 ‘서복’이라 합니다. 13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서 노인, 그만 일어나게.”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몸을 일으킨 서복이 한립을 힐끗 보고 의아하다는 내색을 했다.
“큼, 우리 두 사람은 중요하게 처리할 일이 있어서 왔네.”
“그러셨군요. 안으로 들어가셔서 말씀 나누시지요.”
“그러세.”
석천공은 진중한 척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한립과 같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적린공경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하자 서복 노인은 놀라며 만류했지만 석천공은 어디서 났는지 석파공의 명령서를 꺼내 급한 임무로 반드시 비경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말씀을 드려 송구스럽지만, 적린공경은 봉인이 된 지 너무 오래되어서 아무도 그 안이 어떻게 변했는지 모릅니다. 전하께서 언급하신 그 전송진도 사용을 하지 않은 지 너무 오래되었고요.”
“우린 낙형공의 명을 받아 이곳에 왔고, 그 점도 낙형공께서 안배하실 테니 서 노인은 신경 쓸 것 없네.”
“이미 결정하셨다면 제가 말릴 수 없는 일이지요.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서복은 할 말을 다 했는지 그들을 뒤쪽의 정당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 뚫린 후문이 공간금제 모래 언덕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공간금제가 바로 입구인 것 같았다.
“안으로 들어가시면 모래에 잠기실 테고, 그대로 가라앉다 보면 적린공경에 도착하실 겁니다. 이곳에서는 들어가는 것밖에 할 수 없어 나오실 때는 다른 방법을 쓰셔야 한다는 점 명심해 주십시오.”
“알겠네.”
서복은 수결을 맺어 네모난 검은 인장을 띄우고 주문을 외웠다.
웅!
후문을 막고 있던 금제가 열리고 빛이 좌르륵 흘러내렸다.
“원하는 바를 이루시고 평안히 돌아오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고맙네, 서복 수사.”
서복의 말에 웃으며 답한 석천공이 한립과 같이 후문을 나섰다.
모래 언덕을 앞두고 걸음을 멈춘 석천공이 손바닥을 뒤집어 검은 장도를 불러내 허리에 차고 한립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
“보물을 발동할 수 없다고 해도 맨손보다는 뭐라도 들고 있는 게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한립은 손가락을 까딱해 은색 빛의 문을 열고 해 도인을 불러냈다. 석천공은 해 도인이 양옆에 검을 차고 나타나자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망설이던 한립도 모든 저물 반지며 저물대들을 동천 공간 속에 넣어두고 손가락에 낀 금반지만 남겨두었다.
준비를 마친 그들은 앞으로 나서 모래 언덕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찾는 이가 없더니, 어찌 최근에는…….”
대전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서복이 생각에 잠겼다.
“……내가 신경 써 무얼 하겠는가. 왕자 공후들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는 것이 상책인 것을.”
노인은 가볍게 고개를 젓고는 인장을 꺼내 후문을 봉하고 돌아섰다.
* * *
적린공경 안의 황폐한 섬 위로 연기가 치솟았다.
회색 비늘을 지닌 거대 도마뱀과 검은 비늘이 돋은 거대 지네가 충돌하고 있었다.
쿠쿵!
먼지가 치솟고 도마뱀은 쓰러지고 지네는 뒤로 넘어갔다.
하지만 둘은 금방 몸을 가누고 상대를 노려보며 다시 충돌하려 하고 있었다.
휘잉이!
두 짐승이 대치 중인 순간, 모래바람이 일고 세 사람이 나타났다. 당연히 한립, 해도인, 석천공이었다.
한립은 모래바람이 사라지자마자 강력한 공간의 압력이 장기를 비틀어 버릴 것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두 팔과 다리의 움직임이 묵직해졌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가장 이상한 느낌은 체내의 선령력 흐름이 멈춘 것이다.
그들이 주변 풍경을 살피기 전에 땅이 울리고 짐승들이 달려들었다.
“조심!”
