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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928화 (1,685/2,000)

1928화. 위험을 무릅쓰다

*

“불쾌하셨다면 제가 사과드립니다. 부인을 곤란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 자령의 행방에 대해 아는 대로 말씀해 주시지요. 사례는 꼭 하겠습니다.”

한립은 노기를 억누르고 공수를 해 보였다.

“흥! 이런다고 내가 방법이 없을 줄 아십니까! 이곳은 흑하수궁입니다!”

국 부인은 완전히 열이 받았는지 두 손을 풍차처럼 돌려 뒤를 가리켰다.

쿠르릉!

흑하수궁 전체가 진동하더니 검은빛이 쏟아져 내려 국 부인의 손바닥 위에서 흑하수궁 허상으로 변했다.

“저건…….”

한립이 그걸 보고 동공을 수축했다.

그가 말을 맺기도 전에 국 부인이 흑하수궁 허상을 날려 한립 주변의 금색 파문과 충돌하게 했다.

푸푹!

금색 파문들이 종이처럼 뚫려 검은 소용돌이가 자유를 되찾고 한립을 집어삼켰다.

눈앞이 번쩍한 한립은 흑하수궁 바깥으로 쫓겨나 있었다.

진언보륜의 시간보문이 반밖에 회복되지 않아 제 위력을 내지 못한 탓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자령의 행방도 알아내지 못하고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심호흡을 한 그가 두 눈에 보랏빛을 일으켜 흑하수궁의 검은 보호막을 살펴보았다.

동시에 진언보륜이 다시 급격히 회전하면서 금색 파문을 퍼트리려 했다.

“려 수사, 역시 여기 계셨군요.”

그 순간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한립이 고개를 돌리자 석파공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3전하께서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한립이 공격을 멈추고 물었다.

석파공이 잔잔히 웃으며 가만히 있는데, 인근 허공에 검은 소용돌이가 나타나 석천공을 토해냈다.

그도 국 부인에게 쫓겨난 듯했다.

“형님!”

석천공도 석파공을 보고 얼떨떨한 눈치였다.

“두 분이 급히 야양성을 떠나 흑수역으로 향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흑하수궁에 있을 거라 짐작했습니다. 제혼 수사의 일도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했는데 자령 수사의 일이라도 도움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해서 급히 오는 길입니다.”

“정말이 십니까?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려 수사! 셋째 형님이 나서주시면 분명 자령 수사를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석천공이 그 말을 듣고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감사합니다, 3전하.”

한립도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에 공수를 했다.

“이야기가 잘 된 것 같지 않은데, 어떻게 된 것입니까?”

석파공의 물음에 한립은 쓴웃음만 지었고 석천공이 흑하수궁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히 말해주었다.

“국 부인은 흑하상인의 반려로 수행은 높지만 마음은 그리 넓지 않습니다. 질투심이 많은 성격이라 흑하상인이 자령 수사를 몹시 중시하다 보니 질투를 하는 듯하군요. 또한 려 수사께서 자령의 벗이라고 하니 악감정을 가지고 일부러 아무 정보도 주지 않는 것 같고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허나 그녀가 원하든 원치 않든 저는 반드시 자령의 행방에 대해 알아내야 합니다.”

한립의 눈빛이 서늘해지고 전신에서 금빛이 반짝거렸다.

자령이 그의 반려는 아니지만, 마음속에서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여인이었다. 몰랐다면 모를까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면서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제가 해결할 수 있으니 너무 조급해 마시지요. 대라경 수사인 흑하상인의 거처에서 무력을 쓰면 나중에 성가신 일들이 줄을 이을 겁니다.”

“저도 알고 있지만 다른 방법이 있겠습니까?”

“제게 맡겨 주시지요. 흑하상인과는 합작을 하는 관계이고, 국 부인도 저를 만만하게 생각하지 않으니 제가 직접 물으면 대답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셋째 형님이 나서보고 그래도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시지요.”

석파공과 석천공은 진심으로 그를 설득했다.

“그렇게 하지요. 부탁드리겠습니다, 3전하.”

“그럼 우리는 물러나 있겠습니다.”

한립이 결정을 내리자 석천공이 그를 끌고 검은 보호막에서 멀리 떨어졌다.

석파공이 보라색 부적을 꺼내 흑하수궁 쪽으로 던지자 잠시 후 통로가 열렸다.

“잘 될 겁니다. 셋째 형님의 지략과 언변이면 분명 자령 수사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

석천공은 셋째 형님이 수궁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웃음 지었다.

“그러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 후, 반 시진이 훌쩍 지나도록 흑하수궁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석천공이 슬슬 안색이 어두워지는 한립을 보고 무슨 말을 하려다 집어삼켰다.

파앗.

그때 검은 보호막에 통로가 생겨 석파공이 빠져나왔다.

“어떻게 되셨습니까?”

“다행히 성공했습니다. 자령 수사가 흑하수궁에서 어찌 지냈는지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어요.”

석파공이 잔잔히 웃으며 말했다.

“하하,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셋째 형님이 나서면 못 해낼 일이 없다고요!”

석파공이 기분 좋게 웃고, 한립도 한시름을 놓았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자령이 흑하수궁에 온 뒤 어떻게 지냈는지 말씀해 주시지요.”

“성역으로 비승한 뒤, 흑하상인이 그 미모와 자질이 마음에 들어 시중을 드는 첩으로 거두었는데 자령 수사의 성격이 완강해 복종하지 않았다 합니다. 흑하상인도 억지로 그녀를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고, 또 폐관 수련을 앞둔 상황이라 다른 이들에게 관리를 맡겼다고 하고요.”

“하하, 천만다행입니다! 자령 수사가 무슨 일을 당하지 않아 안심입니다. 려 형도 이제 마음이 놓이시겠어요!”

석천공이 힘껏 한립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우, 그게 무슨 예의 없는 말이냐.”

석파공은 그런 석천공을 흘기며 질책했다. 그제야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은 석천공이 어색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아닙니다, 자령이 홀로 성역에 도착해 무슨 일을 당했다고 해도 그녀의 잘못이라 할 수 없지요. 그보다 자령은 아직 흑하수궁에 남아 있는 것입니까?”

한립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흑하상인이 폐관에 들어가고 자령 수사가 흑하수궁을 탈출하려 시도했는데 국 부인이 막지 않고 암암리에 그녀를 도왔다고 합니다.”

석파공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흑하수궁을 빠져나왔다니 성역이 넓다고 해도 금방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려 형, 제가 바로 수하들을 시켜…….”

석천공이 웃으며 말을 이으려다 무언가 이상한 느낌에 석파공과 한립의 눈치를 살폈다.

국 부인 성격에 자령을 무사히 흑하수궁에서 빠져나가게 하다니 앞뒤가 맞지 않았다. 이야기가 이대로 끝이 아님이 확실했다.

“려 수사께서도 짐작하시는 것 같군요. 국 부인은 자령이 흑하수궁을 빠져나가길 기다렸다가 수하들을 보내 잡은 다음 그 죄를 물어 적린공경 속으로 유배를 보내버렸습니다.”

석파공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한립은 동공을 수축한 채 말없이 서 있었다.

“적린공경은 아주 위험한 곳이 아닙니까. 막 비승한 자령 수사가 진선경 수행으로 그곳에 들어갔다면 아마…….”

석천공이 중얼거렸다.

“흑하상인은 반려인 국 부인 외에 시첩만 열댓 명이 더 있습니다. 속세의 황궁과 다를 바 없는 곳에서 암투를 이겨낸 것을 보면 자령 수사의 심지가 굳고 머리가 명석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게다가 흑하상인도 폐관 전 자령 수사가 다른 시첩들의 괴롭힘을 당할까 걱정해 몇 가지 강력한 방어용 마기를 남겨 주었다고 합니다. 적린공경 안에 갇혔다고 해도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 겁니다.”

석파공이 자신이 아는 바를 말해주었다.

“3전하의 말씀이 맞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그 많은 정보를 알아내시다니 감탄스럽습니다.”

한립은 한숨을 내쉬며 화제를 돌렸다.

“맞습니다, 어떻게 그 늙은 호랑이 같은 여인에게서 이런 것들을 알아내신 겁니까?”

“국 부인과 알고 지낸 세월이 있기에 그 성품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질문하기 전부터 어떻게 자령 수사를 대했을지 예상을 하고 있었지요. 그걸 바탕으로 심중을 알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3전하께는 쉬운 일이었겠지만 저희는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럴 리가요. 려 수사께서는 이제 어찌할 생각입니까?”

“이곳은 대화를 나누기 좋지 않은 곳이니 일단 이동하시지요.”

석파공의 질문에 눈을 반짝인 한립이 수면 위를 가리켰다.

* * *

보름 뒤, 흑수성 성주부의 별채 안.

우아한 대청 안에 검은 목재로 만들어진 원형 탁자가 놓여 있고, 그 위의 붉은 화로에 보라색 주전자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탁자에 앉은 석파공은 주전자를 들어 청옥색 자기 병에 물을 따라 차를 우려낸 다음 찻잔에 따랐다.

그의 앞에 앉은 보라색 장포를 입은 백발 청년과 평범한 얼굴에 별처럼 빛나는 눈을 지닌 청년은 석천공과 한립이었다.