한립은 차분한 얼굴로 손을 저었지만, 보광이 번득이거나 보물이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습관적인 행동에 한립은 멈칫하다 앞으로 나서서 현규에 빛을 발하며 거대 도마뱀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석천공 역시 검은 장도를 움켜쥐고 뛰어올라 검은 지네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퍽!
한립의 주먹 한 방에 도마뱀 머리가 움푹 들어가고 거대한 회색 비늘 하나가 깨져나갔다.
그러나 한립도 강력한 충격에 뒷걸음쳐야 했다. 거대 도마뱀의 힘과 비늘의 강도가 그의 상상을 초월한 것이다.
평범한 도마뱀 요수였다면 대주천성원공이 담긴 일격에 머리가 터져버렸어야 했는데, 겨우 비늘 하나만 망가졌다는 것이 이상했다.
그때 다른 쪽에서 채채챙! 하는 소리가 들렸다.
석천공의 장도가 지네의 머리부터 배까지 가르며 불꽃을 튕기고 있었지만 비늘 갑옷을 뚫지는 못했다.
“셋째 형님 말씀대로 바깥 세계에 서식하는 생물들과는 다르군요.”
바닥에 착지한 석천공이 소리를 쳤다.
“공간의 압력만 해도 성역의 두 배입니다. 이걸 이겨내고 자랐으니 비늘이나 몸이 강력한 건 당연하겠지요.”
한립은 다시 머리를 들어 올린 도마뱀을 신중하게 쳐다보았다…….
“려 형, 요핵(妖核)으로 뭘 하시려고요? 제련 가치도 없을 텐데요.”
지네를 해치운 석천공은 도마뱀을 잡아 해 도인의 장도로 비늘을 벗겨내고 살점 속에서 요핵을 꺼내는 한립을 발견했다.
“제대로 살펴보고 말씀하시지요.”
미소를 지은 한립이 요핵을 던져 주었다. 그걸 받아 자세히 살펴보던 석천공의 얼굴에 의외라는 표정이 떠올랐다.
“강력한 혈육 기운이 담겨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복용하면 몸의 힘을 기를 수 있겠어요.”
“맞습니다. 이곳에 천지영기나 마기는 없어도 이곳만의 천지법칙이 있는 듯합니다.”
“요수들은 환경에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강화된 것일 테고요.”
“이곳에 흘러들어온 사람들도 세월이 흐르면서 요핵의 효과를 알아냈을 겁니다. 이걸 모아 특별한 자원으로 사용하고 있을지 모르고요. 이곳에 대해 하는 바가 많지 않으니 최대한 수집을 해두었다가 나중에 쓸데가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역시 려 형의 꼼꼼함은 이길 수가 없습니다. 정말 예전에 이곳으로 추방당한 이들은 어찌 되었을지 갑자기 궁금해지는군요.”
“성역 사람들은 선역에 비해 육체적으로 발달해 있습니다. 유배된 이들도 이곳에서 살아남았다면 그런 쪽으로 특화가 되어 있겠지요.”
한립은 생각에 잠겨 말하다 의식을 퍼트려 보았다.
의식의 힘은 사용할 수 있었지만, 무형의 압력에 제약을 받아 백 리밖에 살필 수 없었다.
잠시 후 그는 품에 잘 접어놓은 요수 가죽을 꺼내 지도를 펼쳤다.
“이곳 지형과 지도를 비교해 보니 아무래도 여기쯤인 듯싶습니다.”
한립은 산발적으로 섬들이 분포해 있는 곳을 가리켰다.
“회리군도(灰鱗群島)라, 외진 곳이군요.”
해 도인이 그걸 보고 말했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 한립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떻습니까? 적린공경에 도착해서 생각나시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무언가 감응이 오기는 하는데 너무 멀리 있어 매우 희박합니다.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도 모르겠고요.”
“이곳이 잃어버린 기억과 연관이 있는 것은 확실하군요. 감응이 오는 방향은 어느 쪽입니까?”