“적린공경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말씀을 드렸는데도 꼭 가셔야겠습니까?”

“셋째 형님, 자령 수사가 려 형에게 그냥 벗이 아니라니까요. 더 말리셔도 소용없습니다. 저라고 안 말려 봤겠어요?”

석파공의 물음에 석천공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마음을 굳히셨다니 더는 아무 소리 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너는 언제 천홍역으로 돌아갈 것이냐?”

“형님, 저와 려 형은 고난을 함께한 사이고, 또 제가 은혜를 입은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적린공경도 같이 가줘야지요. 천홍역 일은……. 당분간 형님이 처리 좀 해주세요.”

“농담 말거라. 부친께서 네게 천홍역을 맡으라 명하신 일이 장난인 줄 알더냐? 게다가 내 어찌 네가 위험을 무릅쓰게 그냥 두겠느냐!”

석파공이 얼굴을 굳히며 아우를 혼냈다.

“석 형, 3황자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적린공경에는 저 홀로 가도 충분합니다.”

“셋째 형님, 제가 은원을 확실하게 갚는다는 걸 아시지요? 광원재만 해도 공평대등의 원칙으로 지금까지 발전한 겁니다. 려 형이 제 목숨을 구해준 게 몇 번인데 도움이 필요할 때 외면한다면 그게 사람입니까?”

석천공은 한립을 향해 손을 내저었고, 석파공에게 진지한 얼굴로 따졌다. 그 말을 들은 석파공도 고민하다 결국에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마음대로 하거라. 어차피 너를 붙잡아 두지 못할 것을 알았다. 내가 맡은 일들이 많지만 않았어도 너를 따라갔을 것인데.”

“하하하, 성족에 이 석천공은 없어도 되지만 셋째 형님은 없어선 안 되는 것을 어찌합니까.”

“허튼소리 그만하고 집중하거라. 려 수사, 제가 적린공경에 직접 가보지는 않았지만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석파공은 고개를 내젓고 한립을 향해 말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그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이야기를 마친 석파공은 석천공과 한립에게 정체 모를 짐승의 가죽을 한 장씩 건넸다.

“야사(野史)가 담긴 서책에서 찾아낸 적린공경 지도입니다. 오래된 것이라 완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형님, 그건 또 뭡니까?”

석천공은 가죽을 품에 넣고는 석파공이 꺼낸 목걸이처럼 생긴 장신구를 가리켰다.

검은 우리에 갇힌 흉악하게 생긴 짐승들이 바깥을 향해 울부짖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다.

“항상 걸고 다니거라. 위급한 순간 검은 우리 조각을 부수면 영력이나 마기 없이도 발동되며 두 사람을 한 번은 위기에서 구해줄 것이다.”

석천공이 그 목걸이를 받아 바로 목에 걸었다.

“적린공경 안에서는 천지영기와 마기 혹은 금제가 작동하지 않는 것은 물론 어떤 술법도 펼칠 수 없습니다. 저물반지나 저물대도 안에서는 열 수 없으니 필요한 물건은 몸에 지니고 다녀야 합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믿을 것은 자신의 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적린공경이 봉인되었다면 다시 나올 때는 어찌해야 할까요?”

“흑수역에 특수 전송진이 적린공경 안에서 사람을 빼내 올 수 있습니다. 사용하지 않은 지 십만 년은 되어서 다시 쓰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이 표식 신물은 전송진법이 두 사람의 위치를 찾는 데 꼭 필요하니 잘 보관하시고요.”

석파공은 말을 하면서 나뭇잎 모양의 옥 조각 두 개를 꺼내 주었다.

“형님……. 이건 어떻게 사용하면 됩니까?”

석천공이 옥 조각을 살펴도 원리를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나오고 싶을 때 피를 떨구면 진법이 감응할 것이야. 자령 수사는 려 수사가 함께 데리고 나오시면 될 것이고요.”

“알겠습니다, 기억해두지요.”

“이건 혈조단(血潮丹)입니다. 잠시 육신의 힘을 증폭해주는 데 효과는 각자의 몸 상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후유증이 적지 않으니 약효가 사라지면 한동안 쇠약해질 겁니다.”

“에이, 우리가 애도 아니고 잘 사용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석천공이 웃으며 말했다.

“네가 내 잔소리를 싫어하는 것은 안다만, 오랫동안 봉인된 곳이라 내부 상황이 정확히 어떨지 몰라 안심이 되지 않는구나. 반드시 무사히 돌아와야 한다.”

석파공은 지그시 아우를 보며 그의 어깨를 잡았다.

“마음 푹 놓고 계셔도 됩니다!”

석천공이 웃음을 흘리는 것을 보고 한립도 두 형제의 모습에 미소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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