“지도에 따르면 중앙지대입니다만, 정확한 위치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아직 자령이 있는 곳을 모르니 일단 중앙지대로 가보지요. 살아남은 유민들이 있다면 중앙지대에 모여있을 가능성도 크고요.”
“려 수사, 이곳은 천지영기가 단절된 곳이라 저도 평범한 공격밖에는 하지 못합니다. 선원석 안의 선령력이 소진되면 깊은 잠에 빠질 테고요.”
“앞으로 무슨 일이 생겨도 전투에 참여하지 마세요. 저물대를 사용할 수도 없고 지닌 중급 선원석도 몇 개 되지 않습니다.”
“그러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잠깐! 뭔가 다가옵니다.”
이때 한립이 표정이 달라져 소리쳤고, 해 도인과 석천공도 긴장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스스스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고, 하얀 선을 이룬 무언가가 바닥을 뒤덮고 다가오고 있었다.
“뭐가 저렇게 많단 말입니까!”
석천공이 중얼거렸다.
한립이 안력을 키워 보니 주먹 크기의 게들이 옹기종기 모여 거대 도마뱀의 유해를 뒤덮는 중이었다.
한 마리 한 마리는 퍽 귀엽게 생겼는데 그게 수천수만 마리가 모여드니 끔찍해 보였다.
게들은 거대 도마뱀을 하얀 융단처럼 덮고 그 안으로 파고들었다.
수십 초 만에 하얀 게들이 물러난 자리에는 도마뱀의 뼈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석천공이 무의식중에 바닥을 박차고 허공을 뛰어올랐다가 다시 떨어졌다. 선령력과 마기를 쓸 수 없다는 사실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석 수사, 당황하지 않아도 됩니다. 백갑해(白甲蟹)들은 죽은 생물만 먹어치워 우리를 공격하지 않을 거예요.”
해 도인이 돌연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하얀 게들이 정말 그들을 빙 돌아 거대 지네 사체로 향하고 있었다.
“해 수사, 백갑해에 대해 어찌 아신 겁니까?”
“그런 것 같아서 해본 말입니다.”
석천공의 질문에 해 도인은 멍한 얼굴로 대충 답해 그가 눈을 부릅뜨게 했다.
“오래 머물 곳이 아닌 듯하니 가시죠. 일단 남아 있는 유민들을 찾아 자령의 소식을 알아봐야겠습니다.”
“려 형, 과도한 근심은 건강에 해롭습니다. 자령 수사도 실락계면에서 비승에 성공한 자질이 뛰어난 수사입니다. 그 자체로 실력을 증명한 셈이니 이곳에서도 별 탈 없이 잘 버티고 있을 겁니다.”
한립의 얼굴에서 근심을 읽은 석천공이 그를 위로했다.
“이번에 도움을 주신 것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수사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는 데에도 시간이 오래 걸렸을 거예요.”
“그리 예의 차리실 것 없습니다. 어찌 보면 려 형이 살려주어서 지금까지 붙어 있는 목숨 아닙니까! 그러고 보면 회계에서 위기에 빠졌을 때도 수사가 동요하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그만큼 자령 수사가 중요하다는 뜻이겠지요. 제가 보기에도 서둘러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가 서두르는 이유는 동천에 있는 제혼 때문이기도 합니다. 자양난옥을 충분히 넣어 두고 괴뢰들에게 돌보라 해두었지만 적린공경에 있는 한 상황을 알 수 없으니까요.”
“그럴수록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합니다. 대부분 신통을 사용할 수 없는 곳이니 그만큼 신중하게 움직여야 하고요.”
석천공의 당부를 들은 한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방향을 정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낮은 산을 넘자 아래쪽으로 기울어진 평원지대가 수백 리까지 펼쳐져 있었다.
바닥이 쩍쩍 갈라진 땅에는 모래가 일다가 강력한 공간 압력에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걸어가는 동안 기이한 형태의 단단한 갑옷을 지닌 몇몇 짐승들을 만나기도 했으나 먼저 공격을 해오지 않으면 한립 일행도 건드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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